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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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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1.76분

36화 - #1


초저녁의 선선한 바람을 마주하고 서서, 답답한 심경을 털어내 보려던 세자의 시선에, 문득 저만치 우물가에서 홀로 빙빙 돌고 있는 연희가 보였다.

"여기 잠시 있거라."

세자는 내관을 돌아보며 한마디 남기고는, 연희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지척까지 다가갔음에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멍하니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연희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뭘 그리 생각하느냐?"

그제야 세자가 온 것을 알아챈 연희가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인사를 올렸다.

"저하.... 언제... 오셨습니까?"

"금방 왔다. 네가 계속 제자리를 돌고 있어, 내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무슨 생각을 그리한 것이냐?"

"아...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아니기는... 너도 뭔가 답답한 게 있는 모양이구나. 나도 그렇다."

세자가 문득 연희 곁으로 다가가 그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시원한 바람이 한껏 불어주면 속이 시원하련가 싶어 나와보았다."

연희는 세자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선선하여, 저하께옵서 원하시는 만큼 불기엔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 기왕 부는 바람이라면 시원하게 불어주었으면 싶은데, 좀 아쉽구나."

"어찌 답답해하십니까?"

"그냥... 모든 일이 내 마음 같지 않으니, 답답한 것이겠지. 너는... 무엇이 그리 답답하여 그러고 있었느냐?"

연희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내려, 어딘가를 초점 없이 바라보았다.

"저도 그렇습니다. 모든 게... 마음 같지 않은 모양입니다."

세자가 연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세상 일이란 게 다 그런 모양이구나. 그래도... 네가 곁에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구나.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이야기하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세자의 말에 연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하... 저하께는 항상 곁에서 보좌하는 금호 나리도 계시고, 저하를 걱정해주는 옹주 마마도 계옵신데, 어찌 그런 분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시는 겁니까?"

세자가 따라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모르는 소리 말거라. 그들은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그저 잔소리, 또 잔소리뿐이다."

세자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연희는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그래. 네가 이렇게 맞장구 쳐주니, 내 기분도 좋아지고. 얼마나 좋느냐? 금호나, 혜령이나 그저 잔소리뿐이니... 쯧쯧"

"다 저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일 겁니다."

"그거야 알지. 하지만 그것도 어디 한두 번이지. 이제 설마 너마져 잔소리를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세자의 말에 연희가 기겁하듯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래 너만이라도 내투정을 받아 주면된다."

연희는 마음속이 번잡해졌다.

세자 때문에 속상해서 밤잠까지 설쳤건만, 그는 이렇게 태연히 옆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잠시 고민하던 연희는 어렵게 입을 떼었다.

"저하는.... 제가 많이 불쌍하다 생각하십니까?"

세자가 의문가득한 눈으로 연희를 바라보자, 연희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니까... 측은해서... 잘 대해 주시는 겁니까?"

그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세자가 돌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세자의 웃음에 연희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왜 웃는 것일까?

한참을 웃던 세자는 자상한 눈빛으로 얼굴에 웃음 가득담고 연희를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 종일 네가 어쩐지 불편해 보인다 했더니, 이제 보니 어제 내가 혜령이에게 했던 말을 들은 모양이구나."

연희의 표정은 더욱더 당혹스러워져서, 급기야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연희야."

돌연 세자가 차분한 표정으로 연희를 불렀다.

연희는 속마음이 들킨것 같아 차마 부끄러워 세자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며 대답했다.

"예...."

세자의 입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내게 말하지 않았느냐? 누군가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거짓말이라면,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다고 말이다. 내가 혜령이에게 한 말은, 그저 네가 곤란하지 않게 하기 위한, 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거라."

그 말을 들으니, 괜스레 심장이 더 두근 거리는 것만 같고, 얼굴은 더욱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럼 진심은 무엇이옵니까?'

마음속에서 되뇌는 말이건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문득 세자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연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연희가 움찔하며 몸을 뒤로 빼려 하자, 세자가 다른 손으로 연희의 어깨를 받치며 말했다.

"괜찮다. 땀을 닦아 주려는 것이다."

세자가 말을 하며, 손수건으로 연희의 이마에 맺힌 땀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한 손으로는 연희의 등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연희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니, 흡사 안겨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연희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세자의 얼굴이 연희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그의 숨소리와 입김이 바로 앞에서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 연희는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았을 때, 돌연 세자의 얼굴이 멀어졌다.

연희가 살며시 다시 눈을 뜨니, 머쓱한 표정의 세자가 땀을 닦던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이게... 필요할 것 같구나."

연희는 조심스럽게 그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실망감이 일순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순간 낙심했다는 생각에 놀란 연희는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이에 세자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엇이 웃긴 것이냐?"

"아니옵니다."

"아니긴... 얼른 말하지 못할까? 무엇 때문에 웃은 것이냐?"

세자가 궁금한듯 재촉하는 물음에, 연희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이유는 알 수 없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연희의 속마음을 들여다 보려는듯 그녀의 얼굴을 가늠하듯 쳐다보던 세자가 알수없는 눈빛으로 연희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연희는 제마음을 들킨것 같아 툴툴거리듯 세자에게 물었다.

"그러는 저하는 어찌 웃으십니까?"

"나? 아... 나는... 하하... 글세. 왜 웃는 것일까?"

세자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연희는 왠지 울적했던 기분이 나아지는것 같아 환하게 웃음 지었다.

연희가 이쁘게 웃으니 세자의 갑갑해던 마음도 씻겨 나가는것 같았다.

"달빛이 참으로 이쁘구나."

세자는 연희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달을 올려다보며 감탄하듯 말했다. 세자의 말에 연희도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올려다보았다.

둥근달이 환한 빛을 뽐내며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문득 연희는 우물가로 다가가 우물물에 비친 달을 내려다 보았다.

세자가 조용히 뒤따라 그녀의 곁에 서며 물었다.

"무엇을 보는 것이냐?"

"그냥... 우물에 비친 달을 보았습니다."

연희의 말에 세자가 고개를 내밀어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말따라 달빛이 환하니 그 달의 모습이 우물에 온전히 비쳐 보였다.

"어쩐지 우물 속의 달은 조금 쓸쓸해 보입니다."

연희의 말에, 세자가 궁금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우물의 달이... 쓸쓸해 보인다? 그거 참 재밌는 생각이구나. 어찌 그렇게 생각하느냐?"

"저 하늘에 있는 달은, 곁에 별도 있고, 구름도 있는데... 우물에 비친 달은 홀로 있지 않습니까"

세자는 잠시 우물을 내려다보다가 실소를 머금었다.

"그거야 우물이 좁으니 그런 것이고, 우물이 크거나, 강물에 비친 달이라면, 곁에 구름도, 별도 보이지 않겠느냐?"

"하오나, 그것은 그것이고, 지금 이 우물 안에 달은 홀로 있지 않습니까?"

세자는 돌연 큰소리로 한번 웃고는 다시 물었다.

"우물에 비친 것은, 말 그대로 비친 것뿐이니, 그것은 가짜가 아니냐? 진짜 달은 저렇게 별들과 함께 있으니, 우물에 비친 것이 홀로 있다 한들, 문제 될 것이 없지 않느냐?"

연희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그럼 더 슬퍼질 것 같습니다. 우물에 비친 달은 가짜라니... 우물에 비친 달은, 그저 우물에 비친 달 아닙니까, 저 하늘의 달이 아니라 하여, 진짜 달이 아니라니, 왠지 더 안타깝습니다."

"뭐라?"

연희가 고개를 들어 세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하늘에 떠있는 달도, 실은 저 위에 신령님들 사는 곳의, 그 어떤 것이 비쳐진 것인지 어찌 압니까? 그럼 저 하늘의 달도 가짜가 되는 것 아닙니까?"

"너는 참 재미난 생각을 하는구나."

"우물에 비친 달은 그냥 우물에 비친 달이었음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가짜라고 부르면 너무 슬플 것 같습니다."

"그래, 알았다. 네 말대로 우물에 비친 달은 그냥 우물에 비친 달인 것으로 하자."

"피~"

연희는 연신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이내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런 연희의 얼굴이 세자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연희의 얼굴을 자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세자도 그녀를 따라 따뜻한 웃음을 지었다.



***



거친 발걸음이 한달음에 빈청으로 향하고 있었다.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병판과 이판이었고, 두 사람은 분노를 참지 못한 얼굴로 씩씩 거리며 들어섰다.

"이보시오, 대사헌. 이 어찌 된 일입니까?"

병판이 대사헌에게 따져 물으니, 대사헌이 곤란한 눈빛으로 병판을 쳐다보았다.

"어찌 감찰들이 이 사람의 집에 찾아온 것인지 묻지 않습니까?"

대사헌 윤일호는 난처한 표정을 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것이... 의금부의 일이라는 것이 원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겝니까?"

병판이 소리치듯 말하자, 뒤에 있던 이판이 나섰다.

"솔직하게 말해 보시오. 좌상대감이 시킨 일입니까?"

대사헌은 더욱 곤란한 표정이 되어 식은 땀을 흘렸다.

그때 문이 열리며 좌상 최준경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는 들어서자마자 병판과 이판을 향해 말했다.

"예, 이 사람이 윤허하였습니다."

병판과 이판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병판은 좌상에게 씩씩 거리며 말했다.

"어찌 이 사람들에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지난번 일로 조금 소원했다고는 하나, 그깟 일로 어찌 우리에게 이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좌상은 태연히 걸어가 빈청의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의금부에 의금부가 하는 일을, 이 사람 눈치 보지 말고 하라 했습니다. 그것이 그리 잘못된 것입니까?"

좌상의 대답에 병판과 이판의 표정이 굳어졌다.

"두 분 대감께서 지은 죄가 없다면, 아무 일도 없을 터, 무엇을 그리 걱정하시는 겝니까?"

"아, 아니... 대감..."

이판이 당황하여 되물으려 하자, 병판이 말을 자르며 나서 물었다.

"이보시오, 좌상대감.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있답니까?"

그러자 좌상이 병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했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없다 해서, 몸에 묻은 먼지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면 잘못된 것이지요. 응당 털어낼 수 있는 먼지는 털어내야 할 일 아닙니까? 더욱이 먼지 터는 일이 업인 사람에게 먼지를 털라 하였는데, 어찌 먼지를 터는 것인지 묻는다면... 이 사람은 뭐라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까?"

자존심이 상한 병판은 눈살을 찌푸리며 헛기침을 하더니, 불쾌한 듯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며 서 있는 이판을 좌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이판대감."

"예, 좌상대감."

"이판은... 신중하신 분이지요. 잘 생각해서 처신하세요. 먼지는 털면 그뿐입니다. 먼지 때문에 목이 날아가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 예, 그래야지요."

이판은 좌상의 눈치를 살피다가 서둘러 병판을 따라나섰다.

그런 이판의 뒷모습을 보던 대사헌이 좌상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 이대로 조사를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그간 좌상대감을 도왔던 병판과 이판이 아닙니까?"

대사헌의 물음에 좌상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일을 하세요. 누가 대사헌더러 병판과 이판을 쳐내라 했습니까? 대사헌은 그저 대사헌의 일을 하면 됩니다."

"예... 대감..."

대답은 그리하였지만, 대사헌의 표정은 떨떠름해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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