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 #1
그녀의 나긋한 손길이 거침없이 다가와 세자의 머리를 매만졌다.
"어... 어찌 이러는 것이냐?"
놀란 세자가 황급히 물러나 보지만, 그녀는 더욱 더 과감하게 바짝 다가왔다.
"부끄러우십니까?"
도발적인 표정과 목소리로 물어오는 연희를 보며, 세자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구, 궁중에 예법이 이, 이렇지 않거늘... 네가..."
어느새 그녀는 당황해 말을 더듬고 있는 세자의 얼굴을 살포시 어루만졌다.
"어어..."
바로 코앞에서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세자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 그만!"
놀란 세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헉헉..."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의 몸을 어루만져 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맙소사... 이건 무슨..."
이해할 수 없었다.
최근 수년간 거의 매일 같이, 어머니가 죽는 꿈만을 꾸었다.
얼마 전 어머니의 죽음이 아닌 어린시절 잠시간의 꿈을 꾸었다고 하더라고....처음이었다. 어머니가 나오지 않는 꿈은...이번엔 전혀 다른 꿈이 아닌가?
"어째서... 어째서 네가 꿈에 나오는 것이냐?"
세자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더군다나 꿈에 나온 그녀의 모습은, 도저히 상상조차 못 할 모습이었다.
세자는 잊으려 고개를 흔들어 보지만, 워낙 꿈속에서의 모습이 강렬해 쉽게 잊히지가 않았다.
"내가 경연을 소홀이 했더니, 헛된 망상에 빠진 모양이구나."
홀로 중얼거리던 세자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이르게 채비를 하였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탓에, 궁인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부랴부랴 움직였다.
아직 새벽빛이 푸른빛을 담고 있는 그 시간, 세자는 밖으로 나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답답했던 가슴이 차가운 새벽 공기에 시원하게 뚫리는 것만 같아,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이른 새벽시간이라 그런지 둥근 만월이 휘영차게 떠 있었다.
그런 달을 올려다보며 누군가를 떠올린듯 아련하게 바라보다 이내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일개 평민이라면 서로 안부를 묻고, 보고 싶으면 찾아가 만나고 하겠지? 허나 나는... 네게 안부를 묻을 수도, 너를 찾아가 만나 볼 수도 없구나."
세자는 달을 보며 갑갑함과 아쉬움에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때 세자의 등 뒤에 선 내관과 궁녀들 뒤쪽에서 수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스럽게 뜨려는 듯, 연신 손으로 비비다가 세자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얼굴을 바로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내가 자네 잠을 깨운 모양이구나."
세자의 말에 수현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어인 일로 이리 일찍 일어나셨습니까?"
세자는 꿈을 생각하자, 벌써 얼굴이 화끈 거리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돌렸다.
"별일 아니다. 그보다..."
세자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연희는... 잘 갔느냐?"
세자의 물음에 수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이... 요 며칠 계속 슬픔에 잠겨 울고 있습니다."
그 말에 세자가 놀란 표정으로 수현을 돌아보았다.
"울다니? 어째써?"
"그게 참... 제가 연유를 물어보니, 본인도 왜 우는지 모르겠다 합니다."
"뭐라?"
"나가던 날... 황인걸 대감의 당여들이 의금부로 호송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자는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허탈하게 말했다.
"알고 있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야. 단 한 명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던 게지. 그런데 왜? 이제 와서? 3년이나 지난 일이건만, 어찌하여 그런 것인가."
"좌상대감 측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최근 그 당여들이 회동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회동?"
"예, 아마도 그것이 좌상대감의 귀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세자는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헌데... 그 일이 연희와 무슨 관련이냐?"
"그날... 잡혀오던 윤호성 대감을 보았습니다."
세자가 놀란 표정으로 수현을 쳐다보았다.
"윤호성 대감? 그 꿈에서 조심하라고 했던?"
"예. 헌데 그 윤호성 대감을 보자, 연희가 떨기 시작했습니다."
"떨어?"
"예. 가슴이 진정되지 않고 손발이 떨린다 하였기에, 저는 두려워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고... 그 사람에 대해 묻기에, 처형되었다 답하였지요."
세자의 표정은 꽤나 관심이 가득 찬 표정이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면서... 왜 우는지 모르겠으나, 눈물이 난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의아한 세자는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연희의 성이 송가라 하지 않았더냐?"
"예,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송연희라 하였습니다."
"그래... 그럼 무슨 사연일까? 윤호성 대감의 죽음을 슬퍼한다? 알 수 없구나."
세자는 꽤나 그 일이 신경 쓰이는지, 잘생긴 얼굴에 근심이 가득차기 시작했다.
"그 일로, 연희에 대한 조사를 좀 더 서두르고 있습니다. 연희가 잡혀왔던 곳에서 발견된, 벽조목으로 만든 벽륜봉이란 것이 있는, 그것이 관련이 있을 듯 하여, 백무에게 조사를 맡겨놓았습니다. 저들이 무얼 하려고 했었는지를 알면, 연희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 부탁하네. 그나저나... 어찌해야 할까..."
세자가 계속 근심 어린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니, 수현은 오히려 의문스러웠다.
"어찌 그러십니까?"
"어찌 그러냐니? 연희가 울고 있다 하지 않았느냐?"
"허면... 지금 연희 때문에 그러시는 것입니까?"
"왜... 그러면 안되느냐?"
수현은 슬쩍 실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저하, 저하의 이런 모습은 제가 저하를 모신 뒤로, 처음 뵙는 듯합니다."
"이런 모습이라니?"
"왕실 사람도, 그렇다고 권력을 쥔 양반가의 사람도 아닌 누군가를, 이토록 걱정하고 근심하셨던 적이 있으셨습니까? 하물며 여인이라니...."
수현이 의뭉스럽다는 눈빛으로 세자를 바라보며 묻자, 세자는 단호하게 표정을 굳히며 헛기침을 하였다.
"그저 세자로써 한 백성을 걱정했을 뿐이다."
수현은 세자의 속내를 모르는척 지지 않고 대답했다.
"세자로써, 한 백성이 아니라, 만백성을 걱정하시옵소서, 저하."
세자는 뻔뻔스러운 얼굴을 하는 수현을 보며,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일부러 입술을 삐죽거리며 가볍게 대꾸했다.
"잔소리하고는... 되었다."
세자가 불만스러운듯 발걸음에 힘을 실어 옮기니, 수현이 얼른 결연한 눈빛으로 그 뒤를 따랐다.
***
앞마당을 쓸던 소연은 누군가의 인기척 소리에 대문을 쳐다보았다.
"아..."
놀란 소연은 얼른 달려가 공손히 인사하였다.
"대감마님 오셨습니까?"
그는 다름 아닌 예판이었다.
예판은 뭔가 불안한 듯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소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백무 안에 있는가?"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소연이 얼른 가서 부르려 하자, 예판이 손을 들어 만류하였다.
"아, 아니다. 오늘은 내 긴히 할 얘기가 있어 그러니, 내가 가마."
예판이 집안으로 걸어들어가니, 인기척 소리를 들었는지 백무가 방문을 열고 대청마루로 나오며 인사했다.
"대감마님 오셨습니까?"
백무의 인사에, 예판이 초조한듯 고개를 끄덕이며 백무에게 다가섰다.
"내 오늘 할 얘기가 있어 왔네만. 시간 괜찮으신가?"
"예, 괜찮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래."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소연은 바삐 다과상을 보러 달려갔다.
방으로 들어선 예판은 당연한듯 자연스레 상석으로 걸어가 앉았고, 맞으편으로 백무가 자리를 잡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자리에 앉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눈빛으로 방안을 둘러보던 예판은, 문득 방 한쪽에 놓인 벽륜봉을 보자 눈이 반짝거렸다.
"아... 다름이 아니라... 내 자네에게 물어볼 것이 하나 있네만... 자네 혹, 천무방(天武幇)이라고 아는가?"
백무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들어 보았습니다. 사술을 부리는 집단이라 들었습니다만... 어찌 묻는 것입니까?"
예판이 눈을 한번 찔끈 감았다 뜨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3년 전 그때 그 일이 있었을 때, 천무방에 천태호라는 방주를 만났었네."
백무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그런 백무의 표정을 읽은 듯, 예판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아는 사람인가?"
"예, 알지요. 본디 제 스승의 사형이셨던 분의 제자로,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나쁜 길로 빠져 사술을 부리는 자로 전락한 자입니다. 천무방의 방주가... 천태호 였다니... 미처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그래. 그랬었군. 그자가 그때 찾아왔었네. 내 딸아이를 다시 깨워주겠다면서, 주술을 부리겠다고 말이야."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예판이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잘 안되었네. 이미 시기를 놓친 것 같다더군. 그러면서, 자네 얘기를 하더군. 자네를 찾아가 보라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백무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네에게 도움을 받으면, 누워있어도 건강한 사람처럼 몸이 상하지 않게 해 줄 것이라 하였네. 내 그래서 자네를 찾아오게 된 것이었어."
백무는 예판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의 말대로, 자네의 주술 덕에 내 딸아이는 지금까지도 육신이 멀쩡히 잘 있지. 고마웠네. 자네 주술의 효력이 이만큼일 줄은 내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미 굳은 낯빛의 백무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몇 번 더 천방주를 만났었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술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지. 그리고 그중에 나는 봉혼벽륜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네."
순간 백무의 표정이 창백해지며, 놀란 얼굴로 겁에 질린듯이 그를 불렀다.
"대감...."
그러자, 예판이 갑자기 백무의 손을 두손으로 부여잡았다.
"내... 내 이렇게 애원하겠네. 그 봉혼벽륜이란 물건이 있으면, 죽은 사람의 영혼도 불러내어 이승에 머물게 할 수 있다 들었네. 우리 딸아이를... 딸아이를 불러내 주게."
백무는 무섭도록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니 됩니다. 그것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금기입니다. 더군다나 저는 봉혼벽륜의 술수를 알지 못합니다."
"영혼을 불러만 내주게. 봉혼벽륜은 내 천방주에게 부탁할 것이니... 자네의 소혼술로 내 딸아이의 영혼을 불러내 주게."
"대감..."
"제발... 제발 부탁이네. 계속, 계속 머물러 있게 해 달라고는 안 하겠네. 다만... 다만, 며칠이라도 머물러 있다 가게 해주게. 그런 다음에 가면 안 되겠나? 제발 부탁일세. 내 자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구해다 주겠네."
그때 문이 열리고 다과상을 든 소연이 들어오려다 예판을 보고 멈칫하였다.
예판은 소연을 보고는 얼른 백무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흠흠..."
예판이 헛기침을 하니, 소연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다과상을 놓고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이보게, 백무..."
"대감마님... 송구하오나, 그 일은 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소혼술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로 인한 업보는 천대 만대를 이어갈 것입니다."
예판은 돌연 험악한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네가 할 마음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허나..."
돌연 예판은 방 한쪽에 있던 봉혼벽륜을 냉큼 집어 들었다.
"대감?"
백무가 예판의 도포자락을 애타게 붙잡아 보지만, 예판은 그런 백무를 거칠게 뿌리쳤다.
"미안하지만, 이건 내가 가져가야겠네. 소혼술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보지."
예판은 그 말을 남기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버렸다.
"대감마님, 아니 됩니다. 그것은..."
예판이 미는 바람에 넘어졌던 백무는 황급히 다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예판을 쫓아나갔다.
하지만 예판은 벌써 부리나케 달려 대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대감!"
뒤에서 백무가 안타깝게 불러보지만, 예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달려가 버렸다.
부엌에 있던 소연이 놀라 허둥지둥 밖으로 나오며, 의아한 표정으로 백무에게 물었다.
"무, 무슨 일입니까? 대감마님은 왜 저리 급하게 가시는 겁니까?"
백무는 망연자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스승님?"
경악한 소연이 얼른 백무 곁으로 달려가 부축하려 팔을뻗자, 넋이 나간듯 백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일을... 이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어... 어찌 이러는 것이냐?"
놀란 세자가 황급히 물러나 보지만, 그녀는 더욱 더 과감하게 바짝 다가왔다.
"부끄러우십니까?"
도발적인 표정과 목소리로 물어오는 연희를 보며, 세자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구, 궁중에 예법이 이, 이렇지 않거늘... 네가..."
어느새 그녀는 당황해 말을 더듬고 있는 세자의 얼굴을 살포시 어루만졌다.
"어어..."
바로 코앞에서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세자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 그만!"
놀란 세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헉헉..."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의 몸을 어루만져 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맙소사... 이건 무슨..."
이해할 수 없었다.
최근 수년간 거의 매일 같이, 어머니가 죽는 꿈만을 꾸었다.
얼마 전 어머니의 죽음이 아닌 어린시절 잠시간의 꿈을 꾸었다고 하더라고....처음이었다. 어머니가 나오지 않는 꿈은...이번엔 전혀 다른 꿈이 아닌가?
"어째서... 어째서 네가 꿈에 나오는 것이냐?"
세자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더군다나 꿈에 나온 그녀의 모습은, 도저히 상상조차 못 할 모습이었다.
세자는 잊으려 고개를 흔들어 보지만, 워낙 꿈속에서의 모습이 강렬해 쉽게 잊히지가 않았다.
"내가 경연을 소홀이 했더니, 헛된 망상에 빠진 모양이구나."
홀로 중얼거리던 세자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이르게 채비를 하였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탓에, 궁인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부랴부랴 움직였다.
아직 새벽빛이 푸른빛을 담고 있는 그 시간, 세자는 밖으로 나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답답했던 가슴이 차가운 새벽 공기에 시원하게 뚫리는 것만 같아,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이른 새벽시간이라 그런지 둥근 만월이 휘영차게 떠 있었다.
그런 달을 올려다보며 누군가를 떠올린듯 아련하게 바라보다 이내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일개 평민이라면 서로 안부를 묻고, 보고 싶으면 찾아가 만나고 하겠지? 허나 나는... 네게 안부를 묻을 수도, 너를 찾아가 만나 볼 수도 없구나."
세자는 달을 보며 갑갑함과 아쉬움에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때 세자의 등 뒤에 선 내관과 궁녀들 뒤쪽에서 수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스럽게 뜨려는 듯, 연신 손으로 비비다가 세자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얼굴을 바로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내가 자네 잠을 깨운 모양이구나."
세자의 말에 수현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어인 일로 이리 일찍 일어나셨습니까?"
세자는 꿈을 생각하자, 벌써 얼굴이 화끈 거리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돌렸다.
"별일 아니다. 그보다..."
세자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연희는... 잘 갔느냐?"
세자의 물음에 수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이... 요 며칠 계속 슬픔에 잠겨 울고 있습니다."
그 말에 세자가 놀란 표정으로 수현을 돌아보았다.
"울다니? 어째써?"
"그게 참... 제가 연유를 물어보니, 본인도 왜 우는지 모르겠다 합니다."
"뭐라?"
"나가던 날... 황인걸 대감의 당여들이 의금부로 호송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자는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허탈하게 말했다.
"알고 있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야. 단 한 명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던 게지. 그런데 왜? 이제 와서? 3년이나 지난 일이건만, 어찌하여 그런 것인가."
"좌상대감 측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최근 그 당여들이 회동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회동?"
"예, 아마도 그것이 좌상대감의 귀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세자는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헌데... 그 일이 연희와 무슨 관련이냐?"
"그날... 잡혀오던 윤호성 대감을 보았습니다."
세자가 놀란 표정으로 수현을 쳐다보았다.
"윤호성 대감? 그 꿈에서 조심하라고 했던?"
"예. 헌데 그 윤호성 대감을 보자, 연희가 떨기 시작했습니다."
"떨어?"
"예. 가슴이 진정되지 않고 손발이 떨린다 하였기에, 저는 두려워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고... 그 사람에 대해 묻기에, 처형되었다 답하였지요."
세자의 표정은 꽤나 관심이 가득 찬 표정이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면서... 왜 우는지 모르겠으나, 눈물이 난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의아한 세자는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연희의 성이 송가라 하지 않았더냐?"
"예,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송연희라 하였습니다."
"그래... 그럼 무슨 사연일까? 윤호성 대감의 죽음을 슬퍼한다? 알 수 없구나."
세자는 꽤나 그 일이 신경 쓰이는지, 잘생긴 얼굴에 근심이 가득차기 시작했다.
"그 일로, 연희에 대한 조사를 좀 더 서두르고 있습니다. 연희가 잡혀왔던 곳에서 발견된, 벽조목으로 만든 벽륜봉이란 것이 있는, 그것이 관련이 있을 듯 하여, 백무에게 조사를 맡겨놓았습니다. 저들이 무얼 하려고 했었는지를 알면, 연희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 부탁하네. 그나저나... 어찌해야 할까..."
세자가 계속 근심 어린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니, 수현은 오히려 의문스러웠다.
"어찌 그러십니까?"
"어찌 그러냐니? 연희가 울고 있다 하지 않았느냐?"
"허면... 지금 연희 때문에 그러시는 것입니까?"
"왜... 그러면 안되느냐?"
수현은 슬쩍 실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저하, 저하의 이런 모습은 제가 저하를 모신 뒤로, 처음 뵙는 듯합니다."
"이런 모습이라니?"
"왕실 사람도, 그렇다고 권력을 쥔 양반가의 사람도 아닌 누군가를, 이토록 걱정하고 근심하셨던 적이 있으셨습니까? 하물며 여인이라니...."
수현이 의뭉스럽다는 눈빛으로 세자를 바라보며 묻자, 세자는 단호하게 표정을 굳히며 헛기침을 하였다.
"그저 세자로써 한 백성을 걱정했을 뿐이다."
수현은 세자의 속내를 모르는척 지지 않고 대답했다.
"세자로써, 한 백성이 아니라, 만백성을 걱정하시옵소서, 저하."
세자는 뻔뻔스러운 얼굴을 하는 수현을 보며,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일부러 입술을 삐죽거리며 가볍게 대꾸했다.
"잔소리하고는... 되었다."
세자가 불만스러운듯 발걸음에 힘을 실어 옮기니, 수현이 얼른 결연한 눈빛으로 그 뒤를 따랐다.
***
앞마당을 쓸던 소연은 누군가의 인기척 소리에 대문을 쳐다보았다.
"아..."
놀란 소연은 얼른 달려가 공손히 인사하였다.
"대감마님 오셨습니까?"
그는 다름 아닌 예판이었다.
예판은 뭔가 불안한 듯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소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백무 안에 있는가?"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소연이 얼른 가서 부르려 하자, 예판이 손을 들어 만류하였다.
"아, 아니다. 오늘은 내 긴히 할 얘기가 있어 그러니, 내가 가마."
예판이 집안으로 걸어들어가니, 인기척 소리를 들었는지 백무가 방문을 열고 대청마루로 나오며 인사했다.
"대감마님 오셨습니까?"
백무의 인사에, 예판이 초조한듯 고개를 끄덕이며 백무에게 다가섰다.
"내 오늘 할 얘기가 있어 왔네만. 시간 괜찮으신가?"
"예, 괜찮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래."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소연은 바삐 다과상을 보러 달려갔다.
방으로 들어선 예판은 당연한듯 자연스레 상석으로 걸어가 앉았고, 맞으편으로 백무가 자리를 잡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자리에 앉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눈빛으로 방안을 둘러보던 예판은, 문득 방 한쪽에 놓인 벽륜봉을 보자 눈이 반짝거렸다.
"아... 다름이 아니라... 내 자네에게 물어볼 것이 하나 있네만... 자네 혹, 천무방(天武幇)이라고 아는가?"
백무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들어 보았습니다. 사술을 부리는 집단이라 들었습니다만... 어찌 묻는 것입니까?"
예판이 눈을 한번 찔끈 감았다 뜨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3년 전 그때 그 일이 있었을 때, 천무방에 천태호라는 방주를 만났었네."
백무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그런 백무의 표정을 읽은 듯, 예판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아는 사람인가?"
"예, 알지요. 본디 제 스승의 사형이셨던 분의 제자로,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나쁜 길로 빠져 사술을 부리는 자로 전락한 자입니다. 천무방의 방주가... 천태호 였다니... 미처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그래. 그랬었군. 그자가 그때 찾아왔었네. 내 딸아이를 다시 깨워주겠다면서, 주술을 부리겠다고 말이야."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예판이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잘 안되었네. 이미 시기를 놓친 것 같다더군. 그러면서, 자네 얘기를 하더군. 자네를 찾아가 보라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백무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네에게 도움을 받으면, 누워있어도 건강한 사람처럼 몸이 상하지 않게 해 줄 것이라 하였네. 내 그래서 자네를 찾아오게 된 것이었어."
백무는 예판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의 말대로, 자네의 주술 덕에 내 딸아이는 지금까지도 육신이 멀쩡히 잘 있지. 고마웠네. 자네 주술의 효력이 이만큼일 줄은 내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미 굳은 낯빛의 백무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몇 번 더 천방주를 만났었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술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지. 그리고 그중에 나는 봉혼벽륜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네."
순간 백무의 표정이 창백해지며, 놀란 얼굴로 겁에 질린듯이 그를 불렀다.
"대감...."
그러자, 예판이 갑자기 백무의 손을 두손으로 부여잡았다.
"내... 내 이렇게 애원하겠네. 그 봉혼벽륜이란 물건이 있으면, 죽은 사람의 영혼도 불러내어 이승에 머물게 할 수 있다 들었네. 우리 딸아이를... 딸아이를 불러내 주게."
백무는 무섭도록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니 됩니다. 그것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금기입니다. 더군다나 저는 봉혼벽륜의 술수를 알지 못합니다."
"영혼을 불러만 내주게. 봉혼벽륜은 내 천방주에게 부탁할 것이니... 자네의 소혼술로 내 딸아이의 영혼을 불러내 주게."
"대감..."
"제발... 제발 부탁이네. 계속, 계속 머물러 있게 해 달라고는 안 하겠네. 다만... 다만, 며칠이라도 머물러 있다 가게 해주게. 그런 다음에 가면 안 되겠나? 제발 부탁일세. 내 자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구해다 주겠네."
그때 문이 열리고 다과상을 든 소연이 들어오려다 예판을 보고 멈칫하였다.
예판은 소연을 보고는 얼른 백무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흠흠..."
예판이 헛기침을 하니, 소연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다과상을 놓고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이보게, 백무..."
"대감마님... 송구하오나, 그 일은 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소혼술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로 인한 업보는 천대 만대를 이어갈 것입니다."
예판은 돌연 험악한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네가 할 마음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허나..."
돌연 예판은 방 한쪽에 있던 봉혼벽륜을 냉큼 집어 들었다.
"대감?"
백무가 예판의 도포자락을 애타게 붙잡아 보지만, 예판은 그런 백무를 거칠게 뿌리쳤다.
"미안하지만, 이건 내가 가져가야겠네. 소혼술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보지."
예판은 그 말을 남기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버렸다.
"대감마님, 아니 됩니다. 그것은..."
예판이 미는 바람에 넘어졌던 백무는 황급히 다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예판을 쫓아나갔다.
하지만 예판은 벌써 부리나케 달려 대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대감!"
뒤에서 백무가 안타깝게 불러보지만, 예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달려가 버렸다.
부엌에 있던 소연이 놀라 허둥지둥 밖으로 나오며, 의아한 표정으로 백무에게 물었다.
"무, 무슨 일입니까? 대감마님은 왜 저리 급하게 가시는 겁니까?"
백무는 망연자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스승님?"
경악한 소연이 얼른 백무 곁으로 달려가 부축하려 팔을뻗자, 넋이 나간듯 백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일을... 이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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