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2
야심한 시각, 다소 어두운 방안에 세자와 수현 그리고 조세춘이 앉아 있었다.
세 사람 모두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수현이었다.
"허나, 거기에 저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들, 그것을 어찌 증좌라 할 수 있겠는가? 분명 저들이 허위로 만든 것이 틀림없지 않은가?"
조세춘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규장각에서 일을 하네. 궁궐에서 다뤄지는 수많은 문서를 다루고 있지. 그중에는 필체를 확인하는 것 역시 내가 맡은 소임 중 하나일세."
수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허면? 거기 있던 이름의 필체가 저하의 필체란 말인가?"
"내 이미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기 힘들 정도로 판박이였네. 저하뿐이 아닐세. 박지언의 필체 또한 본인의 것이라 믿기 충분해 보였네."
세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정도의 필사가 가능한 것인가?"
"예,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필사꾼이 누군지 찾아내야 하는 문제입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수현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밑도 끝도 없이 어디서부터 그를 찾는단 말인가? 누구인지 알고?"
세자 역시 표정이 어두워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교도의 맹약서에 내 필체로 내 이름이 적혀 있고, 연희가 의금부가 잡혀 있으니... 이거야말로 사면초가로구나."
수현이 초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 제신녀라는 여인도 오래 잡아둘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어떤 거짓 정보를 주어 저 천태호란 자를 흔드실 생각이십니까?"
세자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더군다나 맹약서의 내용을 알았으니, 그것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이어 돌연 세자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어차피 연극을 할 것이라면, 차라리 그것이 낫겠구나."
세자의 말에 수현과 조세춘이 의아한 표정이 되어 세자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수현이 재차 물어보자, 세자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그 제신녀라는 여인에게서 필사장이의 정체를 밝혀낼 것이다. 소연을 불러오거라. 할 일이 있다."
***
망연히 앉아 있던 연희는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들은 연희의 옥사 앞에 멈추어 서서 문을 열고 있었고, 포도청 사람들의 복색을 본 연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보다 일찍 오셨습니다."
연희는 으레 세자가 보낸 좌포청 사람들인가 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이끄는 무관이 평소에 보던 좌포청 종사관 여학수가 아닌 다른 인물이었다.
"여종사관께서는 안 오신 것입니까?"
연희가 의아한 듯 묻는 말에 무관은 대답은 커녕 시선 조차 주지 않았다.
그제야 연희는 불길한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어찌 이러시는 것입니까?"
연희의 물음에 그들은 대답하지 않고 무시하며, 그저 연희를 옥사에서 빼내어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었다.
이전에 갔었던 궁궐 내 궐내각사가 아니었다.
궁궐 쪽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안 연희는 두려운 마음에 소리쳐 물었다.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
그러자 병졸들을 이끌던 무관이 살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닥치거라. 조용히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연희가 끌려간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궐집 앞마당이었다.
양쪽으로 불을 피워 주위를 밝힌 그곳에는, 마치 추국장에서나 볼법한 형틀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그 맞은편 상석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바로 안영군이었다.
안영군은 연희를 보자 무표정하던 얼굴을 순식간에 바꾸며 반갑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허나 그 표정이 흡사 광기 어린 미친 사람 처럼 보였다.
"왔구나! 기다렸다. 기다렸어. 항상 세자 저하께서 먼저 채가시는 바람에 만나기가 어려웠는데, 오늘이야말로 내가 먼저 선수를 쳤구나. 하하하."
안영군의 말에 연희는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앉히거라. 쇠꼬챙이를 가져오너라. 오늘 이년의 가죽을 모조리 태워, 추하게 변하여도 세자가 여전히 찾게 될지 내 지켜보고 싶구나."
절망 어린 표정의 연희를, 병사들이 이끌고 가 형틀 의자에 앉혔다.
그녀는 자신이 의자에 묶이는 와중에도 안영군을 응시하다가, 이내 체념한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감은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가슴에는 절망감만이 가득했다.
"어떠하냐? 기대되느냐?"
안영군이 연희 앞으로 다가와 비꼬듯이 하는 말에 연희가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찌 이러시는 것입니까?"
"어찌 이러다니? 몰라서 묻는 말이냐? 당장 네년이 사교도이고, 세자도 한통속이라고 불어보거라. 그리하면 네년을 온전히 내보내 주마."
"저는 사교도가 아닙니다. 세자마마는 더더욱이 아니십니다."
그러자 안영군이 씨익 웃어 보였다.
"불에 달궈진 쇳덩이에 살이 타들어가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진실을 왜곡하려 하시면, 천벌을 받게 되실 겁니다."
연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연 안영군이 연희의 머리체를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감히 어디서 그딴 소리를 지껄여! 당장 쳐 죽이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것이야!"
이어 나지막하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죽여주마.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불에 태우고, 살점을 뜯어내 개에게 먹이로 줄 것이다. 팔다리를 잘라내어 네년 눈앞에 구경시켜 줄 것이야. 제발 죽여달라고 빌게 해 주마."
이어 음흉한 눈빛으로 연희의 몸을 훑어내리며 말했다.
"그냥 죽이기엔 조금 아까운 것 같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네게 남녀 간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알려줄까?"
문득 연희의 몸을 내려다보던 안영군의 눈에 무언가 보였다.
"이건 뭐야?"
그가 갑자기 연희의 품속으로 손을 밀어 넣자, 연희가 놀라 소리쳤다.
"무슨 짓이오?"
그러나 안영군은 태연히 연희의 품속에서 무언가 꺼내 들었다.
그것은 마치 은장도처럼 보이는 자그마한 단검이었고,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검집 안에 들어있었다.
"이게 무엇이냐?"
연희는 안영군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물건은 바로 소연이 그녀에게 맡긴 파사신검이었다.
"돌려주십시오. 제 물건입니다."
연희의 말에 안영군이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거라. 네년의 마지막 순간, 이 칼로 네년 심장을 찔러주마."
광기어린 눈으로 안영군이 검집 안에서 검을 빼어 들었다.
***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신음소리만이 정적 속에 울려 퍼지고, 두 눈을 부릅뜬 체 앉아 있는 제신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에게선 어떤 긴장감이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태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 옥사 안으로 누군가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말단 무관의 차림을 한 그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서 제신녀 앞에 멈춰 섰다.
제신녀는 그를 응시하며 위아래로 살펴보는가 싶더니,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이내 평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제신녀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율제님의 전언이다."
율제란 말이 나오자 제신녀의 표정이 황망하게 변하며 고개를 숙였다.
"율제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율제님께서, 그간 너의 수고를 치하한다 하셨다. 허나, 배신은 용서할 수 없다 하셨다."
그의 말에 제신녀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배신이라뇨?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필사하는 자를 빼돌려, 사익을 추구하려 했음을 율제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다."
"필사? 필사장인 우사를 말함입니까?"
"그렇다."
"우사를 빼돌렸다니요? 우사가 사라졌단 말입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그저 서쾌나 하는 자에게서 무슨 사익을 얻겠습니까? 더욱이..."
[ 서쾌 : 돌아다니며 책을 파는 책장사꾼 ]
문득 이야기하던 제신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어 앙칼진 목소리로 그를 노려보며 소리치듯 말했다.
"네 이놈! 네놈은 누구냐? 감히 누구를 기만하려 드는 것이냐?"
그러자 바깥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세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고맙구나. 필사장이가 누군지 알려주어서 말이다. 그런데... 내게 필사장이의 신분을 알려주었단 사실을 천방주가 알면... 과연 네년을 가만 놔둘지 모르겠구나."
제신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표독스런 눈길로 세자를 노려보았다.
"네놈.... 네놈이...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이어 자신을 속인 이를 향해 고개를 돌려 노려보며 말했다.
"그럴 리 없어! 네놈에게서... 네놈에게서 분명 율제님의 주술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러자, 세자의 등 뒤에서 소연과 수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소연이 제신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비록 기생령의 술수를 부릴 순 없다 하여도, 비슷한 기운을 느낄 수 있게는 만들 수 있다."
소연의 말에 제신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년이... 네년이 나를 속이다니...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네년을 기필코..."
그러자 세자가 그녀의 옥사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래, 해보거라. 천방주에게 돌아가야지? 내 그 필사장이를 잡고 나면 네게 걸린 주술을 풀어주마."
이어 고개를 돌려 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한양 안에 있는 모든 서쾌들을 잡아들여라."
"예."
수현이 대답과 동시에 바람같이 바깥으로 달려 나가며 사라지자, 제신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제신녀를 보며 세자가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필사장이를 잡으면 천방주에게, 네가 가르쳐 주었다고, 꼭 전하도록 하마."
"이이이...."
제신녀는 분을 참지 못해,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거렸고, 세자는 웃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일행과 함께 옥사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온 세자는, 수하에게 걸린 주술을 푸는 소연을 쳐다보았다. 그때 세자 앞으로 여학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니, 여종사관 아닌가? 연희는 어쩌고 오는 것인가?"
세자의 물음에 여학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저하... 그것이..."
세 사람 모두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수현이었다.
"허나, 거기에 저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들, 그것을 어찌 증좌라 할 수 있겠는가? 분명 저들이 허위로 만든 것이 틀림없지 않은가?"
조세춘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규장각에서 일을 하네. 궁궐에서 다뤄지는 수많은 문서를 다루고 있지. 그중에는 필체를 확인하는 것 역시 내가 맡은 소임 중 하나일세."
수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허면? 거기 있던 이름의 필체가 저하의 필체란 말인가?"
"내 이미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기 힘들 정도로 판박이였네. 저하뿐이 아닐세. 박지언의 필체 또한 본인의 것이라 믿기 충분해 보였네."
세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정도의 필사가 가능한 것인가?"
"예,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필사꾼이 누군지 찾아내야 하는 문제입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수현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밑도 끝도 없이 어디서부터 그를 찾는단 말인가? 누구인지 알고?"
세자 역시 표정이 어두워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교도의 맹약서에 내 필체로 내 이름이 적혀 있고, 연희가 의금부가 잡혀 있으니... 이거야말로 사면초가로구나."
수현이 초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 제신녀라는 여인도 오래 잡아둘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어떤 거짓 정보를 주어 저 천태호란 자를 흔드실 생각이십니까?"
세자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더군다나 맹약서의 내용을 알았으니, 그것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이어 돌연 세자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어차피 연극을 할 것이라면, 차라리 그것이 낫겠구나."
세자의 말에 수현과 조세춘이 의아한 표정이 되어 세자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수현이 재차 물어보자, 세자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그 제신녀라는 여인에게서 필사장이의 정체를 밝혀낼 것이다. 소연을 불러오거라. 할 일이 있다."
***
망연히 앉아 있던 연희는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들은 연희의 옥사 앞에 멈추어 서서 문을 열고 있었고, 포도청 사람들의 복색을 본 연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보다 일찍 오셨습니다."
연희는 으레 세자가 보낸 좌포청 사람들인가 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이끄는 무관이 평소에 보던 좌포청 종사관 여학수가 아닌 다른 인물이었다.
"여종사관께서는 안 오신 것입니까?"
연희가 의아한 듯 묻는 말에 무관은 대답은 커녕 시선 조차 주지 않았다.
그제야 연희는 불길한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어찌 이러시는 것입니까?"
연희의 물음에 그들은 대답하지 않고 무시하며, 그저 연희를 옥사에서 빼내어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었다.
이전에 갔었던 궁궐 내 궐내각사가 아니었다.
궁궐 쪽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안 연희는 두려운 마음에 소리쳐 물었다.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
그러자 병졸들을 이끌던 무관이 살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닥치거라. 조용히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연희가 끌려간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궐집 앞마당이었다.
양쪽으로 불을 피워 주위를 밝힌 그곳에는, 마치 추국장에서나 볼법한 형틀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그 맞은편 상석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바로 안영군이었다.
안영군은 연희를 보자 무표정하던 얼굴을 순식간에 바꾸며 반갑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허나 그 표정이 흡사 광기 어린 미친 사람 처럼 보였다.
"왔구나! 기다렸다. 기다렸어. 항상 세자 저하께서 먼저 채가시는 바람에 만나기가 어려웠는데, 오늘이야말로 내가 먼저 선수를 쳤구나. 하하하."
안영군의 말에 연희는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앉히거라. 쇠꼬챙이를 가져오너라. 오늘 이년의 가죽을 모조리 태워, 추하게 변하여도 세자가 여전히 찾게 될지 내 지켜보고 싶구나."
절망 어린 표정의 연희를, 병사들이 이끌고 가 형틀 의자에 앉혔다.
그녀는 자신이 의자에 묶이는 와중에도 안영군을 응시하다가, 이내 체념한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감은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가슴에는 절망감만이 가득했다.
"어떠하냐? 기대되느냐?"
안영군이 연희 앞으로 다가와 비꼬듯이 하는 말에 연희가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찌 이러시는 것입니까?"
"어찌 이러다니? 몰라서 묻는 말이냐? 당장 네년이 사교도이고, 세자도 한통속이라고 불어보거라. 그리하면 네년을 온전히 내보내 주마."
"저는 사교도가 아닙니다. 세자마마는 더더욱이 아니십니다."
그러자 안영군이 씨익 웃어 보였다.
"불에 달궈진 쇳덩이에 살이 타들어가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진실을 왜곡하려 하시면, 천벌을 받게 되실 겁니다."
연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연 안영군이 연희의 머리체를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감히 어디서 그딴 소리를 지껄여! 당장 쳐 죽이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것이야!"
이어 나지막하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죽여주마.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불에 태우고, 살점을 뜯어내 개에게 먹이로 줄 것이다. 팔다리를 잘라내어 네년 눈앞에 구경시켜 줄 것이야. 제발 죽여달라고 빌게 해 주마."
이어 음흉한 눈빛으로 연희의 몸을 훑어내리며 말했다.
"그냥 죽이기엔 조금 아까운 것 같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네게 남녀 간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알려줄까?"
문득 연희의 몸을 내려다보던 안영군의 눈에 무언가 보였다.
"이건 뭐야?"
그가 갑자기 연희의 품속으로 손을 밀어 넣자, 연희가 놀라 소리쳤다.
"무슨 짓이오?"
그러나 안영군은 태연히 연희의 품속에서 무언가 꺼내 들었다.
그것은 마치 은장도처럼 보이는 자그마한 단검이었고,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검집 안에 들어있었다.
"이게 무엇이냐?"
연희는 안영군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물건은 바로 소연이 그녀에게 맡긴 파사신검이었다.
"돌려주십시오. 제 물건입니다."
연희의 말에 안영군이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거라. 네년의 마지막 순간, 이 칼로 네년 심장을 찔러주마."
광기어린 눈으로 안영군이 검집 안에서 검을 빼어 들었다.
***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신음소리만이 정적 속에 울려 퍼지고, 두 눈을 부릅뜬 체 앉아 있는 제신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에게선 어떤 긴장감이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태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 옥사 안으로 누군가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말단 무관의 차림을 한 그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서 제신녀 앞에 멈춰 섰다.
제신녀는 그를 응시하며 위아래로 살펴보는가 싶더니,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이내 평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제신녀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율제님의 전언이다."
율제란 말이 나오자 제신녀의 표정이 황망하게 변하며 고개를 숙였다.
"율제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율제님께서, 그간 너의 수고를 치하한다 하셨다. 허나, 배신은 용서할 수 없다 하셨다."
그의 말에 제신녀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배신이라뇨?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필사하는 자를 빼돌려, 사익을 추구하려 했음을 율제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다."
"필사? 필사장인 우사를 말함입니까?"
"그렇다."
"우사를 빼돌렸다니요? 우사가 사라졌단 말입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그저 서쾌나 하는 자에게서 무슨 사익을 얻겠습니까? 더욱이..."
[ 서쾌 : 돌아다니며 책을 파는 책장사꾼 ]
문득 이야기하던 제신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어 앙칼진 목소리로 그를 노려보며 소리치듯 말했다.
"네 이놈! 네놈은 누구냐? 감히 누구를 기만하려 드는 것이냐?"
그러자 바깥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세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고맙구나. 필사장이가 누군지 알려주어서 말이다. 그런데... 내게 필사장이의 신분을 알려주었단 사실을 천방주가 알면... 과연 네년을 가만 놔둘지 모르겠구나."
제신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표독스런 눈길로 세자를 노려보았다.
"네놈.... 네놈이...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이어 자신을 속인 이를 향해 고개를 돌려 노려보며 말했다.
"그럴 리 없어! 네놈에게서... 네놈에게서 분명 율제님의 주술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러자, 세자의 등 뒤에서 소연과 수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소연이 제신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비록 기생령의 술수를 부릴 순 없다 하여도, 비슷한 기운을 느낄 수 있게는 만들 수 있다."
소연의 말에 제신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년이... 네년이 나를 속이다니...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네년을 기필코..."
그러자 세자가 그녀의 옥사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래, 해보거라. 천방주에게 돌아가야지? 내 그 필사장이를 잡고 나면 네게 걸린 주술을 풀어주마."
이어 고개를 돌려 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한양 안에 있는 모든 서쾌들을 잡아들여라."
"예."
수현이 대답과 동시에 바람같이 바깥으로 달려 나가며 사라지자, 제신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제신녀를 보며 세자가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필사장이를 잡으면 천방주에게, 네가 가르쳐 주었다고, 꼭 전하도록 하마."
"이이이...."
제신녀는 분을 참지 못해,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거렸고, 세자는 웃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일행과 함께 옥사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온 세자는, 수하에게 걸린 주술을 푸는 소연을 쳐다보았다. 그때 세자 앞으로 여학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니, 여종사관 아닌가? 연희는 어쩌고 오는 것인가?"
세자의 물음에 여학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저하...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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