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2
여객터미널 주변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비기 마련이다.
회사 사람들도 어쨌거나 놀러 간다는 사실에 신이 나 이야기꽃을 피우는 와중에, 나래는 전화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좀 적은 구석으로 황급히 몸을 피했다.
"여보세요? 엄마?"
전화를 받는 나래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이렇게 걸려오는 전화면 열에 아홉은 어떤 전화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았어, 알았다고."
이른 아침시간이건만, 짜증이 가슴속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는 것만 같다.
"나한테 돈 맡겨놨어?"
나래가 버럭 짜증을 내고는 통화를 끊어버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아, 잠시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하는 그 짧은 시간 또다시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래는 전화를 무시하고, 통화음을 꺼버린 체 다시 사람들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부모 덕은 바라지도 않건만, 이리도 짐이 되는 건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자자, 모두들 버스에 타세요."
양 과장이 버스표를 한 움큼 챙겨 들고 부르는 소리에, 나래도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나래 씨, 나랑 같이 앉자."
어느 틈엔가 나래의 팔을 붙잡으며, 이대리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 네네..."
사실 좀 불편했다. 이대리는 워낙 수다스럽게 떠드는 성격이라, 계속 들어주는 것도 곤욕이었다.
특히나 차를 타면 꾸벅꾸벅 조는 성격인데, 누군가 옆에서 얘기하는데, 졸 수도 없고.
그냥 혼자서 가면 편할 텐데, 아마도 그건 어려울 같다.
버스에 올라 빈자리를 살핀 뒤 비교적 뒤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안쪽으로 이대리가, 바깥쪽으로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앉은 나래는, 생각보다 버스 좌석이 여유로운 것을 보고 따로 앉자고 말을 할까 고민하다, 이대리가 수다를 시작하자, 그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아침부터 붙잡는 애들 떼어놓고 오느라 애먹었어. 일단 오늘은 시어머니가 봐주기로 하셨거든. 그래 봐야 저녁 한끼긴 하지만, 그런 거 부탁하는 것도 눈치 보인다니까."
별 관심도 없고, 흥미도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래는 그저 밋밋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버스가 출발하는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버스가 출발하고 한 시간이 체 안돼서 이대리가 먼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참을 수다를 떨어서였을까? 피곤한 듯 곯아떨어진 이대리를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래는 바로 건너편 자리로 슬쩍 옮겨 앉았다.
아직도 한 시간 이상 더 가야 했기에, 편하게 앉아서 눈 좀 붙여볼까 했지만, 어쩐지 잠이 오질 않았다.
고속버스 창문 커튼을 걷어 스쳐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니, 어느새 삭막했던 도심 풍경은 사라지고, 녹색 빛으로 물든 세상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일까, 그런 풍경을 바라보는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아까 엄마한테 그 말은 괜히 했던 것일까, 엄마도 딸자식한테 그런 말 하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마음이 무겁다. 그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 복잡한 심정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스스로도 지금의 심정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차창에 비친 풍경 위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삶에 지쳐 버린 자신의 눈동자에는 어떤 생기도 없어 보였다.
누군가는 꿈 많은 시절을 그리워한다지만, 정작 돌이켜 보면 그리 꿈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가난했고, 그 가난했던 삶이, 피곤에 찌든 삶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을 뿐이다.
예의 습관적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대로 어디론가, 다른 사람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그렇게 훌쩍 떠나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걸 다 그만둔 채로.
그런 나래를 싣고 버스는 하염없이 달렸다.
이젠 어딘지도 모를 곳을 달리고 있지만, 보이는 풍경은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그렇게 한 시간을 더 달려, 어느덧 버스는 비교적 낮은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얼마 후 버스는 큼지막한 사찰에 당도했고, 총 4대의 버스가 사찰 주차장에 정차했다.
비록 불만을 가지고 참석한 회사 워크숍이긴 했지만, 정작 산 중턱 즈음에 도착해 내려선 주변 풍경은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사찰도 제법 규모가 커 보였고, 곳곳에 잘 다듬어지고 관리된 풍경과 그 너머에 자리 잡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 꽤나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있는 듯했다.
4대의 고속버스에 나누어 탄 백여 명의 직원들이 속속들이 도착해 내려서자, 나서기 좋아하는 양 과장이 부사장님 옆에 바짝 붙어서 직원들을 인솔했다.
하품하며 짐을 들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이대리 뒤를 쫓아 나래도 직원들 속에 섞여 들어갔다.
사찰 내 건물들은 꽤 오랫동안 이곳에 자리잡은것 같아 보이는 반면, 직원들이 묵게 될 숙소 쪽 건물들은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듯 꽤나 세련되고 이쁜 형태와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는 데다가, 외부 모양과는 달리 내부 쪽은 현대적인 구조로 지어져 있었다.
템플스테이라길래, 당장 화장실부터 꽤 불편하겠다 걱정했지만, 화장실부터 샤워실까지 도시에서 볼 법한 시설이 충분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을 보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2인 1실 형태로 숙소로, 예상했던 대로 이대리가 나래의 팔짱을 꼭 잡은 체, 한방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이렇게 자신을 찾아주니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각자 자기 방에서 짐을 풀고, 주어진 갈색 빛 수련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일단 다 같이 한 군데 모여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스님 한분이 앞에서 환영인사와 함께 불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지만, 나래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이대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작은 소리로 소곤거린다.
"아... 어떻게... 여기 신호 안 잡혀..."
이대리의 말에, 나래도 얼른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정말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인터넷은커녕 통화도 힘들 것이다.
아, 이건 좀 많이 힘든데... 하다못해 인터넷이라도 하게 해 줘야, 그 하염없는 시간을 보낼 텐데...
***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다시 모여 앉은 직원들은 넓은 공간에 방석을 깔고 앉아야 했다.
앞에는 상 하나 없이 그릇과 그릇받침만을 놓아둔 식사를 해야 했다.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에 익숙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바닥에 놓인 그릇으로 식사를 한다는 것은 꽤나 불편한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각자에게 잠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나래는 혼자 있고 싶은 마음에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 들렸다가 일행과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갑갑한 도심에서 나와 이런 자연 속에 온 만큼, 기왕이면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자기를 챙겨주는 이대리가 고맙긴 하지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뭘 하든 자기가 만만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을 쉬이 시킬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즉, 이대리도 자기가 편하니까 나래랑 같이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나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산 중턱에 지어진 사찰이라 필연적으로 산의 능선을 따라 지어졌고, 평탄화 작업을 했다고는 하지만, 건물 간에 높낮이가 어느 정도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
오르막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 보니, 어느 스님께서 가꾸시는 텃밭인지 잘 가꾸어진 밭이 눈에 들어왔다.
작고 아담한 밭을 보니 왠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조금 더 다가가 가만히 들여다보니, 심어놓은 모종마다 작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어느덧 여름의 초입이니, 심은지 한참이 지나서 이미 시들해진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중간에 새로 심었는지 싹이 올라오는 녀석들도 있었다.
끄트머리에 있는 옥수수는 제법 높다랗게 자라 있어, 때가 되면 맛 좋은 옥수수를 수확하기에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딸만한 게 있으면 좀 따서 주겠는데, 방울토마토도 어제 딴지라 남은 게 별로 없네요."
누군가의 말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나이 지긋해 보이는 노스님이 다가와 텃밭을 둘러보며 말을 걸어왔다.
원래 낯선 사람에게 말을 잘 못 거는 성격인 나래였지만, 어쩐지 따스한 느낌의 노스님에게는 그런 어려움 없이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잘 자라네요. 좋은 거름 주셨나 봐요."
나래의 물음에 노스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름은... 그냥, 거 심은 것이 잘 나는 것이지요."
"정말요? 거름도 안 줬는데 이렇게 잘 자라요?"
"땅이 살아있으니까. 땅이 살아서 숨을 쉬니까, 식물들도 잘 자라는 게지요."
나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하네요. 그래도 거름 같은 거 줘야 잘 자라던데..."
"여, 거름 주는 놈이 하나 있긴 합니다."
"거름 주는 놈이요?"
"네. 사찰에 돌아다니는 똥개 한 마리가 있거든요. 그놈도 뭘 아는지, 꼭 여와서 똥을 쌉니다."
노스님의 말에 나래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 개똥이 거름이 된 건가요?"
"나야 모르지요. 여하튼 꼭 여와서 똥 싸는 것이, 그놈이 이 밭을 절반은 키웠을 겁니다. 그놈이 얼마나 영특한 지, 부처님께 절도한다니까요.허허"
"예에? 정말요?"
"여와보시겠습니까. 개가 절하는 거 보여드릴테니."
노스님이 돌아서서 어딘가로 향하는데, 이제와 거절하기도 그렇고 해서 나래는 그냥 노스님을 따라 걸었다.
노스님은 사찰 맨 끄트머리에 위치한 자그마한 법당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그곳은 어쩐지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듯 조금 허름해 보였다.
"와... 여긴 오래되었나 봐요?"
"오래됐지요. 여서 제일 오래된 곳입니다. 그놈이 항상 이곳에서 부처님께 절을 한답니다. 이리 오십시요."
노스님이 법당 안으로 들어가서 손짓을 하니, 나래는 노스님을 따라 법당 안으로 신을 벗고 들어섰다.
낡고 오래되긴 했지만, 제법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었고, 낡은 부처님 동상 하나가 가운데 모셔져 있었으며, 그 앞으로는 작은 초가 하나 밝혀져 있었다.
무엇보다 특이한 건, 그 불상 뒷편에 자리잡고 있는 병풍의 그림이었다.
사람인 듯, 털이 복실복실한 이들이 잔뜩 모여있는 풍경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사람같아 보이지 않았다.
"저 그림 속에 사람들은 왜 저렇게 털이 많아요?"
"아.. 쟤들은 도깨비입니다."
"도깨비요?"
"그렇습니다. 도깨비들이 저리 생겼지요. 가만, 여 있어보십시요. 그 똥개가 어딨나 보고 오겠습니다."
노스님이 그리 말하고는 법당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혼자 법당 안에 남아있으니 조금 무서울 법도 하지만, 어쩐지 아늑하고 조용한 것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만 같았다.
나래는 좌정을 하고 앉아있는 불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슨 마음에서인지 양손을 모아 합장하고는 두 눈을 감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냥 다 잊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다시 눈을 뜬 나래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무슨 소용 있겠냐마는... 아, 마지막에는, 뭐... 나무 관세음보살, 그런 거 해야 하나?"
혼잣말에 실없이 웃음 짓는데, 문득 눈앞이 흐려졌다.
"왜 이러지?"
의아해진 나래는 손으로 눈을 비볐다.
다시 뜬 흐릿한 시야 너머로, 앞에서 일렁거리는 불빛이 조금 달라 보였다.
"뭐지?"
고개를 갸웃하는데, 가만히 보니 불상도 조금 달라 보였다.
왠지 좀 허름해진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법당 안 풍경도 조금 달라 보였다.
전체적으로 조금 더 허름해 보이는 것이, 마치 폐가 같아 보였다.
눈이 침침해졌나, 몇 번 더 껌뻑거리고 있는데, 바깥에서 인기척 소리가 났다.
노스님이 돌아오시는가 보다 생각하는데 돌연, 밖에서 큰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웬 놈이냐?"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나래가 움찔하고 놀라는 사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엥? 네놈은 뭐냐?"
그렇게 묻고 있는 이를 보는 순간, 나래의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피부 위에 숨구멍이란 숨구멍은 모두 호흡을 멈춰버린 듯, 소름이 쫘악 돋아 올랐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비명을 질러버렸다.
"꺄악!"
나래의 비명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들어선 것은 그런 나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시끄럽구나, 인간 계집이 왜 여기 있는 것이냐?"
그것은 놀랍게도 2m가 족히 넘어보이는 기다란 키에 머리 위로 뿔 같은 것이 두 개가 돋아나 있는데, 뿔 자체가 피부로 덮여 있는 데다가, 주요 부위만 살짝 가린 옷을 입고 있었다.
"이리 나와!"
그것은 기다란 손을 뻗어 나래를 붙잡더니 강한 힘으로 잡아끌었다.
"으악! 으아악!"
나래는 경악한 표정으로 연신 비명만 질러댔고, 뿌리치려 애써봤지만 마치 고목나무같이 둔탁한 느낌에,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기겁하고 있던 나래는, 바깥으로 끌려 나왔다. 바깥은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더 놀라운 것은 나래가 나온 법당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고, 주위에 그 많던 사찰의 건물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인간인가?"
바깥에 있던, 온몸에 털이난 사내가 나래를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러게. 저 안에 있던데?"
"법당 안에? 어떻게 된 노릇이지?"
"몰라. 여하튼 대장에게 데려가 보면 알겠지."
나래가 가만히 보니, 바깥에 털북숭이 사내도, 도저히 사람이라고 하기엔 온몸이 털 투성이고, 코도 시뻘건 것이 사람이 아니었다.
그 순간, 나래는 정신을 잃고 혼절해 버렸다.
"어? 뭐야? 정신이 나갔네?"
둘은 그런 나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내 혼절한 나래를 어깨에 들쳐메고 그 법당을 떠나갔다.
회사 사람들도 어쨌거나 놀러 간다는 사실에 신이 나 이야기꽃을 피우는 와중에, 나래는 전화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좀 적은 구석으로 황급히 몸을 피했다.
"여보세요? 엄마?"
전화를 받는 나래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이렇게 걸려오는 전화면 열에 아홉은 어떤 전화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았어, 알았다고."
이른 아침시간이건만, 짜증이 가슴속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는 것만 같다.
"나한테 돈 맡겨놨어?"
나래가 버럭 짜증을 내고는 통화를 끊어버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아, 잠시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하는 그 짧은 시간 또다시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래는 전화를 무시하고, 통화음을 꺼버린 체 다시 사람들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부모 덕은 바라지도 않건만, 이리도 짐이 되는 건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자자, 모두들 버스에 타세요."
양 과장이 버스표를 한 움큼 챙겨 들고 부르는 소리에, 나래도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나래 씨, 나랑 같이 앉자."
어느 틈엔가 나래의 팔을 붙잡으며, 이대리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 네네..."
사실 좀 불편했다. 이대리는 워낙 수다스럽게 떠드는 성격이라, 계속 들어주는 것도 곤욕이었다.
특히나 차를 타면 꾸벅꾸벅 조는 성격인데, 누군가 옆에서 얘기하는데, 졸 수도 없고.
그냥 혼자서 가면 편할 텐데, 아마도 그건 어려울 같다.
버스에 올라 빈자리를 살핀 뒤 비교적 뒤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안쪽으로 이대리가, 바깥쪽으로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앉은 나래는, 생각보다 버스 좌석이 여유로운 것을 보고 따로 앉자고 말을 할까 고민하다, 이대리가 수다를 시작하자, 그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아침부터 붙잡는 애들 떼어놓고 오느라 애먹었어. 일단 오늘은 시어머니가 봐주기로 하셨거든. 그래 봐야 저녁 한끼긴 하지만, 그런 거 부탁하는 것도 눈치 보인다니까."
별 관심도 없고, 흥미도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래는 그저 밋밋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버스가 출발하는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버스가 출발하고 한 시간이 체 안돼서 이대리가 먼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참을 수다를 떨어서였을까? 피곤한 듯 곯아떨어진 이대리를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래는 바로 건너편 자리로 슬쩍 옮겨 앉았다.
아직도 한 시간 이상 더 가야 했기에, 편하게 앉아서 눈 좀 붙여볼까 했지만, 어쩐지 잠이 오질 않았다.
고속버스 창문 커튼을 걷어 스쳐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니, 어느새 삭막했던 도심 풍경은 사라지고, 녹색 빛으로 물든 세상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일까, 그런 풍경을 바라보는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아까 엄마한테 그 말은 괜히 했던 것일까, 엄마도 딸자식한테 그런 말 하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마음이 무겁다. 그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 복잡한 심정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스스로도 지금의 심정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차창에 비친 풍경 위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삶에 지쳐 버린 자신의 눈동자에는 어떤 생기도 없어 보였다.
누군가는 꿈 많은 시절을 그리워한다지만, 정작 돌이켜 보면 그리 꿈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가난했고, 그 가난했던 삶이, 피곤에 찌든 삶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을 뿐이다.
예의 습관적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대로 어디론가, 다른 사람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그렇게 훌쩍 떠나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걸 다 그만둔 채로.
그런 나래를 싣고 버스는 하염없이 달렸다.
이젠 어딘지도 모를 곳을 달리고 있지만, 보이는 풍경은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그렇게 한 시간을 더 달려, 어느덧 버스는 비교적 낮은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얼마 후 버스는 큼지막한 사찰에 당도했고, 총 4대의 버스가 사찰 주차장에 정차했다.
비록 불만을 가지고 참석한 회사 워크숍이긴 했지만, 정작 산 중턱 즈음에 도착해 내려선 주변 풍경은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사찰도 제법 규모가 커 보였고, 곳곳에 잘 다듬어지고 관리된 풍경과 그 너머에 자리 잡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 꽤나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있는 듯했다.
4대의 고속버스에 나누어 탄 백여 명의 직원들이 속속들이 도착해 내려서자, 나서기 좋아하는 양 과장이 부사장님 옆에 바짝 붙어서 직원들을 인솔했다.
하품하며 짐을 들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이대리 뒤를 쫓아 나래도 직원들 속에 섞여 들어갔다.
사찰 내 건물들은 꽤 오랫동안 이곳에 자리잡은것 같아 보이는 반면, 직원들이 묵게 될 숙소 쪽 건물들은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듯 꽤나 세련되고 이쁜 형태와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는 데다가, 외부 모양과는 달리 내부 쪽은 현대적인 구조로 지어져 있었다.
템플스테이라길래, 당장 화장실부터 꽤 불편하겠다 걱정했지만, 화장실부터 샤워실까지 도시에서 볼 법한 시설이 충분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을 보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2인 1실 형태로 숙소로, 예상했던 대로 이대리가 나래의 팔짱을 꼭 잡은 체, 한방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이렇게 자신을 찾아주니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각자 자기 방에서 짐을 풀고, 주어진 갈색 빛 수련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일단 다 같이 한 군데 모여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스님 한분이 앞에서 환영인사와 함께 불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지만, 나래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이대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작은 소리로 소곤거린다.
"아... 어떻게... 여기 신호 안 잡혀..."
이대리의 말에, 나래도 얼른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정말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인터넷은커녕 통화도 힘들 것이다.
아, 이건 좀 많이 힘든데... 하다못해 인터넷이라도 하게 해 줘야, 그 하염없는 시간을 보낼 텐데...
***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다시 모여 앉은 직원들은 넓은 공간에 방석을 깔고 앉아야 했다.
앞에는 상 하나 없이 그릇과 그릇받침만을 놓아둔 식사를 해야 했다.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에 익숙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바닥에 놓인 그릇으로 식사를 한다는 것은 꽤나 불편한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각자에게 잠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나래는 혼자 있고 싶은 마음에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 들렸다가 일행과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갑갑한 도심에서 나와 이런 자연 속에 온 만큼, 기왕이면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자기를 챙겨주는 이대리가 고맙긴 하지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뭘 하든 자기가 만만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을 쉬이 시킬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즉, 이대리도 자기가 편하니까 나래랑 같이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나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산 중턱에 지어진 사찰이라 필연적으로 산의 능선을 따라 지어졌고, 평탄화 작업을 했다고는 하지만, 건물 간에 높낮이가 어느 정도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
오르막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 보니, 어느 스님께서 가꾸시는 텃밭인지 잘 가꾸어진 밭이 눈에 들어왔다.
작고 아담한 밭을 보니 왠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조금 더 다가가 가만히 들여다보니, 심어놓은 모종마다 작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어느덧 여름의 초입이니, 심은지 한참이 지나서 이미 시들해진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중간에 새로 심었는지 싹이 올라오는 녀석들도 있었다.
끄트머리에 있는 옥수수는 제법 높다랗게 자라 있어, 때가 되면 맛 좋은 옥수수를 수확하기에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딸만한 게 있으면 좀 따서 주겠는데, 방울토마토도 어제 딴지라 남은 게 별로 없네요."
누군가의 말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나이 지긋해 보이는 노스님이 다가와 텃밭을 둘러보며 말을 걸어왔다.
원래 낯선 사람에게 말을 잘 못 거는 성격인 나래였지만, 어쩐지 따스한 느낌의 노스님에게는 그런 어려움 없이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잘 자라네요. 좋은 거름 주셨나 봐요."
나래의 물음에 노스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름은... 그냥, 거 심은 것이 잘 나는 것이지요."
"정말요? 거름도 안 줬는데 이렇게 잘 자라요?"
"땅이 살아있으니까. 땅이 살아서 숨을 쉬니까, 식물들도 잘 자라는 게지요."
나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하네요. 그래도 거름 같은 거 줘야 잘 자라던데..."
"여, 거름 주는 놈이 하나 있긴 합니다."
"거름 주는 놈이요?"
"네. 사찰에 돌아다니는 똥개 한 마리가 있거든요. 그놈도 뭘 아는지, 꼭 여와서 똥을 쌉니다."
노스님의 말에 나래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 개똥이 거름이 된 건가요?"
"나야 모르지요. 여하튼 꼭 여와서 똥 싸는 것이, 그놈이 이 밭을 절반은 키웠을 겁니다. 그놈이 얼마나 영특한 지, 부처님께 절도한다니까요.허허"
"예에? 정말요?"
"여와보시겠습니까. 개가 절하는 거 보여드릴테니."
노스님이 돌아서서 어딘가로 향하는데, 이제와 거절하기도 그렇고 해서 나래는 그냥 노스님을 따라 걸었다.
노스님은 사찰 맨 끄트머리에 위치한 자그마한 법당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그곳은 어쩐지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듯 조금 허름해 보였다.
"와... 여긴 오래되었나 봐요?"
"오래됐지요. 여서 제일 오래된 곳입니다. 그놈이 항상 이곳에서 부처님께 절을 한답니다. 이리 오십시요."
노스님이 법당 안으로 들어가서 손짓을 하니, 나래는 노스님을 따라 법당 안으로 신을 벗고 들어섰다.
낡고 오래되긴 했지만, 제법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었고, 낡은 부처님 동상 하나가 가운데 모셔져 있었으며, 그 앞으로는 작은 초가 하나 밝혀져 있었다.
무엇보다 특이한 건, 그 불상 뒷편에 자리잡고 있는 병풍의 그림이었다.
사람인 듯, 털이 복실복실한 이들이 잔뜩 모여있는 풍경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사람같아 보이지 않았다.
"저 그림 속에 사람들은 왜 저렇게 털이 많아요?"
"아.. 쟤들은 도깨비입니다."
"도깨비요?"
"그렇습니다. 도깨비들이 저리 생겼지요. 가만, 여 있어보십시요. 그 똥개가 어딨나 보고 오겠습니다."
노스님이 그리 말하고는 법당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혼자 법당 안에 남아있으니 조금 무서울 법도 하지만, 어쩐지 아늑하고 조용한 것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만 같았다.
나래는 좌정을 하고 앉아있는 불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슨 마음에서인지 양손을 모아 합장하고는 두 눈을 감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냥 다 잊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다시 눈을 뜬 나래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무슨 소용 있겠냐마는... 아, 마지막에는, 뭐... 나무 관세음보살, 그런 거 해야 하나?"
혼잣말에 실없이 웃음 짓는데, 문득 눈앞이 흐려졌다.
"왜 이러지?"
의아해진 나래는 손으로 눈을 비볐다.
다시 뜬 흐릿한 시야 너머로, 앞에서 일렁거리는 불빛이 조금 달라 보였다.
"뭐지?"
고개를 갸웃하는데, 가만히 보니 불상도 조금 달라 보였다.
왠지 좀 허름해진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법당 안 풍경도 조금 달라 보였다.
전체적으로 조금 더 허름해 보이는 것이, 마치 폐가 같아 보였다.
눈이 침침해졌나, 몇 번 더 껌뻑거리고 있는데, 바깥에서 인기척 소리가 났다.
노스님이 돌아오시는가 보다 생각하는데 돌연, 밖에서 큰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웬 놈이냐?"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나래가 움찔하고 놀라는 사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엥? 네놈은 뭐냐?"
그렇게 묻고 있는 이를 보는 순간, 나래의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피부 위에 숨구멍이란 숨구멍은 모두 호흡을 멈춰버린 듯, 소름이 쫘악 돋아 올랐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비명을 질러버렸다.
"꺄악!"
나래의 비명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들어선 것은 그런 나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시끄럽구나, 인간 계집이 왜 여기 있는 것이냐?"
그것은 놀랍게도 2m가 족히 넘어보이는 기다란 키에 머리 위로 뿔 같은 것이 두 개가 돋아나 있는데, 뿔 자체가 피부로 덮여 있는 데다가, 주요 부위만 살짝 가린 옷을 입고 있었다.
"이리 나와!"
그것은 기다란 손을 뻗어 나래를 붙잡더니 강한 힘으로 잡아끌었다.
"으악! 으아악!"
나래는 경악한 표정으로 연신 비명만 질러댔고, 뿌리치려 애써봤지만 마치 고목나무같이 둔탁한 느낌에,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기겁하고 있던 나래는, 바깥으로 끌려 나왔다. 바깥은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더 놀라운 것은 나래가 나온 법당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고, 주위에 그 많던 사찰의 건물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인간인가?"
바깥에 있던, 온몸에 털이난 사내가 나래를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러게. 저 안에 있던데?"
"법당 안에? 어떻게 된 노릇이지?"
"몰라. 여하튼 대장에게 데려가 보면 알겠지."
나래가 가만히 보니, 바깥에 털북숭이 사내도, 도저히 사람이라고 하기엔 온몸이 털 투성이고, 코도 시뻘건 것이 사람이 아니었다.
그 순간, 나래는 정신을 잃고 혼절해 버렸다.
"어? 뭐야? 정신이 나갔네?"
둘은 그런 나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내 혼절한 나래를 어깨에 들쳐메고 그 법당을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