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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둘러싼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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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연랑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03
목차 다음화 ▶
읽기 시간 예측: 약 10.51분

2화 - #6


수많은 고서들 사이에서 세자가 무언가를 찾는듯 하면서도 무심한 눈길로 책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아무책이나 하나 꺼낸듯 책을 건성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세자 뒤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수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자마마께서 말씀하셨던 당시 당하관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만... 놀랍게도 당시 상황을 알고 있는 당하관은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책장을 넘기던 세자의 손길이 잠시 멈칫하였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한 표정과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았어... 당시 상황을 알고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내 주위에서 치워버리신게지. 일국의 국모를 참수하였다는 이야기는 내 들어본 적이 없다. 대역죄를 지었어도 사약을 내릴 것인데... 어머니는 참수를 당하셨어.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리 했는지, 당시는 내가 너무 어려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아야겠다."

세자의 목소리에 분노가 어려있었다.

책장을 넘기던 손길은 그대로 멈춰 버렸고, 세자는 가슴속 깊이 응어리진 답답함을 토해내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 교리(校理: 종5품)는 어떤 것 같은가?"

세자의 물음에 수현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과연 듣던 대로 올곧기 그지없습니다. 능력으로만 보자면 벌써 판교(判校: 정3품 당상관)가 되고도 남았을 사람인데, 대쪽 같은 성품 때문에, 윗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도 밖에 그대로 서 있는가?"

"예, 한치의 흔들림도 없습니다. 세자마마 한테까지 이럴 정도면, 보통 인사는 아닌 듯합니다."

수현의 말을 들은 세자는 책을 책장에 도로 꽂아놓고, 돌아서서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니, 그 앞에 꼿꼿이 서 있는 인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세자가 밖으로 나오자 조심스럽게 예를 갖추었고, 그런 그를 보며 세자가 물었다.

"그래, 아직도 불가한 것인가?"

세자의 물음에 그는 결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설령 이 자리에서 제 목을 베신다 한들, 그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어차피 훗날 때가 되면 결국 보게 될 것 아닌가?"

"그럼 그때 보십시오. 지금은 아니되옵니다. 이것은 추상같은 어명이기에, 임금의 명을 따르는 신하로써, 결코 불가한 일이옵니다."

"정 그리 말한다면 알았네."

세자는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 그를 스쳐 지나갔고, 그 뒤를 수현과 호위무사들이 서둘러 뒤따랐다.

세자 곁으로 바짝 다가선 수현이 물어왔다.

"어떻습니까?"

세자가 걸으며 눈길조차 주지 않은 체 대답했다.

"강직한 자이니, 믿을 수 있을 것 같네. 적당한 때에 자네가 만나보게."

"예, 마마."

막 바깥으로 나와 말 위로 오를 무렵이었다.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에 다들 어리둥절하여 멈춰있는데, 그 아이는 오자마자 넙죽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마... 마마, 소, 소인은...."

그 아이가 체 다 말을 하기도 전에 수현이 나서 물었다.

"솔아? 네가 예까지 어인 일이냐?"

수현이 묻는 말에 솔이가 고개를 살짝 들어 수현을 보더니, 울상이 되어 말했다.

"나리, 큰일 났습니다. 애기씨가.... 애기씨가..."

울먹거리는 솔이를 보며 수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애기씨라니? 연희 말이냐?"

연희라는 말에 세자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연희가 왜?"

수현이 재차 다그쳐 물으니, 솔이가 숨을 고르고는 대답했다.

"애기씨가, 어떤 사람들에게 잡혀 갔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수현과 세자가 크게 놀랐고, 수현이 무어라 되물으려는 찰나 세자가 나서 솔이에게 물었다.

"잡아가다니? 누가 잡아갔단 말이냐?"

세자의 물음에 솔이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그것이... 저도 잘은 모르겠으나, 주변 사람들 말로는 좌상 대감댁 사람들이라 하였습니다."

순간 세자와 수현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이내 말을 몰기 시작했다.

"이랴!"

세자가 먼저 앞서 달려나가자, 그 뒤를 수현과 호위무사들이 서둘러 뒤따랐다.



***



인영에 의해 좌상대감댁으로 잡혀 온 연희는, 밧줄로 몸이 묶인 체, 사랑채 앞마당에 앉혀졌다.

덩치가 산만한 장정 네 명이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고, 그 앞으로 입꼬리를 올린 인영과, 그녀 못지않게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보고 있는 여종이 한 명 서 있었다.

"네년이 세자마마의 은총에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것 같으니, 내 오늘 반상의 법도를 알려줄 것이다."

인영의 말에, 연희는 기죽지 않고 말했다.

"제 신분이 어떠한지 아직 알지 못한데, 어찌 밥상의 법도를 이야기하십니까."

인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웃기지 마라. 네깟년의 신분이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설령 네년이 양반이라 한들, 달라질 것은 없다. 여봐라, 가서 물동이를 가져오너라."

인영의 명에 하인들이 이내 물이 가득 찬 물동이 두 개를 가져오자, 연희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무슨 연유로 이러십니까?"

연희가 격앙된 목소리로 물어보지만, 인영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이유? 그딴 것은 필요 없다. 그저 내가 원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면 족하다는 말이다."

"이러실 수는 없는 겁니다. 이건..."

하지만 연희는 체 말을 다하지 못했다.

그녀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한 사내의 거친 손아귀가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를 붙잡고 거침없이 물 동아리 속으로 연희의 머리를 쳐박아 넣었다.

숨이 막혀 오고, 기도로 넘어오는 물에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힘껏 발버둥을 쳐도 손이 묶여있고, 힘센 사내 두 명이 붙잡고 있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꺼내라."

인영의 말에, 사내들은 물동아리 속에서 버둥거리는 연희의 머리잡아 당겼다.

"헉..헉!.."

그제야 숨을 쉴 수 있게 된 연희는 숨 끊어질 듯한 기침을 연달아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시원~ 하더냐? 이제 곧 날이 더 더워질 터인데, 내 이처럼 네게 아량을 베푸는구나."

인영의 비아냥 거림에, 연희는 아미를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고, 이해되지 않았다.

"눈빛을 보아하니, 아직 멀었구나."

인영이 고개를 까딱 거리자, 사내들은 다시 연희의 머리를 물통 속에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제법 숨을 들이마셔 그럭저럭 참을만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인영의 눈짓에, 한쪽에 서 있던 나이 든 사내가 손에 몽둥이를 들고 다가섰다.

이어 사정없이 연희의 등을 내리치니, 몽둥이가 살갗에 달라붙는 듯한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연희는 숨을 토해냈다.

참을 수 없는 아픔에 몸부림쳐 보지만, 그럴 때마다 물이 콧속으로, 입속으로 사정없이 들어왔다.

미칠 것 같은 고통이 머리끝까지 소용돌이쳤고, 연희의 발버둥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또다시 몽둥이가 그녀의 등을 사정없이 내려치니, 그녀의 코에서 피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물에 비릿한 핏물이 섞여 벌겋게 번지기 시작했다.

"꺼내보거라."

인영의 말에 몽둥이질이 멈춰지고, 사내들은 물통 속에서 연희의 머리를 꺼내 고개를 들게했다.

물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토악질을 해대는 연희의 두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정신을 차릴 수 없어 혼미한 상태로 휘청거렸다.

"물맛이 좋더냐? 호호,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이제 물맛을 제법 알겠구나."

연희는 고통속에 정신을 놓고 싶었지만, 여전히 풀리지않는 의문에 기침을 하면서도 기어코 다시 물었다.

"어, 어찌하여... 어찌하여 이러십... 니까..."

핏물과 콧물, 눈물이 뒤범벅이 되어 창백해진 연희의 얼굴을 보며 인영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감히 내 심기를 어지럽힌 죄를 내 단단히 물을 것이니..."

그때였다. 누군가 그녀에게 황급히 달려와 그녀에게 무언의 눈빛을 보내니, 인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귀를 내주었다.

그는 인영의 귀에 대고 귓속말로 소곤거리듯 말했고, 이내 인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

인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귓속말을 전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게 참말이냐?"

"참말이옵니다."

인영의 표정이 황망해지더니, 사내들을 향해 소리치듯 말했다.

"당장 그년을 끌고..."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높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자마마 납시오."

문이 거칠게 열리고, 발 빠르게 들어선 금군이 좌우로 도열해 섰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를 걸어오는 힘찬 걸음이 있었다.

차분한 듯, 하지만 미묘하게 서두르는 그 발걸음 위로, 검은 바탕에 금빛 휘장으로 장식된 옷을 입고, 전립 아래로 날카로운 눈빛이 번득거리는 세자의 얼굴이 있었다.

세자의 뒤로 위풍당당히 따라오는 수현도 있었다.

두 사람을 보며 모두가 뒤로 물러서며 바닥에 엎드리는 사이, 인영은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연...."

수현이 연희를 보고 놀라 달려가 보기도 전에, 어느새 세자가 먼저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느냐?"

세자는 걱정스러움에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고개를 든 연희의 얼굴을 보고, 세자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피투성이에 온몸이 엉망진창이 된 연희를 보니, 머리끝까지 화가 끓어올라 표정을 갈무리하기 힘들었다.

"...세...자...마마...?"

연희가 힘겹게 세자를 알아본 듯 말을 하다 말고, 돌연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연희야?"

세자가 놀라 그녀를 끌어안으며, 연희의 이름을 연달아 불렀다.

"연희야? 정신 차리거라. 연희야?"

세자가 고개를 돌려 수현을 바라보며 소리치듯 말했다.

"의관! 어서 의관을 부르거라."

"예, 마마."

수현이 후다닥 다시 밖으로 달려나가는 사이 세자가 자신의 옷소매로 조심스럽게 연희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세자는 연희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괜한 일에 끌어들여 고초를 겪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어머니 때처럼,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질 만큼, 지켜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어 가슴 깊숙이 끓어오르는 분노로 변해갔다.

서서히 세자의 싸늘하고 날 선 눈빛이 인영에게로 향하니, 인영은 세자의 그런 눈빛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마마....그, 그것이 아니오라..."

세자는 인영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은 체, 그대로 연희를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 한마디 없이 돌아서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 마마...."

뒤따르며 인영이 세자를 애타게 불러보지만, 세자는 대답은커녕 쳐다보지도 않은 체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를 호위하는 금군이 뒤따라 밖으로 나가고, 마치 그의 마음인양 거칠게 문을 닫아버렸다.

인영은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넋을 잃은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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