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5
하늘을 날던 두루미는 해가 서산으로 거의 질 무렵, 어느새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과 저물어가는 해가 만나며 붉은빛으로 수놓은 하늘과 바다는 하나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수면 위에 반짝 거리는 햇살이 보석처럼 빛났다.
저 멀리 수면 위를 헤엄치고 있는 거북이 한 마리가 보이자, 나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빠르게 날아가는 두루미의 속도에 점점 가까워지는 거북이의 그 크기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등껍질 위로는 숲과 산 같은 것들이 보였고, 다가갈수록 믿을 수 없는 그 크기에 절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저게 뭐예요?"
나래가 놀라 묻는 말에, 백하가 고개를 살짝 돌려 나래를 보았다.
"귀수산이라 한다. 오늘 밤은 저곳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구나."
옆에서 같이 날고 있는 닭 위의 고양이가 말했다.
"귀수산이라니... 정말 오랜만이군."
그러자 나래가 고양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따라오시는 건가요?"
고양이가 나래를 보더니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닭에게 물었다.
"이봐, 왜 따라가는 거야?"
"나래. 좋아."
닭의 대답에 고양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좋댄다. 이 미련한 닭대가리는 복잡한 생각을 못해."
"아... 네...."
나래는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이름을 모르는데..."
"나는 흑산장군(黑山將軍)이라 한다. 그냥 장군님이라고 불러도 되고..."
고양이의 대답에 닭이 말했다.
"아토다."
"아토?"
나래가 되묻는 말에, 고양이가 따지듯이 닭에게 말했다.
"남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알려주면 어떡해? 쟤가 뭐하는 앤 줄 알고?"
"아토다, 아토."
닭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재차 말하더니, 나래를 보며 이어 말했다.
"나는 초코."
그 말에 나래가 다시 풉하고 웃음을 지었다.
"초코요?"
"초코."
"초코님, 아토님. 일단은... 만나서 반가워요."
그러자 아토가 그런 나래를 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흥, 반갑기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어느덧 두루미는 귀수산의 등껍질 산의 꼭대기에 자리 잡은 사찰 같아 보이는 곳으로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내릴 거니까, 조심하거라."
백하의 말에 나래는 조심스럽게 그의 허리에서 손을 놓았다.
어쩐지 따듯했던 감촉에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그런 기분이 드는 자신을 부정하며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백하가 손을 내밀자, 나래는 냉큼 그의 손을 붙잡았고, 손을 잡자 몸이 둥실 떠오르며 땅 위로 살포시 내려설 수 있었다.
그 옆으로 아토와 초코가 내려서고, 땅에 내려서자마자 아토가 초코의 등에서 내려오더니 기지개를 켰다.
"젠장, 좁아서 엉덩이가 저리다고."
투덜거리는 아토를 보며 초코는 닭 특유에 딱딱 끊어지는 목 동작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빼. 돼지냐?"
"뭐라고? 이 닭대가리가..."
둘이 투닥거리는 사이, 백하는 집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나래는 얼른 백하의 뒤를 쫓아 걸었다.
"청의야."
백하가 친숙한 어조로 누군가를 부르자,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백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하도령 아니십니까?"
그는 백하를 단번에 알아보고 얼른 나와 공손히 인사를 해 보였다. 푸른색 옷을 입고 말쑥한 모습을 하고 있는 똘망똘망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오늘 하루 묵을 곳이 필요하여 그러니, 이곳에서 머물게 해 주겠느냐?"
백하의 물음에 청의가 고개 숙여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편히 쉬다 가시지요."
백하가 몸을 돌려 나래를 보았다.
"이쪽은 최나래라는 인간 아이다. 이 아이를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해, 모꼬지 마을로 가는 길이다."
그 말에 청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간의 아이요? 어찌 인간의 아이가 이곳까지 온 것입니까?"
청의의 물음에 백하는 의문스러운 표정과 함께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청의는 다시 나래를 보며 말했다.
"모꼬지 마을까지는 꽤 먼길이니, 귀수산에게 일러 그쪽으로 가게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나래는 어쩐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청의를 보며 깊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쪽은 네 친구들이냐?"
청의가 초코와 아토를 보며 묻자, 나래가 "아..." 하며 뭐라 대답하려는 사이, 초코가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맞다."
그러자 뒤에 있던 아토가 따라나서며 투덜거렸다.
"언제부터 친구야? 만난 지 하루도 안 지났어."
"친구다."
청의는 그런 둘을 보며 빙그레 웃더니 나래를 보며 말했다.
"사랑채를 정리해 줄 테니, 그 방을 쓰도록 하거라. 저 아이들은 사랑채 앞에 머물게 하면 될 듯 하구나. 불을 밝혀 둘테니 방에서 쉬도록 해라."
나래는 다시 한번 청의에게 몸을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아이들 같은 용모에 존칭을 쓰는 것이 아직 좀 어색하긴 했지만, 당장 자신의 모습 또한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고, 딱 봐도 평범하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의 행동에, 절로 조심스러움이 생겨났다.
"허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청의가 양해를 구하고 뒤쪽 사랑채로 향하는 사이, 해는 완전히 저물어 푸르스름한 저녁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불을 밝히지 않아 금세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나래가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그런 나래를 본 백하가 양손을 모아 입김을 후~ 하고 불었다.
그러자 그의 손 안에서 빛이 생겨나더니, 양손을 펼치자 빛이 날아올랐다.
놀랍게도 그의 손 안에서 십여 마리의 반딧불이 날아오른 것이다.
"우와?"
마법 같은 행동에 나래가 감탄을 하며 놀라 해 하는데, 놀라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십여 마리의 반딧불이 내는 불의 밝기가 도심의 가로등만큼이나 밝아서, 이곳 주위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었다.
"신기해요."
나래의 감격에 겨운 목소리에 백하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듯하여, 반딧불이를 불렀다. 또 필요한 것이 있으면 편히 말을 하거라."
나래는 백하의 얼굴을 고마운 마음 가득 담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름이... 백하... 신 건가요?"
조심스럽게 묻는 나래를 보며 백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백하라 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토가 궁시렁 거렸다.
"뭐야? 여태 이름도 제대로 몰랐던 거야? 쯧쯧..."
궁시렁 거리는 아토를 보며 나래는 미안하다는 듯 허리 숙여 꾸벅 인사를 해 보였다.
"죄송합니다."
"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
아토의 핀잔에, 나래는 백하를 보며 다시 꾸벅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백하는 그런 나래를 보며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다. 개의치 말거라."
나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소심하게 물었다.
"저기...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나래의 물음에, 백하는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래를 바라보았다.
"나이? 내 나이 말이냐?"
"예.... 아직..."
나래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데, 백하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 내 나이가 300살이 체 안되었다."
나래는 백하의 대답에 그만 할 말을 잃은 표정이 되었다.
옆에 있던 아토가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하아~ 아직 어리시구만. 백하도령이 이렇게 어린 줄 몰랐네."
"어리다."
그 말에 나래는 아토를 보며 물었다.
"그럼... 아토님은 나이가?"
아토는 나래를 보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나? 몰라 안샌지 오래됐어. 한 500까지는 샜던 거 같은데... 초코, 네놈 나이는 800이 넘었지?"
"넘었다."
나래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나래는 왜 반말을 하느냐고 물으려다가 침과 함께 질문을 꿀꺽 삼켜버렸다.
황망한 표정이 되어버린 나래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사랑채로 갔던 청의가 돌아왔다.
"방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가서 쉬시지요."
청의의 말에 백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래를 보며 말했다.
"가자."
백하가 앞장서 걸으니, 나래와 아토, 초코가 그 뒤를 따랐다.
따라가며 아토가 나래에게 말을 건네었다.
"근데, 나이는 왜 물어본 거야?"
아토의 질문에 나래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예? 아... 그게... 전 저보다 어린 줄 알고..."
아토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뭐가 중요해? 나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아토의 핀잔에 나래는 왠지 모르게 가슴속에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번번이 알게 모르게 나이 앞에 좌절했던 경험이 있었다.
이젠 늦었다고, 너무 늦어버렸다고, 여태 뭐했냐고, 그런 질문을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져왔다.
그런데 설마 고양이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뭔지 모를 묘한 기분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던 나래는 서둘러 백하의 뒤를 쫓아 사랑채로 향했다.
방문을 열어본 백하는 안쪽을 살피더니 나래를 보며 말했다.
"네가 이 사랑채를 쓰거라. 안사랑채를 내가 쓰도록 하마."
백하의 말에 나래는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하고는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한가운데 초가 밝혀져 있고 황토색 빛깔이 곱게 둘러진 아득한 방이었다.
"이른 아침이 되면, 내가 찾아올 것이니. 그때까지는 푹 쉬거라."
백하가 말을 마치고 돌아가려 하자, 나래가 얼른 말했다.
"가...감사합니다."
나래의 인사에 백하가 나래를 돌아보고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쩜 저리도 맑고 순수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쉬거라."
그 말을 남기고 백하는 건너편에 있는 안사랑채로 향했고, 아토와 초코는 나래의 방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 안으로 들어오실래요?"
나래는 밤새 문밖에 있을 그들이 걱정 되어 묻자, 아토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 청의동자한테 혼이 날 텐데... 신경 쓰지 말고 자라. 우리는 바깥이 더 편해."
초코가 고개를 까딱 거리며 말했다.
"밖이 좋아."
나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해보인 뒤 방문을 닫았다.
아늑한 방안에 있자니, 조금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지금의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일까? 어쩌다가 여기 있게 된 것일까?
묘한 흥분감에 가슴이 두근거리며, 어쩐지 지금의 상황이 아주 싫지만은 않은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과 저물어가는 해가 만나며 붉은빛으로 수놓은 하늘과 바다는 하나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수면 위에 반짝 거리는 햇살이 보석처럼 빛났다.
저 멀리 수면 위를 헤엄치고 있는 거북이 한 마리가 보이자, 나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빠르게 날아가는 두루미의 속도에 점점 가까워지는 거북이의 그 크기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등껍질 위로는 숲과 산 같은 것들이 보였고, 다가갈수록 믿을 수 없는 그 크기에 절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저게 뭐예요?"
나래가 놀라 묻는 말에, 백하가 고개를 살짝 돌려 나래를 보았다.
"귀수산이라 한다. 오늘 밤은 저곳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구나."
옆에서 같이 날고 있는 닭 위의 고양이가 말했다.
"귀수산이라니... 정말 오랜만이군."
그러자 나래가 고양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따라오시는 건가요?"
고양이가 나래를 보더니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닭에게 물었다.
"이봐, 왜 따라가는 거야?"
"나래. 좋아."
닭의 대답에 고양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좋댄다. 이 미련한 닭대가리는 복잡한 생각을 못해."
"아... 네...."
나래는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이름을 모르는데..."
"나는 흑산장군(黑山將軍)이라 한다. 그냥 장군님이라고 불러도 되고..."
고양이의 대답에 닭이 말했다.
"아토다."
"아토?"
나래가 되묻는 말에, 고양이가 따지듯이 닭에게 말했다.
"남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알려주면 어떡해? 쟤가 뭐하는 앤 줄 알고?"
"아토다, 아토."
닭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재차 말하더니, 나래를 보며 이어 말했다.
"나는 초코."
그 말에 나래가 다시 풉하고 웃음을 지었다.
"초코요?"
"초코."
"초코님, 아토님. 일단은... 만나서 반가워요."
그러자 아토가 그런 나래를 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흥, 반갑기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어느덧 두루미는 귀수산의 등껍질 산의 꼭대기에 자리 잡은 사찰 같아 보이는 곳으로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내릴 거니까, 조심하거라."
백하의 말에 나래는 조심스럽게 그의 허리에서 손을 놓았다.
어쩐지 따듯했던 감촉에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그런 기분이 드는 자신을 부정하며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백하가 손을 내밀자, 나래는 냉큼 그의 손을 붙잡았고, 손을 잡자 몸이 둥실 떠오르며 땅 위로 살포시 내려설 수 있었다.
그 옆으로 아토와 초코가 내려서고, 땅에 내려서자마자 아토가 초코의 등에서 내려오더니 기지개를 켰다.
"젠장, 좁아서 엉덩이가 저리다고."
투덜거리는 아토를 보며 초코는 닭 특유에 딱딱 끊어지는 목 동작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빼. 돼지냐?"
"뭐라고? 이 닭대가리가..."
둘이 투닥거리는 사이, 백하는 집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나래는 얼른 백하의 뒤를 쫓아 걸었다.
"청의야."
백하가 친숙한 어조로 누군가를 부르자,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백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하도령 아니십니까?"
그는 백하를 단번에 알아보고 얼른 나와 공손히 인사를 해 보였다. 푸른색 옷을 입고 말쑥한 모습을 하고 있는 똘망똘망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오늘 하루 묵을 곳이 필요하여 그러니, 이곳에서 머물게 해 주겠느냐?"
백하의 물음에 청의가 고개 숙여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편히 쉬다 가시지요."
백하가 몸을 돌려 나래를 보았다.
"이쪽은 최나래라는 인간 아이다. 이 아이를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해, 모꼬지 마을로 가는 길이다."
그 말에 청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간의 아이요? 어찌 인간의 아이가 이곳까지 온 것입니까?"
청의의 물음에 백하는 의문스러운 표정과 함께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청의는 다시 나래를 보며 말했다.
"모꼬지 마을까지는 꽤 먼길이니, 귀수산에게 일러 그쪽으로 가게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나래는 어쩐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청의를 보며 깊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쪽은 네 친구들이냐?"
청의가 초코와 아토를 보며 묻자, 나래가 "아..." 하며 뭐라 대답하려는 사이, 초코가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맞다."
그러자 뒤에 있던 아토가 따라나서며 투덜거렸다.
"언제부터 친구야? 만난 지 하루도 안 지났어."
"친구다."
청의는 그런 둘을 보며 빙그레 웃더니 나래를 보며 말했다.
"사랑채를 정리해 줄 테니, 그 방을 쓰도록 하거라. 저 아이들은 사랑채 앞에 머물게 하면 될 듯 하구나. 불을 밝혀 둘테니 방에서 쉬도록 해라."
나래는 다시 한번 청의에게 몸을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아이들 같은 용모에 존칭을 쓰는 것이 아직 좀 어색하긴 했지만, 당장 자신의 모습 또한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고, 딱 봐도 평범하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의 행동에, 절로 조심스러움이 생겨났다.
"허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청의가 양해를 구하고 뒤쪽 사랑채로 향하는 사이, 해는 완전히 저물어 푸르스름한 저녁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불을 밝히지 않아 금세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나래가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그런 나래를 본 백하가 양손을 모아 입김을 후~ 하고 불었다.
그러자 그의 손 안에서 빛이 생겨나더니, 양손을 펼치자 빛이 날아올랐다.
놀랍게도 그의 손 안에서 십여 마리의 반딧불이 날아오른 것이다.
"우와?"
마법 같은 행동에 나래가 감탄을 하며 놀라 해 하는데, 놀라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십여 마리의 반딧불이 내는 불의 밝기가 도심의 가로등만큼이나 밝아서, 이곳 주위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었다.
"신기해요."
나래의 감격에 겨운 목소리에 백하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듯하여, 반딧불이를 불렀다. 또 필요한 것이 있으면 편히 말을 하거라."
나래는 백하의 얼굴을 고마운 마음 가득 담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름이... 백하... 신 건가요?"
조심스럽게 묻는 나래를 보며 백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백하라 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토가 궁시렁 거렸다.
"뭐야? 여태 이름도 제대로 몰랐던 거야? 쯧쯧..."
궁시렁 거리는 아토를 보며 나래는 미안하다는 듯 허리 숙여 꾸벅 인사를 해 보였다.
"죄송합니다."
"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
아토의 핀잔에, 나래는 백하를 보며 다시 꾸벅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백하는 그런 나래를 보며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다. 개의치 말거라."
나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소심하게 물었다.
"저기...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나래의 물음에, 백하는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래를 바라보았다.
"나이? 내 나이 말이냐?"
"예.... 아직..."
나래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데, 백하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 내 나이가 300살이 체 안되었다."
나래는 백하의 대답에 그만 할 말을 잃은 표정이 되었다.
옆에 있던 아토가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하아~ 아직 어리시구만. 백하도령이 이렇게 어린 줄 몰랐네."
"어리다."
그 말에 나래는 아토를 보며 물었다.
"그럼... 아토님은 나이가?"
아토는 나래를 보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나? 몰라 안샌지 오래됐어. 한 500까지는 샜던 거 같은데... 초코, 네놈 나이는 800이 넘었지?"
"넘었다."
나래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나래는 왜 반말을 하느냐고 물으려다가 침과 함께 질문을 꿀꺽 삼켜버렸다.
황망한 표정이 되어버린 나래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사랑채로 갔던 청의가 돌아왔다.
"방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가서 쉬시지요."
청의의 말에 백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래를 보며 말했다.
"가자."
백하가 앞장서 걸으니, 나래와 아토, 초코가 그 뒤를 따랐다.
따라가며 아토가 나래에게 말을 건네었다.
"근데, 나이는 왜 물어본 거야?"
아토의 질문에 나래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예? 아... 그게... 전 저보다 어린 줄 알고..."
아토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뭐가 중요해? 나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아토의 핀잔에 나래는 왠지 모르게 가슴속에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번번이 알게 모르게 나이 앞에 좌절했던 경험이 있었다.
이젠 늦었다고, 너무 늦어버렸다고, 여태 뭐했냐고, 그런 질문을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져왔다.
그런데 설마 고양이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뭔지 모를 묘한 기분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던 나래는 서둘러 백하의 뒤를 쫓아 사랑채로 향했다.
방문을 열어본 백하는 안쪽을 살피더니 나래를 보며 말했다.
"네가 이 사랑채를 쓰거라. 안사랑채를 내가 쓰도록 하마."
백하의 말에 나래는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하고는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한가운데 초가 밝혀져 있고 황토색 빛깔이 곱게 둘러진 아득한 방이었다.
"이른 아침이 되면, 내가 찾아올 것이니. 그때까지는 푹 쉬거라."
백하가 말을 마치고 돌아가려 하자, 나래가 얼른 말했다.
"가...감사합니다."
나래의 인사에 백하가 나래를 돌아보고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쩜 저리도 맑고 순수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쉬거라."
그 말을 남기고 백하는 건너편에 있는 안사랑채로 향했고, 아토와 초코는 나래의 방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 안으로 들어오실래요?"
나래는 밤새 문밖에 있을 그들이 걱정 되어 묻자, 아토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 청의동자한테 혼이 날 텐데... 신경 쓰지 말고 자라. 우리는 바깥이 더 편해."
초코가 고개를 까딱 거리며 말했다.
"밖이 좋아."
나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해보인 뒤 방문을 닫았다.
아늑한 방안에 있자니, 조금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지금의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일까? 어쩌다가 여기 있게 된 것일까?
묘한 흥분감에 가슴이 두근거리며, 어쩐지 지금의 상황이 아주 싫지만은 않은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