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1
자상한 미소였다.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을 가진 얼굴이었다.
그렇게 환한 미소로 자애롭게 웃고 있었다.
그늘이라고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옥안이었다. 그저 그렇게 환하게 빛나고 있는...
"이것이 정녕 원자가 그린 것입니까? 어미는 이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별것 아닌 그림에, 무슨 대단한 그림이라도 그린 양, 그렇게 칭찬의 말을 해주니, 세자, 아니 그때의 원자는 기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품에 안기고 싶었다.
너무도 그리웠던 그 품으로...
"저하, 아니되옵니다."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저 멀리서 칼을 뽑아 든 수현과 도총관 홍여립이 달려오고 있었다.
세자는 저들이 왜 저러는지 몰라 의아해하며 당혹감에 물든 시선을 어머니에게 보냈다.
"어마마마, 저들이...어찌..."
그런데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중전은 싸늘하고 파리한 표정으로 세자를 노려보며 높이 치켜든 단도를 당장이라도 내리꽂을 것만 같았다.
"어마..."
놀란 세자가 뒷걸음질 치는 순간, 중전의 칼이 세자의 가슴으로 파고들듯 내리 꽂혔다.
"악!"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 난 세자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의 침소에 누워 잠이 들었던 세자였다.
분명 처음에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꿈이었건만, 그 끝은 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째서...
밖에서 놀란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무슨 일이옵니까?"
아마도 비명소리를 듣을 듯 당장이라도 방안으로 들어와 세자의 상태를 확인하고픈 조바심이 느껴졌다.
"아니다. 그저 악몽을 꾸었을 뿐이다."
세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매일 반복되던 꿈의 내용이 바뀌었다.
행복했던 시절의 어머니 모습을 본 것 같아 좋았는데, 그 마지막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어째서 그런 꿈을 꾼 것일까.
무겁고도 복잡한 얼굴로 침상에 앉은 체, 그렇게 한참을 생각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
며칠 사이, 몸이 많이 회복된 연희는 이제 큰 무리 없이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이따금씩 등에서 통증이 느껴질 때가 있긴 했지만, 참을만했고, 이 정도면 생활하는데 크게 무리가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몸이 나아져 잠시나마 걸으며 산책이라도 하고싶었지만 이곳은 함부로 돌아다닐 수도 없는 궁이었다.
이 궁궐 안에 구조도 모르거니와, 분별없이 돌아다니다 임금이라도 만나면 혹여 더 큰 실수를 할지도 모를일이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죄진것도 없건만 괜히 놀란 연희는 얼른 다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했듯이, 오늘도 정오 무렵에 세자가 찾아왔다.
문이 열리고 곁으로 다가온 세자는 뒤따라온 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의관을 불러오고, 다들 나가 있거라."
"예, 저하"
모두가 나가자, 세자가 조심스럽게 연희 곁에 앉았다.
사실 어제도, 그제도, 잠에서 깬 연희였지만, 일어나지 못하게 만류하는 세자 때문에, 민망함과 송구한 마음에 차라리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세자의 시선이, 얼굴을 살살 간지럽히는 것만 같았다.
깨어 있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자는 척하던 연희는 필사적으로 숨을 고르며 태평하고 평온한 얼굴을 하려 노력했다.
괜스레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 것이, 심장소리 때문에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
문득 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지막하고, 부드러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게 느껴지는 음성이였다.
"내 너 하나를 지키는 것도, 이리 버겁구나."
무슨 의미의 독백이었을까... 세자의 말을 들은 연희는 몸을 감싸고 있던 긴장이 풀어지고, 두근거리던 가슴이 차츰 진정되었다.
'고맙습니다. 저하.'
연희는 마음속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자신의 신분도 확인되지 않았건만, 자신을 지켜주려 애쓰는 세자에게 진정으로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저 네게 궁금한 것이 있어 물어보려 했을 뿐이었다. 그저 네가 기억하지 못하기에, 기억을 되찾아 묻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의 그런 행동이, 네게 이런 아픔이 될 것이라, 생각지 못하였다."
씁쓸한 세자의 독백을 들으며, 연희는 가슴이 아려왔다.
'괜찮습니다. 저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말하고 싶었다. 당장 일어나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너 하나쯤 지키지 못하겠냐는 나의 아집이, 하마터면 너를 죽음으로 내몰 뻔했구나. 그저 한 사람, 지키지도 못하는 세자 따위는 내던져 버리고 싶구나."
연희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막 눈을 뜨려는 찰나, 바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의관 들었사옵니다."
"들라하라."
연희는 도로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안으로 들어선 의관은 세자의 뒤편에 섰다.
"어찌하여 연희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세자의 무거운 질책에, 의관이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것이... 이제는 많이 회복되었사온데..."
연희는 의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네가 정성으로 환자를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묻는 것이네."
"저, 저하...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부, 분명 이제는 거의 나아가고 있었사옵니다."
"그런데 어찌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의관은 난처한 표정으로 차마 대답하지 못한 체, 우물 거리고 있었다.
"저, 저하... 송구하옵니다. 저하, "
세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결 온화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세세히 살펴주시게, 내 당부하겠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저하. 더욱 살피고 살피겠나이다."
"고맙네."
세자가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희는 괜스레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속이 상했지만, 당장은 일어날 수도 없었다.
모두가 나갔는지, 적막감이 느껴졌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과연 모두가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눈을 뜬 연희는 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세자가 했던 독백을 떠올리며, 궁금증이 생겨났다.
세자라면, 이 나라 임금의 아들이자, 다음 왕이 될 사람이다.
그 정도의 사람이라면, 못할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한 사람 지키기가 힘들다니... 그건 무슨 말이었을까...
무슨 일인지, 어떤 속사정이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세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내까짓게... 무슨 도움이 될까..."
연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무력한 한숨을 내쉬었다.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포졸 서너 명이 넝마가 된 피투성이의 누군가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왔다.
한쪽에 쌓여있는 시체더미에 피투성이가 된 이를 던져 놓았고, 뒤따라 나온 형방이 눈살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형방 나리, 이러 다가 마을에 사람이 남아나질 않겠습니다."
한 포졸의 말에 형방이 투덜거리듯 대답했다.
"아, 어쩌겠어. 나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나. 유향소에 알렸으니, 상소는 올라갔을 게야. 좀만 기다려봐."
형방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뭔 비가 이렇게 끈적끈적하게 내려쌌냐? 확 시원하게 내려버리지. 쯧..."
형방은 혀를 끌끌 거리며 옷에 묻은 빗물을 탁탁 털어내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형방의 모습을 은밀히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잠시 후 소리죽인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떠나 멀찍한 곳에 묶어둔 말을 향해 걸었다.
말위에 올라 한참을 달려, 정오가 지날 무렵이 되어서야 한 주막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는 말을 우리에 묶어둔 뒤, 주막 안으로 들어서서 홀로 앉아 술잔을 비우고 있는 남자의 맞은편에 태연히 자리 잡고 마주 앉았다.
"왔느냐? 수고했다."
앉아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수현이었다.
"예, 부총관 나리. 말씀하신 대로 요 며칠 현감에 대해 세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수현은 자기 앞에 놓인 잔에 술을 채운 뒤, 수하에게 내밀어 보였다.
"숨이라도 돌리고 이야기하게."
"예, 감사합니다."
수하는 술잔을 들어, 고개를 돌려 마신 뒤,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확실히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죄를 지은 자에게 까지 가혹한 형벌을 가해 죽이고 있었습니다. 어찌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지, 관청 옆에 시체를 쌓아두는 장소가 따로 있을 정도였습니다."
수현은 아미를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뿐만 아니라 직접 칼 들고 죄인을 베어 죽이는 일도 빈번하였습니다. 마을 내 양반들까지도 이런저런 구실로 이미 여럿이 죽은 상태라, 유향소에서도 두려워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상소는? 상소는 올렸다 하더냐?"
"확인해보니, 상소는 이미 여러 차례 올라간 모양입니다. 지금쯤이면, 빈청에서도 알고 있을 듯합니다."
수현은 수심이 깊어졌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래.... 그리고 다른 것은?"
"들어보니 처음부터 그런 자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얼마 전부터 점점 과격해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마치 미친 사람 같다고들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사교도 무리들이 마을 사람들을 현혹하였던 모양인데, 혹자는 그들이 현감에게 저주를 건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저주라... "
수현이 고심에 빠져 있을 때, 막 주막에 들어서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알았다. 수고 많았으니, 어서 가서 쉬거라."
"예, 나리."
수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가자, 막 들어선 이가 수하를 힐끔 보고는 혼연히 와서 수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셨는가?"
수현이 반가운 얼굴로 맞으니, 그가 싱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왔지요."
수현은 의식하지 않은 듯 여전히 반가운 얼굴로 되물었다.
"시험은? 풀어왔는가?"
그는 바로 조세춘이 었다.
"풀었으니까 온 것 아니겠수? 그 양반... 이름이 김문익이라고, 전 병조참판을 지냈던 김상호 대감의 둘째 아들이더이다. 뭐 특출 난 것도 없고, 공부도 그리 잘한 것도 아니고, 성격도 유순한 데다가, 겁이 많아 그럭저럭 관직에 올라 고만 고만하게 현감 일이나 하면서 지내려고 했었던 모양이오."
수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술병을 들고 술을 따라주려던 손짓이 멈췄다.
"김상호 대감이라면... 예전에 있었던 황인설 대감의 측근이 아닌가?"
"그랬죠. 좌상대감과 정치싸움에서 패해 좌천되어 사약이 내려졌던 바로 그 인물이지요. 김상호 대감은 어떤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니나, 세가 밀렸으니... 좌천되었다가 하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 모양입니다."
수현은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성격이 유순하고 겁이 많은데, 죄인들을 직접 칼로 베어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인단 말이지."
수현의 말에 조세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뭔 말이요? 누가? 김문익이?"
수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네. 현감 일을 하면서, 미미한 죄에도 가혹한 형벌을 물어 때려죽이니, 그 시체가 관청 옆에 수북이 쌓여있다 들었습니다."
조세춘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에헤이, 그럴 리가... 나도 예전에 한번 본적 있는 인물인데... 결코 그럴만한 위인이 못 되는 양반이오. 딱 봐도 겁 많게 생긴 것이... 순하디 순한 양반이라 이 말이오."
수현은 절로 탄식이 나왔다.
"그렇단 말인가... 그런 사람이 그렇게 변했다...."
"에헤이... 아니라니까...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네."
조세춘은 따라주려다 만 수현의 손에서 술병을 뺏듯이 가져가 술잔에 따라 마셨고, 수현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으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환한 미소로 자애롭게 웃고 있었다.
그늘이라고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옥안이었다. 그저 그렇게 환하게 빛나고 있는...
"이것이 정녕 원자가 그린 것입니까? 어미는 이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별것 아닌 그림에, 무슨 대단한 그림이라도 그린 양, 그렇게 칭찬의 말을 해주니, 세자, 아니 그때의 원자는 기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품에 안기고 싶었다.
너무도 그리웠던 그 품으로...
"저하, 아니되옵니다."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저 멀리서 칼을 뽑아 든 수현과 도총관 홍여립이 달려오고 있었다.
세자는 저들이 왜 저러는지 몰라 의아해하며 당혹감에 물든 시선을 어머니에게 보냈다.
"어마마마, 저들이...어찌..."
그런데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중전은 싸늘하고 파리한 표정으로 세자를 노려보며 높이 치켜든 단도를 당장이라도 내리꽂을 것만 같았다.
"어마..."
놀란 세자가 뒷걸음질 치는 순간, 중전의 칼이 세자의 가슴으로 파고들듯 내리 꽂혔다.
"악!"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 난 세자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의 침소에 누워 잠이 들었던 세자였다.
분명 처음에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꿈이었건만, 그 끝은 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째서...
밖에서 놀란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무슨 일이옵니까?"
아마도 비명소리를 듣을 듯 당장이라도 방안으로 들어와 세자의 상태를 확인하고픈 조바심이 느껴졌다.
"아니다. 그저 악몽을 꾸었을 뿐이다."
세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매일 반복되던 꿈의 내용이 바뀌었다.
행복했던 시절의 어머니 모습을 본 것 같아 좋았는데, 그 마지막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어째서 그런 꿈을 꾼 것일까.
무겁고도 복잡한 얼굴로 침상에 앉은 체, 그렇게 한참을 생각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
며칠 사이, 몸이 많이 회복된 연희는 이제 큰 무리 없이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이따금씩 등에서 통증이 느껴질 때가 있긴 했지만, 참을만했고, 이 정도면 생활하는데 크게 무리가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몸이 나아져 잠시나마 걸으며 산책이라도 하고싶었지만 이곳은 함부로 돌아다닐 수도 없는 궁이었다.
이 궁궐 안에 구조도 모르거니와, 분별없이 돌아다니다 임금이라도 만나면 혹여 더 큰 실수를 할지도 모를일이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죄진것도 없건만 괜히 놀란 연희는 얼른 다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했듯이, 오늘도 정오 무렵에 세자가 찾아왔다.
문이 열리고 곁으로 다가온 세자는 뒤따라온 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의관을 불러오고, 다들 나가 있거라."
"예, 저하"
모두가 나가자, 세자가 조심스럽게 연희 곁에 앉았다.
사실 어제도, 그제도, 잠에서 깬 연희였지만, 일어나지 못하게 만류하는 세자 때문에, 민망함과 송구한 마음에 차라리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세자의 시선이, 얼굴을 살살 간지럽히는 것만 같았다.
깨어 있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자는 척하던 연희는 필사적으로 숨을 고르며 태평하고 평온한 얼굴을 하려 노력했다.
괜스레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 것이, 심장소리 때문에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
문득 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지막하고, 부드러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게 느껴지는 음성이였다.
"내 너 하나를 지키는 것도, 이리 버겁구나."
무슨 의미의 독백이었을까... 세자의 말을 들은 연희는 몸을 감싸고 있던 긴장이 풀어지고, 두근거리던 가슴이 차츰 진정되었다.
'고맙습니다. 저하.'
연희는 마음속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자신의 신분도 확인되지 않았건만, 자신을 지켜주려 애쓰는 세자에게 진정으로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저 네게 궁금한 것이 있어 물어보려 했을 뿐이었다. 그저 네가 기억하지 못하기에, 기억을 되찾아 묻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의 그런 행동이, 네게 이런 아픔이 될 것이라, 생각지 못하였다."
씁쓸한 세자의 독백을 들으며, 연희는 가슴이 아려왔다.
'괜찮습니다. 저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말하고 싶었다. 당장 일어나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너 하나쯤 지키지 못하겠냐는 나의 아집이, 하마터면 너를 죽음으로 내몰 뻔했구나. 그저 한 사람, 지키지도 못하는 세자 따위는 내던져 버리고 싶구나."
연희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막 눈을 뜨려는 찰나, 바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의관 들었사옵니다."
"들라하라."
연희는 도로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안으로 들어선 의관은 세자의 뒤편에 섰다.
"어찌하여 연희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세자의 무거운 질책에, 의관이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것이... 이제는 많이 회복되었사온데..."
연희는 의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네가 정성으로 환자를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묻는 것이네."
"저, 저하...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부, 분명 이제는 거의 나아가고 있었사옵니다."
"그런데 어찌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의관은 난처한 표정으로 차마 대답하지 못한 체, 우물 거리고 있었다.
"저, 저하... 송구하옵니다. 저하, "
세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결 온화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세세히 살펴주시게, 내 당부하겠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저하. 더욱 살피고 살피겠나이다."
"고맙네."
세자가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희는 괜스레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속이 상했지만, 당장은 일어날 수도 없었다.
모두가 나갔는지, 적막감이 느껴졌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과연 모두가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눈을 뜬 연희는 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세자가 했던 독백을 떠올리며, 궁금증이 생겨났다.
세자라면, 이 나라 임금의 아들이자, 다음 왕이 될 사람이다.
그 정도의 사람이라면, 못할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한 사람 지키기가 힘들다니... 그건 무슨 말이었을까...
무슨 일인지, 어떤 속사정이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세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내까짓게... 무슨 도움이 될까..."
연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무력한 한숨을 내쉬었다.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포졸 서너 명이 넝마가 된 피투성이의 누군가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왔다.
한쪽에 쌓여있는 시체더미에 피투성이가 된 이를 던져 놓았고, 뒤따라 나온 형방이 눈살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형방 나리, 이러 다가 마을에 사람이 남아나질 않겠습니다."
한 포졸의 말에 형방이 투덜거리듯 대답했다.
"아, 어쩌겠어. 나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나. 유향소에 알렸으니, 상소는 올라갔을 게야. 좀만 기다려봐."
형방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뭔 비가 이렇게 끈적끈적하게 내려쌌냐? 확 시원하게 내려버리지. 쯧..."
형방은 혀를 끌끌 거리며 옷에 묻은 빗물을 탁탁 털어내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형방의 모습을 은밀히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잠시 후 소리죽인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떠나 멀찍한 곳에 묶어둔 말을 향해 걸었다.
말위에 올라 한참을 달려, 정오가 지날 무렵이 되어서야 한 주막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는 말을 우리에 묶어둔 뒤, 주막 안으로 들어서서 홀로 앉아 술잔을 비우고 있는 남자의 맞은편에 태연히 자리 잡고 마주 앉았다.
"왔느냐? 수고했다."
앉아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수현이었다.
"예, 부총관 나리. 말씀하신 대로 요 며칠 현감에 대해 세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수현은 자기 앞에 놓인 잔에 술을 채운 뒤, 수하에게 내밀어 보였다.
"숨이라도 돌리고 이야기하게."
"예, 감사합니다."
수하는 술잔을 들어, 고개를 돌려 마신 뒤,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확실히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죄를 지은 자에게 까지 가혹한 형벌을 가해 죽이고 있었습니다. 어찌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지, 관청 옆에 시체를 쌓아두는 장소가 따로 있을 정도였습니다."
수현은 아미를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뿐만 아니라 직접 칼 들고 죄인을 베어 죽이는 일도 빈번하였습니다. 마을 내 양반들까지도 이런저런 구실로 이미 여럿이 죽은 상태라, 유향소에서도 두려워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상소는? 상소는 올렸다 하더냐?"
"확인해보니, 상소는 이미 여러 차례 올라간 모양입니다. 지금쯤이면, 빈청에서도 알고 있을 듯합니다."
수현은 수심이 깊어졌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래.... 그리고 다른 것은?"
"들어보니 처음부터 그런 자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얼마 전부터 점점 과격해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마치 미친 사람 같다고들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사교도 무리들이 마을 사람들을 현혹하였던 모양인데, 혹자는 그들이 현감에게 저주를 건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저주라... "
수현이 고심에 빠져 있을 때, 막 주막에 들어서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알았다. 수고 많았으니, 어서 가서 쉬거라."
"예, 나리."
수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가자, 막 들어선 이가 수하를 힐끔 보고는 혼연히 와서 수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셨는가?"
수현이 반가운 얼굴로 맞으니, 그가 싱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왔지요."
수현은 의식하지 않은 듯 여전히 반가운 얼굴로 되물었다.
"시험은? 풀어왔는가?"
그는 바로 조세춘이 었다.
"풀었으니까 온 것 아니겠수? 그 양반... 이름이 김문익이라고, 전 병조참판을 지냈던 김상호 대감의 둘째 아들이더이다. 뭐 특출 난 것도 없고, 공부도 그리 잘한 것도 아니고, 성격도 유순한 데다가, 겁이 많아 그럭저럭 관직에 올라 고만 고만하게 현감 일이나 하면서 지내려고 했었던 모양이오."
수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술병을 들고 술을 따라주려던 손짓이 멈췄다.
"김상호 대감이라면... 예전에 있었던 황인설 대감의 측근이 아닌가?"
"그랬죠. 좌상대감과 정치싸움에서 패해 좌천되어 사약이 내려졌던 바로 그 인물이지요. 김상호 대감은 어떤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니나, 세가 밀렸으니... 좌천되었다가 하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 모양입니다."
수현은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성격이 유순하고 겁이 많은데, 죄인들을 직접 칼로 베어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인단 말이지."
수현의 말에 조세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뭔 말이요? 누가? 김문익이?"
수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네. 현감 일을 하면서, 미미한 죄에도 가혹한 형벌을 물어 때려죽이니, 그 시체가 관청 옆에 수북이 쌓여있다 들었습니다."
조세춘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에헤이, 그럴 리가... 나도 예전에 한번 본적 있는 인물인데... 결코 그럴만한 위인이 못 되는 양반이오. 딱 봐도 겁 많게 생긴 것이... 순하디 순한 양반이라 이 말이오."
수현은 절로 탄식이 나왔다.
"그렇단 말인가... 그런 사람이 그렇게 변했다...."
"에헤이... 아니라니까...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네."
조세춘은 따라주려다 만 수현의 손에서 술병을 뺏듯이 가져가 술잔에 따라 마셨고, 수현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으로 생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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