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2
무복으로 환복하고 막 동궁전을 나서려던 세자는,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왕을 보고 놀라 황망한 표정으로 멈추어 서서 공손히 예를 갖추어 인사하였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 것이냐?"
무심한 듯 묻는 왕이자, 아버지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세자가 입을 열었다.
"사교도에 대한 수사를 협조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이 나라의 국본임은 알고 있는 것이냐?"
세자는 무거운 마음으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왕은 말없이 세자를 응시하다가 이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됐다."
짤막했지만, 어쩐지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그것뿐이었다. 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홀연히 왔다가 그렇게 다시 어딘가로 발걸음을 돌렸다.
놀란 세자는 고개를 들어 걸어가는 왕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왕의 곁을 지키는 홍여립이 그런 세자를 향해 웃어 보이며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세자는 아버지가 암묵적으로 허락해 주었음을 느끼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이내 다시 발길을 재촉하였다.
그때, 때마침 동궁전으로 오고 있던 수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현은 헐레벌떡 달려와 서둘러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저하, 우포청이 조금 전 사교도 무리의 본거지를 기습 공격했다고 합니다."
세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이 어디냐? 당장 가봐야겠다."
"앞장서겠습니다."
수현이 앞서 달려나가자, 그 뒤를 세자가 뒤쫓아 달렸다.
세자와 수현이 다급히 뛰어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눈이 있었으니, 바로 상궁으로 변한 제신녀였다.
그녀는 세자의 뒷모습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궁궐 대문밖에는 도총부 소속의 병사 십여 명이 말을 타고 대기하고 있었고, 수현과 세자는 서둘러 말위에 올랐다.
말위에 오르며 세자가 수현에게 물었다.
"연희나 연희로 추정되는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느냐?"
"예, 딱히 짐작되는 바는 없습니다."
수현과 세자는 재차 말을 재촉하며 달리기 시작했고, 십여 명의 수하들이 일사불란하게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얼마 달리지 않아, 달리고 있는 세자 일행 옆으로 다른 무리가 빠른 속도로 달려와 합류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좌포청 사람들이었고, 맨 앞에 있는 여학수 종사관이 마상에서 가볍게 예를 표하며, 말을 건네 왔다.
"조금 전, 사교도 무리가 본거지를 빠져나갔으며, 우포청에서 그 뒤를 쫓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일부는 산 곳곳으로 흩어져 도피 중이라, 저희 좌포청에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세자는 보고를 받는 와중에도 말을 재촉하며 달리고 있었다.
뒤따라 오던 수현이 소리치듯 외쳤다.
"저하, 양쪽으로 나누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니다. 셋으로 나눈다."
수현이 의아한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예? 셋이라뇨?"
"금호 자네는 우포청을 따라 도주하는 사교도 무리를 쫓아라. 여종사관은 우포청에서 요청한 대로 흩어져 도망치는 사교도들을 쫓게. 나는...."
이야기하는 세자의 눈빛이 번득거리고 있었다.
"나는 저들이 비운 본거지로 가서, 행적을 살핀 뒤 어느 쪽으로 갈지 결정하겠다."
세자의 말에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다섯은 날 따르고, 다섯은 저하를 따른다. 가자."
수현은 갈래길이 나오자 가로지르기 위해 일부 수하들과 함께 세자의 곁에서 멀어졌다.
여학수 역시 얼마 가지 않아 좌포청 병사들과 함께 산기슭 외곽 쪽으로 향했다.
다섯 명의 수하들 중 길을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앞장서서 사교도의 본거지를 향해 내달렸다.
그리 오래지 않아 가파른 산길이 나오자 그 앞에 일행이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수하의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서 내려섰고, 수하들은 말고삐를 나무에 묶어둔 뒤 서둘러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연희야...'
세자는 연희를 떠올리며 산을 오르는 발길을 더욱 서둘렀다.
***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가 허름해 보이는 초가집으로 들어서자, 때마침 밖으로 나오던 천태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사내는 헐레벌떡 달려온 듯, 숨을 헐떡 거렸고 진정하려 애쓰며 힘겹게 이야기했다.
"그... 그것이... 본거지가... 본거지가 공격당했습니다."
사내의 말에 천태호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본거지가 공격당했다니? 뭔 소리를 하는 게냐? 똑바로 얘기해봐!"
천태호가 버럭 소리지르자, 그가 다시금 숨을 진정시키고는 한결 나아진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본거지가 공격당했습니다. 박지언이... 박지언이 우포청 병사들을 데리고 돌아오던 율무단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천태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래서? 그래서 어찌 되었어? 본거지 위치가 발각된 것이냐?"
그는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동환 형님이.... 율무단을 이끌고 급히 하산하여... 다행히 위치를 들키지는 않았습니다. 헌데... 동환 형님이 크게 다치셨습니다."
천태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다쳐? 누구에게?"
"박지언과 싸우다... 크게 부상을 당하셨습니다."
천태호가 돌연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
이어 손에 들고 있던 바가지 같은 것을 내팽개 치더니,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해 발을 구르며 중얼거렸다.
"박지언 이 개자식... 안 그래도 손을 써두려고 했었는데, 젠장, 젠장, 젠장!"
"어, 어찌해야 할까요? 포도청 병사들한테 들킬까 봐, 본거지에는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천태호가 이를 갈며 말했다.
"멍청한 놈아, 어차피 율무단을 모두 잃으면 거기 있는 것들은 쓸모도 없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동굴 속의 빌어먹을 것들이 아니라, 내 명령에 충성할 율무단이란 말이다."
그때 문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뜻밖에도 그곳에는 궁궐의 상궁 복장을 한 여인이 서 있었고, 복색을 알아본 본 사내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천태호는 그녀를 알아본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이렇게 함부로 나다니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느냐?"
천태호의 물음에 그녀가 공손히 인사를 하며 말했다.
"급히... 아뢸일이 있어 왔습니다."
"급히? 무어냐?"
"세자가... 방금 본거지 쪽으로 향했습니다."
천태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세자가?"
"예. 연희 때문에 급히 서두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말에 천태호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아주 푹 빠지셨구만. 너무 그렇게 대놓고 좋아하면 곤란한데... 이제 내 몸이 될 것이거늘..."
그러자 상궁, 아니 제신녀가 웃으며 말했다.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위험한 곳에 갔으니 어떤 일이 생길지 그누가 알수 있겠습니까?"
제신녀의 말에 천태호의 눈이 순간 반짝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
"더할 나위 없지요."
천태호가 이내 결심한 듯 그의 눈에 광기가 번득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좋아. 이참에 세자의 몸을 뺏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어 사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머지 녀석들 모두 데리고 와, 그리고 연희 그년의 위치를 파악해. 그년이 있으면, 세자의 몸을 뺏기가 수월할 테니. 적당한 곳으로 세자를 유인해서, 몸을 뺏고, 거기서 연희 년도 제거해 버려야겠다."
사내는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헐레벌떡 집밖으로 뛰어나갔고, 천태호와 제신녀는 서로를 마주 보며 음흉한눈빛으로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
포도청 병사 두 명이 연희의 양팔을 붙잡고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정말입니다. 염탐 중이었다 하지 않습니까? 좌포청에 확인해 보십시오."
그러나 포도청 병사들은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포도청에 가보면 알 것 아니냐? 시끄럽게 굴지 말고 따라오너라."
포도청 병사가 험악하게 말을 하며, 연희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연희는 이대로 잡혀 가면 세자의 입장이 난처할까 그것이 걱정되었다.
이대로라면 사교도로 몰릴 것이 분명했다.
걱정스런 마음에 연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힘없이 끌려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일련의 무리들이 벼락같이 쏟아져 나왔다.
"뭐야?"
당황한 포도청 병사들이 무엇을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날아드는 칼날에 목이 베었다.
"크헉!"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려 퍼지고, 두 병사의 육신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뭐?"
자신의 팔을 거칠게 붙잡고 있던 손이 맥없이 떨어져 나가자, 연희는 저도 모르게 몸이 휘청거렸다.
"뭐야?"
연희가 놀라 당황하고 있는 사이, 어둠속에서 두 병사를 벤 인물 두 명이 연희에게 다가왔다.
"네가 연희구나."
담담한 목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광기가 어른 거리는 눈빛이, 왠지 모르게 연희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누... 누구십니까?"
"당주님의 명이시다. 너를 데려오라 신다."
이번에는 그들이 연희의 팔을 붙잡았다.
"따라와라."
신분을 정확히 알 수없는 괴한들에게 붙들리자, 연희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가, 가고 싶지 않습니다."
연희가 멈춰 서 두발로 버티며 저항하자, 두 괴한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네깟 년에게 선택권이 있을 것 같으냐?"
괴한 중 하나가 말을 하며, 갑작스레 연희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악!"
연희는 그 통증에 비명이 터져 나왔고, 괴한은 비명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희를 잡아끌며 다시 산 어귀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다른 곳에서 또 다른 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연희를 데리고 있는 두 괴한을 보며 말했다.
"세자가 오고 있다."
그 말에 고통스러워하던 연희의 눈까지 휘둥그레졌다.
"좋아, 절벽 쪽으로 유인하자."
괴한들은 마치 세자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짓입니까? 세자마마를 어찌하려는 것입니까?"
연희가 따져 물으며 외치자,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괴한이 낄낄 거리며 말했다.
"어찌하긴, 세자의 몸을 빼앗아야지. 걱정 말거라. 그의 몸을 뺏는데 네가 아주 요긴하게 쓰일 것 같으니 말이다."
연희의 표정은 너무 놀라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아, 아, 안됩니다. 안..."
연희가 체 말을 다하기도 전에, 괴한이 내려치는 손에 머리를 맞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네년도 거기서 죽게 될 것이다. 흐흐"
괴한은 사악하게 웃으며 말을 내뱉고는 연희를 들어 어깨에 들쳐 멨다. 그리곤 다른 괴한들과 함께 산길을 따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 것이냐?"
무심한 듯 묻는 왕이자, 아버지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세자가 입을 열었다.
"사교도에 대한 수사를 협조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이 나라의 국본임은 알고 있는 것이냐?"
세자는 무거운 마음으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왕은 말없이 세자를 응시하다가 이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됐다."
짤막했지만, 어쩐지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그것뿐이었다. 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홀연히 왔다가 그렇게 다시 어딘가로 발걸음을 돌렸다.
놀란 세자는 고개를 들어 걸어가는 왕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왕의 곁을 지키는 홍여립이 그런 세자를 향해 웃어 보이며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세자는 아버지가 암묵적으로 허락해 주었음을 느끼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이내 다시 발길을 재촉하였다.
그때, 때마침 동궁전으로 오고 있던 수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현은 헐레벌떡 달려와 서둘러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저하, 우포청이 조금 전 사교도 무리의 본거지를 기습 공격했다고 합니다."
세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이 어디냐? 당장 가봐야겠다."
"앞장서겠습니다."
수현이 앞서 달려나가자, 그 뒤를 세자가 뒤쫓아 달렸다.
세자와 수현이 다급히 뛰어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눈이 있었으니, 바로 상궁으로 변한 제신녀였다.
그녀는 세자의 뒷모습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궁궐 대문밖에는 도총부 소속의 병사 십여 명이 말을 타고 대기하고 있었고, 수현과 세자는 서둘러 말위에 올랐다.
말위에 오르며 세자가 수현에게 물었다.
"연희나 연희로 추정되는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느냐?"
"예, 딱히 짐작되는 바는 없습니다."
수현과 세자는 재차 말을 재촉하며 달리기 시작했고, 십여 명의 수하들이 일사불란하게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얼마 달리지 않아, 달리고 있는 세자 일행 옆으로 다른 무리가 빠른 속도로 달려와 합류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좌포청 사람들이었고, 맨 앞에 있는 여학수 종사관이 마상에서 가볍게 예를 표하며, 말을 건네 왔다.
"조금 전, 사교도 무리가 본거지를 빠져나갔으며, 우포청에서 그 뒤를 쫓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일부는 산 곳곳으로 흩어져 도피 중이라, 저희 좌포청에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세자는 보고를 받는 와중에도 말을 재촉하며 달리고 있었다.
뒤따라 오던 수현이 소리치듯 외쳤다.
"저하, 양쪽으로 나누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니다. 셋으로 나눈다."
수현이 의아한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예? 셋이라뇨?"
"금호 자네는 우포청을 따라 도주하는 사교도 무리를 쫓아라. 여종사관은 우포청에서 요청한 대로 흩어져 도망치는 사교도들을 쫓게. 나는...."
이야기하는 세자의 눈빛이 번득거리고 있었다.
"나는 저들이 비운 본거지로 가서, 행적을 살핀 뒤 어느 쪽으로 갈지 결정하겠다."
세자의 말에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다섯은 날 따르고, 다섯은 저하를 따른다. 가자."
수현은 갈래길이 나오자 가로지르기 위해 일부 수하들과 함께 세자의 곁에서 멀어졌다.
여학수 역시 얼마 가지 않아 좌포청 병사들과 함께 산기슭 외곽 쪽으로 향했다.
다섯 명의 수하들 중 길을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앞장서서 사교도의 본거지를 향해 내달렸다.
그리 오래지 않아 가파른 산길이 나오자 그 앞에 일행이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수하의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서 내려섰고, 수하들은 말고삐를 나무에 묶어둔 뒤 서둘러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연희야...'
세자는 연희를 떠올리며 산을 오르는 발길을 더욱 서둘렀다.
***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가 허름해 보이는 초가집으로 들어서자, 때마침 밖으로 나오던 천태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사내는 헐레벌떡 달려온 듯, 숨을 헐떡 거렸고 진정하려 애쓰며 힘겹게 이야기했다.
"그... 그것이... 본거지가... 본거지가 공격당했습니다."
사내의 말에 천태호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본거지가 공격당했다니? 뭔 소리를 하는 게냐? 똑바로 얘기해봐!"
천태호가 버럭 소리지르자, 그가 다시금 숨을 진정시키고는 한결 나아진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본거지가 공격당했습니다. 박지언이... 박지언이 우포청 병사들을 데리고 돌아오던 율무단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천태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래서? 그래서 어찌 되었어? 본거지 위치가 발각된 것이냐?"
그는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동환 형님이.... 율무단을 이끌고 급히 하산하여... 다행히 위치를 들키지는 않았습니다. 헌데... 동환 형님이 크게 다치셨습니다."
천태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다쳐? 누구에게?"
"박지언과 싸우다... 크게 부상을 당하셨습니다."
천태호가 돌연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
이어 손에 들고 있던 바가지 같은 것을 내팽개 치더니,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해 발을 구르며 중얼거렸다.
"박지언 이 개자식... 안 그래도 손을 써두려고 했었는데, 젠장, 젠장, 젠장!"
"어, 어찌해야 할까요? 포도청 병사들한테 들킬까 봐, 본거지에는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천태호가 이를 갈며 말했다.
"멍청한 놈아, 어차피 율무단을 모두 잃으면 거기 있는 것들은 쓸모도 없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동굴 속의 빌어먹을 것들이 아니라, 내 명령에 충성할 율무단이란 말이다."
그때 문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뜻밖에도 그곳에는 궁궐의 상궁 복장을 한 여인이 서 있었고, 복색을 알아본 본 사내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천태호는 그녀를 알아본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이렇게 함부로 나다니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느냐?"
천태호의 물음에 그녀가 공손히 인사를 하며 말했다.
"급히... 아뢸일이 있어 왔습니다."
"급히? 무어냐?"
"세자가... 방금 본거지 쪽으로 향했습니다."
천태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세자가?"
"예. 연희 때문에 급히 서두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말에 천태호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아주 푹 빠지셨구만. 너무 그렇게 대놓고 좋아하면 곤란한데... 이제 내 몸이 될 것이거늘..."
그러자 상궁, 아니 제신녀가 웃으며 말했다.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위험한 곳에 갔으니 어떤 일이 생길지 그누가 알수 있겠습니까?"
제신녀의 말에 천태호의 눈이 순간 반짝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
"더할 나위 없지요."
천태호가 이내 결심한 듯 그의 눈에 광기가 번득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좋아. 이참에 세자의 몸을 뺏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어 사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머지 녀석들 모두 데리고 와, 그리고 연희 그년의 위치를 파악해. 그년이 있으면, 세자의 몸을 뺏기가 수월할 테니. 적당한 곳으로 세자를 유인해서, 몸을 뺏고, 거기서 연희 년도 제거해 버려야겠다."
사내는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헐레벌떡 집밖으로 뛰어나갔고, 천태호와 제신녀는 서로를 마주 보며 음흉한눈빛으로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
포도청 병사 두 명이 연희의 양팔을 붙잡고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정말입니다. 염탐 중이었다 하지 않습니까? 좌포청에 확인해 보십시오."
그러나 포도청 병사들은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포도청에 가보면 알 것 아니냐? 시끄럽게 굴지 말고 따라오너라."
포도청 병사가 험악하게 말을 하며, 연희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연희는 이대로 잡혀 가면 세자의 입장이 난처할까 그것이 걱정되었다.
이대로라면 사교도로 몰릴 것이 분명했다.
걱정스런 마음에 연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힘없이 끌려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일련의 무리들이 벼락같이 쏟아져 나왔다.
"뭐야?"
당황한 포도청 병사들이 무엇을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날아드는 칼날에 목이 베었다.
"크헉!"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려 퍼지고, 두 병사의 육신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뭐?"
자신의 팔을 거칠게 붙잡고 있던 손이 맥없이 떨어져 나가자, 연희는 저도 모르게 몸이 휘청거렸다.
"뭐야?"
연희가 놀라 당황하고 있는 사이, 어둠속에서 두 병사를 벤 인물 두 명이 연희에게 다가왔다.
"네가 연희구나."
담담한 목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광기가 어른 거리는 눈빛이, 왠지 모르게 연희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누... 누구십니까?"
"당주님의 명이시다. 너를 데려오라 신다."
이번에는 그들이 연희의 팔을 붙잡았다.
"따라와라."
신분을 정확히 알 수없는 괴한들에게 붙들리자, 연희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가, 가고 싶지 않습니다."
연희가 멈춰 서 두발로 버티며 저항하자, 두 괴한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네깟 년에게 선택권이 있을 것 같으냐?"
괴한 중 하나가 말을 하며, 갑작스레 연희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악!"
연희는 그 통증에 비명이 터져 나왔고, 괴한은 비명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희를 잡아끌며 다시 산 어귀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다른 곳에서 또 다른 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연희를 데리고 있는 두 괴한을 보며 말했다.
"세자가 오고 있다."
그 말에 고통스러워하던 연희의 눈까지 휘둥그레졌다.
"좋아, 절벽 쪽으로 유인하자."
괴한들은 마치 세자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짓입니까? 세자마마를 어찌하려는 것입니까?"
연희가 따져 물으며 외치자,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괴한이 낄낄 거리며 말했다.
"어찌하긴, 세자의 몸을 빼앗아야지. 걱정 말거라. 그의 몸을 뺏는데 네가 아주 요긴하게 쓰일 것 같으니 말이다."
연희의 표정은 너무 놀라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아, 아, 안됩니다. 안..."
연희가 체 말을 다하기도 전에, 괴한이 내려치는 손에 머리를 맞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네년도 거기서 죽게 될 것이다. 흐흐"
괴한은 사악하게 웃으며 말을 내뱉고는 연희를 들어 어깨에 들쳐 멨다. 그리곤 다른 괴한들과 함께 산길을 따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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