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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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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연랑
· 최초 등록: 2025.10.04 · 최근 연재: 2025-10-25
읽기 시간 예측: 약 10.77분

35화 - #4


나래는 굳어진 표정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 호랑이를 응시했다.

두발로 선 호랑이는 전래동화에서나 묘사될 법한 하얀 한복 차림에 노쇠한 듯 허리가 구부정했다.

지팡이에 몸을 기대어 걷는 호랑이는 수풀에서 나오자마자 나래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놀란 표정으로 나래를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나래의 시선이 그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호랑이의 허리춤에 둘러진 허리띠는 입고 있는 옷과는 대조되게 현대적인 허리띠였고, 거기에는 카세트 하나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카세트에서 "어흥~"하는 우렁찬 소리가 재생되어 나왔다.

나래가 카세트를 멍하니 바라보자, 호랑이가 당황하여 나래에게 꾸짖듯이 말했다.

"너 왜 안도망가?"

나래는 멍한 표정으로 호랑이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왜 잡으러 안 오세요?"

나래의 되물음에 호랑이 할아버지는 눈을 껌뻑거리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왜?"

나래는 저도 모르게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저는 왜 도망가요? 쫓아오지도 않는데?"

"뭐?"

"제가 왜 도망가냐구요?"

호랑이 할아버지는 도통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껌뻑거리다가 뭔가 생각난 듯 "아!" 하며 말했다.

"쫓아가야지. 쫓아가야지. 내가 어흥! 하며 잡아먹어야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흥할 때 보니 호랑이의 상징인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이지 않았다.

"이빨이 없는 거 같은데요?"

나래의 물음에, 호랑이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 맞다! 틀니!"

호랑이 할아버지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크기가 엄청난 송곳니가 달린 틀니를 꺼내 들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중에도, 카세트에서는 "어흥~"하는 소리가 재생되고 있었다.

호랑이 할아버지는 틀니를 입에 끼워 넣으려 낑낑거렸지만, 송곳니가 워낙 커서 쉽지 않아 보였다.

"그거 끼면 절 잡아먹을 수 있긴 한 거예요?"

나래가 걱정스레 묻는 말에, 호랑이 할아버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끼는 거지. 질긴 고기를 어떻게 뜯어? 차라리..."

그러다가 나래를 보더니 뭔가 생각난 듯, 또다시 움찔 거리며 말했다.

"어어... 이거 말하면 안 되는데?"

나래는 호랑이 할아버지를 보며 풋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나래를 보며 호랑이 할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성을 내기 시작했다.

"옛날 같았으면 단숨에 달려가서 잡아먹었어! 쯧... 내가 이빨만 성했어도..."

그 와중에도 카세트에서는 또다시 "어흥~"하는 소리가 재생되어 나왔다.

"네에, 알았어요. 그런데 잡아먹지도 못하는데, 그 어흥 소리는 뭐하러 틀어놓으세요?"

호랑이 할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도망가라고. 다 도망가. 호랑이가 나타나면 도망가야지."

나래는 그런 할아버지를 보면서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왜요? 왜 다 도망가게 만드세요?"

"왜긴? 호랑이니까."

나래는 호랑이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다 도망가 버려서 서운한 적 있으세요?"

그러자 호랑이 할아버지는 화들짝 놀라더니,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아~~니. 뭔 소리야? 호랑이를 봤으면 도망가는 게 당연하지."

"그거야, 젊어서는 그러셨겠죠. 나이 들어서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도, 다들 도망만 가서 서운하셨던 거 아니세요?"

호랑이 할아버지는 나래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 체, "허허~" "허참~"하는 소리만 되풀이했다.

"저는 안 도망갈게요."

나래가 당차게 말하자, 호랑이 할아버지는 "허허~ 거참..." 하더니, 틀니를 다시 주머니 속에 넣으며 말했다.

"네 맘대로 해라."

그러고는 다시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걷기 시작했고, 나래는 그 곁을 따라 걸었다.

"어디 가는데?"

호랑이 할아버지는 어느새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 오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럼 그냥 가."

"그냥 가라고요?"

"그래. 그냥 계속 걸어."

"왜요?"

"그러다 보면 어딘가에는 닿을 거 아냐?"

"뭐... 그렇겠죠?"

"그럼 된 거여."

"뭐가요?"

"어디든 도착했잖어. 그럼 된 거라고."

이 오묘한 대화가 나래는 어쩐지 싫지 않았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는 거여. 어디로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모르지. 그런다고 멈춰 서면 안 돼. 일단은 가던 길을 계속 가야지. 가다 보면 새로운 길도 나오고, 새로운 이도 만나는 거지."

나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멈춰있지 말고 전진하라는 거죠?"

나래의 대답에 잠시 대답 없던 호랑이 할아버지는 태연히 걷다가 카세트에서 "어흥~"소리가 나자 귀찮다는 듯이 카세트를 꺼버렸다.

그러고는 여전히 느리게 걸으며 말했다.

"멈춰도 괜찮어."

"예? 계속 가라면서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는, 그냥 가던 길 계속 가란 거지."

"그게 멈추지 말라는 거 아니에요?"

"그런다고 안 멈출 필요 있나? 가다 보면 지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면, 잠깐 멈춰서 쉬었다 가기도 하는 거지."

묘한 대화 속에서 나래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렇게 멈춰 있으면, 그래도 되는 건지 불안해요.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거 같고..."

"아이가 빨리 달리지 못한다고 쉴틈도 없이 몰아세우면 아이는 지쳐 버리지. 제대로 뛰기도 전에 지쳐 버린다고."

나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전 아이가 아닌걸요, 모습은 이래도..."

나래가 말끝을 흐리자, 호랑이 할아버지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누구나 마음속에 아이가 있지. '자신'이라는 아이가 있어. 그 아이가 지치지 않게, 때때로 보듬어 줄줄 알아야 하는 법이야."

호랑이 할아버지 말을 들은 나래는 어쩐지 방황했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

나래는 어느새 호랑이 할아버지를 친근하게 불렀다.

걸어가던 호랑이 할아버지는 계속 걸으면서 고개를 살짝 돌려 나래를 힐끔 바라보았다.

"실은 다른 이들과 함께 있고 싶은 거죠?"

나래의 물음에 호랑이 할아버지는 무심한 듯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호랑이는 늙어도 호랑인거여. 호랑이를 봤으면 도망가는 게 정상이지.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무시했다가는 발톱에 당하는 거야."

"그래도 이제는 안 잡아먹으니까 같이 있어도 되는 거잖아요?"

"그럼 호랑이가 아니지."

"왜요?"

문득 호랑이 할아버지가 발걸음을 멈춰서 나래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 말대로 나는 가끔 외롭지. 이따금 누군가 곁에 있었으면 싶기도 하고. 하지만 그걸 내가 용납할 수가 없어. 나는 호랑이니까, 내 본질은 모두가 두려워하는 호랑이지.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죽는 순간까지 나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런 호랑이고 싶은 거지. 지금까지 그거 하나로, 여태 죽지 않고 살아왔으니까. 내게 숨이 붙어 있는 한, 그런 호랑이로 살다가 죽는 게 내 바램인거야."

그러더니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너무 오래 살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

나래는 잠시 생각하다가, 호랑이 할아버지를 보며 물었다.

"제게 자기 안에 있는 '자신'이라는 아이를 보듬어 줄줄 알아야 한다면서요? 할아버지도 그런 '자신'을 보듬어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다른 이들과 함께 하면 더 행복할 수도 있잖아요?"

호랑이 할아버지는 여전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아이를 위로하는 것 또한 '자신'이어야 해. 다른 이에게서 위로받을 생각 따윈 집어치워. 너 스스로 '자신'을 위로할 줄 모르면,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어. 다른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마. 기대는 곧 실망으로 이어질 테니까. 꿋꿋이 홀로 설 수 있어야지."

나래는 호랑이 할아버지의 말과 행동에서 모순됨을 느끼고 있었지만, 어쩐지 씁쓸해 하는 모습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안녕히 가세요."

나래는 허리숙여 인사를 했고, 호랑이 할아버지는 개의치 않는 듯 말없이 계속 걸어갔다.

힘겹게 걸음걸음을 옮기는 호랑이 할아버지의 굽은 뒷모습을, 나래는 말없이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


호랑이 할아버지와 헤어진 나래는 처음 자기가 가던 길로 돌아가서 걷기 시작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따사로운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는 것도 좋았고, 나무와 수풀 사이로 살살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래 옆으로 아까의 색색이 도깨비불들이 날아들었다.

이어 아이들의 모습으로 '펑 펑' 소리를 내며 변하더니, 일제히 나래 옆을 나란히 걸었다.

"호랑이 갔어?"

"호랑이가 안 물어 갔네?"

"어떻게 살았어?"

나래가 대답할 세도 없이 누군가 잘난척하듯 나서 말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댔어."

"와, 나래는 엄청 용감한가 봐."

누군가의 말에 나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냐, 나 겁 엄청 많아."

"겁 안 많은 거 같아."

"맞아, 우린 다 도망갔는데, 나래는 안 도망갔잖아."

나래는 사실 도망갈 겨를이 없었다고 말하려다가, 머쓱한 표정과 어색한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때 같이 걷던 한울이 나서 나래에게 물었다.

"너는 도깨비가 아니구나?"

나래는 그런 한울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맞아. 나는 사람이야."

그러자 아이들이 모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사람?"

"나래는 사람이었어?"

한울도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가, 이해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쩐지.... 뭔가 느낌이 달랐어."

아이들은 나래를 이리저리 살피며 신기한 듯 구경했다.

"난 사람이 좋아."

"나도 사람이 좋아."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사람을 좋아한다고 재잘거렸다.

"사람들이랑 놀이터에서 놀 때가 좋았는데..."

"맞아."

누군가의 말에 나래는 의아한 듯 물었다.

"예전에는 사람들하고 놀았어?"

"응, 놀이터에서. 아이들이랑 놀았어."

"맞아, 아이들이랑 다방구도 하고 얼음땡도하고."

"딱지치기!"

"공기놀이!"

"난 비석까기랑 땅따먹기!"

서로 뭐가 제일 재미있었는지 이야기하기 바빴다.

"왜 지금은 사람들하고 안 놀아?"

나래가 궁금한 듯 묻자, 한울이 나서 대답했다.

"지금은 놀이터에 애들이 별로 없어."

"왜?"

"모르겠어. 예전에는 아이들이 많아서, 우리가 그 사이에 몰래 끼어들어 놀아도, 같이 놀 수 있었는데... 이젠 아이들도 별로 없고, 모르는 우리하고는 놀려고 하지 않아. 그래서 우리끼리 놀게 됐어."

한울의 대답에 아이들이 일제히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이야기했다.

"그래도 술래잡기할 땐 살짝 낄 수 있어."

그 말을 기점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들은 또다시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미끄럼틀 할 때 끼어든 적 있는데, 아무도 몰랐어."

"나도."

아이들의 특유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나래는 과히 싫지 않았다.

흡사 일할 때 집중력을 높이려고 듣는 백색소음 같달까?

나래는 절로 지어지는 미소에 마음도 포롱포롱 날아가는 새처럼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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