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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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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0.32분

45화 - #1


이른 아침, 간밤에 내리던 비가 마침 멈추었기에 연희는 서둘러 짐을 챙겨 궁궐을 나서기 위해 발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연희에게 말을 건네 왔다.

"제법이구나."

놀란 연희가 고개를 돌려보니 상궁의 복색을 한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마마님, 어찌 그러시옵니까?"

연희가 얼른 공손히 인사를 하며 묻는 말에, 상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모른 척 하기는... 네년의 살랑거리는 웃음에, 세자가 마음을 홀린 듯 하구나."

독기 어린 목소리에, 연희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당황해 어찌할줄 모르는 연희를 바라보며, 상궁이 낄낄거리듯 웃어댔다.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웃음소리에 연희는, 그녀가 여느 상궁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놀라기는... 내가 바로 네년을 여기 있게 만든 장본인, 제신녀 이니라."

그녀의 말에 연희의 눈이 충격으로 휘둥그레졌다.

옥사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여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와는 겉모습이 완연하게 달랐지만, 묘하게도 그녀에게서 받았던 느낌과 매우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럴 리가.... 그때 그분들은 모두 처형당했다고...."

당황해하는 연희를 보며, 상궁은 더욱 큰소리로 웃어대며 말했다.

"내 말하지 않았더냐,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연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심장이 쿵쿵거렸다.

"세자를 홀린 것은 칭찬해줄 만 하구나. 네가 기억을 하든 안 하든, 결국 너는 율제님의 것이다. 잘 듣거라. 율제님의 뜻이 바뀌셨다. 이제 더 이상 주상과 세자에게 위해는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니... 네가 세자의 곁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라."

연희는 그녀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궁궐에 머물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상궁, 아니 제신녀가 다시금 낄낄 거리며 웃어댔다.

"그게 과연 네년 마음대로 되는 것인 줄 알더냐? 결국 네년 스스로 율제님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니라. 흐흐흐"

제신녀는 그 말을 남기고 유유히 돌아서서 어딘가로 걸어가 버렸다.

연희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불길한 기운에 휩싸였다.

어쩐지 모든 일이 잘못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제신녀가 말하기를 이제 주상과 세자에게 위해는 없을 것이라 했다.

그것이면 족했다.

더 이상 위해가 없다고 하니, 자신만 미련 없이 떠나면 그만일 것이다.

연희는 다시금 발길을 재촉하여, 서둘러 궁궐을 나섰다.

밖으로 나서던 연희는, 잠시 발길을 멈추어 궁궐을 돌아보았다.

궁궐 그 어딘가에 있을 세자를 향해,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건네고는, 떠나기위해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



뭔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세자 곁으로 수현이 다가와 섰다.

"저하, 이곳에 계셨습니까?"

세자는 수현을 돌아보지도 않은 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침부터 내내 연희가 보이지 않는구나."

"그렇습니까? 제게도 딱히 기별한 것이 없는데... 무슨 일인지 수하들을 시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자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허나 그 모습이 평소와는 달리 사뭇 초초해 보였다.

"응? 저 사람은 유상옥 대감이 아닌가?"

세자의 말에, 막 자리를 떠나려던 수현이 세자의 눈길을 따라갔다.

붉은빛의 당상관 복장을 하고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이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보였다. 해맑게 웃는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맹한 구석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맞습니다. 좌상의 당여이자, 주상전하의 장인이라고 호언장담을 했다가, 좌천되었지요."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박하기 이를 데 없고, 신중하지 못하여, 좌상도 내친 사람이라 들었는데, 어찌 입궐한 것인가?"

"제가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때 뒤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필요 없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소리 난 곳을 바라보니, 푸른색 당하관 차림의 조세춘이 서서 세자에게 인사를 했다.

세자가 그를 보며 물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고 있는가?"

조세춘이 고개를 들어 한걸음 더 다가와 대답했다.

"어제 빈청에서 현 호판 대감을 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판 고숭렴 대감을 호판에, 그리고 이조판서에 유상옥 대감을 임명하는 것을 주청 드려, 주상전하께서 윤허하셨습니다."

그 말에 수현이 놀라 되물었다.

"허나... 그는 좌상의 눈밖에 난 이가 아닌가? 좌상이 없다고 이렇게 마음대로 바꿨다가..."

조세춘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이는 모두 좌상대감의 지시라고 하네."

세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좌상이? 유상옥 대감은 근본적으로 경박한 이라, 어디 중용할만한 위인이 되지 못한다. 좌상이 이를 모를 리 없을터... 더욱이 유상옥 대감은..."

조세춘이 세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의빈마마의 부친으로써, 때때로 주상전하의 편에 서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정녕, 좌상이 이를 알고도, 이조판서의 자리에 유상옥 대감을 앉혔단 말인가?"

"그 속내를 알 수 없으나, 이는 분명 좌상의 뜻입니다. 더욱이 빈청의 분위기를 살펴보니, 이를 꽤나 반기는 분위기였습니다."

세자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래 들어, 병판과 이판이 좌상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들에게는 좌천되었던 유상옥이 돌아온 것이, 자신들도 용서받을 수 있음을 생각케 할 것이네. 좌상이 이점을 노린 것이라고 하기엔... 굉장히 큰 무리수를 둔 것 아닌가? 더욱이 그럴 것이라면, 그저 호판의 자리에 앉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인데... 이조와 병조는 육조에서도 가장 실권을 쥔 곳이 아닌가?"

세자를 보며 조세춘이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이판과 병판을 타일러, 다시금 관계를 돈독키 하기 위함이라면 적절한 한수입니다. 더불어, 고숭렴 대감을 이판의 자리에서, 실권이 없는 호판의 자리로 옮겨놓은 것이, 의도한 바가 아닐까 합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상옥을 이판에 앉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고숭렴 대감을 이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함이 목적이다? 그럴 수 있긴 하지만..."

세자는 수긍하면서도, 그 대답이 뭔가 명쾌하지 않음을 느꼈다.

"금호, 자네는 서둘러 연희부터 찾아보게."

수현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저하."

수현이 물러나자, 떠나가는 수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세춘이 세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하... 근래 들어, 그 아이와 좌포청을 수시로 드나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교도들에 대한 조사를 위해서일세. 천무방이란 조직이 사교도와 관련이 있고, 또한 좌상과도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네."

"예, 소신도 그리 들었사옵니다. 더불어, 현재 좌포청과 우포청에서 사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하고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 우포청을 맡고 있는 사람이 박지언이며, 박지언이 최근 좌상대감과 연이어 만났다고 합니다."

세자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조세춘이 놀랍지 않냐는듯 도리어 눈을크게 뜨고 세자를 쳐다보았다.

"이미 좌상과 박지언의 만남을 알고있네."

"아..그러셨습니까.. 그리고 사교도에 대한 강도 높은 조사를 명한 사람이, 바로 좌상대감이라 하옵니다. 이도 알고 계셨던겁니까?"

이번에는 세자도 몰랐던듯 표정이 적지 않게 당황스러워졌다.

사교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좌상이, 도리어 사교도에 대한 강력한 조사를 요구했다니...

"꼬리를 자르려는 것인가?"

세자의 말에 조세춘이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아니면, 애초에 사교도와 관련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세자는 인정할 수 없으나, 조세춘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 이유야 어찌 되었든, 우포청과 좌포청이 사교도에 대한 조사를 큰폭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허니, 저하께서는 한걸음 물러나심이 마땅해 보입니다."

세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들은 무엇을 노리든 필경 사교도와 관련이 있음이다. 내가 좌포청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나서자, 우포청을 움직여 꼬리를 자르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무언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내가 그만둘 수는 없네"

조세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것이 함정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세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조세춘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저하를 더욱 나서게 만들려는, 저들의 포석이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저하께옵서 사교도들과 작당했다는 모양새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럴만한 구실을 옆에 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세자가 눈쌀이 더욱 찌푸려졌다.

"연희를 두고 하는 말인가?"

"망극하옵니다, 저하. 허나, 부정하지 않겠사옵니다."

"도대체 다들 어찌 그리도 매정한 것인가? 연희 하나를 어쩌지 못해 안달이니..."

조세춘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습니까? 저하? 허나... 그 연희라는 아이 하나를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저하 께옵서도 마찬가지 아니시옵니까?"

조세춘이 빙그레 웃어 보이니, 세자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체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사람하고는... 그래서 내가 그 아이를 내치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만약 그러셨다면, 저는 저하의 곁에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뜻밖의 대답에 세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조세춘을 바라보았다. 조세춘은 예의 그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지키십시오. 마지막까지 저하의 사람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저는 그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조세춘의 말에 세자도 싱긋 웃어 보였다.

어쩐지 조세춘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짐 하나를 덜어준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망극할 따름입니다."

그때 자리를 떠났던 수현이 부랴부랴 다가왔다.

세자가 눈으로 물으며 말없이 수현을 쳐다보자, 수현이 당황한 표정으로 세자에게 말했다.

"연희가 이른 아침에 궁궐을 나섰다 합니다. 머물던 처소를 살펴보니, 짐을 싸가지고 나간 것이, 무언가 결심을 하고 나선 것..."

수현이 체 말을 다하기도 전에 세자가 다급히 되물었다.

"어디로 갔단 말이냐?"

"궁궐을 나서는 것까지만 보았답니다."

세자는 갑자기 몸을 돌려 어딘가로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저하? 어디로 가시는 것이옵니까?"

수현과 조세춘이 놀라 서둘러 그 뒤를 따랐고, 세자는 걷기 답답하다는듯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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