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29
가게 밖으로 나와 길을 걷는 나래는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나래의 어린 시절 동네 풍경부터 근래의 풍경까지, 온 세상의 시간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게 대체...."
당황해하는 나래의 손을 꼭 잡은 백하도령이 거침없이 어딘가를 향해 걸으며 말했다.
"이곳은 너의 심연이자, 너의 마음이고, 너의 기억이다. 이곳은 네가 존재했던 모든 순간들의 집합이며, 네가 살아온 너의 삶이다. 잊지 말거라. 이것은 너의 발자국이니, 이로써 지금의 네가 있는 것임을."
앞장서 가던 백하도령이 멈춰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중얼거렸다.
"낌새가 사라져 버렸다."
이어 나래를 돌아보며 물었다.
"잘 생각해 보거라. 네가 자주 가서 몸을 숨기던 곳이 있었더냐?"
나래는 백하도령의 질문에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이 자주 가던 곳, 몸을 숨기던 곳이라면...
"만화방이요."
"만화방?"
"네. 친구랑 같이 가던 만화방이 있어요. 어릴 땐 곧잘 거기 가 있곤 했었어요. 거기 가면 아주머니가 귀엽다고 호빵도 주곤 하셨거든요."
"그곳이 어디냐?"
백하도령의 물음에, 나래는 어딘가를 가리켰고, 백하도령은 나래가 가리킨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가 자주 가던 만화방의 입간판이 보였고, 백하도령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 만화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아까부터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백하도령을 보며 의아한 듯 물으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손을 계속 잡고 있냐고 물으려는데,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오셨수?"
온화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할머니를 보며, 나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이 만화방의 주인은 이 할머니보다 훨씬 젊은 아주머니였다.
어린 시절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할머니가 눈앞에서 손님을 받고 있으니, 나래는 이상해서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백하도령이 할머니를 보며 답하는 사이, 누군가 나래를 향해 달려오며 반갑게 소리쳤다.
"나래야!"
나래가 고개를 돌려보니, 어린 시절 함께 만화방에 자주 왔던 친구 영이었다.
"영아?"
나래가 놀란 얼굴로 영이를 바라보자, 영이가 나래를 와락 껴안았다.
"왜 이제 왔어? 아까부터 한참 기다렸잖아."
나래는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어린 시절 영이를 다시 보니 기쁘고 반가웠다.
나래가 중학교 진학할 무렵, 영이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렸고, 그 이후로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근데... 이 오빠는 누구야?"
영이가 백하도령을 보며 묻는 말에, 나래의 시선 역시 백하도령에게로 향했다.
"아... 백하도령님.... 이셔..."
나래는 소개를 하면서도 뭔가 이상한 듯 머뭇거렸고, 영이는 재밌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 도령? 하하, 도령님이라고?"
그런데 아까부터 백하도령의 표정이 이상했다.
평소 같지 않게 딱딱하고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고, 진중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나래가 백하도령을 보며 조심스럽게 묻자, 백하도령이 물었다.
"잘 기억해 보거라. 혹, 이곳에 네 기억과 다른 낯선 것이 있느냐?"
그 말에 나래는 다시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어린 시절 보았던 풍경 그대로였던지라,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했다.
"똑같아요. 단지... 제가 아는 여기 사장님은 아주머니 셨어요."
말을 하며 할머니를 돌아보니, 할머니의 웃음에 어쩐지 묘하게 등골이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백하도령은 할머니를 응시하며 일갈했다.
"잔재주는 그만 피우고, 정체를 밝히거라."
백하도령의 호통 소리에 주위가 지진 난 듯이 덜덜 거리기 시작했고, 영이를 비롯해 주위에서 만화책을 보던 이들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겁이 난 나래는 얼른 백하도령에게 바짝 붙어 소매를 꼭 잡았는데, 놀랍게도 백하도령만은 이 진동 속에서 떨리지 않고 멀쩡했다.
"이제 보니, 네놈은 다른 누리의 신이로구나."
할머니는 어느새 부리부리한 눈으로 백하도령을 노려보았다.
말을 하는 사이 할머니의 몸집이 두배 정도 더 커지고, 하얀 백발이 길게 늘어져 펄럭였다.
"나는 시간할망이다. 이 세계에서는 내가 신이지. 네놈이 어느 곳의 신인지는 모르나, 이곳에서는 오직 나만이 신이다."
나래는 시간할망의 본모습을 보고 겁이 덜컥 났지만, 백하는 두려움 없는 눈빛으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무례함이 있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우리 의도가 아니었으니,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을 찾고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백하도령의 공손한 말에 시간할망이 깔깔 거리며 웃어댔다.
"내 손에 들어온 소중한 장난감을 내 그리 쉽게 내어줄 수는 없지. 네 등 뒤에 숨어 벌벌 떨고 있는 저 아이를 내게 준다면, 네놈은 기꺼이 돌려보내 주마."
시간할망의 협박에도 백하도령은 도리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곳에서 신이라니,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 아이는 다른 누리에서 온 아이이니, 돌려보내 줄 수 있도록,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흥, 내 너희들을 호락호락 보내줄 성싶으냐?"
백하는 이대로는 위험하다고 판단한 듯, 자기 옆에 붙은 나래를 한쪽 팔로 감아 꼭 붙잡았다.
"일단 피해야겠다."
백하는 말과 동시에 온몸에서 푸른 섬광을 일으키며 가게 벽을 뚫고 밖으로 나갔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부서진 벽 너머로 쏜살같이 날아오른 백하가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른 것도 잠시, 어떤 강력한 힘에 이끌려 왔던 그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읏..."
백하가 그 힘에 저항해 보려 했으나, 속수무책이었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백하가 부서뜨린 모든 것들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소용없다."
시간할망이 백하를 보며 말했다.
"네가 무엇을 하든지, 나는 이곳의 시간을 되돌려 놓을 수 있다. 보아하니 네놈이 가진 힘이 우뢰의 힘인 모양인데, 그런 힘이라면 이 나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백하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나래를 돌아보자, 나래도 황망한 표정으로 백하를 마주 보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도움 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이 세계는 필경 너와 관련이 있다. 이곳은 너의 심연이니... 마치 네게는 꿈과 같은 공간일 터,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백하의 말에 나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곳이 자기의 심연이자 꿈과 같은 공간이란 생각에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으하하하, 소용이 없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시간할망의 말에 백하가 그녀를 응시하며 가만히 있다가 물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대 역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듯 하구나."
백하의 말에 시간할망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이곳은 흡사 늪과도 같으니, 늪에 빠진 이들이 빠져나가려 발버둥 칠 때마다, 시간을 되돌리며 그들의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것이겠지. 허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대 역시 되돌릴만한 것이 없을 터. 우리는 이대로 있을 것이다."
시간할망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백하를 노려보았다.
"이노옴.... 제법 눈치가 빠른 녀석이로구나."
그 사이 나래는 계속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가게, 이 풍경, 만나고 싶었던 영이까지... 나래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돌아가고 싶었던 순간, 가장 행복했다고 기억하는 바로 그때 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순수하게 친구 영이와 즐길 수 있었던 그 순간들, 너무 소중해서 보석 같은 시간들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어려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만화방이냐고 말할지 몰라도, 나래에게는 돌이켜 본 시간 중에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다.
"그래, 나도 돌아가고 싶었어. 영이랑 같이 이야기하던 그때로... 하지만, 그 순간만 소중한 건 아니잖아."
나래가 마치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듯 말을 하자, 가게 안은 다시 우르르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시간할망이 놀라 당혹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왜? 왜 그러는 것이냐?"
거대한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사방에 모든 것이 사라져 갔다.
"백하도령님!"
나래는 자신이 붙잡고 있던 백하도령마저 사라지자 당황하여 그를 불러보았지만, 어디에도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
시커먼 어둠 속 한복판에 오직 혼자만 서 있었다.
그리고 들려왔다.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가.
-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나래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몸을 돌렸고, 거기에는 현실에서의 자신 모습인, 36살의 나래가 서 있었다.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고, 소녀 나래는 그런 성인 나래를 보며 말했다.
"그 모든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야."
소녀 나래를 보며 성인 나래가 말했다.
"너는 아직도... 네가 나인 줄 아는 모양이구나."
성인 나래의 말에 소녀 나래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너는 나야. 너는 내 그림자고, 우린 하나야."
성인 나래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
"틀렸어. 너는 나래가 아냐. 나래는 나야. 아직도 모르겠어?"
성인 나래의 말에 소녀 나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어, 너도 나고, 나도 너고, 우린 나래야, 최나래."
성인 나래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최나래는 나야. 너는.... 나래가 아니라... 나래인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이야."
순간 소녀 나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
"숨고 싶었던... 도망가고 싶었던 나는... 그림자가 돼버렸고,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 뒤에 숨었던 거야. 그게... 지금의 네가 된 거고. 내가 돌아가고 싶던 시절의 모습, 내가 가지고 싶었던 용기, 내가 품고 싶었던 밝은 모습.... 그 모든 나의 바램이 뭉쳐서 네가 된 거라고. 너는 내가 아냐. 너는.... 너는 내 바램이야."
성인 나래의 말에 소녀 나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체 멍하니 서 있었다.
엄청난 정신적 충격에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나래가 아니라, 나래의 마음이 투영된 존재라는 사실이 어쩐지 진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 나는...."
소녀 나래는 무슨 말인가를 해보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너무 혼란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래의 어린 시절 동네 풍경부터 근래의 풍경까지, 온 세상의 시간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게 대체...."
당황해하는 나래의 손을 꼭 잡은 백하도령이 거침없이 어딘가를 향해 걸으며 말했다.
"이곳은 너의 심연이자, 너의 마음이고, 너의 기억이다. 이곳은 네가 존재했던 모든 순간들의 집합이며, 네가 살아온 너의 삶이다. 잊지 말거라. 이것은 너의 발자국이니, 이로써 지금의 네가 있는 것임을."
앞장서 가던 백하도령이 멈춰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중얼거렸다.
"낌새가 사라져 버렸다."
이어 나래를 돌아보며 물었다.
"잘 생각해 보거라. 네가 자주 가서 몸을 숨기던 곳이 있었더냐?"
나래는 백하도령의 질문에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이 자주 가던 곳, 몸을 숨기던 곳이라면...
"만화방이요."
"만화방?"
"네. 친구랑 같이 가던 만화방이 있어요. 어릴 땐 곧잘 거기 가 있곤 했었어요. 거기 가면 아주머니가 귀엽다고 호빵도 주곤 하셨거든요."
"그곳이 어디냐?"
백하도령의 물음에, 나래는 어딘가를 가리켰고, 백하도령은 나래가 가리킨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가 자주 가던 만화방의 입간판이 보였고, 백하도령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 만화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아까부터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백하도령을 보며 의아한 듯 물으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손을 계속 잡고 있냐고 물으려는데,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오셨수?"
온화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할머니를 보며, 나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이 만화방의 주인은 이 할머니보다 훨씬 젊은 아주머니였다.
어린 시절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할머니가 눈앞에서 손님을 받고 있으니, 나래는 이상해서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백하도령이 할머니를 보며 답하는 사이, 누군가 나래를 향해 달려오며 반갑게 소리쳤다.
"나래야!"
나래가 고개를 돌려보니, 어린 시절 함께 만화방에 자주 왔던 친구 영이었다.
"영아?"
나래가 놀란 얼굴로 영이를 바라보자, 영이가 나래를 와락 껴안았다.
"왜 이제 왔어? 아까부터 한참 기다렸잖아."
나래는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어린 시절 영이를 다시 보니 기쁘고 반가웠다.
나래가 중학교 진학할 무렵, 영이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렸고, 그 이후로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근데... 이 오빠는 누구야?"
영이가 백하도령을 보며 묻는 말에, 나래의 시선 역시 백하도령에게로 향했다.
"아... 백하도령님.... 이셔..."
나래는 소개를 하면서도 뭔가 이상한 듯 머뭇거렸고, 영이는 재밌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 도령? 하하, 도령님이라고?"
그런데 아까부터 백하도령의 표정이 이상했다.
평소 같지 않게 딱딱하고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고, 진중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나래가 백하도령을 보며 조심스럽게 묻자, 백하도령이 물었다.
"잘 기억해 보거라. 혹, 이곳에 네 기억과 다른 낯선 것이 있느냐?"
그 말에 나래는 다시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어린 시절 보았던 풍경 그대로였던지라,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했다.
"똑같아요. 단지... 제가 아는 여기 사장님은 아주머니 셨어요."
말을 하며 할머니를 돌아보니, 할머니의 웃음에 어쩐지 묘하게 등골이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백하도령은 할머니를 응시하며 일갈했다.
"잔재주는 그만 피우고, 정체를 밝히거라."
백하도령의 호통 소리에 주위가 지진 난 듯이 덜덜 거리기 시작했고, 영이를 비롯해 주위에서 만화책을 보던 이들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겁이 난 나래는 얼른 백하도령에게 바짝 붙어 소매를 꼭 잡았는데, 놀랍게도 백하도령만은 이 진동 속에서 떨리지 않고 멀쩡했다.
"이제 보니, 네놈은 다른 누리의 신이로구나."
할머니는 어느새 부리부리한 눈으로 백하도령을 노려보았다.
말을 하는 사이 할머니의 몸집이 두배 정도 더 커지고, 하얀 백발이 길게 늘어져 펄럭였다.
"나는 시간할망이다. 이 세계에서는 내가 신이지. 네놈이 어느 곳의 신인지는 모르나, 이곳에서는 오직 나만이 신이다."
나래는 시간할망의 본모습을 보고 겁이 덜컥 났지만, 백하는 두려움 없는 눈빛으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무례함이 있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우리 의도가 아니었으니,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을 찾고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백하도령의 공손한 말에 시간할망이 깔깔 거리며 웃어댔다.
"내 손에 들어온 소중한 장난감을 내 그리 쉽게 내어줄 수는 없지. 네 등 뒤에 숨어 벌벌 떨고 있는 저 아이를 내게 준다면, 네놈은 기꺼이 돌려보내 주마."
시간할망의 협박에도 백하도령은 도리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곳에서 신이라니,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 아이는 다른 누리에서 온 아이이니, 돌려보내 줄 수 있도록,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흥, 내 너희들을 호락호락 보내줄 성싶으냐?"
백하는 이대로는 위험하다고 판단한 듯, 자기 옆에 붙은 나래를 한쪽 팔로 감아 꼭 붙잡았다.
"일단 피해야겠다."
백하는 말과 동시에 온몸에서 푸른 섬광을 일으키며 가게 벽을 뚫고 밖으로 나갔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부서진 벽 너머로 쏜살같이 날아오른 백하가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른 것도 잠시, 어떤 강력한 힘에 이끌려 왔던 그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읏..."
백하가 그 힘에 저항해 보려 했으나, 속수무책이었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백하가 부서뜨린 모든 것들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소용없다."
시간할망이 백하를 보며 말했다.
"네가 무엇을 하든지, 나는 이곳의 시간을 되돌려 놓을 수 있다. 보아하니 네놈이 가진 힘이 우뢰의 힘인 모양인데, 그런 힘이라면 이 나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백하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나래를 돌아보자, 나래도 황망한 표정으로 백하를 마주 보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도움 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이 세계는 필경 너와 관련이 있다. 이곳은 너의 심연이니... 마치 네게는 꿈과 같은 공간일 터,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백하의 말에 나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곳이 자기의 심연이자 꿈과 같은 공간이란 생각에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으하하하, 소용이 없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시간할망의 말에 백하가 그녀를 응시하며 가만히 있다가 물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대 역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듯 하구나."
백하의 말에 시간할망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이곳은 흡사 늪과도 같으니, 늪에 빠진 이들이 빠져나가려 발버둥 칠 때마다, 시간을 되돌리며 그들의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것이겠지. 허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대 역시 되돌릴만한 것이 없을 터. 우리는 이대로 있을 것이다."
시간할망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백하를 노려보았다.
"이노옴.... 제법 눈치가 빠른 녀석이로구나."
그 사이 나래는 계속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가게, 이 풍경, 만나고 싶었던 영이까지... 나래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돌아가고 싶었던 순간, 가장 행복했다고 기억하는 바로 그때 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순수하게 친구 영이와 즐길 수 있었던 그 순간들, 너무 소중해서 보석 같은 시간들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어려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만화방이냐고 말할지 몰라도, 나래에게는 돌이켜 본 시간 중에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다.
"그래, 나도 돌아가고 싶었어. 영이랑 같이 이야기하던 그때로... 하지만, 그 순간만 소중한 건 아니잖아."
나래가 마치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듯 말을 하자, 가게 안은 다시 우르르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시간할망이 놀라 당혹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왜? 왜 그러는 것이냐?"
거대한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사방에 모든 것이 사라져 갔다.
"백하도령님!"
나래는 자신이 붙잡고 있던 백하도령마저 사라지자 당황하여 그를 불러보았지만, 어디에도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
시커먼 어둠 속 한복판에 오직 혼자만 서 있었다.
그리고 들려왔다.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가.
-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나래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몸을 돌렸고, 거기에는 현실에서의 자신 모습인, 36살의 나래가 서 있었다.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고, 소녀 나래는 그런 성인 나래를 보며 말했다.
"그 모든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야."
소녀 나래를 보며 성인 나래가 말했다.
"너는 아직도... 네가 나인 줄 아는 모양이구나."
성인 나래의 말에 소녀 나래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너는 나야. 너는 내 그림자고, 우린 하나야."
성인 나래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
"틀렸어. 너는 나래가 아냐. 나래는 나야. 아직도 모르겠어?"
성인 나래의 말에 소녀 나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어, 너도 나고, 나도 너고, 우린 나래야, 최나래."
성인 나래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최나래는 나야. 너는.... 나래가 아니라... 나래인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이야."
순간 소녀 나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
"숨고 싶었던... 도망가고 싶었던 나는... 그림자가 돼버렸고,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 뒤에 숨었던 거야. 그게... 지금의 네가 된 거고. 내가 돌아가고 싶던 시절의 모습, 내가 가지고 싶었던 용기, 내가 품고 싶었던 밝은 모습.... 그 모든 나의 바램이 뭉쳐서 네가 된 거라고. 너는 내가 아냐. 너는.... 너는 내 바램이야."
성인 나래의 말에 소녀 나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체 멍하니 서 있었다.
엄청난 정신적 충격에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나래가 아니라, 나래의 마음이 투영된 존재라는 사실이 어쩐지 진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 나는...."
소녀 나래는 무슨 말인가를 해보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너무 혼란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