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 #3
자욱한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몽환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흡사 보랏빛으로 보이는 짙은안개가 펼쳐진 것이 평소 볼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그런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어딘가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지, 얼마큼 걸어왔는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가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나리."
누군가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나리."
비로소 고개를 든 그의 눈앞에 낯익은 누군가가 그를 부르며 서있었고, 앞으로 나아가던 그는 발걸음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누구냐?"
그가 물었다.
"나리. 백무입니다."
"백무?"
그는 순간 혼란스러웠다.
백무가 누구지? 이어 또다시 궁금해졌다. 나는 누구지?
"부총관 나리. 이름을 떠올리십시오."
부총관? 익숙한 호칭이다.
"나리의 성함은 임 수자 현자, 임수현입니다."
그랬다. 그는 바로 수현이었다.
수현은 자신의 이름을 듣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엄청난 무기력증이 수현의 의식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깨어나십시오. 죽음에게 이끌려 가서는 안됩니다."
수현은 흐릿해지는 의식을 붙잡으려 애를 썼다.
"돌아가십시오. 더 이상 이리 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나리는 아직... 살아계십니다."
수현은 얼굴에 힘을 주며, 의식이 무의식 속에 묻히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자네는.... 자네도 함께 가야지."
수현의 말에 백무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나리... 저는 이미 죽었습니다."
수현이 그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가...?"
"예, 나리.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제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왔으며, 그 아이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아이를 믿고, 제게 그랬던 것처럼 도움을 청하십시오."
수현은 백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네. 나 때문에... 지켜주지 못했어."
백무는 온화한 미소를 지은 체 수현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제 운명이었습니다. 제 힘이 약해져 정확히 언제 죽게 될지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제... 어서 돌아가십시오. 나리는 아직 하실 일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백무의 말에 수현은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다시 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의식은 자꾸 백무가 있는 쪽으로 가려했기에, 의식을 잃지 않으려 애를 써가며, 한걸음 한걸음을 어렵게 옮겨야 했다.
"미안하네... 미안하네...."
수현은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으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
비로소 눈을 뜬 수현은, 눈을 뜸과 동시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으...."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고, 그 곁에 있던 세자는 의식을 차린 수현을 보고 놀라 외쳤다.
"금호!"
그와 동시에 한걸음 물러나 있던 홍여립과 조세춘이 곁으로 다가왔고, 의원이 수현의 상태를 살폈다.
모두가 수현이 깨어나자 안도감에 기쁜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다행히 고비를 넘긴 듯합니다."
의원의 말에 세자는 물론,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사람아,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조세춘이 참지 못하고 물었지만, 수현은 통증 때문인지 대답 없이 신음소리만 흘렸다.
"아니다. 지금은 그저 쉬거라. 오로지 낫는 것만 신경 쓸 때이다."
세자가 말하자, 의원이 이어 말했다.
"예, 저하. 하옵고, 이제 고비를 넘겼으니, 충분한 휴식과 치료를 위해 환자와 저를 제외하고 모두가 자리를 비워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래. 알겠네. 잘 부탁하네"
의원에게 당부한 세자는 확인하듯 수현의 얼굴을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수현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자리를 비워주세"
세자를 비롯한 일동은 모두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상태였다.
홍여립은 나오자마자 세자에게 말을 건네었다.
"저하, 소신은 이만 전하 곁으로 돌아가겠나이다."
"그래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저하. 저하께서도 이제 그만 동궁전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에, 그래야죠."
홍여립이 공손히 인사를 하고 돌아가자, 조세춘이 세자에게 말했다.
"저하, 동궁전으로 가시지요."
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궁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현이 죽지 않아 천만다행이라며 연신 가슴을 쓸어내리던 세자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가만... 수현이 지금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라면... 연희는 누가 지킨단 말인가.'
세자가 조세춘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보게. 지금 궁궐 밖에 있는 연희가 매우 위험한 상태이네."
조세춘은 뜬금없는 세자의 말에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연...희라...하심은, 일전에 그 사교도 무리에서 구했다는 여인 말씀이십니까?"
"아, 자네는 모르고 있었던가? 금호의 가택 인근에 머물고 있는데... 지금 금호가 저렇게 쓰러진 마당에 더 이상 그곳은 안전하지 않은 것 같으이."
"허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녀를 궁으로 데려올 방법이 없겠는가?"
조세춘이 눈을 몇 번 껌뻑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되물었다.
"연희라는 여인을 궁궐로 데려올 적당한 명분을 찾고자 하심입니까?"
세자가 조세춘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네."
"허면, 꼭 연희라는 여인으로써 올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조세춘의 말에 세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조세춘이 말을 이었다.
"간단하게는, 의관에게 부탁하여 내의녀로써 들인 다음, 금호를 간병케 하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조세춘의 말에 세자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군. 그리 간단한 방법도 있었어."
그러고 보니 세자는 예전에 연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지."
세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조세춘이 의문스러운 눈으로 세자를 쳐다봤다.
"예?"
"아, 아닐세. 그래, 내 의관에게 말해둘 터이니, 자네가 가서 준비를 도와주겠는가?"
"예. 그리하겠습니다. 염려치 마시고, 이만 동궁전으로 돌아가 쉬십시오. 금호도 금호지만, 저하도 휴식이 필요하옵니다."
"알겠네. 자네는 어서 서둘러 준비해 주게."
허나 세자는 동궁전이 아닌 의원을 만나기 위해 다시 수현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그런 세자의 뒷모습을 보며 조세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
연희는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금세 붉어진 눈시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다행히 고비를 넘겼다 하니, 곧 쾌차할 것이다."
조세춘의 말에 연희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천만다행입니다."
"그래. 하늘이 무심치 않았어. 어쨌든 그 일로 인해, 저하께서 너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신다. 이곳은 위험하니, 궁으로 와 있으라 명하셨다."
그 말에 연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오나... 제가 궁으로 가게 되면... 저하께 짐이 될까 염려되옵니다."
연희의 말에 조세춘이 걱정말라는듯이 웃어 보였다.
"그래. 알고 있다. 해서, 네가 '사교도들 사이에서 저하가 구해낸 여인'이 아니라, 의녀로써 입궁하게 될 것이다."
연희는 놀라 되물었다.
"예? 제가요? 제가 어찌...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염려치 말거라.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너는 오늘부로 혜민서(惠民署)에 초학의녀(初學醫女)가 된 것이고, 의관의 요청에 따라 입궁하여 금호의 곁에서 간병하게 될 것이다."
연희는 무슨 말인지 금세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바로 채비가 끝나는대로 나가자. 지체할 시간이 없다."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곧 밖으로 나왔다.
신을 신고 막 나오던 조세춘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옆으로 따라 나오던 연희도 마찬가지로 놀라 멈춰섰다.
호위하고 있던 병사들이 쓰러져있고, 그 가운데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듯이 서 있었다.
연희는 그가 주동환임을 알아보고 조세춘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뭐 하는 겁니까?"
주동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나와 함께 가자."
주동환의 말에 연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를 잡아가시려는 겁니까?"
연희의 물음에 주동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쓸쓸한 눈빛으로 연희를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말없이 바라보다가,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는 한 번도... 너에게 무엇도 강요한 적이 없다."
연희는 외로이 서있는 그를 보니, 왠지 마음속에서 안타까움이 솟아올랐으나 애써 밀어내며 단호히 말했다.
"허면... 보내주십시오. 입궁할 것입니다."
"입궁하면? 그곳에서 누가 너를 반긴다더냐? 사교도 무리에서 잡혀온 여인을?"
연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망설이던 연희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저하가 부르십니다. 가볼 것입니다."
주동환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세자가 찾는다고? 세자가 너를 어찌 생각할 듯 싶으냐? 네가 세자의 곁에 있을 수 있을 것이라 보느냐?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주동환이 손을 내밀었다.
"가자. 나와 함께 가자. 언제나 네가 웃을 수 있게. 네가 마음 아프지 않게. 오직 너만을 위해 살 것이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나와 함께 살자. 내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주동환의 애절한 모습을 보며, 연희는 마음이 아파옴을 느꼈다.
잠시나마 저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연희는 이미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기억할 순 없지만 가슴속에서 느껴지는 주동환을 향한 감정은 남녀간의 애정이 아닌 남매간에 우애와 같음을....., 연희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입궁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 의지입니다."
순간 주동환은 내밀었던 손을 꽉 움켜 주먹쥐고는 낮고 강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곳에 가면.... 세자가 아닌, 네가 고통받게 될 것이다. 오직 너만 힘들 것이다. 설령 세자의 곁에 서게 된다 한들, 수많은 이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 것이고, 정쟁에 휘말려 언제 죽을지 몰라 가슴 졸이며 살게 될 것이다. 부탁이다. 나를 따라오지 않아도 좋으니, 입궁하지 말거라. 그곳은 네게 있어, 지옥과도 같을 것이니."
연희는 다시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곳이 불길 속이라 하더라도 가겠습니다."
단호한 의지를 보인 연희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조세춘은 주동환의 눈치를 살피며 살금 살금 연희 곁을 따라 걸었고, 주동환은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연희를 돌아보지 않은 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있던 주동환은 멀어져가는 그녀에게 여전히 돌아보지 않으며 다짐하듯 말했다.
"기다릴 것이다. 며칠,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이 걸린다 해도 기다릴 것이다. 허니, 돌아오거라. 가서 힘들거든, 괴롭거든, 미련하게 참지 말고 돌아오란 말이다. 십년이든 이십년이든, 나는... 네가 돌아오길 기다릴 것이다."
차라리 강요라도 하면 나을 것을. 연희는 주동환의 고요한 목소리를 들으며 연민으로 마음이 아파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제가... 대체 제가 대관절 무엇입니까?"
연희 역시 차마 돌아보지 못한 체, 등 뒤에서 물었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주동환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전부다."
연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굳게 다짐했다.
자신의 모호한 태도는 오히려 그에게 득이 아닌 독이 될 것이다.
자신에게 아낌없이 애정을 주는 주동환에게는 미안하지만 가야 한다. 지금 가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이미 알고있고 확고한 이상, 이제 더는 그에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보여 희망을 주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는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힘겹게 옮겼다.
흡사 보랏빛으로 보이는 짙은안개가 펼쳐진 것이 평소 볼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그런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어딘가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지, 얼마큼 걸어왔는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가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나리."
누군가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나리."
비로소 고개를 든 그의 눈앞에 낯익은 누군가가 그를 부르며 서있었고, 앞으로 나아가던 그는 발걸음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누구냐?"
그가 물었다.
"나리. 백무입니다."
"백무?"
그는 순간 혼란스러웠다.
백무가 누구지? 이어 또다시 궁금해졌다. 나는 누구지?
"부총관 나리. 이름을 떠올리십시오."
부총관? 익숙한 호칭이다.
"나리의 성함은 임 수자 현자, 임수현입니다."
그랬다. 그는 바로 수현이었다.
수현은 자신의 이름을 듣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엄청난 무기력증이 수현의 의식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깨어나십시오. 죽음에게 이끌려 가서는 안됩니다."
수현은 흐릿해지는 의식을 붙잡으려 애를 썼다.
"돌아가십시오. 더 이상 이리 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나리는 아직... 살아계십니다."
수현은 얼굴에 힘을 주며, 의식이 무의식 속에 묻히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자네는.... 자네도 함께 가야지."
수현의 말에 백무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나리... 저는 이미 죽었습니다."
수현이 그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가...?"
"예, 나리.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제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왔으며, 그 아이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아이를 믿고, 제게 그랬던 것처럼 도움을 청하십시오."
수현은 백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네. 나 때문에... 지켜주지 못했어."
백무는 온화한 미소를 지은 체 수현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제 운명이었습니다. 제 힘이 약해져 정확히 언제 죽게 될지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제... 어서 돌아가십시오. 나리는 아직 하실 일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백무의 말에 수현은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다시 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의식은 자꾸 백무가 있는 쪽으로 가려했기에, 의식을 잃지 않으려 애를 써가며, 한걸음 한걸음을 어렵게 옮겨야 했다.
"미안하네... 미안하네...."
수현은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으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
비로소 눈을 뜬 수현은, 눈을 뜸과 동시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으...."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고, 그 곁에 있던 세자는 의식을 차린 수현을 보고 놀라 외쳤다.
"금호!"
그와 동시에 한걸음 물러나 있던 홍여립과 조세춘이 곁으로 다가왔고, 의원이 수현의 상태를 살폈다.
모두가 수현이 깨어나자 안도감에 기쁜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다행히 고비를 넘긴 듯합니다."
의원의 말에 세자는 물론,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사람아,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조세춘이 참지 못하고 물었지만, 수현은 통증 때문인지 대답 없이 신음소리만 흘렸다.
"아니다. 지금은 그저 쉬거라. 오로지 낫는 것만 신경 쓸 때이다."
세자가 말하자, 의원이 이어 말했다.
"예, 저하. 하옵고, 이제 고비를 넘겼으니, 충분한 휴식과 치료를 위해 환자와 저를 제외하고 모두가 자리를 비워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래. 알겠네. 잘 부탁하네"
의원에게 당부한 세자는 확인하듯 수현의 얼굴을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수현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자리를 비워주세"
세자를 비롯한 일동은 모두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상태였다.
홍여립은 나오자마자 세자에게 말을 건네었다.
"저하, 소신은 이만 전하 곁으로 돌아가겠나이다."
"그래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저하. 저하께서도 이제 그만 동궁전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에, 그래야죠."
홍여립이 공손히 인사를 하고 돌아가자, 조세춘이 세자에게 말했다.
"저하, 동궁전으로 가시지요."
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궁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현이 죽지 않아 천만다행이라며 연신 가슴을 쓸어내리던 세자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가만... 수현이 지금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라면... 연희는 누가 지킨단 말인가.'
세자가 조세춘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보게. 지금 궁궐 밖에 있는 연희가 매우 위험한 상태이네."
조세춘은 뜬금없는 세자의 말에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연...희라...하심은, 일전에 그 사교도 무리에서 구했다는 여인 말씀이십니까?"
"아, 자네는 모르고 있었던가? 금호의 가택 인근에 머물고 있는데... 지금 금호가 저렇게 쓰러진 마당에 더 이상 그곳은 안전하지 않은 것 같으이."
"허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녀를 궁으로 데려올 방법이 없겠는가?"
조세춘이 눈을 몇 번 껌뻑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되물었다.
"연희라는 여인을 궁궐로 데려올 적당한 명분을 찾고자 하심입니까?"
세자가 조세춘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네."
"허면, 꼭 연희라는 여인으로써 올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조세춘의 말에 세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조세춘이 말을 이었다.
"간단하게는, 의관에게 부탁하여 내의녀로써 들인 다음, 금호를 간병케 하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조세춘의 말에 세자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군. 그리 간단한 방법도 있었어."
그러고 보니 세자는 예전에 연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지."
세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조세춘이 의문스러운 눈으로 세자를 쳐다봤다.
"예?"
"아, 아닐세. 그래, 내 의관에게 말해둘 터이니, 자네가 가서 준비를 도와주겠는가?"
"예. 그리하겠습니다. 염려치 마시고, 이만 동궁전으로 돌아가 쉬십시오. 금호도 금호지만, 저하도 휴식이 필요하옵니다."
"알겠네. 자네는 어서 서둘러 준비해 주게."
허나 세자는 동궁전이 아닌 의원을 만나기 위해 다시 수현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그런 세자의 뒷모습을 보며 조세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
연희는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금세 붉어진 눈시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다행히 고비를 넘겼다 하니, 곧 쾌차할 것이다."
조세춘의 말에 연희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천만다행입니다."
"그래. 하늘이 무심치 않았어. 어쨌든 그 일로 인해, 저하께서 너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신다. 이곳은 위험하니, 궁으로 와 있으라 명하셨다."
그 말에 연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오나... 제가 궁으로 가게 되면... 저하께 짐이 될까 염려되옵니다."
연희의 말에 조세춘이 걱정말라는듯이 웃어 보였다.
"그래. 알고 있다. 해서, 네가 '사교도들 사이에서 저하가 구해낸 여인'이 아니라, 의녀로써 입궁하게 될 것이다."
연희는 놀라 되물었다.
"예? 제가요? 제가 어찌...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염려치 말거라.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너는 오늘부로 혜민서(惠民署)에 초학의녀(初學醫女)가 된 것이고, 의관의 요청에 따라 입궁하여 금호의 곁에서 간병하게 될 것이다."
연희는 무슨 말인지 금세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바로 채비가 끝나는대로 나가자. 지체할 시간이 없다."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곧 밖으로 나왔다.
신을 신고 막 나오던 조세춘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옆으로 따라 나오던 연희도 마찬가지로 놀라 멈춰섰다.
호위하고 있던 병사들이 쓰러져있고, 그 가운데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듯이 서 있었다.
연희는 그가 주동환임을 알아보고 조세춘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뭐 하는 겁니까?"
주동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나와 함께 가자."
주동환의 말에 연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를 잡아가시려는 겁니까?"
연희의 물음에 주동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쓸쓸한 눈빛으로 연희를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말없이 바라보다가,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는 한 번도... 너에게 무엇도 강요한 적이 없다."
연희는 외로이 서있는 그를 보니, 왠지 마음속에서 안타까움이 솟아올랐으나 애써 밀어내며 단호히 말했다.
"허면... 보내주십시오. 입궁할 것입니다."
"입궁하면? 그곳에서 누가 너를 반긴다더냐? 사교도 무리에서 잡혀온 여인을?"
연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망설이던 연희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저하가 부르십니다. 가볼 것입니다."
주동환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세자가 찾는다고? 세자가 너를 어찌 생각할 듯 싶으냐? 네가 세자의 곁에 있을 수 있을 것이라 보느냐?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주동환이 손을 내밀었다.
"가자. 나와 함께 가자. 언제나 네가 웃을 수 있게. 네가 마음 아프지 않게. 오직 너만을 위해 살 것이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나와 함께 살자. 내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주동환의 애절한 모습을 보며, 연희는 마음이 아파옴을 느꼈다.
잠시나마 저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연희는 이미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기억할 순 없지만 가슴속에서 느껴지는 주동환을 향한 감정은 남녀간의 애정이 아닌 남매간에 우애와 같음을....., 연희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입궁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 의지입니다."
순간 주동환은 내밀었던 손을 꽉 움켜 주먹쥐고는 낮고 강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곳에 가면.... 세자가 아닌, 네가 고통받게 될 것이다. 오직 너만 힘들 것이다. 설령 세자의 곁에 서게 된다 한들, 수많은 이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 것이고, 정쟁에 휘말려 언제 죽을지 몰라 가슴 졸이며 살게 될 것이다. 부탁이다. 나를 따라오지 않아도 좋으니, 입궁하지 말거라. 그곳은 네게 있어, 지옥과도 같을 것이니."
연희는 다시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곳이 불길 속이라 하더라도 가겠습니다."
단호한 의지를 보인 연희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조세춘은 주동환의 눈치를 살피며 살금 살금 연희 곁을 따라 걸었고, 주동환은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연희를 돌아보지 않은 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있던 주동환은 멀어져가는 그녀에게 여전히 돌아보지 않으며 다짐하듯 말했다.
"기다릴 것이다. 며칠,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이 걸린다 해도 기다릴 것이다. 허니, 돌아오거라. 가서 힘들거든, 괴롭거든, 미련하게 참지 말고 돌아오란 말이다. 십년이든 이십년이든, 나는... 네가 돌아오길 기다릴 것이다."
차라리 강요라도 하면 나을 것을. 연희는 주동환의 고요한 목소리를 들으며 연민으로 마음이 아파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제가... 대체 제가 대관절 무엇입니까?"
연희 역시 차마 돌아보지 못한 체, 등 뒤에서 물었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주동환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전부다."
연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굳게 다짐했다.
자신의 모호한 태도는 오히려 그에게 득이 아닌 독이 될 것이다.
자신에게 아낌없이 애정을 주는 주동환에게는 미안하지만 가야 한다. 지금 가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이미 알고있고 확고한 이상, 이제 더는 그에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보여 희망을 주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는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힘겹게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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