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3
담벼락에 걸터앉았던 주동환은 가벼운 동작으로 마당에 내려섰다.
그는 한껏 반가운 얼굴로 연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놀란 연희가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누... 누구요? 소리를 지를 것이오."
연희의 말에 주동환은 그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여... 연희야. 나야.... 나 영호야. 왜 그러는 거야?"
주동환, 아니 자신을 영호라고 칭하는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황한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봤다.
"누구? 난... 난 그런 사람 모릅니다. 난.... 나는..."
연희가 당혹해하는 사이, 그의 얼굴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어찌 된 것이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야?"
연희는 다시금 그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어쩐 지 낯익은 듯, 아니 또 낯선 듯 묘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 알던 사람이었을까?
그러나 어떻게 알던 사람이었을까? 가까운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기억을 잃었단 사실을 알고 자신을 이용하려 드는 것일까?
온갖 의문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맴돌고 있을 때, 주동환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혹여,,,기억을 잃은 것이냐?"
연희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주동환은 실망스런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연희를 지긋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나 이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긴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연희를 향해 웃으며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괜찮다. 까짓 거 다시 처음부터 하면 될 것이다. 나는 주동환이다. 알아두거라."
연희가 아미를 찌푸리며 의심스럽다는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방금 전.... 영호라고...하지 않았습니까?"
주동환이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영호면 어떻고 주동환이면 어떠하냐. 중한 것은 너와 내가 다시 만났다는 것이다."
연희는 여전히 의혹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 하마.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다만... 내가 너에게 위해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아두거라. 이 세상에 너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란 것도 잊지 말거라."
이어 주동환이 명심하라는듯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세자 가까이에 가지 말거라. 그는 네게 아주 위험한 사람이다."
순간 연희의 얼굴에서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찌 그렇습니까?"
"그는.... 네 진짜 정체를 알게 되면, 어느 누구보다 너를 증오할 것이기 때문이다."
연희는 충격에빠져 두려움 어린 시선으로 주동환을 바라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때, 밖에 서 있던 호위병들이 인기척 소리를 들었는지, 안으로 들어오다 주동환을 발견하고 놀라 소리쳤다.
"웬 놈이냐?"
주동환은 그들을 힐끔 보더니, 연희에게 다정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에 다시 보자."
병사들이 재빨리 주동환에게 달려들었지만, 주동환은 그보다 빠른 동작으로 바람같이 담벼락을 너머 바깥으로 나갔다.
"고수다!"
병사들이 놀라 소리치며, 부랴부랴 집 밖으로 몰려 나갔다.
연희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대체 누구일까. 누구길래 저리 말하는 것일까.
연희의 머릿속은 다시 복잡해졌다. 마치 안개가 낀듯 뿌옇고 암담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연희의 기억 속에 저 사람의 목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일전에 윤호성 대감을 조심하라 일러주던 목소리도, 연희를 애틋하게 부르던 목소리도, 바로 방금 전 저 남자의 목소리였다.
누구일까.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나는...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끝이 없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갔다.
***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예판 옆으로, 이상함을 느낀 아내가 다가와 앉았다.
"대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어찌 얘기를 안 하십니까?"
그러나 예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깊은 시름이 담긴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도로 일어나려 했다.
그때서야 예판이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봉혼벽륜이란 물건이 있소."
아내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려던 몸을 도로 내렸다.
"봉혼...뭐요?"
아내의 되물음을 못 들었는지, 예판은 자기 말을 이어 나갔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붙잡아, 구천에 남아있게 한다는 물건이더이다. 내 주술 좀 한다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예령이는 숨만 쉬지 이미 죽은 사람이라 하더이다. 영혼이 이미 떠나고 없다고... 그래, 이 물건이 있단 소리에, 내 당장 훔쳐왔소. 이제 주술로 영혼을 불러내고 이 물건으로 붙잡아 두면 되겠거니... 그리 생각했건만... 그 물건이 망가져 쓰지 못한다 하더군."
아내는 예판의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금 떨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 물건은 어찌하셨소?"
예판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봉혼벽륜을 집어 들었다.
"도로 가져다 주어야 겠구료. 도총부 물건이라 지금쯤 찾고 있을 터인데..."
아내는 그런 예판이 불쌍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예령이 품에 안겨주시구랴."
예판이 의아한 얼굴로 아내를 돌아보았다.
"기일도 정합시다. 예령이 쓰러지던 날로. 먼저 죽은 자식, 제사 지내는 거 아니라지만, 혹시 모르잖소. 상이라도 차려주면 밥 먹으러 올지. 왜, 제사 지내면 조상신들 와서 밥 한 그릇씩 먹고 간다지 않습니까? 그렇게라도 예령이 왔을 때, 그 물건 있으면 좀 더 머물다 가지 않겠습니까?"
아내의 말에 예판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주저하는 목소리로 봉혼벽륜을 집어 들고 이야기했다.
"허나... 이 물건은 도총부 물건이라... 이것을 훔쳐온 것을 알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오."
"어차피, 벌어진 일, 이제와 없던 일이랄 수도 없고.... 나쁜 일도 하려면 끝까지 하랬다고, 기왕에 훔쳐온 거 대감 뜻대로 하시구랴. 어차피 이 지경이 된 마당에, 예령이를 마냥 방에 둘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내 이미 비구니들만 있는 적당한 절을 알아보았으니, 그곳에 예령이를 맡겨두십시다. 제 아무리 도총부라 할지라도, 우리가 얘기하지 않으면 어디 있는지 찾아내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예판은 아내의 말에 짊어지고 있던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논듯 온화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판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봉혼벽륜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때, 수현은 때마침 백무의 집을 찾았다.
소연은 찾아온 수현을 보고 공손히 인사를 한 뒤, 백무를 불렀고, 때마침 부엌에 있던 백무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오셨습니까, 나리..."
백무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며 난처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수현을 쳐다보았다.
눈치 빠른 수현은 그런 백무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좀... 보셨습니까?"
곤란한 백무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머뭇거리며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것이... 나리..."
그런 백무를 향해 수현이 마음쓰지 말라는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알아낸 것이 없다 하셔도 괜찮습니다. 화급을 다툴 정도의 일은 아니니, 저희가 천천히 알아보면 됩니다."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난감해하는 백무 곁으로 소연이 다가와 촐랑거리듯 일러바쳤다.
"예판대감께서 벽륜봉을 뺏어가셨습니다."
백무가 입술에 힘을 주며 소연에게 경고하듯 노려보았고, 수현은 놀라 되물었다.
"예판대감이요?"
수현의 의문에, 자신을 쏘아보는 백무의 눈치를 보던 소연이 불평 어린 표정으로 수현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예, 분명 그리했습니다. 도둑놈처럼 벽륜봉을..."
"소연아!"
백무의 타박에 소연이 입술을 삐죽거리자, 백무가 얼른 나서 말했다.
"송구합니다. 나리. 뜻하지 않은 일에 저도 당황하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대감께..."
"아닙니다."
수현이 백무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입장이 난처하실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조판서가 물건을 뺏어 갔으니, 돌려달라 말하기 힘드시겠지요. 제가 가서 청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무는 그저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뿐이었다.
"헤아려 살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나저나, 예판이 어찌 그랬을까요?"
수현의 물음에 백무가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이실직고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으나, 대감댁 애기씨가 3년 전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었죠."
수현은 그제야 생각나는 듯 "아!" 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래, 그랬었죠. 아직도 일어나지 못했다 들었습니다만...."
"예...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상태를 보아하니, 육신만 살아있을 뿐, 이미 영혼은 육신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수현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쯧쯧... 헌데, 그런 분이 어찌..."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듯합니다. 세상에 자기 자식을 포기하는 부모가 있겠냐마는... 제게 소혼술을 부탁하시더군요."
"소혼술이요?"
"예, 세상으로 영혼을 불러들여, 봉혼벽륜의 힘으로 구천에 머물게 하면 되지 않느냐 하시더군요."
수현은 어이없는 실소를 지었다.
"허허... 알만하신 분이..."
"차마 말하지 못했으나, 이미 저승에 간 영혼을 소혼술로 부른다 한들, 육신에 깃들지 못합니다. 이승과의 인연이 끊어졌기 때문이죠. 육신에 깃들기 위해서는 이승에 인연이 남아있는 영혼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판 대감께서는 그러한 설명도 체 다 들으시기 전에, 봉혼벽륜을 가지고 나가 버리셨습니다."
수현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놔둘 수도 없는 일이군요. 때마침 근자에 들어 세자빈 간택을 다시 하자는 상소에 올라오고 있습니다. 3년을 기다렸으니, 그만큼 기다렸으면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뜻이지요. 그와 함께 예판의 입지도 이미 많이 좁아진 터입니다. 그저 안타깝군요. 예판대감은 제가 만나볼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예, 나리."
밖으로 나온 수현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길을 지나는 행인들 사이로, 수현은 묵묵히 걸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수현의 곁을 스쳐지나가는중 한 사람이 실수인듯 어깨를 부딪히고는 사과의 인사하고 지나갔다.
수현도 마주 인사를 하고는 딱히 의식하지않으며 다시 길을 걸었다. 하지만 상대는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걸어가는 수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벼운 웃음을 짓는 그는, 다름 아닌 주동환이었다.
그리고 그는 수현의 뒷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는 한껏 반가운 얼굴로 연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놀란 연희가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누... 누구요? 소리를 지를 것이오."
연희의 말에 주동환은 그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여... 연희야. 나야.... 나 영호야. 왜 그러는 거야?"
주동환, 아니 자신을 영호라고 칭하는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황한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봤다.
"누구? 난... 난 그런 사람 모릅니다. 난.... 나는..."
연희가 당혹해하는 사이, 그의 얼굴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어찌 된 것이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야?"
연희는 다시금 그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어쩐 지 낯익은 듯, 아니 또 낯선 듯 묘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 알던 사람이었을까?
그러나 어떻게 알던 사람이었을까? 가까운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기억을 잃었단 사실을 알고 자신을 이용하려 드는 것일까?
온갖 의문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맴돌고 있을 때, 주동환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혹여,,,기억을 잃은 것이냐?"
연희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주동환은 실망스런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연희를 지긋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나 이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긴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연희를 향해 웃으며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괜찮다. 까짓 거 다시 처음부터 하면 될 것이다. 나는 주동환이다. 알아두거라."
연희가 아미를 찌푸리며 의심스럽다는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방금 전.... 영호라고...하지 않았습니까?"
주동환이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영호면 어떻고 주동환이면 어떠하냐. 중한 것은 너와 내가 다시 만났다는 것이다."
연희는 여전히 의혹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 하마.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다만... 내가 너에게 위해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아두거라. 이 세상에 너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란 것도 잊지 말거라."
이어 주동환이 명심하라는듯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세자 가까이에 가지 말거라. 그는 네게 아주 위험한 사람이다."
순간 연희의 얼굴에서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찌 그렇습니까?"
"그는.... 네 진짜 정체를 알게 되면, 어느 누구보다 너를 증오할 것이기 때문이다."
연희는 충격에빠져 두려움 어린 시선으로 주동환을 바라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때, 밖에 서 있던 호위병들이 인기척 소리를 들었는지, 안으로 들어오다 주동환을 발견하고 놀라 소리쳤다.
"웬 놈이냐?"
주동환은 그들을 힐끔 보더니, 연희에게 다정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에 다시 보자."
병사들이 재빨리 주동환에게 달려들었지만, 주동환은 그보다 빠른 동작으로 바람같이 담벼락을 너머 바깥으로 나갔다.
"고수다!"
병사들이 놀라 소리치며, 부랴부랴 집 밖으로 몰려 나갔다.
연희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대체 누구일까. 누구길래 저리 말하는 것일까.
연희의 머릿속은 다시 복잡해졌다. 마치 안개가 낀듯 뿌옇고 암담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연희의 기억 속에 저 사람의 목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일전에 윤호성 대감을 조심하라 일러주던 목소리도, 연희를 애틋하게 부르던 목소리도, 바로 방금 전 저 남자의 목소리였다.
누구일까.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나는...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끝이 없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갔다.
***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예판 옆으로, 이상함을 느낀 아내가 다가와 앉았다.
"대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어찌 얘기를 안 하십니까?"
그러나 예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깊은 시름이 담긴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도로 일어나려 했다.
그때서야 예판이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봉혼벽륜이란 물건이 있소."
아내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려던 몸을 도로 내렸다.
"봉혼...뭐요?"
아내의 되물음을 못 들었는지, 예판은 자기 말을 이어 나갔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붙잡아, 구천에 남아있게 한다는 물건이더이다. 내 주술 좀 한다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예령이는 숨만 쉬지 이미 죽은 사람이라 하더이다. 영혼이 이미 떠나고 없다고... 그래, 이 물건이 있단 소리에, 내 당장 훔쳐왔소. 이제 주술로 영혼을 불러내고 이 물건으로 붙잡아 두면 되겠거니... 그리 생각했건만... 그 물건이 망가져 쓰지 못한다 하더군."
아내는 예판의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금 떨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 물건은 어찌하셨소?"
예판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봉혼벽륜을 집어 들었다.
"도로 가져다 주어야 겠구료. 도총부 물건이라 지금쯤 찾고 있을 터인데..."
아내는 그런 예판이 불쌍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예령이 품에 안겨주시구랴."
예판이 의아한 얼굴로 아내를 돌아보았다.
"기일도 정합시다. 예령이 쓰러지던 날로. 먼저 죽은 자식, 제사 지내는 거 아니라지만, 혹시 모르잖소. 상이라도 차려주면 밥 먹으러 올지. 왜, 제사 지내면 조상신들 와서 밥 한 그릇씩 먹고 간다지 않습니까? 그렇게라도 예령이 왔을 때, 그 물건 있으면 좀 더 머물다 가지 않겠습니까?"
아내의 말에 예판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주저하는 목소리로 봉혼벽륜을 집어 들고 이야기했다.
"허나... 이 물건은 도총부 물건이라... 이것을 훔쳐온 것을 알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오."
"어차피, 벌어진 일, 이제와 없던 일이랄 수도 없고.... 나쁜 일도 하려면 끝까지 하랬다고, 기왕에 훔쳐온 거 대감 뜻대로 하시구랴. 어차피 이 지경이 된 마당에, 예령이를 마냥 방에 둘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내 이미 비구니들만 있는 적당한 절을 알아보았으니, 그곳에 예령이를 맡겨두십시다. 제 아무리 도총부라 할지라도, 우리가 얘기하지 않으면 어디 있는지 찾아내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예판은 아내의 말에 짊어지고 있던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논듯 온화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판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봉혼벽륜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때, 수현은 때마침 백무의 집을 찾았다.
소연은 찾아온 수현을 보고 공손히 인사를 한 뒤, 백무를 불렀고, 때마침 부엌에 있던 백무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오셨습니까, 나리..."
백무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며 난처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수현을 쳐다보았다.
눈치 빠른 수현은 그런 백무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좀... 보셨습니까?"
곤란한 백무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머뭇거리며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것이... 나리..."
그런 백무를 향해 수현이 마음쓰지 말라는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알아낸 것이 없다 하셔도 괜찮습니다. 화급을 다툴 정도의 일은 아니니, 저희가 천천히 알아보면 됩니다."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난감해하는 백무 곁으로 소연이 다가와 촐랑거리듯 일러바쳤다.
"예판대감께서 벽륜봉을 뺏어가셨습니다."
백무가 입술에 힘을 주며 소연에게 경고하듯 노려보았고, 수현은 놀라 되물었다.
"예판대감이요?"
수현의 의문에, 자신을 쏘아보는 백무의 눈치를 보던 소연이 불평 어린 표정으로 수현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예, 분명 그리했습니다. 도둑놈처럼 벽륜봉을..."
"소연아!"
백무의 타박에 소연이 입술을 삐죽거리자, 백무가 얼른 나서 말했다.
"송구합니다. 나리. 뜻하지 않은 일에 저도 당황하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대감께..."
"아닙니다."
수현이 백무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입장이 난처하실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조판서가 물건을 뺏어 갔으니, 돌려달라 말하기 힘드시겠지요. 제가 가서 청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무는 그저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뿐이었다.
"헤아려 살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나저나, 예판이 어찌 그랬을까요?"
수현의 물음에 백무가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이실직고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으나, 대감댁 애기씨가 3년 전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었죠."
수현은 그제야 생각나는 듯 "아!" 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래, 그랬었죠. 아직도 일어나지 못했다 들었습니다만...."
"예...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상태를 보아하니, 육신만 살아있을 뿐, 이미 영혼은 육신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수현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쯧쯧... 헌데, 그런 분이 어찌..."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듯합니다. 세상에 자기 자식을 포기하는 부모가 있겠냐마는... 제게 소혼술을 부탁하시더군요."
"소혼술이요?"
"예, 세상으로 영혼을 불러들여, 봉혼벽륜의 힘으로 구천에 머물게 하면 되지 않느냐 하시더군요."
수현은 어이없는 실소를 지었다.
"허허... 알만하신 분이..."
"차마 말하지 못했으나, 이미 저승에 간 영혼을 소혼술로 부른다 한들, 육신에 깃들지 못합니다. 이승과의 인연이 끊어졌기 때문이죠. 육신에 깃들기 위해서는 이승에 인연이 남아있는 영혼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판 대감께서는 그러한 설명도 체 다 들으시기 전에, 봉혼벽륜을 가지고 나가 버리셨습니다."
수현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놔둘 수도 없는 일이군요. 때마침 근자에 들어 세자빈 간택을 다시 하자는 상소에 올라오고 있습니다. 3년을 기다렸으니, 그만큼 기다렸으면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뜻이지요. 그와 함께 예판의 입지도 이미 많이 좁아진 터입니다. 그저 안타깝군요. 예판대감은 제가 만나볼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예, 나리."
밖으로 나온 수현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길을 지나는 행인들 사이로, 수현은 묵묵히 걸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수현의 곁을 스쳐지나가는중 한 사람이 실수인듯 어깨를 부딪히고는 사과의 인사하고 지나갔다.
수현도 마주 인사를 하고는 딱히 의식하지않으며 다시 길을 걸었다. 하지만 상대는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걸어가는 수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벼운 웃음을 짓는 그는, 다름 아닌 주동환이었다.
그리고 그는 수현의 뒷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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