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2
멍한 듯 초점 없는 시선으로, 벽에 몸을 기댄 체 앉아있던 그녀는 이 알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문득 눈을 떠 보니,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자신을 붙잡고 있었고, 어느 이름 모를 여인들과 함께 잡혀 이곳으로 끌려왔다.
내가 누군지, 내 이름은 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그저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만 같이 멍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잡혀와 이제는 창살 달린 감방에 누군지 모를 사람들과 갇혀 있다보니,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이없기도 했다.
걸치고 있는 옷이라고는 걸레로 쓰기에도 지저분해 보이는 시커먼 거적때기 옷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데 여기 잡혀온 다른 사람들도 하나같이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서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고, 그녀와는 달리 고개를 숙인 체 말없이 있을 뿐이었다.
다만, 한 사람. 그녀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은 어쩐지 아까부터 계속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여인들이었는데, 다른 여인들과 달리 노려보고 있는 여인은 어딘지 모르게 살벌하고 무서운 느낌이 드는 여인이었다.
"연희야, 네게는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냐? 어찌 그리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냐?"
노려보고 있던 여인이 난데없이 물어왔다.
연희라 불린 여인은 잠시 주위를 살폈다. 혹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건 것인가 싶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 여인이 바라보는 방향에 자신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없었다.
"저... 한 테 말씀하신 건가요?"
연희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누구에게 이야기할까? 여기 송연희란 이름을 가진 계집이 너 말고 또 있어?"
연희는 잠시 멋쩍은 표정으로 있다가 되물었다.
"제... 이름이 송연희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여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 기억나지 않는 것이냐? 율제님의 명령을 잊은 것이야? 나는 기억하느냐? 제신녀인 나조차도 기억 못하는 것이냐?"
여인의 물음에, 연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실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제 이름도... 제가 누군지... 그리고 여기 왜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런데,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제신녀라는건... 뭐죠?"
연희의 물음에 여인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깔깔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연희는 당황스러웠다. 저 여인이 어찌 저러는지도 모르겠고, 어딘지 모르게 제정신이 아닌 사람인 것만 같았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연희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어보지만, 여인은 계속 웃기만 할 뿐이었다.
돌연 그녀가 웃음을 멈추더니, 냉랭한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 의식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어. 그쯤에서 멈춘다고, 실패했을 리 없다고... 네년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야. 네년이..."
그녀의 살벌한 목소리에 연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때 감방 문이 열리며 거칠게 생긴 사내 두 명이 들어섰다.
"시끄러, 이 년이..."
그중 한 명이 들어오자마자 대뜸 여인을 발로 걷어찼고, 여인은 그 발길질에 힘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여인은 마치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사내의 말에 모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네년들이 죄다 미친 모양이구나. 가면 네년들은 무조건 사형이야. 그걸 알면서도 이리 태연한 거야?"
사내가 비아냥 거리듯 하는 말에, 여인이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죽음이 끝이 아니거늘."
"어, 그래그래. 끝인지 아닌지 보면 알겠지. 나가 얼른!"
사내는 여인의 등을 거칠게 떠밀었고, 여인은 휘청거리면서도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감방 밖에 있는 병사들 앞으로 걸어갔다.
연희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의 거친 손을 피해 서둘러 따라 나갔다.
이대로 나가면 정말 죽는 것일까.
살길은 전혀 없는 것일까.
마치 이제 갓 태어났는데, 바로 죽으러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렸을 뿐인데, 무슨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형을 받는단 말인가.
연희는 계속 그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추국장으로 가는 길은 꽤 길었다.
다듬어진 길이라곤 하나, 모래밭 위를 그녀가 걸을때 신발 신지않은 발바닥 아래로 거친느낌이 전해져 왔다.
이따금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이나, 자기 일에 열중하는 궁인들을 볼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저려오는 것만 같았다.
왜 일까. 나는 누구였을까. 그런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건물 밖으로 나와 또다른 옆 건물 뒷길로 걷기 시작했다.
다듬어진 길이라고는 하나, 이따금씩 돌멩이를 밟을 때면 발바닥 전체가 찌릿하고 아파 절뚝거리기까지 했다.
문득 어제 만났던 사람이 생각났다.
그는 제법 신분이 높아 보이는 남자였다.
자신의 목에 뭐가 있다면서 자꾸 그것에 대해 물어보는데, 그런 것이 목덜미에 있었는지 조차 몰랐던 그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마당에, 무엇인들 기억이 나겠는가.
드디어 행렬이 어느 이름 모를 건물에 도착했고, 일행과 그녀는 병사들에의해 떠밀리듯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매우 널찍한 마당 한가운데, 나무로 만든 의자에 자리 잡고 앉을 수 있었다.
바닥에 앉아만 있다가 이런 의자에 앉으니 한결 살 것 같았다.
이어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정면으로 보이는, 꽤 높은 사람들이 앉을 것 같은 자리에 세 명의 사람이 자리 잡고 앉았다.
그 옆으로, 네댓명의 사람이 더 다가와 섰다.
이곳은 추국장이었다.
연희는 그것을 알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 자신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자, 몇 명인가... 총 4명인가?"
정면 중앙에 앉은 관리가 묻는 말에, 왼쪽 편에 서 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가가 대답했다.
"예, 일단 오늘은 4명입니다."
관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빨리빨리하자. 비가 오려나, 몸이 찌뿌둥한 게... 피곤하네."
"예, 지사나리. 바로 시작하시죠."
연희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자기 왼편에 앉은 여인들에게 사형이 선고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강탈하는 행위 이건만, 사형을 선고하는 이들도, 사형을 선고받은 여인들도, 어찌 이토록 태연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정해진 수순이라는 것일까?
연희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 누구라도 도와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생겨났다. 누가 도와줄 수 있을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을 도와줄 것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 하나하나에 경멸과 증오가 서려 있었다.
왜? 왜 일까? 왜 저렇게 우리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일까? 왜?
연희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애원하면 살려줄까?
두려움에 가슴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제 연희의 차례였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그녀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제발 살려달라는 외침은 가슴속에서만 울리고 있을 뿐 바깥으로 새어나오지 못했다.
'누가... 누가 좀... 살려주세요..'
그때였다. 문득 뒤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유독 그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꽃히듯 들려왔다.
연희는 마치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 문쪽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럽게 열린 문 사이로, 붉은 빛의 옷깃을 휘날리며 강인해 보이는 인상으로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세자였다.
마치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때, 한줄기 빛이 희망을 담아 어둠을 밝혀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저 사람이 자신을 살려줄 것만 같았다.
아니 저 사람에게 살려달라 애원하면 살려줄 것만 같았다.
세자의 뒤로 수현이 따라 들어섰다.
"잠시 기다리시오."
들어선 세자는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하며, 지사 앞쪽으로 걸어갔다.
지사는 세자를 보자 살짝 놀란 표정으로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저하, 이곳에는 어인 일이시옵니까?"
세자는 지사 앞까지 걸어간 다음, 멈춰 서서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연희를 바라보았다.
잠시 연희를 바라보던 세자는 다시 지사를 보며 말했다.
"저기 앉아 있는 저 여인은 죄가 없습니다."
그 말에 지사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수근 거리기 시작했다.
지사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가, 뒤쪽이 소란스럽자 고개를 돌려 눈치를 주었고, 지사의 눈빛에 금새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어 지사는 세자를 보며 물었다.
"어찌 그리 이야기하십니까?"
그러자 세자가 고개를 돌려 지사 왼쪽 편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보며 물었다.
"그대가 어제 이자들을 이송한 사람인가?"
그는 얼른 고개를 숙여보이며 세자에게 예를 갖추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대의 관등성명을 답하라."
"소인은 의금부도사의 임무를 맡고 있는 동지사 윤하령이라 하옵니다."
"윤 동지사, 그대는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현장 기습을 진두지휘했으며, 죄인들의 이송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사를 흘낏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묻겠네. 당시 저 여인은 어떤 상태였는가?"
"아, 그건 어제..."
그가 수현을 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수현이 얼른 검지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대며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자, 윤하령은 얼른 말을 바꾸었다.
"어, 어, 그러니까... 저 여인은 제단 위에 올려져 있었고, 제물을 바치는 사교도의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 의식을 중단시키고, 모두 추포 하게 되었습니다."
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 그렇다면, 저 여인은 제물이었으니, 희생될뻔한 안타까운 사람이었구나."
그 말에, 옆에 있던 한 남자가 놀라며 얼른 나서 말했다.
"저하, 어찌 그것만으로 그녀에게 죄가 없다 말할 수 있겠나이까."
그러자 세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경력 홍석평이옵니다."
"홍 경력, 자네는 사교도인가?"
세자의 난데없는 물음에, 홍석평은 크게 놀라해 하며 대답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사교도라뇨?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자네가 사교도가 아니란 것을 어찌 증명할 건가?"
세자의 거침없는 물음에 홍석평은 당황하여 억울하다는듯이 되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 어째서... 제가 사교도가 아니란 것을 증명해야 합니까?"
그러자 세자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바로 맞췄네. 자네가 굳이 사교도가 아니란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지. 사교도라는 증거가 나왔을 때, 비로소 자네를 의심해야 하는게 맞는 거겠지? 그렇다면 묻겠네. 어찌 저 여인은 자신이 무죄임을 증명을 해야 하는 거지? 단지 제물로 받쳐질뻔 했을 뿐인데?"
홍석평은 할 말을 잃은 체 멋쩍은 표정으로 서 있다가, 마치 구원을 찾는 듯한 눈빛으로 지사를 바라보았다.
지사는 한숨을 짧게 내시고는 세자를 향해 말했다.
"저하, 저하의 의중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허나, 지금 저하의 이러한 행동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옵니다. 마마의 의중을 알았으니, 잠시 그녀에 대한 판결은 미루도록 하겠나이다."
세자가 지사를 바라보는 사이, 지사는 말을 이어나갔다.
"허나, 그녀가 무죄임을 판결한 것은 아니옵니다. 단지 살펴볼 정황이 있으니, 판결을 미루겠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
돌연 세자가 지사의 말을 끊으며 이야기했다.
"죄없는 백성을 돌보는 일이야 말로 가장 우선시 되야할 일, 죄가 있음이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옥사에 가두는 것은 과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지사는 살짝 입맛을 다시며 세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허면, 판결을 미루는 동안은 도성 안에 기거하는 것을 허락하겠나이다. 다만... 이번 뿐이옵니다. 또 다시, 이렇듯 법도를 어기고 나서서는 아니 되옵니다."
지사는 세자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천천히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머지 죄인들에 대한 형을 집행하라."
"예, 지사나리."
세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세상 반짝 거리는 한 여인의 부담스런 눈빛을...
세자는 머쓱한 표정이 되어 애써 시선을 피했지만, 그녀의 눈빛이 불길같이 뜨겁게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세자의 말에 수현은 연희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고, 세 사람은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문득 눈을 떠 보니,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자신을 붙잡고 있었고, 어느 이름 모를 여인들과 함께 잡혀 이곳으로 끌려왔다.
내가 누군지, 내 이름은 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그저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만 같이 멍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잡혀와 이제는 창살 달린 감방에 누군지 모를 사람들과 갇혀 있다보니,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이없기도 했다.
걸치고 있는 옷이라고는 걸레로 쓰기에도 지저분해 보이는 시커먼 거적때기 옷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데 여기 잡혀온 다른 사람들도 하나같이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서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고, 그녀와는 달리 고개를 숙인 체 말없이 있을 뿐이었다.
다만, 한 사람. 그녀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은 어쩐지 아까부터 계속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여인들이었는데, 다른 여인들과 달리 노려보고 있는 여인은 어딘지 모르게 살벌하고 무서운 느낌이 드는 여인이었다.
"연희야, 네게는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냐? 어찌 그리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냐?"
노려보고 있던 여인이 난데없이 물어왔다.
연희라 불린 여인은 잠시 주위를 살폈다. 혹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건 것인가 싶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 여인이 바라보는 방향에 자신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없었다.
"저... 한 테 말씀하신 건가요?"
연희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누구에게 이야기할까? 여기 송연희란 이름을 가진 계집이 너 말고 또 있어?"
연희는 잠시 멋쩍은 표정으로 있다가 되물었다.
"제... 이름이 송연희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여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 기억나지 않는 것이냐? 율제님의 명령을 잊은 것이야? 나는 기억하느냐? 제신녀인 나조차도 기억 못하는 것이냐?"
여인의 물음에, 연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실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제 이름도... 제가 누군지... 그리고 여기 왜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런데,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제신녀라는건... 뭐죠?"
연희의 물음에 여인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깔깔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연희는 당황스러웠다. 저 여인이 어찌 저러는지도 모르겠고, 어딘지 모르게 제정신이 아닌 사람인 것만 같았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연희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어보지만, 여인은 계속 웃기만 할 뿐이었다.
돌연 그녀가 웃음을 멈추더니, 냉랭한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 의식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어. 그쯤에서 멈춘다고, 실패했을 리 없다고... 네년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야. 네년이..."
그녀의 살벌한 목소리에 연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때 감방 문이 열리며 거칠게 생긴 사내 두 명이 들어섰다.
"시끄러, 이 년이..."
그중 한 명이 들어오자마자 대뜸 여인을 발로 걷어찼고, 여인은 그 발길질에 힘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여인은 마치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사내의 말에 모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네년들이 죄다 미친 모양이구나. 가면 네년들은 무조건 사형이야. 그걸 알면서도 이리 태연한 거야?"
사내가 비아냥 거리듯 하는 말에, 여인이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죽음이 끝이 아니거늘."
"어, 그래그래. 끝인지 아닌지 보면 알겠지. 나가 얼른!"
사내는 여인의 등을 거칠게 떠밀었고, 여인은 휘청거리면서도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감방 밖에 있는 병사들 앞으로 걸어갔다.
연희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의 거친 손을 피해 서둘러 따라 나갔다.
이대로 나가면 정말 죽는 것일까.
살길은 전혀 없는 것일까.
마치 이제 갓 태어났는데, 바로 죽으러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렸을 뿐인데, 무슨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형을 받는단 말인가.
연희는 계속 그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추국장으로 가는 길은 꽤 길었다.
다듬어진 길이라곤 하나, 모래밭 위를 그녀가 걸을때 신발 신지않은 발바닥 아래로 거친느낌이 전해져 왔다.
이따금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이나, 자기 일에 열중하는 궁인들을 볼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저려오는 것만 같았다.
왜 일까. 나는 누구였을까. 그런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건물 밖으로 나와 또다른 옆 건물 뒷길로 걷기 시작했다.
다듬어진 길이라고는 하나, 이따금씩 돌멩이를 밟을 때면 발바닥 전체가 찌릿하고 아파 절뚝거리기까지 했다.
문득 어제 만났던 사람이 생각났다.
그는 제법 신분이 높아 보이는 남자였다.
자신의 목에 뭐가 있다면서 자꾸 그것에 대해 물어보는데, 그런 것이 목덜미에 있었는지 조차 몰랐던 그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마당에, 무엇인들 기억이 나겠는가.
드디어 행렬이 어느 이름 모를 건물에 도착했고, 일행과 그녀는 병사들에의해 떠밀리듯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매우 널찍한 마당 한가운데, 나무로 만든 의자에 자리 잡고 앉을 수 있었다.
바닥에 앉아만 있다가 이런 의자에 앉으니 한결 살 것 같았다.
이어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정면으로 보이는, 꽤 높은 사람들이 앉을 것 같은 자리에 세 명의 사람이 자리 잡고 앉았다.
그 옆으로, 네댓명의 사람이 더 다가와 섰다.
이곳은 추국장이었다.
연희는 그것을 알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 자신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자, 몇 명인가... 총 4명인가?"
정면 중앙에 앉은 관리가 묻는 말에, 왼쪽 편에 서 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가가 대답했다.
"예, 일단 오늘은 4명입니다."
관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빨리빨리하자. 비가 오려나, 몸이 찌뿌둥한 게... 피곤하네."
"예, 지사나리. 바로 시작하시죠."
연희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자기 왼편에 앉은 여인들에게 사형이 선고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강탈하는 행위 이건만, 사형을 선고하는 이들도, 사형을 선고받은 여인들도, 어찌 이토록 태연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정해진 수순이라는 것일까?
연희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 누구라도 도와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생겨났다. 누가 도와줄 수 있을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을 도와줄 것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 하나하나에 경멸과 증오가 서려 있었다.
왜? 왜 일까? 왜 저렇게 우리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일까? 왜?
연희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애원하면 살려줄까?
두려움에 가슴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제 연희의 차례였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그녀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제발 살려달라는 외침은 가슴속에서만 울리고 있을 뿐 바깥으로 새어나오지 못했다.
'누가... 누가 좀... 살려주세요..'
그때였다. 문득 뒤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유독 그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꽃히듯 들려왔다.
연희는 마치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 문쪽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럽게 열린 문 사이로, 붉은 빛의 옷깃을 휘날리며 강인해 보이는 인상으로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세자였다.
마치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때, 한줄기 빛이 희망을 담아 어둠을 밝혀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저 사람이 자신을 살려줄 것만 같았다.
아니 저 사람에게 살려달라 애원하면 살려줄 것만 같았다.
세자의 뒤로 수현이 따라 들어섰다.
"잠시 기다리시오."
들어선 세자는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하며, 지사 앞쪽으로 걸어갔다.
지사는 세자를 보자 살짝 놀란 표정으로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저하, 이곳에는 어인 일이시옵니까?"
세자는 지사 앞까지 걸어간 다음, 멈춰 서서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연희를 바라보았다.
잠시 연희를 바라보던 세자는 다시 지사를 보며 말했다.
"저기 앉아 있는 저 여인은 죄가 없습니다."
그 말에 지사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수근 거리기 시작했다.
지사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가, 뒤쪽이 소란스럽자 고개를 돌려 눈치를 주었고, 지사의 눈빛에 금새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어 지사는 세자를 보며 물었다.
"어찌 그리 이야기하십니까?"
그러자 세자가 고개를 돌려 지사 왼쪽 편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보며 물었다.
"그대가 어제 이자들을 이송한 사람인가?"
그는 얼른 고개를 숙여보이며 세자에게 예를 갖추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대의 관등성명을 답하라."
"소인은 의금부도사의 임무를 맡고 있는 동지사 윤하령이라 하옵니다."
"윤 동지사, 그대는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현장 기습을 진두지휘했으며, 죄인들의 이송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사를 흘낏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묻겠네. 당시 저 여인은 어떤 상태였는가?"
"아, 그건 어제..."
그가 수현을 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수현이 얼른 검지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대며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자, 윤하령은 얼른 말을 바꾸었다.
"어, 어, 그러니까... 저 여인은 제단 위에 올려져 있었고, 제물을 바치는 사교도의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 의식을 중단시키고, 모두 추포 하게 되었습니다."
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 그렇다면, 저 여인은 제물이었으니, 희생될뻔한 안타까운 사람이었구나."
그 말에, 옆에 있던 한 남자가 놀라며 얼른 나서 말했다.
"저하, 어찌 그것만으로 그녀에게 죄가 없다 말할 수 있겠나이까."
그러자 세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경력 홍석평이옵니다."
"홍 경력, 자네는 사교도인가?"
세자의 난데없는 물음에, 홍석평은 크게 놀라해 하며 대답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사교도라뇨?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자네가 사교도가 아니란 것을 어찌 증명할 건가?"
세자의 거침없는 물음에 홍석평은 당황하여 억울하다는듯이 되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 어째서... 제가 사교도가 아니란 것을 증명해야 합니까?"
그러자 세자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바로 맞췄네. 자네가 굳이 사교도가 아니란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지. 사교도라는 증거가 나왔을 때, 비로소 자네를 의심해야 하는게 맞는 거겠지? 그렇다면 묻겠네. 어찌 저 여인은 자신이 무죄임을 증명을 해야 하는 거지? 단지 제물로 받쳐질뻔 했을 뿐인데?"
홍석평은 할 말을 잃은 체 멋쩍은 표정으로 서 있다가, 마치 구원을 찾는 듯한 눈빛으로 지사를 바라보았다.
지사는 한숨을 짧게 내시고는 세자를 향해 말했다.
"저하, 저하의 의중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허나, 지금 저하의 이러한 행동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옵니다. 마마의 의중을 알았으니, 잠시 그녀에 대한 판결은 미루도록 하겠나이다."
세자가 지사를 바라보는 사이, 지사는 말을 이어나갔다.
"허나, 그녀가 무죄임을 판결한 것은 아니옵니다. 단지 살펴볼 정황이 있으니, 판결을 미루겠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
돌연 세자가 지사의 말을 끊으며 이야기했다.
"죄없는 백성을 돌보는 일이야 말로 가장 우선시 되야할 일, 죄가 있음이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옥사에 가두는 것은 과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지사는 살짝 입맛을 다시며 세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허면, 판결을 미루는 동안은 도성 안에 기거하는 것을 허락하겠나이다. 다만... 이번 뿐이옵니다. 또 다시, 이렇듯 법도를 어기고 나서서는 아니 되옵니다."
지사는 세자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천천히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머지 죄인들에 대한 형을 집행하라."
"예, 지사나리."
세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세상 반짝 거리는 한 여인의 부담스런 눈빛을...
세자는 머쓱한 표정이 되어 애써 시선을 피했지만, 그녀의 눈빛이 불길같이 뜨겁게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세자의 말에 수현은 연희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고, 세 사람은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