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2
저녁 8시 10분. 저녁식사를 하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는 시간이었다.
평소 같으면 냉장고를 뒤져 있는 거 없는 거 다 꺼내서 찾아 먹든, 그것도 아니면 배달음식을 시켜먹든 할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남의 집에 이렇게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이유란 게, 내가 그런 운명을 타고났다, 뭐 그런 얘깁니까?"
수호의 되물음에,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인, 세희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뭐, 굳이 얘기하자면... 운명이라기보단, 필연에 가깝긴 하죠."
"하, 참~"
수호는 기가 찼다. 어이없는 실소가 절로 터져 나왔다.
"아니 뭐 도를 아십니까의 새로운 버전이야 뭐야? 아니 그리고..."
수호가 삐딱한 시선으로 세희를 대놓고 위아래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다 큰 처자가 겁도 없이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덜컥 들어오고 그럽니까? 가정교육을 대체..."
수호의 말이 체 다 끝나기도 전에, 세희가 투덜대는 수호의 말을 잘랐다.
"그쪽 고아죠? 나도 고안데? 같은 고아끼리 가정교육 운운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뻔뻔한 세희의 태도에 수호는 더욱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하~ 나 아주 훌~륭한 고아원 나왔어요. 국립, 국립."
"아~ 국립고아원 나오셨어요? 아주~ 대~단한데 나오셨네? 뭐 어디 서울대 부설 고아원이라도 되나 보죠?"
세희의 비아냥에, 수호는 입맛을 다시며 눈을 흘겼다.
"아니..., 다짜고짜 찾아와서, 어? 내가 뭐, 무슨 필연인지 뭐시긴지, 어? 그런 거라고 하면, 누가 믿어? 누가?"
수호가 따지듯이 손을 들어 검지로 삿대질을 해가며 열을 내도 세희는 콧방귀 뀌며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뭐 믿고 안 믿고는 자유의지긴 한데... 안 믿고 손해 보기 전에, 알려주려는 거죠."
"뭘 손해 봐요?"
"언제까지 숨어 지낼 수 있을 거 같아요?"
난데없는 질문에 수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숨어 살다뇨? 내가 왜 숨어 살아요?"
"본인 능력. 그 능력 계속 숨긴 체로 살아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세희의 말에 순간 수호의 얼굴에서 그동안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싸늘하게 굳어졌다.
"뭐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주 숨긴 것도 아니죠. 은근슬쩍 써가면서... 적당히 이득을 취하고 계시죠."
세희의 지적에 수호는 가늘게 뜬 눈으로 가늠하듯 세희를 쳐다보다 굳은 얼굴을 풀고는 이내 다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변명조로 말했다.
"아, 밥은 먹고살아야 되니까. 밥은. 나도 좀, 어? 먹고삽시다. 좀."
그러다가 이내 정색을 했다.
"아니 그런데... 그걸... 대체 당신이 어떻게 아는데?"
"내가 좀 잘 알거든요. 쫌."
세희의 알쏭달쏭한 말에 짜증이난 수호가 눈을 부릅떴다.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아냐고, 어떻게!"
"내가 무당이거든요. 그것도 신녀(神女)라고 아실라나 모르겠는데... 이래 봬도 제법 큰 신을 모시는 무당이라."
"아~ 무당. 무당이라..."
수호가 돌연 태평한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한껏 기대며 말했다.
"그렇지. 무당이면 알겠지. 아, 무당. 무당인 줄 몰라봤네. 아이고, 이렇~ 게~ 대단하신 무당이 나를 찾아왔는데, 알아 모시질 못했네. 아이고, 죄송합니다."
수호의 과장된 행동과 비아냥 거림에도 세희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내가 여느 무당보다 좀 빨리 알아챈 건 있긴 하지만, 저쪽 무당 능력이 과히 나보다 부족한 건 아니라서... 이대로 가면 조만간에 당신을 눈여겨보게 될걸요. 그때가 되면... 저쪽에서 가만히 있을 거 같아요?"
"거 아까부터 저쪽 저쪽 하는데, 대체 이쪽은 누구고, 저쪽은 누구요?"
"최성길."
갑작스럽게 누군가의 이름을 꺼내들자, 수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껌뻑거렸다.
"누구?"
"국회의원 최성길. 차기 국선당 대선주자. 그 사람 곁에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이 이 나라를 쥐고 흔들려고 하고 있어요."
"아~ 국회의원? 대선? 아 엄청난 일이네. 아니 그런 엄청난 일을 알고 있으면 얼른 경찰에 신고해야지, 왜 날 찾아왔을까?"
세희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계속 이렇게 삐딱하게 굴거면 말고."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세희가 말을 이었다.
"나중에 누가 자기를 죽였니 어쨌니 하면서 잡귀가 돼서 찾아오지나 마요. 확 소멸시켜 버릴라니까."
마치 저주하듯 말하고는 세희가 몸을 돌려 현관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버리자, 수호가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기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뭐 날 보고 어쩌라고?"
나가려던 세희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수호를 쳐다봤다. 수호는 멋쩍은 표정으로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그들을 막아야죠. 그들이 뭘 하려는지 알아내서 막아야죠."
수호는 다시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밥이나 간신히 벌어먹고 사는 평범한 소시민한테, 국회의원의 비리를 밝히라는 거요?"
"필연이라니까. 안 믿네."
"아 갑자기 찾아와서 그렇게 말하는데, 누가 믿어요? 거참..."
수호의 짜증에 세희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여 보였다.
"믿든 안 믿든 자유."
이어 그녀는 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수호가 앉아있는 곳으로 다가와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믿음이 가거들랑 연락하되, 저쪽에서 눈치채면 연락하지 마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니 왜? 저쪽에서 눈치채면 연락하지 말라니?"
그러자 세희가 신발을 신으며 당연한거 아니냐는 얼굴로 말을 툭 던지고는 문밖으로 사라졌다.
"눈치채면 죽이러 올 텐데, 나라도 살아야지. 아니면 능력을 쓰지 말던가."
수호의 표정이 그대로 사정없이 구겨졌다.
***
세희가 가고 나서도 머릿속이 복잡해진 수호는 도저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밥은 둘째치고라도 서둘러 일을 해야 하는데,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 진짜..."
수호는 들고 있던 명세서를 집어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능력을 쓰지 말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뭐 거창한 능력을 쓰는 것도 아니고..."
물끄러미 책상 위에 놓인 카드를 보았다.
"이마저도 안 하면, 어떻게 먹고살라고?"
수호는 투덜거리며 카드를 집어 들었다.
그 카드는 타로카드의 메이저카드로 총 22장의 카드였다.
수호는 그중에 은둔자 카드를 집어 들고 중얼거렸다.
"디자인 작업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잠깐이면 돼."
그렇게 자신을 설득시킨 수호는 지긋이 은둔자 카드를 바라보며 정신을 집중시켰고, 그의 눈빛이 푸른색과 초록색 사이를 넘나들며 빛을 발하다가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안광이 형형하게 빛나는 듯 초롱거렸고, 수호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타블렛 펜을 붙잡으며 다시 한번 자신을 향해 말했다.
"한 시간이면 충분해."
수호가 집중해서 작업을 시작한 그 시점, 그의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희가 있었다.
세희는 편의점에서 산 음료를 들고 홀짝거리며 마시다가, 수호가 있는 집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 바보 멍청이... 능력 쓰지 말라니까, 말을 안 듣네. 한번 된통 혼이 나봐야 믿으려나..."
그러고는 손에 든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마치 술을 마신 냥, "크으~" 소리를 냈다.
"아~ 취한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윽고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부적 하나를 꺼내 든 그녀는 키득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게 여기 있었네? 그럼 이걸로 깜짝 놀라게 해 줘 볼까? 그럼 믿으려나?"
세희는 재밌다는 듯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수호가 사는 아파트 12층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이 아주 특별한 밤이 되게 해 주지."
그녀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더 깊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
칠흑 같은 어둠이 잔뜩 내려앉은 늦은 시간. 작업을 마치고 깊은 잠에 빠져든 수호가 침대에서 뒤척거리며 코를 골고 있는 그 시간에, 수호의 집 거실에는 검은 안개가 몽글몽글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내 그것은 어금니가 멧돼지처럼 튀어나오고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험악하게 생긴 야차(夜叉)가 되었다.
야차는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와 현관문을 열어주었고, 문 앞에 서 있던 세희는 양손으로 수인(手印)을 맺은 상태로 걸어 들어왔다.
"자, 그럼~ 깜짝 파티를 시작해 보실까?"
세희가 안으로 들어오자, 야차는 다시 문을 닫아걸어 잠갔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수호가 잠든 안방 문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무것도 모른체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수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조용히 기다리던 세희가 불평스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만큼 인기척을 냈으면 좀 일어나는 시늉이라도 하든가."
세희가 수인을 고쳐 잡고 중얼거리자, 야차는 수호의 옆으로 걸어가 잠든 수호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음... 음..."
수호는 야차가 툭툭 치는 중에도 쉬이 깨어나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크르르..."
야차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수호를 다시 툭툭 치자, 그제야 실눈을 뜬 수호가 고개를 들었다.
"음... 뭐야?"
옆에 누군가 있는 것을 알고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 반대편으로 부리나케 몸을 옮겼다.
"뭐야? 누구야?"
이어 바깥에서 들어오는 나지막한 달빛에 형체를 확인한 수호는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으악!"
수호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야차가 거칠게 손을 내뻗자 수호가 껑충 뛰어서 침대를 벗어났다.
"뭐야? 이거?"
수호가 놀라 기겁하는 사이, 야차는 거침없이 손을 휘둘러 계속 수호를 잡으려 들었다.
재빨리 야차의 손을 피한 수호가 야차의 다리 사이를 쓱 미끄러져 지나가며 책상 위에 있던 타로카드를 집어 들었다.
얼른 악마 카드를 찾아든 수호가 자신을 향해 돌아서는 야차를 노려보며 타로카드에 집중했다.
"삼촌, 도와줘!"
다급하게 중얼거리는 수호의 눈이 초록빛과 푸른빛 사이를 오가며 다시금 형형한 안광을 내뿜기 시작했다.
이어 야차가 다시 수호를 잡으려 손을 내뻗는 순간, 수호 역시 손을 내뻗어 야차와 손을 마주 잡았다.
야차는 일반적인 사람이 당해낼 수 없는 엄청난 괴력을 가진 존재이다.
어지간한 사람은 이와 같은 상황이라면 손뼈가 으스러지고, 팔이 뽑혀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수호는 야차를 상대로 대등한 힘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심지어는 점점 수호가 야차를 압박해 가며 힘으로 찍어 누르고 있었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수호가 야차를 벽으로 내동댕이 치자, 야차는 벽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혔고, 수호는 재빨리 야차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벽력신장(霹靂迅掌)!"
외침과 동시에 수호의 오른손바닥이 야차의 복부 정중앙을 후려쳤고, 타격이 가해지는 순간 마치 벼락이 치는 듯 섬광이 번쩍거렸다.
'콰직!' 하는 굉음과 동시에 야차는 타서 날리는 잿가루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와~~"
이어 감탄하는 목소리와 함께 박수를 치며 세희가 모습을 드러내자, 수호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대단한데요? 그 타로카드는, 영환사들이 쓰는 매개체 인가 보죠?"
수호는 이해가 안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세희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세희는 그러거나 말거나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이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냉장고를 뒤져 있는 거 없는 거 다 꺼내서 찾아 먹든, 그것도 아니면 배달음식을 시켜먹든 할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남의 집에 이렇게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이유란 게, 내가 그런 운명을 타고났다, 뭐 그런 얘깁니까?"
수호의 되물음에,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인, 세희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뭐, 굳이 얘기하자면... 운명이라기보단, 필연에 가깝긴 하죠."
"하, 참~"
수호는 기가 찼다. 어이없는 실소가 절로 터져 나왔다.
"아니 뭐 도를 아십니까의 새로운 버전이야 뭐야? 아니 그리고..."
수호가 삐딱한 시선으로 세희를 대놓고 위아래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다 큰 처자가 겁도 없이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덜컥 들어오고 그럽니까? 가정교육을 대체..."
수호의 말이 체 다 끝나기도 전에, 세희가 투덜대는 수호의 말을 잘랐다.
"그쪽 고아죠? 나도 고안데? 같은 고아끼리 가정교육 운운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뻔뻔한 세희의 태도에 수호는 더욱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하~ 나 아주 훌~륭한 고아원 나왔어요. 국립, 국립."
"아~ 국립고아원 나오셨어요? 아주~ 대~단한데 나오셨네? 뭐 어디 서울대 부설 고아원이라도 되나 보죠?"
세희의 비아냥에, 수호는 입맛을 다시며 눈을 흘겼다.
"아니..., 다짜고짜 찾아와서, 어? 내가 뭐, 무슨 필연인지 뭐시긴지, 어? 그런 거라고 하면, 누가 믿어? 누가?"
수호가 따지듯이 손을 들어 검지로 삿대질을 해가며 열을 내도 세희는 콧방귀 뀌며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뭐 믿고 안 믿고는 자유의지긴 한데... 안 믿고 손해 보기 전에, 알려주려는 거죠."
"뭘 손해 봐요?"
"언제까지 숨어 지낼 수 있을 거 같아요?"
난데없는 질문에 수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숨어 살다뇨? 내가 왜 숨어 살아요?"
"본인 능력. 그 능력 계속 숨긴 체로 살아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세희의 말에 순간 수호의 얼굴에서 그동안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싸늘하게 굳어졌다.
"뭐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주 숨긴 것도 아니죠. 은근슬쩍 써가면서... 적당히 이득을 취하고 계시죠."
세희의 지적에 수호는 가늘게 뜬 눈으로 가늠하듯 세희를 쳐다보다 굳은 얼굴을 풀고는 이내 다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변명조로 말했다.
"아, 밥은 먹고살아야 되니까. 밥은. 나도 좀, 어? 먹고삽시다. 좀."
그러다가 이내 정색을 했다.
"아니 그런데... 그걸... 대체 당신이 어떻게 아는데?"
"내가 좀 잘 알거든요. 쫌."
세희의 알쏭달쏭한 말에 짜증이난 수호가 눈을 부릅떴다.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아냐고, 어떻게!"
"내가 무당이거든요. 그것도 신녀(神女)라고 아실라나 모르겠는데... 이래 봬도 제법 큰 신을 모시는 무당이라."
"아~ 무당. 무당이라..."
수호가 돌연 태평한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한껏 기대며 말했다.
"그렇지. 무당이면 알겠지. 아, 무당. 무당인 줄 몰라봤네. 아이고, 이렇~ 게~ 대단하신 무당이 나를 찾아왔는데, 알아 모시질 못했네. 아이고, 죄송합니다."
수호의 과장된 행동과 비아냥 거림에도 세희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내가 여느 무당보다 좀 빨리 알아챈 건 있긴 하지만, 저쪽 무당 능력이 과히 나보다 부족한 건 아니라서... 이대로 가면 조만간에 당신을 눈여겨보게 될걸요. 그때가 되면... 저쪽에서 가만히 있을 거 같아요?"
"거 아까부터 저쪽 저쪽 하는데, 대체 이쪽은 누구고, 저쪽은 누구요?"
"최성길."
갑작스럽게 누군가의 이름을 꺼내들자, 수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껌뻑거렸다.
"누구?"
"국회의원 최성길. 차기 국선당 대선주자. 그 사람 곁에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이 이 나라를 쥐고 흔들려고 하고 있어요."
"아~ 국회의원? 대선? 아 엄청난 일이네. 아니 그런 엄청난 일을 알고 있으면 얼른 경찰에 신고해야지, 왜 날 찾아왔을까?"
세희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계속 이렇게 삐딱하게 굴거면 말고."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세희가 말을 이었다.
"나중에 누가 자기를 죽였니 어쨌니 하면서 잡귀가 돼서 찾아오지나 마요. 확 소멸시켜 버릴라니까."
마치 저주하듯 말하고는 세희가 몸을 돌려 현관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버리자, 수호가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기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뭐 날 보고 어쩌라고?"
나가려던 세희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수호를 쳐다봤다. 수호는 멋쩍은 표정으로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그들을 막아야죠. 그들이 뭘 하려는지 알아내서 막아야죠."
수호는 다시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밥이나 간신히 벌어먹고 사는 평범한 소시민한테, 국회의원의 비리를 밝히라는 거요?"
"필연이라니까. 안 믿네."
"아 갑자기 찾아와서 그렇게 말하는데, 누가 믿어요? 거참..."
수호의 짜증에 세희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여 보였다.
"믿든 안 믿든 자유."
이어 그녀는 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수호가 앉아있는 곳으로 다가와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믿음이 가거들랑 연락하되, 저쪽에서 눈치채면 연락하지 마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니 왜? 저쪽에서 눈치채면 연락하지 말라니?"
그러자 세희가 신발을 신으며 당연한거 아니냐는 얼굴로 말을 툭 던지고는 문밖으로 사라졌다.
"눈치채면 죽이러 올 텐데, 나라도 살아야지. 아니면 능력을 쓰지 말던가."
수호의 표정이 그대로 사정없이 구겨졌다.
***
세희가 가고 나서도 머릿속이 복잡해진 수호는 도저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밥은 둘째치고라도 서둘러 일을 해야 하는데,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 진짜..."
수호는 들고 있던 명세서를 집어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능력을 쓰지 말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뭐 거창한 능력을 쓰는 것도 아니고..."
물끄러미 책상 위에 놓인 카드를 보았다.
"이마저도 안 하면, 어떻게 먹고살라고?"
수호는 투덜거리며 카드를 집어 들었다.
그 카드는 타로카드의 메이저카드로 총 22장의 카드였다.
수호는 그중에 은둔자 카드를 집어 들고 중얼거렸다.
"디자인 작업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잠깐이면 돼."
그렇게 자신을 설득시킨 수호는 지긋이 은둔자 카드를 바라보며 정신을 집중시켰고, 그의 눈빛이 푸른색과 초록색 사이를 넘나들며 빛을 발하다가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안광이 형형하게 빛나는 듯 초롱거렸고, 수호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타블렛 펜을 붙잡으며 다시 한번 자신을 향해 말했다.
"한 시간이면 충분해."
수호가 집중해서 작업을 시작한 그 시점, 그의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희가 있었다.
세희는 편의점에서 산 음료를 들고 홀짝거리며 마시다가, 수호가 있는 집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 바보 멍청이... 능력 쓰지 말라니까, 말을 안 듣네. 한번 된통 혼이 나봐야 믿으려나..."
그러고는 손에 든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마치 술을 마신 냥, "크으~" 소리를 냈다.
"아~ 취한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윽고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부적 하나를 꺼내 든 그녀는 키득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게 여기 있었네? 그럼 이걸로 깜짝 놀라게 해 줘 볼까? 그럼 믿으려나?"
세희는 재밌다는 듯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수호가 사는 아파트 12층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이 아주 특별한 밤이 되게 해 주지."
그녀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더 깊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
칠흑 같은 어둠이 잔뜩 내려앉은 늦은 시간. 작업을 마치고 깊은 잠에 빠져든 수호가 침대에서 뒤척거리며 코를 골고 있는 그 시간에, 수호의 집 거실에는 검은 안개가 몽글몽글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내 그것은 어금니가 멧돼지처럼 튀어나오고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험악하게 생긴 야차(夜叉)가 되었다.
야차는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와 현관문을 열어주었고, 문 앞에 서 있던 세희는 양손으로 수인(手印)을 맺은 상태로 걸어 들어왔다.
"자, 그럼~ 깜짝 파티를 시작해 보실까?"
세희가 안으로 들어오자, 야차는 다시 문을 닫아걸어 잠갔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수호가 잠든 안방 문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무것도 모른체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수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조용히 기다리던 세희가 불평스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만큼 인기척을 냈으면 좀 일어나는 시늉이라도 하든가."
세희가 수인을 고쳐 잡고 중얼거리자, 야차는 수호의 옆으로 걸어가 잠든 수호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음... 음..."
수호는 야차가 툭툭 치는 중에도 쉬이 깨어나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크르르..."
야차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수호를 다시 툭툭 치자, 그제야 실눈을 뜬 수호가 고개를 들었다.
"음... 뭐야?"
옆에 누군가 있는 것을 알고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 반대편으로 부리나케 몸을 옮겼다.
"뭐야? 누구야?"
이어 바깥에서 들어오는 나지막한 달빛에 형체를 확인한 수호는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으악!"
수호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야차가 거칠게 손을 내뻗자 수호가 껑충 뛰어서 침대를 벗어났다.
"뭐야? 이거?"
수호가 놀라 기겁하는 사이, 야차는 거침없이 손을 휘둘러 계속 수호를 잡으려 들었다.
재빨리 야차의 손을 피한 수호가 야차의 다리 사이를 쓱 미끄러져 지나가며 책상 위에 있던 타로카드를 집어 들었다.
얼른 악마 카드를 찾아든 수호가 자신을 향해 돌아서는 야차를 노려보며 타로카드에 집중했다.
"삼촌, 도와줘!"
다급하게 중얼거리는 수호의 눈이 초록빛과 푸른빛 사이를 오가며 다시금 형형한 안광을 내뿜기 시작했다.
이어 야차가 다시 수호를 잡으려 손을 내뻗는 순간, 수호 역시 손을 내뻗어 야차와 손을 마주 잡았다.
야차는 일반적인 사람이 당해낼 수 없는 엄청난 괴력을 가진 존재이다.
어지간한 사람은 이와 같은 상황이라면 손뼈가 으스러지고, 팔이 뽑혀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수호는 야차를 상대로 대등한 힘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심지어는 점점 수호가 야차를 압박해 가며 힘으로 찍어 누르고 있었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수호가 야차를 벽으로 내동댕이 치자, 야차는 벽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혔고, 수호는 재빨리 야차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벽력신장(霹靂迅掌)!"
외침과 동시에 수호의 오른손바닥이 야차의 복부 정중앙을 후려쳤고, 타격이 가해지는 순간 마치 벼락이 치는 듯 섬광이 번쩍거렸다.
'콰직!' 하는 굉음과 동시에 야차는 타서 날리는 잿가루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와~~"
이어 감탄하는 목소리와 함께 박수를 치며 세희가 모습을 드러내자, 수호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대단한데요? 그 타로카드는, 영환사들이 쓰는 매개체 인가 보죠?"
수호는 이해가 안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세희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세희는 그러거나 말거나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이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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