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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둘러싼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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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연랑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03
읽기 시간 예측: 약 10.46분

1화 - #5


오랜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니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 좌우로, 초록빛으로 물든 나무가 길게 솟아올라 있고, 쭉쭉뻗은 나무 가지들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은 마치 해변의 모래처럼 반짝거렸다.

시원한 바람은 살랑거리듯 다가왔다가 짙은 풀내음만 남긴 체 스쳐 지나간다.

이전의 자신에 관한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것이 꽤나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이런 상황을 꿈꿔왔던 삶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수풀 밖으로 나오니, 세자의 말 옆에 몇 명의 호위무사가 더 대기하고 있었다.

"그럼, 이만 가서 쉬거라."

자신의 말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세자를 보며 연희가 물었다.

"혹여 제가..."

연희의 말에 세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기억을 찾게 된다면... 그럼, 저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연희의 물음에 세자는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찌 되다니? 응당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세자의 대답에 연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물었다.

"혹... 돌아가지 않는다 하면... 지금처럼 이렇게... 저하의 곁에 있어도 되는 것이옵니까?"

연희의 물음에 세자의 표정이 당황스러워졌다.

때마침 다가와 선 수현 역시 놀란 표정으로 얼른 나섰다.

"저하, 아직 궁중의 예법을 몰라 그러는 것이옵니다.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수현의 말에 세자는 살짝 웃어 보이고는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연희를 보며 말했다.

"나중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기억을 되찾는 것에 집중하자구나. 그럼..."

세자가 말고삐를 돌리자, 호위무사들도 잇따라 말위로 올라 세자를 따랐다.

세자를 태운 말이 빠른 속도로 연희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연희는 그런 세자의 뒷모습을 아쉬운 듯 바라보았고, 그런 연희를 수현이 탐탁지 않게 쳐다보았다.

"네 신분이 어떤 신분이었든 간에, 해서 될 말이 있고 안될 말이 있다. 어서 날 따라오너라."

수현의 냉랭한 말에 연희는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예."

수현을 뒤따라 걸으며 연희는 중간중간 아쉬운 듯, 고개를 돌려 세자가 떠난 길을 바라보았다.



***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마을 한켠에, 은밀히 만나는 두 사람이 있었다.

신중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가 기다리고 있던 이에게 인사하는 모양새로 보아, 기다리던 사람의 신분이 더 높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기다리던 사람에게 인사 한 뒤, 조심스럽게 다가가 귓속말로 은밀하게 말을 전하였고, 기다리던 사람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이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기다리던 사람은 잠시 시간차를 두고, 서둘러 발길을 재촉하여 걷기 시작했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커다란 대궐집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안채 쪽으로 다가간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공손히 말했다.

"대감마님, 소인 추광이옵니다."

"들어오시게."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추광이란 남자는 주위를 쓱 한번 둘러본 후, 방안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안채에서 기다리던 노년의 남자는, 늦은 시간임에도 단정한 옷가짐으로 좌정을 하고 앉아 있었고, 추광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니,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앉게."

"예."

추광이 맞은편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새벽에 세자가 궁궐을 빠져나가, 며칠 전 사교도들과 함께 잡혀왔었던 여인을 만났다고 합니다."

추광의 말에 대감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여인? 어떤 여인이길래?"

"그것이... 본인도 기억을 잃고 그녀에 대해 아는 이도 없습니다. 사교도의 의식 때 제물로 받쳐져 같이 잡혀 온 모양입니다. 추국장에서 세자가 직접 나서 구명을 해주었다하는데 어찌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지는 알지 못합니다."

대감이 긴 한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는 하나, 총명한 세자다. 제 어미의 죽음을 목전에서 보았으니, 나를 비롯하여 작금의 대신들에 대해 불만이 많을 터...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감마님. 주상전하를 호위하는 운검과 금군을 제외하고는, 어영위를 포함한 모든 병사들이 좌상대감의 명을 따르고 있습니다. 세자를 따르는 이들도 몇몇에 불과하니, 제아무리 세자라 한들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좌상이 고개를 끄덕 거리며 수염을 만지작 거리자, 추광이 말을 이었다.

"이참에 아예 사고로 위장해서 죽여 없애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추광의 말에 좌상이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제아무리 힘이 없다고는 하나, 한 나라의 왕과 세자다.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면, 그들은 자신들의 선을 넘어서지 않을 것이니, 우리 또한 그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예, 대감마님."

좌상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추광은 조용히 집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 문 앞에서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경계심에 인상을 굳히다 누군지를 알아보자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애기씨 였습니까. 소인이 어두워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좌상의 딸, 인영이었다.

"나도 듣고 싶은 것이 좀 있네."

그녀의 말에 추광이 난색을 하였다.

"무...엇을 말씀하시는것인지... 소인이 그닥 아는 것이 없어서..."

그러자 인영은 대뜸 무언가를 추광에게 던졌고, 추광은 부지불식간에 놀란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추광이 받아들은 것은 금빛 비단의 작은 보자기 였고, 그 안으로 묵직하고 익숙한 것이 손안에서 느껴졌다.

"공으로 하란 얘기는 하지 않겠네. 보상은 부족하지 않게 줄 것이니...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세자마마에 관한 것만 내게 이야기해주게."

추광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이 돈이란 것을 알았을 때부터, 표정이 밝아지고 있었다.

그는 뒤편의 안채 눈치를 살짝 살피고는, 웃음끼 어린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세자마마께서는 오늘 아침 이른 새벽부터 소수의 호위무사만을 대동하고 밖으로 나가, 운검에 속해 있는 수현이란 자를 만났습니다. 헌데 그 자리에, 일전에 사교도들 사이에서 구해온 계집도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지고, 아미가 꿈틀거렸다.

"그년은 왜?"

"그것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애기씨. 그리 오랜 시간 함께 있지는 않았고, 짧게 대화를 나눈 뒤 헤어진 것 같습니다."

인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추광에게 다시 이야기했다.

"그 계집이 어디 묵고 있는지, 누가 보살피고 있는지 알아봐 주게."

추광이 다시금 난처한 표정으로 무어라 말을 하려 하자, 인영은 대뜸 또 하나의 보자기를 던졌다.

보자기를 받아 든 추광의 눈빛은 기쁨을 감추기 힘들어 보였다.

"결과가 좋으면 보상도 더 줌세. 속히, 알아봐 주어야 하네."

"예예, 애기씨. 여부가 있겠습니까. 금세 알아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추광은 굽신거리듯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집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인영은 분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디 감히 근본도 없는 것이 끼어들어... 주리를 틀어 반 병신이 되어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인영은 씩씩 거리며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



한낮의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정오였다.

딱히 할 것 없는 연희는 종종 수현의 집을 찾아가곤 했었는데, 그래 봐야 수현은 입궁하고 없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찾아가니, 문을 열어주는 백발이 성성한 행랑아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셨는가?"

그는 수현의 당부로 신분이 불분명함에도 연희에게 예를 지키고 있었다.

연희 역시 예로써 다소곳이 인사를 해 보였다.

"청소 중이셨나 봅니다."

연희의 눈에 행랑아범이 들고 있는 싸리비가 들어왔다.

행랑아범은 자신의 손에 들린 싸리비를 내려다 보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인자 막 할 참이었죠. 밥은 자셨소?"

연희는 안으로 들어서며 대답했다.

"아직인데, 딱히 생각은 없습니다."

행랑아범은 연희가 들어오자, 대문을 닫으며 말했다.

"아, 그 사람의 머리란 것이, 뭐라도 뱃구녕속에 들어가야 설설 움직인다 안하요? 마침 도련님 자시라고 챙겨놓은 것이 있응께, 후딱 드쇼."

행랑아범의 말에 연희가 웃어보였다.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오늘은 솔이가 나와보지 않네요?"

수현이 없어도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는, 그녀에게 말벗이 되어주는 솔이라는 여종 때문이었다.

"잉, 아까 나물 캔다고 나갔응께, 금방 들어올 것이요. 근디, 지금은 나물 캘 시기가 지났는디, 이것이 정신을 어따 팔고 다니는 것인지 모르것소."

궁시렁 거리며 자기 일을 보러 가는 행랑아범을 돌아보며 연희는 연이어 웃음을 지었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집 주변을 돌며, 솔이가 올 때까지 기다려볼까 생각하기 무섭게, 대문이 열리더니 아직 앳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들어섰다.

"애기씨!"

함지박만한 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달려오는 이 소녀가 바로 솔이였다.

"솔아, 잘 다녀왔어?"

연희도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네네, 일찍 오셨어요?"

솔이의 물음에 연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 조금전에 왔어. 나물 캐러 갔다며? 나물이 있어?"

솔이가 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니, 실은 그냥 꽃구경 갔다 왔어요. 꽃구경 간다고 하면 아저씨에게 혼쭐이 나거든요."

솔이가 들고 있는 소쿠리에는 나물이라기보다는, 잡풀 같은 것들이 조금 놓여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절로 짓궂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걸 보면 아무 말 안 해도 혼나겠는데?"

그러자 솔이도 따라 웃음 지었다.

"애기씨 네로 가요. 제가 어제저녁에 재밌는 걸 보고 왔어요."

"재밌는 거? 뭐?"

"일단 애기씨네로 가요."

솔이는 행랑아범의 눈치를 살피며, 연희를 데리고 연희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길목으로 나와 신이 난듯 솔이는 연신 재잘거렸고, 따라 걸으며 연희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솔이 너머로 자신의 집 앞에 서있는 일련의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응? 누구지?"

솔이 역시 그들을 보고 의아해하였고, 두 사람이 그들을 지나쳐 마침 문안으로 들어서려 할때, 문 안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곱디 고운 비단옷을 차려입고, 딱 봐도 귀티가 흐르는 여인은, 날카로운 눈매로 두 사람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솔이는 얼른 허리를 숙여 인사하였고, 연희 역시 따라 인사하면서도, 그녀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오~ 여기 있었구나?"

그녀는 번득이는 눈으로 연희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고, 연희는 불길한 기운이 서서히 자신을 감싸오기 시작하는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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