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4
하늘에서 땅으로 한 마리 새처럼 사뿐히 내려선 소년과 나래 앞에, 대나무살로 엮은 허름한 나무벽을 두른 마을이 펼쳐졌다.
마을 입구에는 누군가가 잘려나간 나무 밑동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소년과 나래가 그 앞으로 걸어가자 인기척에 눈을 뜬 그는, 눈을 몇 번 껌뻑거리다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웨, 웬 놈이냐?"
그는 엉거주춤 바닥에 놓여있던 몽둥이를 들고 나름대로 험악한 인상을 쓰려 애썼다.
듬성듬성 난 수염과 둥글둥글한 얼굴, 약간 생선 머리같이 생긴 용모는, 아무리 인심을 써도 흉악해 보인다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어설프게 부릅뜬 눈은 웃음을 자아내기 충분해 보였다.
"도미 할아범, 저예요."
소년이 알은체를 하자, 도미 할아범이라 불린 남자가 눈을 껌뻑 껌뻑거리더니, 이내 몽둥이를 내리며 말했다.
"하이고, 누군가 했더니 백하도령이었구만, 내 요즘 눈이 침침하여 앞이 잘 안보인다우."
넉살 좋게 웃으며 건네는 말에, 백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따라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들어가 한숨 주무시고 나오시지요."
백하의 제안에, 도미 할아범이 손사래를 쳤다.
"아녀아녀, 괜찮어, 내 오늘은 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지. 도둑놈들이 또 진상품을 훔쳐가면, 내가 볼 낯이 없지 않겠어?"
"그들은 필시 잡힐 것입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 어여 들가 봐."
도미 할아범의 말에 백하는 가볍게 인사를 해 보이고 마을 입구로 들어섰고, 나래는 백하를 따라 한 듯 안 한 듯 어설프게 인사를 건네고는 후다닥 뒤따랐다.
마을은 마치 민속촌에 있는 마을의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했다.
다만, 아까 마을 입구를 지키던 도미 할아범도 그렇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생김생김이 어쩐지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묘하게, 사람 같지 않은 구석들이 있는 것이,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들게 만들었다.
사람이라고 하기엔 구부정하고 머리가 너무 크다거나, 눈이 얼굴에 반 이상을 차지하거나, 치마 아래로 큼지막한 꼬리 같은 것이 달려 있다거나 한 것이, 괴물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덜컥 무서운 기분과 함께, 너무 멋모르고 이 소년을 따라온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오다니, 혹시나 준수한 용모로 사람을 꾀어내 괴물들에게 인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며 소름이 돋았다.
그러다가 길가를 지나는 닭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어디가 아픈 닭인 듯 양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았고, 휘청이듯 걸어 지나가다 나래를 보고는 나래를 향해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닭이 신경 쓰이는 나래는 힐끔힐끔 쳐다보며 애써 외면해 보았지만, 닭은 마치 자신의 주인을 따라다니는 듯 계속 나래를 따라걸었다.
그러다가 그 모습을 본 검은색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닭을 쫓아오기 시작했다.
나래는 닭에 이어 고양이까지 뒤를 쫓아오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저 고양이가 닭을 잡아먹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괜찮다. 걱정마라. 내 친구다."
나래는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방금 닭이 말을 했다.
누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복화술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아, 아니 저기..."
나래는 앞서가는 백하에게 뭔 말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뒤쫓아온 검은 고양이가 말했다.
"얘 뭔데?"
그러자 닭이 대답했다.
"사람."
"그건 보면 알아."
"사람."
"그건 보면 안다니까, 이 닭대가리야."
시큰둥하게 말하는 고양이를, 닭이 한번 힐끔 보더니 다시 대답했다.
"여자."
"젠장, 네놈이랑 얘기하면 속 터진다."
그러더니 검은 고양이가 나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넌 뭐야? 어디서 왔어? 사람이 여긴 어떻게 왔데?"
나래는 자신을 향해 묻는 고양이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면서 계속 백하를 따라 걸었다.
"저, 저요?"
나래가 되묻자, 고양이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럼, 내가 누구한테 말하는 거 같아? 내가 딴 데 보고 얘기하나?"
왠지 시크한 고양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나래는 거스를 수 없는 기분에 얼른 대답했다.
"하, 한국에서 왔어요. 나래라고 해요."
"한국? 그건 어디야? 어떻게 온 거야?"
"그,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재밌는 인간일세. 지가 어떻게 왔는지도 몰라?"
이어 백하가 어느 집의 열린 대문으로 들어서자, 닭과 고양이는 그 대문 앞에 멈춰 섰다.
"기다린다."
닭의 말에 나래는 그들을 돌아보았고, 고양이는 닭 옆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저들이 왜 따라오는지, 어떻게 말을 하는 건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백운 할아버지, 저 왔어요."
문 앞에서 백하가 부르는 소리에, 문이 열리고 인자한 모습에 백발 할아버지가 모습을 보였다.
웃는 인상에 가늘게 뜬 눈과 하얀 머리와 수염이, 어쩐지 정겨운 모습이었다. 허나 머리 위로는 사슴의 뿔 같은 것이 두 개 나있고, 목에는 어느 짐승의 어금니 같은 것이 세 개 달려있는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허허, 백하도령께서 오셨습니까? 이리 자주 찾아오시다가 금상(今上)께서 진노하실까 우려되옵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염려 거두시지요. 도움이 필요해 찾아왔습니다."
도움이란 말에 백운 할아버지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움이라뇨? 미천한 저희들이 도령을 도울 일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백하가 뒤쪽에 서 있는 나래를 힐끔 돌아보았다가 다시 백운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있는 이 아이가, 각군에게 잡혀가고 있는 것을 간밤에 제가 구했지요. 헌데 본인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니, 이 아이를 살던 곳으로 돌려보낼 방도를 찾고 있습니다."
백운할아버지는 백하의 말을 듣고 나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인간의 아이로군요."
"그렇습니다."
"허허, 큰일입니다. 요괴와 도깨비들이 인간의 냄새를 맡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루 속히 환궁하셔서 금왕 전하의 도움을 받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허나, 궁궐의 법도가 엄준하여, 언제 이 아이가 돌아갈 수 있을지 가늠키 어렵습니다. 하루 속히 돌려보내야 할 것이니, 백운 할아버지께서 도와주시지요."
백운할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나래를 바라보았다.
나래는 어쩐지 자신이 죄지은 듯한 기분에 눈치를 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려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건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도움이 아쉬운 처지였다.
"아이야."
백운할아버지가 나래를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자, 나래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대답했다.
"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 전 최나래라고 합니다."
백운할아버지가 수염을 한번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이곳으로 어찌 온 것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였느냐?"
"그게..."
나래는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템플스테이를 갔는데, 어느 노스님께서 작은 법당으로 안내해 주셨어요. 그 법당 안에는 도깨비 마을 그림이 그려진 병풍이 있었고, 그걸 보고 있는데... 갑자기 괴물이 나타났어요. 그러고 정신을 잃고 일어나보니까..."
나래가 말끝을 흐리자, 백운할아버지는 눈을 껌뻑 거리며 나래를 쳐다보다가, 한번 더 수염을 만지작 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쯧쯧... 초공연화(超空聯畵)를 본 모양이구나."
백운할아버지의 말에 백하가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그럼 이 아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말씀이십니까?"
백운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도 그런 듯 합니다. 내 듣기로, 홍저왕(紅狙王)이 초공연화를 가지고 있다 들었습니다."
백하의 표정이 밝아졌다.
"허면, 홍저왕에게서 초공연화를 얻으면, 저 아이가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백운할배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 초공연화가 어디로 연결되어 있을지 알지 못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요. 아마도 홍저왕의 초공연화를 얻는다면, 돌아갈 방법이 필시 있을 것입니다. 온전히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초공연화의 사용법을 알아야겠지요."
"고맙습니다, 백운 할아버지. 홍저왕을 찾아가 도움을 청해봐야 겠습니다."
백운할아버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만류했다.
"괴팍하기 이를 데 없는 자입니다. 특히나 금상을 비롯하여 천상계의 모든 이를 증오하고 있으니, 성급히 만나러 가셨다가는 위험하실 수 있습니다."
백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그 물건을 얻어야 할까요?"
"먼저 홍저왕의 초공연화를 이용해 돌아갈 수 있는지부터 알아보셔야겠지요. 모꼬지마을에 모지랑아범을 찾아가 보면 그에 관해 들어볼 수 있을 겝니다."
"고맙습니다."
백하가 인사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오니, 나래도 얼른 인사를 한 뒤 백하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모꼬지마을까지는 꽤 멀어. 날도 저물어 가고 있고. 이번에는 도움을 좀 받아야겠다."
백하의 말에 나래가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도움이요?"
백하가 활짝 웃는 얼굴로 "응"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한 손을 입으로 가져가 휘파람을 불었다.
제법 큰소리가 울려 퍼지고, 잠시 후 하늘 위로 하얀 물체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나래가 놀라 멍하게 쳐다보는 것도 잠시, 두 사람 앞에 거대한 크기의 두루미가 내려앉았다.
"자"
백하가 손을 내밀며 나래를 바라보니, 나래는 왠지 모를 설렘에 잠시 움찔했다.
'뭐야....'
그런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며, 나래가 백하의 손을 붙잡자, 백하는 날아오르듯 나래와 함께 두루미 위로 올라탔다.
"꽉 잡아."
백하의 말에 나래는 백하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포근한 느낌이 싫지 않았고, 꽃향기 같은 냄새가 풍겨왔다.
이 어린아이에게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낀다는 게, 스스로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그 기분이 싫지만은 않았다.
"가자."
두루미가 날아오르고, 다시 한번 하늘 위를 날아올랐지만, 나래는 어쩐지 처음과 같은 기분을 느낄 수는 없었다.
순간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날아가는 두루미 옆으로 고양이를 등에 태운 닭이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 아닌가?
"푸핫!"
나래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빵 터뜨리고 말았다.
"뭐야? 비웃는 거야?"
검은 고양이가 시시껄렁하게 시비 걸듯 물었지만, 나래는 계속 비현실적인 이상황에 웃음만 나왔다.
"어이, 인간, 조심해.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
"조용."
"뭐라고 이 닭대가리야?"
나래의 웃음소리가 두루미의 날개짓과 함께 하늘 위로 울려 퍼졌다.
마을 입구에는 누군가가 잘려나간 나무 밑동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소년과 나래가 그 앞으로 걸어가자 인기척에 눈을 뜬 그는, 눈을 몇 번 껌뻑거리다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웨, 웬 놈이냐?"
그는 엉거주춤 바닥에 놓여있던 몽둥이를 들고 나름대로 험악한 인상을 쓰려 애썼다.
듬성듬성 난 수염과 둥글둥글한 얼굴, 약간 생선 머리같이 생긴 용모는, 아무리 인심을 써도 흉악해 보인다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어설프게 부릅뜬 눈은 웃음을 자아내기 충분해 보였다.
"도미 할아범, 저예요."
소년이 알은체를 하자, 도미 할아범이라 불린 남자가 눈을 껌뻑 껌뻑거리더니, 이내 몽둥이를 내리며 말했다.
"하이고, 누군가 했더니 백하도령이었구만, 내 요즘 눈이 침침하여 앞이 잘 안보인다우."
넉살 좋게 웃으며 건네는 말에, 백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따라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들어가 한숨 주무시고 나오시지요."
백하의 제안에, 도미 할아범이 손사래를 쳤다.
"아녀아녀, 괜찮어, 내 오늘은 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지. 도둑놈들이 또 진상품을 훔쳐가면, 내가 볼 낯이 없지 않겠어?"
"그들은 필시 잡힐 것입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 어여 들가 봐."
도미 할아범의 말에 백하는 가볍게 인사를 해 보이고 마을 입구로 들어섰고, 나래는 백하를 따라 한 듯 안 한 듯 어설프게 인사를 건네고는 후다닥 뒤따랐다.
마을은 마치 민속촌에 있는 마을의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했다.
다만, 아까 마을 입구를 지키던 도미 할아범도 그렇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생김생김이 어쩐지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묘하게, 사람 같지 않은 구석들이 있는 것이,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들게 만들었다.
사람이라고 하기엔 구부정하고 머리가 너무 크다거나, 눈이 얼굴에 반 이상을 차지하거나, 치마 아래로 큼지막한 꼬리 같은 것이 달려 있다거나 한 것이, 괴물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덜컥 무서운 기분과 함께, 너무 멋모르고 이 소년을 따라온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오다니, 혹시나 준수한 용모로 사람을 꾀어내 괴물들에게 인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며 소름이 돋았다.
그러다가 길가를 지나는 닭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어디가 아픈 닭인 듯 양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았고, 휘청이듯 걸어 지나가다 나래를 보고는 나래를 향해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닭이 신경 쓰이는 나래는 힐끔힐끔 쳐다보며 애써 외면해 보았지만, 닭은 마치 자신의 주인을 따라다니는 듯 계속 나래를 따라걸었다.
그러다가 그 모습을 본 검은색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닭을 쫓아오기 시작했다.
나래는 닭에 이어 고양이까지 뒤를 쫓아오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저 고양이가 닭을 잡아먹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괜찮다. 걱정마라. 내 친구다."
나래는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방금 닭이 말을 했다.
누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복화술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아, 아니 저기..."
나래는 앞서가는 백하에게 뭔 말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뒤쫓아온 검은 고양이가 말했다.
"얘 뭔데?"
그러자 닭이 대답했다.
"사람."
"그건 보면 알아."
"사람."
"그건 보면 안다니까, 이 닭대가리야."
시큰둥하게 말하는 고양이를, 닭이 한번 힐끔 보더니 다시 대답했다.
"여자."
"젠장, 네놈이랑 얘기하면 속 터진다."
그러더니 검은 고양이가 나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넌 뭐야? 어디서 왔어? 사람이 여긴 어떻게 왔데?"
나래는 자신을 향해 묻는 고양이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면서 계속 백하를 따라 걸었다.
"저, 저요?"
나래가 되묻자, 고양이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럼, 내가 누구한테 말하는 거 같아? 내가 딴 데 보고 얘기하나?"
왠지 시크한 고양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나래는 거스를 수 없는 기분에 얼른 대답했다.
"하, 한국에서 왔어요. 나래라고 해요."
"한국? 그건 어디야? 어떻게 온 거야?"
"그,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재밌는 인간일세. 지가 어떻게 왔는지도 몰라?"
이어 백하가 어느 집의 열린 대문으로 들어서자, 닭과 고양이는 그 대문 앞에 멈춰 섰다.
"기다린다."
닭의 말에 나래는 그들을 돌아보았고, 고양이는 닭 옆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저들이 왜 따라오는지, 어떻게 말을 하는 건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백운 할아버지, 저 왔어요."
문 앞에서 백하가 부르는 소리에, 문이 열리고 인자한 모습에 백발 할아버지가 모습을 보였다.
웃는 인상에 가늘게 뜬 눈과 하얀 머리와 수염이, 어쩐지 정겨운 모습이었다. 허나 머리 위로는 사슴의 뿔 같은 것이 두 개 나있고, 목에는 어느 짐승의 어금니 같은 것이 세 개 달려있는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허허, 백하도령께서 오셨습니까? 이리 자주 찾아오시다가 금상(今上)께서 진노하실까 우려되옵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염려 거두시지요. 도움이 필요해 찾아왔습니다."
도움이란 말에 백운 할아버지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움이라뇨? 미천한 저희들이 도령을 도울 일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백하가 뒤쪽에 서 있는 나래를 힐끔 돌아보았다가 다시 백운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있는 이 아이가, 각군에게 잡혀가고 있는 것을 간밤에 제가 구했지요. 헌데 본인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니, 이 아이를 살던 곳으로 돌려보낼 방도를 찾고 있습니다."
백운할아버지는 백하의 말을 듣고 나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인간의 아이로군요."
"그렇습니다."
"허허, 큰일입니다. 요괴와 도깨비들이 인간의 냄새를 맡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루 속히 환궁하셔서 금왕 전하의 도움을 받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허나, 궁궐의 법도가 엄준하여, 언제 이 아이가 돌아갈 수 있을지 가늠키 어렵습니다. 하루 속히 돌려보내야 할 것이니, 백운 할아버지께서 도와주시지요."
백운할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나래를 바라보았다.
나래는 어쩐지 자신이 죄지은 듯한 기분에 눈치를 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려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건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도움이 아쉬운 처지였다.
"아이야."
백운할아버지가 나래를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자, 나래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대답했다.
"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 전 최나래라고 합니다."
백운할아버지가 수염을 한번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이곳으로 어찌 온 것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였느냐?"
"그게..."
나래는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템플스테이를 갔는데, 어느 노스님께서 작은 법당으로 안내해 주셨어요. 그 법당 안에는 도깨비 마을 그림이 그려진 병풍이 있었고, 그걸 보고 있는데... 갑자기 괴물이 나타났어요. 그러고 정신을 잃고 일어나보니까..."
나래가 말끝을 흐리자, 백운할아버지는 눈을 껌뻑 거리며 나래를 쳐다보다가, 한번 더 수염을 만지작 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쯧쯧... 초공연화(超空聯畵)를 본 모양이구나."
백운할아버지의 말에 백하가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그럼 이 아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말씀이십니까?"
백운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도 그런 듯 합니다. 내 듣기로, 홍저왕(紅狙王)이 초공연화를 가지고 있다 들었습니다."
백하의 표정이 밝아졌다.
"허면, 홍저왕에게서 초공연화를 얻으면, 저 아이가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백운할배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 초공연화가 어디로 연결되어 있을지 알지 못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요. 아마도 홍저왕의 초공연화를 얻는다면, 돌아갈 방법이 필시 있을 것입니다. 온전히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초공연화의 사용법을 알아야겠지요."
"고맙습니다, 백운 할아버지. 홍저왕을 찾아가 도움을 청해봐야 겠습니다."
백운할아버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만류했다.
"괴팍하기 이를 데 없는 자입니다. 특히나 금상을 비롯하여 천상계의 모든 이를 증오하고 있으니, 성급히 만나러 가셨다가는 위험하실 수 있습니다."
백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그 물건을 얻어야 할까요?"
"먼저 홍저왕의 초공연화를 이용해 돌아갈 수 있는지부터 알아보셔야겠지요. 모꼬지마을에 모지랑아범을 찾아가 보면 그에 관해 들어볼 수 있을 겝니다."
"고맙습니다."
백하가 인사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오니, 나래도 얼른 인사를 한 뒤 백하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모꼬지마을까지는 꽤 멀어. 날도 저물어 가고 있고. 이번에는 도움을 좀 받아야겠다."
백하의 말에 나래가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도움이요?"
백하가 활짝 웃는 얼굴로 "응"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한 손을 입으로 가져가 휘파람을 불었다.
제법 큰소리가 울려 퍼지고, 잠시 후 하늘 위로 하얀 물체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나래가 놀라 멍하게 쳐다보는 것도 잠시, 두 사람 앞에 거대한 크기의 두루미가 내려앉았다.
"자"
백하가 손을 내밀며 나래를 바라보니, 나래는 왠지 모를 설렘에 잠시 움찔했다.
'뭐야....'
그런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며, 나래가 백하의 손을 붙잡자, 백하는 날아오르듯 나래와 함께 두루미 위로 올라탔다.
"꽉 잡아."
백하의 말에 나래는 백하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포근한 느낌이 싫지 않았고, 꽃향기 같은 냄새가 풍겨왔다.
이 어린아이에게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낀다는 게, 스스로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그 기분이 싫지만은 않았다.
"가자."
두루미가 날아오르고, 다시 한번 하늘 위를 날아올랐지만, 나래는 어쩐지 처음과 같은 기분을 느낄 수는 없었다.
순간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날아가는 두루미 옆으로 고양이를 등에 태운 닭이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 아닌가?
"푸핫!"
나래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빵 터뜨리고 말았다.
"뭐야? 비웃는 거야?"
검은 고양이가 시시껄렁하게 시비 걸듯 물었지만, 나래는 계속 비현실적인 이상황에 웃음만 나왔다.
"어이, 인간, 조심해.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
"조용."
"뭐라고 이 닭대가리야?"
나래의 웃음소리가 두루미의 날개짓과 함께 하늘 위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