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2
밤새 뒤척이며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연희의 괴로움은 나몰라라 여지없이 아침이 밝아왔다.
계속 누워있어봤자 갑갑한 마음만 더해지자 연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차가운 공기를 온몸으로 맞았다..
적막한 새벽속에서 느껴지는 편안함과 공기의 시원함.... 세상을 맞이하는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하니 처음 기억을 잃고 마주하던 막막함이 되살아났다. 외롭고도 쓸쓸했다.
문득, 또다시 다른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났다.
자신은 삼길이와 함께 떠돌던 빈민이었지만...
그렇다면 이 몸의 주인은 누구고 어떤 사람이었을까?
연희는 손을 들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세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어쩌면 이 육신의 주인은 제법 지체 높은 집안의 자녀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내야 하는 것일까.
그때, 연희의 눈에 저 멀리서 다가오는 세자가 보였다.
세자는 연희와 눈이 마주치자, 뭐가 그리 기쁜지 활짝 웃음 짓고 있었다.
그런 세자를 보며, 연희 역시 저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 와중에도, 세자를 보니 좋다는 생각이 드는 자신이, 어쩐지 바보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세자와 나누는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것이 아니란 사실에, 웃음이 금세 사라져버렸다.
세자가 지척 거리로 다가오자, 연희는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일찍 일어난 모양이구나."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말을 건네는 세자의 모습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예, 새벽 공기가 시원하여 일찍 나왔습니다."
연희의 대답에 세자가 심호흡을 하듯 길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과연,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구나. 오늘은 좌포청과 함께 일전에 가보았던 그 사교도들이 모이는 장소로 가볼 생각이다. 같이 가자꾸나. 그곳에 가면 기억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웃으며 이야기하던 세자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세자의 물음에 연희가 그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 어찌 그러십니까?"
"아니... 어쩐지 네 얼굴에 수심이 깃든 것 같아보여 물었다."
연희는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그저 아직 잠이 덜 깨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행여라도 걱정되는 바가 있거든, 꼭 내게 이야기하여야 한다. 알았느냐?"
연희는 그렇게 말하는 세자의 얼굴을, 마치 마음속에 담아두려는 듯이 세세히 살펴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꼭 그리하겠습니다."
세자는 연희가 미소를 짓자,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환하게 따라 웃었다.
"그래. 그럼 가자."
앞장서서 걷는 세자를, 연희가 뒤따라 걸었다.
뒷짐 쥐고 걷는 세자의 넓은 어깨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듬직함과 연희를 안고 다독이던 포근함이, 무척이나 그리울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공허해지는 것 같았다.
궁궐 앞에는 그간 세자를 호위했던 금위영 병사들 대신, 수현이 어영위 병사 두 명과 함께 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현과 병사들은 세자를 보자 공손히 인사를 올렸고, 연희는 수현을 보며 인사를 건네었다.
언제나처럼 먼저 말에 오른 세자가 연희에게 손을 내밀었고, 연희는 잠시 그런 세자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완연한 아침 햇살이, 세자의 등 뒤에서 후광처럼 빛나고 있는 가운데, 그 햇살만큼 환한 미소를 띤 세자가 부드러운 손길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어쩐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딱 한 번만.'
연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세자의 손을 잡았다.
말 위에 오른 연희는 믿음직스런 세자의 너른 등을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세자는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먼저 출발하는 수현때문에 더 깊이 생각 하지 못하고 말을 재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세자를 그저 꼭 붙잡기만 했던 것이라면, 오늘은 마치 품에 안기기라도 하는 듯 보드랍게 안겨왔기 때문이었다.
딱 한 번만, 세자를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 연희는 자기도 모르게 안기듯 그를 꼭 껴안고 말았다.
그렇게 좌포청으로 향하는 세자와 연희 일행을, 저너머 집들 담벼락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주동환이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사람의 발길이 닿지않는 외진곳을 다 기울어져 가는 허름한 집 한채가 덩그러니 지키고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그곳에서, 천태호는 태연하게 문 앞에 걸터앉아 술병을 들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 천태호 앞으로 주동환이 다가와 멈춰 서자, 천태호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세자는?"
천태호가 대뜸 물어오자, 주동환은 차분하게 인사를 한 뒤 대답했다.
"연희와 함께 이전 집결지로 향했습니다."
주동환의 대답을 듣고 천태호가 키득거리며 웃어댔다.
"고 계집 제법일세. 어찌 세자의 마음을 얻었을고? 잘됐어.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것들 사이에만 있는 것 보다야 낫겠지. 집결지는? 다 치웠지?"
"예. 깨끗합니다."
주동환의 대답에 천태호가 "그래"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술병을 들어 술을 마셨다.
"하지만... 세자가 이런 식으로 계속 추격해 오면, 결국엔 많은 것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천태호가 술병을 내려 주동환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걸 기다리는 거야."
"예?"
"더 깊숙이...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내 코앞까지 왔을 때, 그 세자의 육신을 내 것으로 만들 거라고."
"하지만... 그러려면 방주님께서..."
"죽어야 되지 않냐고?"
되묻는 천태호의 질문에, 주동환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런 주동환을 보며 천태호는 다시금 키득키득 웃어 보이고는, 이어 말했다.
"알아냈지. 내가 죽지 않고, 내 영혼이 나가 다른 사람의 육신을 지배하는 주술. 물론... 약간의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하긴 하지만... 크게 무리는 없어."
주동환은 천태호의 말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해내셨군요."
"그럼. 내가 누군데? 크흐흐, 좌상은 뭐 하고 있어?"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 잘했어. 가봐."
천태호는 말을 마치곤, 다시 술병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천태호의 추방령에도 주동환은 자리를 뜨지 않고 서 있었다.
천태호가 의아한 듯 주동환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할 말 있어?"
"그... 좌상의 몸에 들어간 자는... 누구입니까?"
주동환의 물음에 천태호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왜?"
잠시 망설이던 주동환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자가... 좌상의 딸을 쳐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천태호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재밌다는 듯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주동환이 왜웃냐는듯 눈썹을 치켜올리자, 천태호가 그를 보며 말했다.
"그것도 재밌네. 딸년 입장에서는 지 아비가 겁탈하는 것 아닌가?"
순간 주동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럴 수 없습니다."
주동환의 정색에 천태호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알았다. 이놈아. 이놈이... 쯧.... 그놈도 너처럼 서자 출신이다. 지 신세 한탄만 하다 뒈져서 구천을 떠돌던 녀석인데, 서자이기 이전에 글공부도 어지간히 안 하고, 여기저기 서방질이나 했던 모양이다만... 다른 놈들이랑 다르게 글을 읽을 줄 아니, 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겠다 싶어 데리고 있던 놈이다."
이어 천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탁탁 털며 말을 이었다.
"내가 왜 굳이 사교를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하는지 알지?"
그의 물음에 주동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죽음을 초월한 믿음과 복종을 얻기 위해서지요."
"그래. 그런데 그렇게 사교에 끌려 온 녀석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가난하고 무식하다는 것 말입니까?"
"그래, 바로 맞췄어. 그런 놈들 중에 글 읽는 놈이 드물어. 그놈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내 입장에서는 흔치 않은 놈들이라 이거지. 그게 가능한 게 뭔지 알아?"
주동환은 왠지 알 것 같았지만,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천태호는 주동환의 지척까지 다가가 고개를 낮게 수그렸다.
"서자야 서자. 서자들의 한. 너도 그래서 날 따르는 거 아냐? 이놈의 빌어먹을 세상은 출신이 좆같으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여전히 좆같다는 거지."
주동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태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말하시는 걸 주의하셔야 합니다. 세자의 몸을 빼앗은 이후라도, 그런 식의 언행은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
주동환의 말에 천태호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갑자기 그 말이 왜 튀어나와.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짜식이, 훈계질은... 어쨌든 그놈도 네놈 같은 서자라는 것만 알아둬."
주동환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서자라는 출신에 한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천태호는 관심 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러고는 주동환을 지나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주동환은 그런 천태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
이전에 잠복했던 사교도들의 모임 장소에 다시 온 세자 일행은 주위를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없고, 쓸데없는 잡다한것들만 버려진 상태였다. 대부분의 것들은 이미 불태워진 이후였다.
"없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깨끗하게 치우고 간 듯합니다."
수현 곁으로 소연이 다가와 건네는 말에 수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수현은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인근에서 주변을 돌아보고있는 세자에게 다가갔다.
"저하. 이만 돌아가시지요. 별로 남아있는 것이 없는 듯합니다."
세자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세자와 수현을 바라보고 서 있던 소연이 고개를 돌렸다.
한쪽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한 연희가 눈에 들어왔다.
소연은 세자와 수현을 다시 한번 돌아본 뒤, 조심스럽게 연희 곁으로 다가갔다.
연희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소연이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까지 숨길 거지?"
가까이 다가온 소연이 냉랭한 목소리로 물어오자, 연희는 경색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은..."
"스승님은 죽어서도 너를 믿고, 네게 칼을 맡기라고 하셨지만, 난 널 믿지 않아."
싸늘한 소연의 말투에, 연희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켜볼 거야. 잠시 동안은. 하지만 그리 오래 기다리진 못할 거야. 난 인내심이 별로 없거든.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을 끝내길 바래. 내 손으로 널 치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 말을 남기고 소연은 돌아서서 수현 곁으로 걸어갔다.
"연희야, 그만 돌아가자꾸나."
수현 옆에 서서 자신을 부르는 세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곁에는 수현과 소연이 서 있었다.
어쩐지 저곳은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될 자리인 것만 같았다.
무거운 발걸음을 느릿하게 옮기는 연희는, 마음이 아려왔다.
바로 곁에 있건만, 어쩐지 홀로 있는것처럼 외로움이 느껴졌다.
계속 누워있어봤자 갑갑한 마음만 더해지자 연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차가운 공기를 온몸으로 맞았다..
적막한 새벽속에서 느껴지는 편안함과 공기의 시원함.... 세상을 맞이하는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하니 처음 기억을 잃고 마주하던 막막함이 되살아났다. 외롭고도 쓸쓸했다.
문득, 또다시 다른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났다.
자신은 삼길이와 함께 떠돌던 빈민이었지만...
그렇다면 이 몸의 주인은 누구고 어떤 사람이었을까?
연희는 손을 들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세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어쩌면 이 육신의 주인은 제법 지체 높은 집안의 자녀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내야 하는 것일까.
그때, 연희의 눈에 저 멀리서 다가오는 세자가 보였다.
세자는 연희와 눈이 마주치자, 뭐가 그리 기쁜지 활짝 웃음 짓고 있었다.
그런 세자를 보며, 연희 역시 저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 와중에도, 세자를 보니 좋다는 생각이 드는 자신이, 어쩐지 바보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세자와 나누는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것이 아니란 사실에, 웃음이 금세 사라져버렸다.
세자가 지척 거리로 다가오자, 연희는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일찍 일어난 모양이구나."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말을 건네는 세자의 모습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예, 새벽 공기가 시원하여 일찍 나왔습니다."
연희의 대답에 세자가 심호흡을 하듯 길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과연,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구나. 오늘은 좌포청과 함께 일전에 가보았던 그 사교도들이 모이는 장소로 가볼 생각이다. 같이 가자꾸나. 그곳에 가면 기억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웃으며 이야기하던 세자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세자의 물음에 연희가 그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 어찌 그러십니까?"
"아니... 어쩐지 네 얼굴에 수심이 깃든 것 같아보여 물었다."
연희는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그저 아직 잠이 덜 깨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행여라도 걱정되는 바가 있거든, 꼭 내게 이야기하여야 한다. 알았느냐?"
연희는 그렇게 말하는 세자의 얼굴을, 마치 마음속에 담아두려는 듯이 세세히 살펴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꼭 그리하겠습니다."
세자는 연희가 미소를 짓자,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환하게 따라 웃었다.
"그래. 그럼 가자."
앞장서서 걷는 세자를, 연희가 뒤따라 걸었다.
뒷짐 쥐고 걷는 세자의 넓은 어깨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듬직함과 연희를 안고 다독이던 포근함이, 무척이나 그리울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공허해지는 것 같았다.
궁궐 앞에는 그간 세자를 호위했던 금위영 병사들 대신, 수현이 어영위 병사 두 명과 함께 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현과 병사들은 세자를 보자 공손히 인사를 올렸고, 연희는 수현을 보며 인사를 건네었다.
언제나처럼 먼저 말에 오른 세자가 연희에게 손을 내밀었고, 연희는 잠시 그런 세자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완연한 아침 햇살이, 세자의 등 뒤에서 후광처럼 빛나고 있는 가운데, 그 햇살만큼 환한 미소를 띤 세자가 부드러운 손길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어쩐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딱 한 번만.'
연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세자의 손을 잡았다.
말 위에 오른 연희는 믿음직스런 세자의 너른 등을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세자는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먼저 출발하는 수현때문에 더 깊이 생각 하지 못하고 말을 재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세자를 그저 꼭 붙잡기만 했던 것이라면, 오늘은 마치 품에 안기기라도 하는 듯 보드랍게 안겨왔기 때문이었다.
딱 한 번만, 세자를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 연희는 자기도 모르게 안기듯 그를 꼭 껴안고 말았다.
그렇게 좌포청으로 향하는 세자와 연희 일행을, 저너머 집들 담벼락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주동환이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사람의 발길이 닿지않는 외진곳을 다 기울어져 가는 허름한 집 한채가 덩그러니 지키고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그곳에서, 천태호는 태연하게 문 앞에 걸터앉아 술병을 들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 천태호 앞으로 주동환이 다가와 멈춰 서자, 천태호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세자는?"
천태호가 대뜸 물어오자, 주동환은 차분하게 인사를 한 뒤 대답했다.
"연희와 함께 이전 집결지로 향했습니다."
주동환의 대답을 듣고 천태호가 키득거리며 웃어댔다.
"고 계집 제법일세. 어찌 세자의 마음을 얻었을고? 잘됐어.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것들 사이에만 있는 것 보다야 낫겠지. 집결지는? 다 치웠지?"
"예. 깨끗합니다."
주동환의 대답에 천태호가 "그래"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술병을 들어 술을 마셨다.
"하지만... 세자가 이런 식으로 계속 추격해 오면, 결국엔 많은 것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천태호가 술병을 내려 주동환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걸 기다리는 거야."
"예?"
"더 깊숙이...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내 코앞까지 왔을 때, 그 세자의 육신을 내 것으로 만들 거라고."
"하지만... 그러려면 방주님께서..."
"죽어야 되지 않냐고?"
되묻는 천태호의 질문에, 주동환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런 주동환을 보며 천태호는 다시금 키득키득 웃어 보이고는, 이어 말했다.
"알아냈지. 내가 죽지 않고, 내 영혼이 나가 다른 사람의 육신을 지배하는 주술. 물론... 약간의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하긴 하지만... 크게 무리는 없어."
주동환은 천태호의 말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해내셨군요."
"그럼. 내가 누군데? 크흐흐, 좌상은 뭐 하고 있어?"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 잘했어. 가봐."
천태호는 말을 마치곤, 다시 술병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천태호의 추방령에도 주동환은 자리를 뜨지 않고 서 있었다.
천태호가 의아한 듯 주동환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할 말 있어?"
"그... 좌상의 몸에 들어간 자는... 누구입니까?"
주동환의 물음에 천태호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왜?"
잠시 망설이던 주동환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자가... 좌상의 딸을 쳐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천태호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재밌다는 듯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주동환이 왜웃냐는듯 눈썹을 치켜올리자, 천태호가 그를 보며 말했다.
"그것도 재밌네. 딸년 입장에서는 지 아비가 겁탈하는 것 아닌가?"
순간 주동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럴 수 없습니다."
주동환의 정색에 천태호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알았다. 이놈아. 이놈이... 쯧.... 그놈도 너처럼 서자 출신이다. 지 신세 한탄만 하다 뒈져서 구천을 떠돌던 녀석인데, 서자이기 이전에 글공부도 어지간히 안 하고, 여기저기 서방질이나 했던 모양이다만... 다른 놈들이랑 다르게 글을 읽을 줄 아니, 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겠다 싶어 데리고 있던 놈이다."
이어 천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탁탁 털며 말을 이었다.
"내가 왜 굳이 사교를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하는지 알지?"
그의 물음에 주동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죽음을 초월한 믿음과 복종을 얻기 위해서지요."
"그래. 그런데 그렇게 사교에 끌려 온 녀석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가난하고 무식하다는 것 말입니까?"
"그래, 바로 맞췄어. 그런 놈들 중에 글 읽는 놈이 드물어. 그놈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내 입장에서는 흔치 않은 놈들이라 이거지. 그게 가능한 게 뭔지 알아?"
주동환은 왠지 알 것 같았지만,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천태호는 주동환의 지척까지 다가가 고개를 낮게 수그렸다.
"서자야 서자. 서자들의 한. 너도 그래서 날 따르는 거 아냐? 이놈의 빌어먹을 세상은 출신이 좆같으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여전히 좆같다는 거지."
주동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태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말하시는 걸 주의하셔야 합니다. 세자의 몸을 빼앗은 이후라도, 그런 식의 언행은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
주동환의 말에 천태호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갑자기 그 말이 왜 튀어나와.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짜식이, 훈계질은... 어쨌든 그놈도 네놈 같은 서자라는 것만 알아둬."
주동환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서자라는 출신에 한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천태호는 관심 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러고는 주동환을 지나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주동환은 그런 천태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
이전에 잠복했던 사교도들의 모임 장소에 다시 온 세자 일행은 주위를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없고, 쓸데없는 잡다한것들만 버려진 상태였다. 대부분의 것들은 이미 불태워진 이후였다.
"없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깨끗하게 치우고 간 듯합니다."
수현 곁으로 소연이 다가와 건네는 말에 수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수현은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인근에서 주변을 돌아보고있는 세자에게 다가갔다.
"저하. 이만 돌아가시지요. 별로 남아있는 것이 없는 듯합니다."
세자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세자와 수현을 바라보고 서 있던 소연이 고개를 돌렸다.
한쪽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한 연희가 눈에 들어왔다.
소연은 세자와 수현을 다시 한번 돌아본 뒤, 조심스럽게 연희 곁으로 다가갔다.
연희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소연이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까지 숨길 거지?"
가까이 다가온 소연이 냉랭한 목소리로 물어오자, 연희는 경색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은..."
"스승님은 죽어서도 너를 믿고, 네게 칼을 맡기라고 하셨지만, 난 널 믿지 않아."
싸늘한 소연의 말투에, 연희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켜볼 거야. 잠시 동안은. 하지만 그리 오래 기다리진 못할 거야. 난 인내심이 별로 없거든.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을 끝내길 바래. 내 손으로 널 치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 말을 남기고 소연은 돌아서서 수현 곁으로 걸어갔다.
"연희야, 그만 돌아가자꾸나."
수현 옆에 서서 자신을 부르는 세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곁에는 수현과 소연이 서 있었다.
어쩐지 저곳은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될 자리인 것만 같았다.
무거운 발걸음을 느릿하게 옮기는 연희는, 마음이 아려왔다.
바로 곁에 있건만, 어쩐지 홀로 있는것처럼 외로움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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