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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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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1.38분

21화 - #4


"대감마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요."

하인의 말에 예판은 단정한 차림으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도총부 부총관 나리 오셨습니다요."

말을 전하는 하인 뒤로, 수현이 서 있었다.

수현은 예판을 보자 공손히 인사를 해 보였고, 예판은 뒷짐을 지고 고개를 끄덕이며 툇마루에 나와 섰다.

"제가... 어찌 찾아오셨는지... 아시리라 생각하옵니다. 대감."

예판이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제... 그 물건을 돌려주시지요."

예판은 근엄한 표정으로 결연하게 물었다.

"관아의 물건을 돌려주지 않겠다면, 어찌 하겠는가?"

수현은 살짝 아미를 찌푸렸다가,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감... 물건을 돌려주시면,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이번일은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치 않을 터이니, 물건만 돌려주십시오. 엄연히 의금부에서 관리하는 사건의 증좌입니다."

"그러니 묻는 것일세... 그 죄를 인정한다 하면, 나는 어떤 죄를 받게 되는 것인가?"

수현은 잠시 대답하지 못하였다.

예판이 어떤 의도로 그러는 것인지, 미루어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사건의 증거를 인멸하려 하였으니, 그 죄로 참형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허나... 대감께서는 육조의 판서이시니, 아마도 감안이 될 것이오나, 현 판서의 자리를 보존키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예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령이가 쓰러지던 날... 나는 이미 허울뿐인 판서였네."

"대감...."

수현이 간곡한 어조로 부르자, 예판은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처결해 주시게. 이제와 판서의 자리를 탐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딸자식 하나 건사하지 못한 못난 애비이니, 벌 받아 마땅한게지. 자네에겐 미안하네... 그 물건은 돌려주지 못할 듯싶네."

"대감... 대체 어찌 이러시는 겁니까? 그런다 한들 애기씨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현의 애타는 말에, 예판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이미 알고 있네. 다들 그리 말하더군. 이미 망가진 물건이라고... 이미 망가진 물건이나마... 딸자식 손에 쥐어주고 싶은 이 마음을, 이해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네. 그러니... 법대로 처결하시게."

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 예판의 단호한 얼굴을 보니 돌려줄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예판은 정적의 당여이고, 의금부의 물건을 의도적으로 훔쳐간 죄인이다.

하지만, 차마 그를 처벌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리도 저를 곤란하게 하셔야겠습니까?"

수현의 간곡한 말에도, 예판은 요지부동으로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수현의 태세전환에 예판은 어리둥절 해졌다.

"그 물건을 드릴 터이니, 그 물건에 대해 어찌 알게 되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판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예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와, 말 못 할 것이 무에 있겠는가. 시간이 조금 걸릴 듯 하니, 안으로 드시겠는가?"

"예, 그리하겠습니다."

예판이 먼저 안으로 들고, 수현이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



흐린 날씨에 바람까지 스산하게 불어 한층 을씨년스러운 창 밖 풍경을 바라보던 최준경 뒤로 한 사람이 다가와 공손히 인사를 건네었다.

최준경은 그를 흘낏 돌아보고는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 어찌하고 있더냐?"

"대감께서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곧바로 도총부의 편제를 변경하여 130여 명에 불과한 어영위 인원을 250명까지 증원하여 궁궐 밖에 배치하였습니다."

최준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만 틈을 주면 그렇게 살려고 발버둥 치게 되어 있는 법이다. 그래서 틈을 주면 안 되는 것이지. 상대를 압도하여 전의를 상실케 만들었을 때야 비로소,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법이야."

"어찌할까요? 당장이라도 병판에게 알려 다시 편제를 바꾸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최준경이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병판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네. 그런 사람에게 말을 번복케 하는 것은, 도리어 반발심만 불러오는 법이지. 그런 사람일수록 스스로 느끼게 만들어야 하네."

아뢰던 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허면... 어찌...."

잠시 생각하던 최준경은 이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희망이 클수록, 그 희망이 무너졌을 때 느끼는 절망감은 더 큰 법이지. 지금은 이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터이니, 실컷 만끽하게 해 주어라. 머지않아 그것이 절망으로 바뀔 터이니..."

최준경의 말에 그는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곧 자리에서 물러갔다.

최준경은 다시 창 밖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곧 태풍이 불어올 모양이구나."

그리고 같은 시각, 수현은 막 입궁하여 말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수현은 곧바로 동궁전으로 향하였고, 때마침 동궁전을 나서던 세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저하."

수현이 부리나케 달려가 인사하니, 세자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오, 부총관. 어딜 이리 급하게 다녀오시는가?"

"급히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무슨 일인가?"

세자가 묻는 말에 수현이 살짝 주위로 눈을 돌리자, 세자가 따라서 주위를 흘낏 보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리 들어오게."

막 나선 동궁전으로 세자가 앞서 다시 들어가자 수현이 뒤를 따랐다.

방에 들어선 세자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수현을 향해 앉으라고 손짓했다.

뒤따른 수현은 공손히 예를 차린뒤 세자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방금 예판으로부터 상당한 정보를 듣고 오는 중입니다."

그 말에 세자가 놀라 되물었다.

"예판?"

"예, 기억하시겠지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국구가 되실뻔한..."

"아.... 그래그래... 알고 있다. 안 그래도 그 일로 아바마마를 뵈러 가는 길이었다. 듣자 하니 세자빈 간택을 다시 한다 하여..."

"맞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예판대감이 무슨말을 하더냐?"

"예판이 벽륜봉에 대해 알고 있기에, 그 물건을 주는 대신 어찌 그 물건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세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벽륜봉을 줬다고?"

"예. 그렇사옵니다."

"그것으로 무얼 하려고?"

"그것은 차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은, 그 물건을 어찌 알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래. 이야기해 보게."

"예, 예판의 말에 따르면, 좌상을 따르는 무리 중에 천무방이라는 주술집단이 있다고 합니다."

세자는 다시금 놀라 심각한 표정으로 눈쌀을 지뿌렸다.

"주술집단?"

"그렇습니다. 거기 방주가 주술을 부리는 실력이 출중하다는데, 듣자 하니 그자가 백무의 스승과 관련이 있는 자였습니다."

"백무의 스승이라... 범상치는 않구나."

"예. 예판의 말에 따르면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정도라 하였습니다. 그런 자가 말하기를, '이 물건이 다시 내게 돌아왔구나'라고 말했다 합니다."

"다시?"

"예, 분명 그리 들었다 했습니다. 이는 틀림없이, 연희가 얽힌 사교도 무리와 좌상대감이 부리는 천무방이 어떤 관련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세자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 물건을 회수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니다,,,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러한 정황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 물건이 있다 하여, 그들의 죄상을 밝힐 증좌가 되기엔 부족할뿐더러, 설령 그렇다 한들, 그들을 처벌할 힘이 아직 없지 않은가..."

세자의 빠르고 냉정한 판단에, 수현도 동감하기에 속이 쓰렸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 물건을 내어줌으로써, 우리는 예판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세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보이나... 결국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그 말에 수현이 의문을 담아 세자를 쳐다봤다.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세자빈을 다시 간택하자는 상소가 올라왔다. 그러한 상소가 의정부를 통해 아바마마께 올라갔다는 것은 좌상이 허락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면 좌상의 뜻일 수도 있고.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결정은 예판과의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의미 일터... 예판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될 것이고, 또는...."

잠시 말을 끊은 세자가 훤칠한 이마를 찌푸리며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느지막이 말을 이었다.

"곧 예판이 죽임을 당하거나, 관직에서 물러날 수도 있음이야."

수현 역시 이해가 된 듯,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어 물었다.

"허면... 병사들을 보내 예판의 주위를 지키도록 할까요?"

"그거야 말로, 이 사람을 죽여달라 청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좌상이 눈에 불을 켜고 있을터... 불필요한 행동이다."

"하지만 이대로 예판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아니면, 잘려나가기 전에 뭐 하나라도 더 얻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자가 의미없다는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판도 연륜이 있는 사람일세. 본인이 어디까지 발설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네.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까지 말한 정도는 아마도 좌상에게 청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정도겠지. 그 이상의 정보는 예판도 그리 호락호락 내어줄 리 없네."

이어 수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판은... 어찌 그 물건을 원하는 것인가?"

"듣자 하니 그 물건은 봉혼벽륜이라 하여, 죽은 자의 영혼을 구천에 묶어두는 술수에 사용되는 물건이라 합니다."

"죽은 자를 구천에 묶어둔다?"

"예... 그걸 안 예판대감이, 그 물건을 가져다 자신의 딸을 불러낸 뒤, 이승에 머물게 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세자는 그제야 이해된다는 듯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쯧쯧... 그럴 만도 하겠지. 안타까운 일일세."

"저도... 그런 연유로 차마 물건을 돌려달라 강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화제를 돌리듯 물었다.

"그건 그렇고. 연희는 어찌 지내느냐? 이제는 좀 괜찮은 것 같으냐?"

"사실... 저도 요 며칠 연희를 살펴보지 못하였습니다만... 이제는 더 이상 울고 있지는 않은 듯했습니다."

"다행이구나. 무슨 속상한 일인지 알 수 없으니... 위로도 해줄 수 없어 답답하던 차였다."

세자의 말에 수현이 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위로를 해줄 생각이셨습니까?"

부정하길 바라는 수현의 속뜻이 느껴지는 물음에 세자는 은근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당연히 걱정할 수 있는것이 아닌가 말이다...

허나 그러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수현에게 둘러대듯 대답하고 말았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혹시나 위해한 자들이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철저히 지키도록 하거라. 명색이 세자가 지켜주기로 약속한 것 아니더냐. 충분히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예... 물론...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헌데...."

수현이 말끝을 흐리자, 세자의 애써 태연하게 그를 바라보며 다음말을 기다렸다.

"꼭... 그것만을 위해서는... 아닌 듯합니다만..."

수현의 말에 세자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허, 이 사람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 천무방이란 조직에 대해 알아보거라."

"예... 그래야지요."

수현은 마지못한 듯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가면서도 수현은 내내 찜찜한 마을을 털어낼 수 없었다.

세자가 아직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는 있지만, 결코 이루어져서는 안될 연정을 품고있음을 느꼈다.

연희는 세자의 앞날에 장애가 될 뿐이다. 세자가 끝까지 깨닫지 못하길 바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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