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4
또다시 악몽은 반복되고 있었다.
울며불며 묶여 있는 어머니에게 달려가고자 하는 세자는, 병사들에게 붙잡혀 단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잔혹한 칼날은 사정없이 여린 어머니의 목을 내리쳤다.
피가 튀고, 주인 잃은 몸뚱이는 힘없이 무너졌으며, 잘려나간 머리는 속절없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그대로 굳어져 버린 어린 세자 앞으로, 잘려나간 머리가 굴러왔다.
그의 앞까지 굴러와서야 멈춰 선 머리의 뒷면이 어린 세자의 눈에 들어왔다.
잘려나간 목덜미 위로 반쯤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는 문신 같은 것이 세자의 눈에 들어왔다.
그 독특한 문양은 분명 찰나에 지나간 것이었다.
세자는 자신의 눈앞에 굴러온 머리를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혼절하여 쓰러졌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세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땀 투성이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괴로운 순간을 벌써 수년째, 반복하고 있는 세자지만, 오늘만큼은 그 느낌이 달랐다.
항상 의문이었으나, 차마 어느 누구에게도 묻지 못했던 그 말.
어머니 목 뒤에 있던 문신의 문양은 무엇이었을까.
잘리는 순간에 끝나던 악몽이 오늘은 그 마지막 순간, 문양을 보았던 바로 그 순간까지 이어졌다.
마치 보란 듯이...
그리고 놀랍게도 그 문양은, 연희의 목 뒤에 있던 문양과 아주 똑같았다.
비로소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비록 연희가 기억을 잃었으나, 그녀의 행적을 쫓다 보면 분명 어머니에 관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문득 고개를 든 세자는 침소 주위를 살폈다.
얇은 방문과 벽 너머로 수많은 이들이 그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 나라의 임금이라는 아버지의 명으로, 어머니에 관한 그 모든 것은 비밀로 붙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야 한다.
이른 시간, 세자는 어떻게 알아가야 할 것인지, 천천히 자신의 계획을 설계하고 있었다.
***
이른 아침부터, 수현은 연희를 데리고 나왔다.
그녀는 지금 수현이 살고 있는 곳, 바로 뒤편에 자리 잡은 집에 머물고 있었다.
수현을 따라 나서 도착한 곳은 어느 이름 모를 수풀 길이었고, 연희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무렵, 두어 명의 사람이 말을 타고 그곳에 당도하였다.
말에서 내려 그들 앞으로 다가오니, 비로소 맨 앞에 선 사람이 세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연희는 세자를 보고 얼른 공손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였고, 세자는 그런 연희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있어, 이곳에서 보자 하였다. 나는 잠시 산책을 나온 것이니, 같이 걷자꾸나."
세자는 말과 동시에 가벼운 걸음으로 연희를 스쳐 지나갔다.
연희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니, 수현이 얼른 따라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세자와 연희가 앞서 걷고, 그 뒤로 수현이 두 명의 호위무사와 함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였느냐?"
걸으며 묻는 세자의 말에, 연희는 얼른 지척 거리로 다가가 대답했다.
"예..."
"어디까지 기억나는지, 네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세자가 다시 묻는 말에, 연희는 아미를 찌푸리며 기억을 떠올려보려 노력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기억이란 게 없었다.
"그것이... 정말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어디 살았었는지... 무얼 하고 살았었는지..."
연희의 대답에, 문득 세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세자가 멈춰 서니, 연희도, 따라오던 수현과 호위 무사도 모두 제 자리에 멈춰 섰다.
세자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연희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연희는 세자의 눈빛에 괜스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그의 눈빛을 피했다.
이어 세자의 눈이 그녀의 손에 이르러, 잠시 그대로 멈추어 있다가, 다시 앞쪽을 보고 걸으며 이야기했다.
"보아하니, 네 신분이 천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구나."
세자의 말에 연희가 눈을 반짝거리며, 그를 따라가 물었다.
"어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얼굴빛이 맑고, 네 손이 깨끗하니, 험한 일을 하거나, 바깥에서 일을 하던 사람은 아니었을거란 뜻이다."
연희가 "아..." 소리를 내며 자신의 손을 살펴보았다.
아직 성숙한 나이는 아니라고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은살 하나, 거친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손이었다.
세자의 말에 수긍하듯, 연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면 세자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니,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알아봐야 할지 다시 막막해지는 느낌어었다.
일단 그녀가 잡혀 왔다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너무 대놓고 조사를 한다면 분명 좌의정을 비롯해,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무리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 뻔했다.
무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행적을 쫓을 방법이 필요했다.
그렇게 고민을 하며 걷고 있을 때, 어디선가 꽃잎 하나가 날아와 세자의 머리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생각에 빠져 있던 세자는 자신의 머리에 꽃잎이 날아든지도 모른 체 걷고 있었고, 그것을 본 연희는 고민할 것도 없이 후다닥 세자 앞으로 걸어갔다.
연희가 갑자기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서니, 세자는 발걸음을 멈추어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어 연희의 손이 망설임없이 세자의 머리 쪽으로 향하니, 당황하여 물었다.
"뭐...뭣하는 것이냐?"
연희는 세자가 당황하는 것도 모른 체, 얼른 세자의 머리에서 꽃잎을 떼어내고는, 그것을 세자에게 보여주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이것이... 세자마마의 머리에 있었습니다."
세자는 연희 손위에 놓인 꽃잎과 연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순간적으로 굳은 얼굴을 갈무리했다.
이내 헛기침을 한번 하며, 다소 태연해진 표정으로 나직히 말했다.
"음...그렇게 함부로 내 몸에 손을 대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궁궐내에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크게 경을 칠 일이야."
"아... 네..."
시무룩해하는 연희를 보며 세자는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뭐, 몰라서 그런 것이니... 괜찮다."
그러자, 연희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럼... 계속 모르면 되는 것입니까?"
세자는 연희의 당돌한 말에 당황스러웠다.
"뭐... 뭐?"
"몰라서 괜찮다 하시니, 그냥 저는 계속 모르면, 세자마마의 몸에 손을 대도 되는 것인가 해서 그렇습니다."
연희의 의중이 뭔지 순간 의심이 들어 무뚝뚝하게 말이 나갔다.
"이제 알지 않느냐?"
연희는, 조금 장난기 어린 당돌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잡혔을 때, 또는 잡히기 전에 머리를 조금 다쳤는가 봅니다. 방금 한 대화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기억을 잃나 봅니다."
연희의 장난스런 농담에 세자가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네가 궁중의 예법을 모르니, 당돌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런 소리는 예서만 하거라. 다른 사람이 들으면 크게 경을 칠 일이다."
"그럼 세자마마께옵서 미리 말씀을 해주십시오. 연희가 머리를 다쳐 종종 기억을 잃는다고 하시면, 어느 누구도 문제 삼지 않을 것 아닙니까?"
기가 찰 노릇이다. 세자는 그녀의 말이 농인지 진담인지 혹 다른뜻이 있어 자신에게 접근한것은 아닌지 순간 의심이 들어 저절로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너는 지금 내게 거짓말을 해달라 청하는 것이냐?"
"그로 인해 누군가 피해를 보지 않는다면, 문제 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거짓말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가지가지다. 이제는 훈계까지 한다.
어이없다 못해 이제는 재밌기까지 했다.
문득 세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가만있어보자. 거짓말이라... 그래, 그러고 보니 항상 올곧은 방법만 고집했었구나.'
그랬다. 어쩌면 거짓말이라는 보다 편하고 쉬운 방법이 있었음에도, 당연히 그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았었다.
"무엇을 그리 생각하십니까?"
"아, 아니다. 조금 더 걷자꾸나."
세자가 연희 곁을 스쳐 지나가며 걸으니, 연희도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서서 걸었다.
세자는 문득 스스럼없이 자신의 곁에 당연하다는듯이 서서 걷는 그녀를 보자, 이걸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하다가, 돌연 재밌다는 듯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찌 웃으십니까?"
궁금해하는 연희의 물음에 세자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세자의 대답에 연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피~"
세자는 그녀의 순진한 반응에 이내 재밌다는 듯이 껄껄 거리며 웃었다.
"왜 자꾸 웃으십니까?"
잠시 그녀를 의심했지만 만나게된 상황자체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에대한 책망과 그녀의 순수한 행동 하나하나가 귀엽게 보여 본인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는 말을 못하고 그저 웃으며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아니다. 네가 궁중의 예법을 모르니, 내 어찌 가르쳐야 할지 막막해서 그렇다."
"그런데 어찌 그렇게 재밌다는 듯이 웃으십니까?"
"네가 재밌어서 그렇다."
"제가 재밌다고요? 뭐가요? 어떻게요?"
"하하하"
이제는 세자에게 따져 묻기까지 하고 있으니, 여태 세자가 살면서 경험했던 여인들에게서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행동이었다.
한편으로는 어이없고, 한편으로는 우스운데, 이걸 그녀에게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연희가 어리둥절해하며 입술을 삐죽거리며 속상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왠지 사랑스럽게까지 느껴졌다.
"흠흠..."
세자는 문득 본인의 생각에 놀라 헛기침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늘어지던 입매를 흠칫 굳힌 뒤,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구나."
"예? 어떤 것이요?"
"네가 기억을 다 잃었다 하였는데, 그래도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 않느냐?"
세자의 물음에 연희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게... 실은 제가 기억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궁금한듯 눈썹을 휘며 묻는 세자의 물음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실은... 저랑 같이 잡혀왔던 여인중 한명이 저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연희라고... 그래서 저도 그냥 그런 줄만 알고있습니다."
순간 세자는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자가 돌아서서 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희 낭자와 함께 잡혀온 이들은 지금 어찌 되었느냐?"
수현은 갑작스레 세자가 물어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이해한 듯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연희아가씨를 거쳐에 모신 후 확인해보니 바로 그날 모두 처형되었다 하옵니다."
세자의 표정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
좀 더 빨리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좀 더 빨리 진실에 한걸음 다가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 혹시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연희가 실망한 표정의 세자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세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를 연희라 불렀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했었습니다. 아니 이름이 아닌 것 같긴 한데... 율제...라고..."
세자의 눈빛이 순간 반짝거렸다.
"율제?"
"예,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율제님의 명령을 잊은 거냐면서, 저에게 화를 냈었습니다."
그러자 수현이 살짝 기쁜 표정이 되어 한걸음 다가왔다.
"보통 사교도 놈들은 자신들의 교주를 엄청 대단한 호칭으로 부르곤 합니다. 황신이니, 천제니, 창신이니 별별 호칭을 다쓰죠. 아마도 이놈은 율제라는 말을 썼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세자 역시 희망 어린 눈빛으로 수현을 보며 물었다.
"찾을 수 있겠느냐?"
수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능할 것입니다. 율제란 호칭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니, 아마도 그놈만이 쓰는 호칭일 것이 분명합니다. 능히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자의 표정에 기쁨이 더해졌다.
"당장 찾아라.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 줄 터이니. 기필코 찾아야 한다."
"예, 저하."
드디어. 드디어 한걸음 다가가는구나.
세자는 희망이 서서히 보이는 듯한 느낌에 고마운 마음으로 연희를 돌아보다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흡사 강아지 같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연희가 바로 코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흠흠... 말해줘서 고맙구나."
"네? 제가...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를 도와주시는 것이라고..."
연희가 의아해 하자, 세자가 살짝 곤혹스러운듯 말했다.
"아~ 아하하... 어, 어쨌든 너를 돕는 나를 도왔으니, 고맙다...라는 것이다."
"아..."
연희가 이해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세자가 손을 들어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간이 지체된 듯 하니, 그만 돌아가자구나."
그리고 세자는 거침없이 걸어갔고, 연희는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울며불며 묶여 있는 어머니에게 달려가고자 하는 세자는, 병사들에게 붙잡혀 단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잔혹한 칼날은 사정없이 여린 어머니의 목을 내리쳤다.
피가 튀고, 주인 잃은 몸뚱이는 힘없이 무너졌으며, 잘려나간 머리는 속절없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그대로 굳어져 버린 어린 세자 앞으로, 잘려나간 머리가 굴러왔다.
그의 앞까지 굴러와서야 멈춰 선 머리의 뒷면이 어린 세자의 눈에 들어왔다.
잘려나간 목덜미 위로 반쯤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는 문신 같은 것이 세자의 눈에 들어왔다.
그 독특한 문양은 분명 찰나에 지나간 것이었다.
세자는 자신의 눈앞에 굴러온 머리를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혼절하여 쓰러졌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세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땀 투성이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괴로운 순간을 벌써 수년째, 반복하고 있는 세자지만, 오늘만큼은 그 느낌이 달랐다.
항상 의문이었으나, 차마 어느 누구에게도 묻지 못했던 그 말.
어머니 목 뒤에 있던 문신의 문양은 무엇이었을까.
잘리는 순간에 끝나던 악몽이 오늘은 그 마지막 순간, 문양을 보았던 바로 그 순간까지 이어졌다.
마치 보란 듯이...
그리고 놀랍게도 그 문양은, 연희의 목 뒤에 있던 문양과 아주 똑같았다.
비로소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비록 연희가 기억을 잃었으나, 그녀의 행적을 쫓다 보면 분명 어머니에 관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문득 고개를 든 세자는 침소 주위를 살폈다.
얇은 방문과 벽 너머로 수많은 이들이 그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 나라의 임금이라는 아버지의 명으로, 어머니에 관한 그 모든 것은 비밀로 붙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야 한다.
이른 시간, 세자는 어떻게 알아가야 할 것인지, 천천히 자신의 계획을 설계하고 있었다.
***
이른 아침부터, 수현은 연희를 데리고 나왔다.
그녀는 지금 수현이 살고 있는 곳, 바로 뒤편에 자리 잡은 집에 머물고 있었다.
수현을 따라 나서 도착한 곳은 어느 이름 모를 수풀 길이었고, 연희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무렵, 두어 명의 사람이 말을 타고 그곳에 당도하였다.
말에서 내려 그들 앞으로 다가오니, 비로소 맨 앞에 선 사람이 세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연희는 세자를 보고 얼른 공손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였고, 세자는 그런 연희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있어, 이곳에서 보자 하였다. 나는 잠시 산책을 나온 것이니, 같이 걷자꾸나."
세자는 말과 동시에 가벼운 걸음으로 연희를 스쳐 지나갔다.
연희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니, 수현이 얼른 따라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세자와 연희가 앞서 걷고, 그 뒤로 수현이 두 명의 호위무사와 함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였느냐?"
걸으며 묻는 세자의 말에, 연희는 얼른 지척 거리로 다가가 대답했다.
"예..."
"어디까지 기억나는지, 네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세자가 다시 묻는 말에, 연희는 아미를 찌푸리며 기억을 떠올려보려 노력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기억이란 게 없었다.
"그것이... 정말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어디 살았었는지... 무얼 하고 살았었는지..."
연희의 대답에, 문득 세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세자가 멈춰 서니, 연희도, 따라오던 수현과 호위 무사도 모두 제 자리에 멈춰 섰다.
세자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연희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연희는 세자의 눈빛에 괜스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그의 눈빛을 피했다.
이어 세자의 눈이 그녀의 손에 이르러, 잠시 그대로 멈추어 있다가, 다시 앞쪽을 보고 걸으며 이야기했다.
"보아하니, 네 신분이 천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구나."
세자의 말에 연희가 눈을 반짝거리며, 그를 따라가 물었다.
"어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얼굴빛이 맑고, 네 손이 깨끗하니, 험한 일을 하거나, 바깥에서 일을 하던 사람은 아니었을거란 뜻이다."
연희가 "아..." 소리를 내며 자신의 손을 살펴보았다.
아직 성숙한 나이는 아니라고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은살 하나, 거친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손이었다.
세자의 말에 수긍하듯, 연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면 세자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니,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알아봐야 할지 다시 막막해지는 느낌어었다.
일단 그녀가 잡혀 왔다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너무 대놓고 조사를 한다면 분명 좌의정을 비롯해,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무리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 뻔했다.
무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행적을 쫓을 방법이 필요했다.
그렇게 고민을 하며 걷고 있을 때, 어디선가 꽃잎 하나가 날아와 세자의 머리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생각에 빠져 있던 세자는 자신의 머리에 꽃잎이 날아든지도 모른 체 걷고 있었고, 그것을 본 연희는 고민할 것도 없이 후다닥 세자 앞으로 걸어갔다.
연희가 갑자기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서니, 세자는 발걸음을 멈추어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어 연희의 손이 망설임없이 세자의 머리 쪽으로 향하니, 당황하여 물었다.
"뭐...뭣하는 것이냐?"
연희는 세자가 당황하는 것도 모른 체, 얼른 세자의 머리에서 꽃잎을 떼어내고는, 그것을 세자에게 보여주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이것이... 세자마마의 머리에 있었습니다."
세자는 연희 손위에 놓인 꽃잎과 연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순간적으로 굳은 얼굴을 갈무리했다.
이내 헛기침을 한번 하며, 다소 태연해진 표정으로 나직히 말했다.
"음...그렇게 함부로 내 몸에 손을 대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궁궐내에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크게 경을 칠 일이야."
"아... 네..."
시무룩해하는 연희를 보며 세자는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뭐, 몰라서 그런 것이니... 괜찮다."
그러자, 연희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럼... 계속 모르면 되는 것입니까?"
세자는 연희의 당돌한 말에 당황스러웠다.
"뭐... 뭐?"
"몰라서 괜찮다 하시니, 그냥 저는 계속 모르면, 세자마마의 몸에 손을 대도 되는 것인가 해서 그렇습니다."
연희의 의중이 뭔지 순간 의심이 들어 무뚝뚝하게 말이 나갔다.
"이제 알지 않느냐?"
연희는, 조금 장난기 어린 당돌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잡혔을 때, 또는 잡히기 전에 머리를 조금 다쳤는가 봅니다. 방금 한 대화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기억을 잃나 봅니다."
연희의 장난스런 농담에 세자가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네가 궁중의 예법을 모르니, 당돌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런 소리는 예서만 하거라. 다른 사람이 들으면 크게 경을 칠 일이다."
"그럼 세자마마께옵서 미리 말씀을 해주십시오. 연희가 머리를 다쳐 종종 기억을 잃는다고 하시면, 어느 누구도 문제 삼지 않을 것 아닙니까?"
기가 찰 노릇이다. 세자는 그녀의 말이 농인지 진담인지 혹 다른뜻이 있어 자신에게 접근한것은 아닌지 순간 의심이 들어 저절로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너는 지금 내게 거짓말을 해달라 청하는 것이냐?"
"그로 인해 누군가 피해를 보지 않는다면, 문제 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거짓말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가지가지다. 이제는 훈계까지 한다.
어이없다 못해 이제는 재밌기까지 했다.
문득 세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가만있어보자. 거짓말이라... 그래, 그러고 보니 항상 올곧은 방법만 고집했었구나.'
그랬다. 어쩌면 거짓말이라는 보다 편하고 쉬운 방법이 있었음에도, 당연히 그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았었다.
"무엇을 그리 생각하십니까?"
"아, 아니다. 조금 더 걷자꾸나."
세자가 연희 곁을 스쳐 지나가며 걸으니, 연희도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서서 걸었다.
세자는 문득 스스럼없이 자신의 곁에 당연하다는듯이 서서 걷는 그녀를 보자, 이걸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하다가, 돌연 재밌다는 듯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찌 웃으십니까?"
궁금해하는 연희의 물음에 세자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세자의 대답에 연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피~"
세자는 그녀의 순진한 반응에 이내 재밌다는 듯이 껄껄 거리며 웃었다.
"왜 자꾸 웃으십니까?"
잠시 그녀를 의심했지만 만나게된 상황자체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에대한 책망과 그녀의 순수한 행동 하나하나가 귀엽게 보여 본인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는 말을 못하고 그저 웃으며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아니다. 네가 궁중의 예법을 모르니, 내 어찌 가르쳐야 할지 막막해서 그렇다."
"그런데 어찌 그렇게 재밌다는 듯이 웃으십니까?"
"네가 재밌어서 그렇다."
"제가 재밌다고요? 뭐가요? 어떻게요?"
"하하하"
이제는 세자에게 따져 묻기까지 하고 있으니, 여태 세자가 살면서 경험했던 여인들에게서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행동이었다.
한편으로는 어이없고, 한편으로는 우스운데, 이걸 그녀에게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연희가 어리둥절해하며 입술을 삐죽거리며 속상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왠지 사랑스럽게까지 느껴졌다.
"흠흠..."
세자는 문득 본인의 생각에 놀라 헛기침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늘어지던 입매를 흠칫 굳힌 뒤,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구나."
"예? 어떤 것이요?"
"네가 기억을 다 잃었다 하였는데, 그래도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 않느냐?"
세자의 물음에 연희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게... 실은 제가 기억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궁금한듯 눈썹을 휘며 묻는 세자의 물음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실은... 저랑 같이 잡혀왔던 여인중 한명이 저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연희라고... 그래서 저도 그냥 그런 줄만 알고있습니다."
순간 세자는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자가 돌아서서 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희 낭자와 함께 잡혀온 이들은 지금 어찌 되었느냐?"
수현은 갑작스레 세자가 물어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이해한 듯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연희아가씨를 거쳐에 모신 후 확인해보니 바로 그날 모두 처형되었다 하옵니다."
세자의 표정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
좀 더 빨리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좀 더 빨리 진실에 한걸음 다가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 혹시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연희가 실망한 표정의 세자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세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를 연희라 불렀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했었습니다. 아니 이름이 아닌 것 같긴 한데... 율제...라고..."
세자의 눈빛이 순간 반짝거렸다.
"율제?"
"예,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율제님의 명령을 잊은 거냐면서, 저에게 화를 냈었습니다."
그러자 수현이 살짝 기쁜 표정이 되어 한걸음 다가왔다.
"보통 사교도 놈들은 자신들의 교주를 엄청 대단한 호칭으로 부르곤 합니다. 황신이니, 천제니, 창신이니 별별 호칭을 다쓰죠. 아마도 이놈은 율제라는 말을 썼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세자 역시 희망 어린 눈빛으로 수현을 보며 물었다.
"찾을 수 있겠느냐?"
수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능할 것입니다. 율제란 호칭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니, 아마도 그놈만이 쓰는 호칭일 것이 분명합니다. 능히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자의 표정에 기쁨이 더해졌다.
"당장 찾아라.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 줄 터이니. 기필코 찾아야 한다."
"예, 저하."
드디어. 드디어 한걸음 다가가는구나.
세자는 희망이 서서히 보이는 듯한 느낌에 고마운 마음으로 연희를 돌아보다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흡사 강아지 같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연희가 바로 코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흠흠... 말해줘서 고맙구나."
"네? 제가...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를 도와주시는 것이라고..."
연희가 의아해 하자, 세자가 살짝 곤혹스러운듯 말했다.
"아~ 아하하... 어, 어쨌든 너를 돕는 나를 도왔으니, 고맙다...라는 것이다."
"아..."
연희가 이해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세자가 손을 들어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간이 지체된 듯 하니, 그만 돌아가자구나."
그리고 세자는 거침없이 걸어갔고, 연희는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