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9
천천히 눈을 뜬 연희는, 시야가 맑지않아 눈앞에 장막이 쳐진듯 흐리게 보였다.
눈을 깜빡 거리며, 정신을 차려보려 애쓰던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등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통증에 절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바늘로 콕콕 찔러대는 것만 같이 신경들이 날뛰고 있었다.
이마 위로는 식은 땀이 송글 송글 맺혀있고 온몸이 뜨겁게 불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고통만이 느껴지던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성치 않으니, 무리해서 움직이려 하지 말거라."
아픔에 정신이 흐릿한 와중에도 그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어 눈 앞으로 희끄무레하게 알아보기 힘든 무언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앗, 차가...'
연희는 그것이 피부에 닿는 순간 차가움에 항의하려는듯 입을 열려다, 곧 차가움은 시원함이 되었고, 그녀가 느끼던 고통을 한결 덜어내 주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시원함 너머로 느껴지는 손길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흐린 시선 너머로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윤곽만으로, 그가 세자임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록 몸은 아픈지만, 마음은 도리어 평안해지는 상반된 상태 속에서, 고마움인지 무엇인지 모를 묘한 기분으로, 흐릿한 시선 너머의 세자를 바라보았다.
"애써 일어나려 하지 말거라. 지금은 그저 몸이 낫는 것만을 신경 쓰면 될 것이다. 내..."
세자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잠시 멈칫거렸다.
그의 말을 따라서, 연희의 이마를 닦아 주던 손길도 멈추었다.
하지만, 금세 다시 움직여 땀을 닦은 물수건을 씻어내며 말을 이었다.
"내 너를 지켜줄 것이니, 그저 마음 편히 쉬거라."
연희는 세자의 말이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잠시나마 망설였던 세자의 말소리에서, 그녀는 그가 가지고 있을 고민을 미루어 짐작해 보고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지켜준다는 말을, 망설였던걸까.
양반 일지, 중인 일지, 아니면 천한 노비 신분일지, 아직 알 수 없는 상태 이건만.
세자는 기꺼이 자신을 곁에서 지켜준다 말하고 있다.
세자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일까.
아니면...
묻지도 못할 생각들을 하는 사이, 연희는 다시 노곤함을 느꼈고 수마가 몰려왔다.
자꾸만 저절로 감기는 시선 너머로, 다가오는 세자의 손길이 보였다.
연희는 잠이 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든 연희를 보면서, 세자는 살짝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분명 아프고 고통스러울 텐데도, 얼핏 고운 미소가 얼굴에 드리운 것 같았다.
잠시 연희의 표정을 다시 살폈으나,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그저 평온할 따름이었다.
세자는 자신이 잘못 보았나 하는 생각에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다시금 그녀의 땀을 닦아주고, 시원한 물수건을 머리에 올려놓았다.
***
포졸 복장에 두 남자가 지친 몸을 이끌고 주막 안으로 들어섰다.
"어우, 그냥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네."
한 사람이 치를 떨며 자리를 잡고 앉자, 다른 이가 따라 마주 앉으며 말했다.
"아 며칠 갈 거야, 그게 쉬이 잊혀지나. 저 고귀하신 양반네들은 그럴싸하게 멋들어진 것들만 하고, 이딴 시체 치우는 일은 죄다 우리 같은 천한 것들 몫 아닌가."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아 수다를 이어가려다, 두 사람을 본 주모가 서둘러 다가오는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오셨어요."
주모가 말을 건네자, 한 사람이 주모를 보며 말했다.
"여기 국밥 두 그릇하고, 탁주 좀 내주쇼."
"예예."
주모가 돌아가고 두 사람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듣자 하니, 그 무슨 사교도들 모임이었다고 하는 것 같던데..."
그 말에, 건너편 자리에서 소리 없이 식사를 하고 있던 한 사람이 짐짓 행동을 멈추었다.
"말도 마, 사람을 죄다 태워 죽인 모양이야. 아주 그냥 시체 탄 냄새가... 어우... 토할 거 같네."
어느새 멈춰 섰던 손은 무심한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그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며, 두 포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살아남아 잡혀온 자들도 있었다면서? 죄다 참수된 건가?"
"아무렴, 살아남았겠어? 국법을 어겼으니, 바로 처형이지. 아, 맞다. 한 명 살아남았다고 하는 것 같던데..."
"누구?"
"몰라, 무슨 제물로 받쳐질 뻔했던 양민이라면서, 세자마마께서 보살피고 있다는 것 같던데..."
"양민은 무슨... 다 그놈이 그놈이지."
"아, 그래도 싹 씻겨서 치장하니, 곱고 참하다 하더만.... 뭐라더라... 이름이 연흰가 뭔가 그랬던 거 같은데..."
두 사람의 이야기를 훔쳐 듣던 사내의 표정은 완전히 망연자실 굳어져 버렸다.
심지어 그는 들고 있던 수저를 놓치는 바람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두 포졸의 관심이 그에게 쏠리며 의아한 눈빛을 보내왔다.
하지만 때마침 나온 국밥과 탁주 덕에 두 포졸의 관심은 금세 그에게서 떨어져나갔다.
사내는 반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모에게 값을 치른 뒤 주막을 나섰다.
터벅터벅 걸음을 걷던 그가 멍하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연희가.... 살아있어?"
그리고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생각에 그는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어?"
밖에서 수다를 떨고 있고있던 무리중의 한사람이 급히 달려가는 그 사내의 모습을 보고 놀라 황급히 소리쳤다.
"형님, 어디 가십니까?"
그를 따르려던 무리들은 순식간에 멀어지는 사내의 뒷모습에 그저 그가 사라져버린 길만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뭐야? 왜 그런 거야?"
다른 이가 묻는 말에, 먼저 부른 이가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낸들 아나? 아니 배고프다고 밥 먹으러 들어가시더니, 왜 저러신대?"
옆에 있던 다른 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따 요새 쪼까 많이 드신다 싶더니, 꽉 맥혀 부렀는 갑네."
"막혀? 소화가 안된다고? 소화가 안된다고 저리 뛰어?"
"아따, 니도 막혀 불면 저리 띠바라. 쪼까 효과가 있응께. 천하의 주동환도, 꽉 막혀 불면 뛰어야제. 별수 있겠는가?"
"그냥 똥 메려운거 아냐?"
그들이 그렇게 부르는 주동환이란 사내는,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가, 어느새 꽤 높은 산자락에까지 닿아서야 멈췄다, 몸을 돌려 눈앞을보니 저 멀리 궁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 있었구나. 살아있었는데... 그런 줄도 몰랐구나."
그는 후회하듯 말하고 있었지만, 그 한편으로는 기쁨이 어려 있었다.
"기다려라. 내 반드시 네 곁으로 갈 것이다."
그는 궁궐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듯 다짐했다.
***
해가 서산으로 그 모습을 감추어 가고 있는 무렵, 마당에서 빗자루질하며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고 있던 한 여인은 문득 돌아서다, 대문에 서 있는 한 젊은 남자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엄마야..."
그녀는, 이내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고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오, 오셨습니까..."
그는 공연히 그녀를 놀라게하여 미안한 듯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미안하다. 너를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방금 도착했다. 백무님께서는 계시느냐?"
"예예, 안에 계십니다. 잠시만요..."
여인이 집 문 쪽으로 다가가 큰 소리로 부르듯 말했다.
"백무님, 밖에 부총관 나리 찾아와 계십니다."
잠시 후, 문이 서둘러 열리며 안에서 중년 여인이 부랴부랴 밖으로 나와 수현에게 인사하였다.
"부총관 나리 오셨습니까."
수현은 그녀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천천히 하시지요. 내 긴히 물어볼 것이 있어 잠시 들렸습니다."
"예, 안으로 드시지요."
백무라 불린 여인은 방문을 열어, 수현을 들여보내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가며 바깥의 젊은 여인에게 말했다.
"소연아, 차를 내오너라."
"예, 백무님."
백무가 안으로 들어선 뒤, 수현과 백무는 서로 마주 보고 자리에 앉았다.
"어찌 기별도 없이 찾아오셨습니까?"
백무가 묻는 말에 수현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말했다시피, 그저 잠시 들린 것뿐입니다. 내 요즘 세자마마의 명으로 사교도들에 관련된 것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예, 사교도들에 대한 이야기는 진즉부터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특히 근자에 들어 한양 인근에서도 사교도들이 출현하고 있어, 우려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백무의 말에 수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야기 하기가 한결 수월하겠군요."
이어 수현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은 타다만 나무 막대기로, 타지 않은 한쪽에는 붉은색 글귀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수현의 물음에 표정이 굳어지던 백무는 조심스럽게 그 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소연이 다과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소연이 두 사람 사이에 다과상을 내려놓다가, 백무가 유심히 살피고 있는 나무 막대기를 보고 놀라 눈이 등잔만 해졌다.
"어? 그거..."
백무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사교도들이 쓰는 벽륜봉(霹倫棒)같구나."
백무의 말에 수현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되물었다.
"벽륜봉? 그게 무엇입니까?"
백무는 짧은 한숨을 내쉰 뒤에, 수현을 보며 대답했다.
"벽륜봉이라고 하여, 주술 행위를 할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글자가 조악하고, 끝을 태우다 만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제대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 듯합니다. 하지만..."
백무가 말끝을 흐리자, 수현의 표정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이 나무는 아마도 벽조목(霹棗木)인 듯합니다.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보통 물건은 아니라고 봐야겠지요. 더욱이 벽조목을 이용해 벽륜봉을 만들었다면, 이는 귀신을 제압하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큽니다."
수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신?"
"예... 보통 벽조목은 양기가 가득하여, 귀신들이 꺼리므로,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부르는 물건이라 하지요. 거기에 이러한 사술의 글귀를 더하였으니, 그 위력은 더욱 강해져 있을 것입니다. 이런 물건을 다룰정도의 사교도라면, 쉬이 웃어넘길 일이 아닐 듯합니다."
백무가 말을 하며 벽륜봉을 넘기자, 수현이 그것을 받아 들고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귀신을 제압하는 힘이라...."
눈을 깜빡 거리며, 정신을 차려보려 애쓰던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등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통증에 절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바늘로 콕콕 찔러대는 것만 같이 신경들이 날뛰고 있었다.
이마 위로는 식은 땀이 송글 송글 맺혀있고 온몸이 뜨겁게 불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고통만이 느껴지던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성치 않으니, 무리해서 움직이려 하지 말거라."
아픔에 정신이 흐릿한 와중에도 그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어 눈 앞으로 희끄무레하게 알아보기 힘든 무언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앗, 차가...'
연희는 그것이 피부에 닿는 순간 차가움에 항의하려는듯 입을 열려다, 곧 차가움은 시원함이 되었고, 그녀가 느끼던 고통을 한결 덜어내 주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시원함 너머로 느껴지는 손길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흐린 시선 너머로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윤곽만으로, 그가 세자임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록 몸은 아픈지만, 마음은 도리어 평안해지는 상반된 상태 속에서, 고마움인지 무엇인지 모를 묘한 기분으로, 흐릿한 시선 너머의 세자를 바라보았다.
"애써 일어나려 하지 말거라. 지금은 그저 몸이 낫는 것만을 신경 쓰면 될 것이다. 내..."
세자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잠시 멈칫거렸다.
그의 말을 따라서, 연희의 이마를 닦아 주던 손길도 멈추었다.
하지만, 금세 다시 움직여 땀을 닦은 물수건을 씻어내며 말을 이었다.
"내 너를 지켜줄 것이니, 그저 마음 편히 쉬거라."
연희는 세자의 말이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잠시나마 망설였던 세자의 말소리에서, 그녀는 그가 가지고 있을 고민을 미루어 짐작해 보고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지켜준다는 말을, 망설였던걸까.
양반 일지, 중인 일지, 아니면 천한 노비 신분일지, 아직 알 수 없는 상태 이건만.
세자는 기꺼이 자신을 곁에서 지켜준다 말하고 있다.
세자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일까.
아니면...
묻지도 못할 생각들을 하는 사이, 연희는 다시 노곤함을 느꼈고 수마가 몰려왔다.
자꾸만 저절로 감기는 시선 너머로, 다가오는 세자의 손길이 보였다.
연희는 잠이 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든 연희를 보면서, 세자는 살짝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분명 아프고 고통스러울 텐데도, 얼핏 고운 미소가 얼굴에 드리운 것 같았다.
잠시 연희의 표정을 다시 살폈으나,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그저 평온할 따름이었다.
세자는 자신이 잘못 보았나 하는 생각에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다시금 그녀의 땀을 닦아주고, 시원한 물수건을 머리에 올려놓았다.
***
포졸 복장에 두 남자가 지친 몸을 이끌고 주막 안으로 들어섰다.
"어우, 그냥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네."
한 사람이 치를 떨며 자리를 잡고 앉자, 다른 이가 따라 마주 앉으며 말했다.
"아 며칠 갈 거야, 그게 쉬이 잊혀지나. 저 고귀하신 양반네들은 그럴싸하게 멋들어진 것들만 하고, 이딴 시체 치우는 일은 죄다 우리 같은 천한 것들 몫 아닌가."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아 수다를 이어가려다, 두 사람을 본 주모가 서둘러 다가오는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오셨어요."
주모가 말을 건네자, 한 사람이 주모를 보며 말했다.
"여기 국밥 두 그릇하고, 탁주 좀 내주쇼."
"예예."
주모가 돌아가고 두 사람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듣자 하니, 그 무슨 사교도들 모임이었다고 하는 것 같던데..."
그 말에, 건너편 자리에서 소리 없이 식사를 하고 있던 한 사람이 짐짓 행동을 멈추었다.
"말도 마, 사람을 죄다 태워 죽인 모양이야. 아주 그냥 시체 탄 냄새가... 어우... 토할 거 같네."
어느새 멈춰 섰던 손은 무심한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그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며, 두 포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살아남아 잡혀온 자들도 있었다면서? 죄다 참수된 건가?"
"아무렴, 살아남았겠어? 국법을 어겼으니, 바로 처형이지. 아, 맞다. 한 명 살아남았다고 하는 것 같던데..."
"누구?"
"몰라, 무슨 제물로 받쳐질 뻔했던 양민이라면서, 세자마마께서 보살피고 있다는 것 같던데..."
"양민은 무슨... 다 그놈이 그놈이지."
"아, 그래도 싹 씻겨서 치장하니, 곱고 참하다 하더만.... 뭐라더라... 이름이 연흰가 뭔가 그랬던 거 같은데..."
두 사람의 이야기를 훔쳐 듣던 사내의 표정은 완전히 망연자실 굳어져 버렸다.
심지어 그는 들고 있던 수저를 놓치는 바람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두 포졸의 관심이 그에게 쏠리며 의아한 눈빛을 보내왔다.
하지만 때마침 나온 국밥과 탁주 덕에 두 포졸의 관심은 금세 그에게서 떨어져나갔다.
사내는 반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모에게 값을 치른 뒤 주막을 나섰다.
터벅터벅 걸음을 걷던 그가 멍하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연희가.... 살아있어?"
그리고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생각에 그는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어?"
밖에서 수다를 떨고 있고있던 무리중의 한사람이 급히 달려가는 그 사내의 모습을 보고 놀라 황급히 소리쳤다.
"형님, 어디 가십니까?"
그를 따르려던 무리들은 순식간에 멀어지는 사내의 뒷모습에 그저 그가 사라져버린 길만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뭐야? 왜 그런 거야?"
다른 이가 묻는 말에, 먼저 부른 이가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낸들 아나? 아니 배고프다고 밥 먹으러 들어가시더니, 왜 저러신대?"
옆에 있던 다른 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따 요새 쪼까 많이 드신다 싶더니, 꽉 맥혀 부렀는 갑네."
"막혀? 소화가 안된다고? 소화가 안된다고 저리 뛰어?"
"아따, 니도 막혀 불면 저리 띠바라. 쪼까 효과가 있응께. 천하의 주동환도, 꽉 막혀 불면 뛰어야제. 별수 있겠는가?"
"그냥 똥 메려운거 아냐?"
그들이 그렇게 부르는 주동환이란 사내는,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가, 어느새 꽤 높은 산자락에까지 닿아서야 멈췄다, 몸을 돌려 눈앞을보니 저 멀리 궁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 있었구나. 살아있었는데... 그런 줄도 몰랐구나."
그는 후회하듯 말하고 있었지만, 그 한편으로는 기쁨이 어려 있었다.
"기다려라. 내 반드시 네 곁으로 갈 것이다."
그는 궁궐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듯 다짐했다.
***
해가 서산으로 그 모습을 감추어 가고 있는 무렵, 마당에서 빗자루질하며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고 있던 한 여인은 문득 돌아서다, 대문에 서 있는 한 젊은 남자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엄마야..."
그녀는, 이내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고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오, 오셨습니까..."
그는 공연히 그녀를 놀라게하여 미안한 듯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미안하다. 너를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방금 도착했다. 백무님께서는 계시느냐?"
"예예, 안에 계십니다. 잠시만요..."
여인이 집 문 쪽으로 다가가 큰 소리로 부르듯 말했다.
"백무님, 밖에 부총관 나리 찾아와 계십니다."
잠시 후, 문이 서둘러 열리며 안에서 중년 여인이 부랴부랴 밖으로 나와 수현에게 인사하였다.
"부총관 나리 오셨습니까."
수현은 그녀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천천히 하시지요. 내 긴히 물어볼 것이 있어 잠시 들렸습니다."
"예, 안으로 드시지요."
백무라 불린 여인은 방문을 열어, 수현을 들여보내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가며 바깥의 젊은 여인에게 말했다.
"소연아, 차를 내오너라."
"예, 백무님."
백무가 안으로 들어선 뒤, 수현과 백무는 서로 마주 보고 자리에 앉았다.
"어찌 기별도 없이 찾아오셨습니까?"
백무가 묻는 말에 수현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말했다시피, 그저 잠시 들린 것뿐입니다. 내 요즘 세자마마의 명으로 사교도들에 관련된 것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예, 사교도들에 대한 이야기는 진즉부터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특히 근자에 들어 한양 인근에서도 사교도들이 출현하고 있어, 우려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백무의 말에 수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야기 하기가 한결 수월하겠군요."
이어 수현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은 타다만 나무 막대기로, 타지 않은 한쪽에는 붉은색 글귀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수현의 물음에 표정이 굳어지던 백무는 조심스럽게 그 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소연이 다과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소연이 두 사람 사이에 다과상을 내려놓다가, 백무가 유심히 살피고 있는 나무 막대기를 보고 놀라 눈이 등잔만 해졌다.
"어? 그거..."
백무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사교도들이 쓰는 벽륜봉(霹倫棒)같구나."
백무의 말에 수현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되물었다.
"벽륜봉? 그게 무엇입니까?"
백무는 짧은 한숨을 내쉰 뒤에, 수현을 보며 대답했다.
"벽륜봉이라고 하여, 주술 행위를 할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글자가 조악하고, 끝을 태우다 만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제대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 듯합니다. 하지만..."
백무가 말끝을 흐리자, 수현의 표정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이 나무는 아마도 벽조목(霹棗木)인 듯합니다.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보통 물건은 아니라고 봐야겠지요. 더욱이 벽조목을 이용해 벽륜봉을 만들었다면, 이는 귀신을 제압하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큽니다."
수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신?"
"예... 보통 벽조목은 양기가 가득하여, 귀신들이 꺼리므로,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부르는 물건이라 하지요. 거기에 이러한 사술의 글귀를 더하였으니, 그 위력은 더욱 강해져 있을 것입니다. 이런 물건을 다룰정도의 사교도라면, 쉬이 웃어넘길 일이 아닐 듯합니다."
백무가 말을 하며 벽륜봉을 넘기자, 수현이 그것을 받아 들고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귀신을 제압하는 힘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