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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둘러싼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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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연랑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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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 #8


붉은 곤룡포를 입은 왕은, 왼손으로 늘어지는 소매를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조심스럽게 붓에, 먹을 묻히고 있었다.

먹을 한껏 머금은 붓을 들어 신중하고도 힘 있는 필체로 종이위에 무언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마에 땀이 송글 송글 맺힐 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 집중을 하고 있는 그의 뒤로, 예를 갖추고 자리에 앉아 있는 세자가 있었고, 그 너머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내관 및 궁녀들이 고개를 숙인 체 서 있었다.

"사교도들 사이에서 잡혀온 여인을 돌봐 주었다더구나."

왕은 묵묵히 글을쓰며 세자를 돌아 보지도 않고 말을 건네왔다.

세자의 눈길이 붓을 든 임금에게로 향했다.

자신을 외면한 크고 넓은 등만이 세자의 눈에 보이는 전부였다.

"예, 그리하였습니다."

세자는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과하다. 일국의 세자가 할 일이 아니구나."

임금은 여전히, 세자를 보지도 않은 체, 혼신의 힘을 다해 글을 쓰면서 말을 하고 있었다.

"백성을 보살피는 일입니다. 어찌할 일이 아니라 하십니까."

"문무백관과 신료들이 헛으로 있더냐."

"전하의 신하들입니다. 저는 아직 세자가 아닙니까."

"왕이 될 몸이다."

"그렇다고 꼭 왕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요."

비로소 임금의 손이 멈추었다.

짤막한 한숨과 함께 붓을 내려놓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가 움직이자 세자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임금은 돌아서서 세자를 내려다보았다.

세자는 임금이자 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래서? 네 손으로 직접 백성들을 살피겠다는 것이냐?"

"어찌 감히 제가 전하의 백성들을 살피겠나이까? 그저, 소자는 전하의 백성을 함께 살피고 어루만지기를..."

"됐다!"

세자의 말을 끊는 임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글공부를 하여 지혜를 익히라 하였더니, 변명 늘어놓는 재주만 늘려놓았구나. 듣자 하니 요 며칠은 아예 곁에서 보살피기까지 하였다 들었다. 일국의 세자가 되어서 그런 망극한 일을 하고도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더냐."

세자는 지지 않으려는 듯,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때문에 다쳤습니다. 저 때문에 죽을 뻔하였습니다. 소자, 세자 이기 이전에 남자로서, 한 사람으로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였을 뿐입니다."

세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금의 호통 소리가 이어졌다.

"세자이기 이전은 없다. 세자이기 이전에 남자 일 수 없고, 세자이기 이전에 사람일 수 없다. 그 모든 것 앞에 너는 우선 세자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자다."

세자는 말없이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의 행동 하나, 너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오는지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네놈이 정녕 폐세자가 되어 목이 달아나 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냐?"

"세자가 되어 일개 백성을 보살폈다는 이유로, 폐세자가 되고, 목을 내놓아야 한다면, 그것이 어찌 일국의 세자라 할 수 있겠나이까."

그 순간, 임금의 목소리는 더욱 고조되어 울러 펴졌다.

"세자니까!"

격앙된 임금의 목소리에 세자는 가슴속이 꽉 막힌듯 답답해짐을 느꼈다.

"세자니까, 보고도 못 본 척! 세자니까, 듣고도 못 들은 척! 세자로써 해야 할 것만, 봐야 할 것만, 들어야 할 것만 들으란 말이다. 모두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 하나같이 네 빈틈을 노려 너를 물어뜯고자 호시탐탐 노리고 있단 말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 행적 하나하나가 허술하기 짝이 없느냐?"

임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자가 고개를 벌떡 치켜들었다.

"그것이!"

세자의 목소리도 어느새 격앙되었고, 분함을 애써 참는 듯 눈에는 울분이 가득했다.

"그것이 일국의 세자입니까? 신하들에 의해 쫓겨나 죽을까 봐 눈치나 보는 것이, 일국의 세자란 말입니까?"

그런 세자를 보며 임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기운 빠진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게 정치니까... 왕이든 왕자든, 신하든, 권력 앞에 몸을 숙이는 것, 그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어찌 정치가 그런 것이라 말씀하십니까? 이 나라의 국왕은 전하십니다. 전하는 이 나라의 권력이십니다."

세자의 단호한 목소리에, 임금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어 그는 허탈한 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한쪽에 놓여 있던 다과상에서 찻잔을 들어 한 모금에 쭈욱 마셔버렸다.

뒤이어 또 다시 긴 한숨을 무겁게 내쉬고 난 뒤에, 세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나는 왕이다. 이 나라의 왕이지. 헌데, 세자야. 그 왕을 누가 옹립하였더냐?"

세자는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임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잊지 말거라. 조선에서 권력은, 임금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자는 분한 얼굴로 임금에게 물었다.

"그럼 어디 있는 것입니까? 저기 저 좌상대감의 손에 있는 것입니까?"

밖으로 돌아서서 나가려던 임금은 좌상대감이 언급되자,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어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세자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니다."

의외의 대답에 세자의 표정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세자를 보며 임금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조선에서 권력은... 명분에 있는 것이다."

임금은 그 말을 남긴 체, 휘적휘적 바깥으로 나가버렸고, 내관과 궁녀들이 그 뒤를 따라 나갔다.

홀로 남은 세자는 임금이 나간 물을 씁쓸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용상에 앉은 임금의 좌우로 중신들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임금의 앞에는 상소가 올려져 있었고, 잠시 후 한쪽에 서 있던 이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좌의정 최준경이었다.

"전하, 지방에 출몰하던 사교도 집단이 어느덧 한양 인근에까지 퍼져 있다 합니다. 이는 국법을 어긴 중죄이므로 샅샅이 살피어 엄히 벌하시옵소서."

임금은 좌의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소. 대사헌은 좌상대감과 논의하여 이 일을 처리토록 하라."

임금의 말에 좌의정 곁에 서 있던 대사헌 윤일호가 한걸음 나선 뒤, 숙여 보이며 답하였다.

"예, 전하. 민심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을 발본색원하겠나이다."

대사헌의 대답을 들은 좌의정이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전하, 또 한 가지가 있사옵니다. 근자에 세자마마께옵서, 사교도의 무리들 중에 하나를 구명해 주셨다 들었습니다."

임금은 좌의정의 입에서 저 말이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들었소. 허나, 내 듣기로 그 여인은 사교도의 무리가 아니라, 그들에게 잡혀있던 것이라 들었네만."

"물론 저 역시 그렇다 들었습니다. 다만, 아직 그녀가 사교도인지 아닌지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것이 아니 온데, 벌써부터 그 여인을 두둔하고, 일국의 세자의 몸으로, 밤새도록 여인의 곁을 지켰다 하니, 남녀가 유별하고, 유학이 근간을 둔 이 조선에서 어찌 해괴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겠나이까. 소신은 무지한 백성들이 이를 두고, 세자마마를 오해할까 심히 걱정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좌의정의 말에 맞은편에 있던 우의정이 나서 두둔했다.

"전하, 좌상대감의 말이 매우 옳사옵니다. 만약 이제라도 그 계집이 사교도로 판명이 난다면, 이는 국법을 어긴 죄인을 두둔한 것이 되옵니다. 이는 명백하게 국법으로 다스려야 할 대죄이니,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우의정이 목소리를 한껏 높이니, 대사헌도 질세라 나서 이야기했다.

"대의로 사은을 끊는 것은 고금의 상전(常典)입니다. 만약 사교도로 밝혀진다면, 그 죄를 엄히 물으셔야 하옵니다."

그런 신료들의 반응을 예상했었다는 듯, 임금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폐세자라도 하자는 말인가?"

좌의정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가 명명백백해지면, 세자마마라 하더라도 국법에 따라 처결하기를 간언해 드리는 것이옵니다. 저희가 어찌 세자마마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세자마마보다 나라의 안위를 더 걱정할 수밖에 없는 소신들을 이해해 주시옵소서."

임금은 좌의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소. 그녀가 사교도로 판명이 나면, 내 세자를 폐세자 시키고, 국법에 따라 그 죄를 엄히 물을 것을 약조하겠소. 그것이면 족한 것이요?"

그러자 좌의정을 비롯 대신들 모두가 읊조리며 말하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임금은 예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결과가 도래하는 것 또한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신들과의 힘겨루기를 마치고, 대전에서 물러나 뒤뜰로 향하는 임금의 뒤로, 독특한 무관복장을 한 중년의 남자가 바짝 따라붙었다.

"저들은... 그녀가 사교도가 아니라도, 기필코 사교도로 만들 것이옵니다."

그 남자가 걱정스러운 듯 나지막이 건네 오는 말에, 임금은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고 있다. 저들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헌데 어찌, 폐세자를 약조하셨나이까?"

그의 물음에 임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득 멈춰 선 발걸음 너머로, 아담한 궁궐 내 연못을 바라보았다.

씁쓸하게 연못을 바라보던 임금은 느지막하게 그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차라리, 세자라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임금의 뜻밖의 말에 그를 뒤따르던 무관, 홍여립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하...."

임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홍여립을 바라보더니, 씁쓸함이 가득한 웃음을 살짝 지어 보였다.

"그렇게 지켜주려 애썼는데, 이제와 이런 말을 하니, 자네가 어이가 없을 만도 하지."

임금의 말에 홍여립의 표정이 황망해졌다.

"아, 아니옵니다. 전하. 소신이 어찌..."

"지켜주려 품에 안을수록... 도리어 위험해지는 것 같으니. 이제라도 품에서 놓아주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싶구나."

임금은 시선을 돌려 다시 연못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연못을 바라보던 임금은 마치 독백을 하듯 혼잣말로 이야기했다.

"중전... 아무래도 세자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지는 못할 것 같소. 그러나 너무 섭섭해하지 마시오. 이 왕이라는 자리가, 그리 좋은 자리는 아닌 듯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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