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2
묘한 기분에 슬며시 눈을 뜬 라마는 이내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랏빛 구름, 기묘한 공간, 페르쿠나스를 만났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리고 그때 페르쿠나스가 서 있던 그 자리에, 지금은 누군지 모를 여러 명이 둥글게 모여서 뭔가를 쑥덕거리며 의논하고 있었다.
라마가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자, 그중 하나가 라마를 발견하고 말했다.
"아, 왔네."
그가 서둘러 라마 앞으로 다가오자, 다른 이들도 부랴부랴 뒤 따라왔고, 제일 먼저 라마 앞에 선 이가 돌아보며 말했다.
"자자, 명색이 신이라 불리는 우리가 질서 없이 행동해서야 되겠소? 줄을 서시오. 줄을."
다른 이들의 표정에 살짝 불만이 어리긴 했지만, 그의 말대로 차례대로 줄을 섰다.
그는 다시 라마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자~ 이게 누구신가? 그 명성이 자자하신 라이덴 마샤크... 아니, 지금은 그냥 라마라고 했던가?"
절로 콧방귀가 나온다.
"누구신지..."
그는 라마의 물음에 과장되게 껄껄 거리며 웃어대고는 라마의 어깨를 토닥 거렸다.
"아, 이 친구 모른 척 하기는... 뭐, 이름이 중요한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뭐, 불카누스라고...하하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갑자기 크게 웃으니, 라마는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부, 불카누스라면... 불의 신?"
"그렇지, 그렇지. 잘 아네. 역시 명성이... 하하, 자자, 내가 특별히 준비해온 계약서야."
불카누스가 마법 계약서를 꺼내자, 페르쿠나스가 그랬던 것처럼, 서있는 키에 딱 맞는 탁자가 나타났다.
"뭐 비슷하게 작성했어. 혹시나 읽기 어려울까 봐. 그 친구가 어찌나 생색을 내던지... 하하..."
라마는 계약서의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그렇다 쳐도, 저놈에 약관은 또 있는데, 어째 하나가 더 붙었다.
"필요에 따라 다른 신의 힘보다 우선한다?"
라마가 그 내용을 읽기 무섭게 뒤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야, 저 치사한 자식, 은근슬쩍 저런 걸 넣었어?"
"꼼수 봐라, 저래 놓고 불의 신이란다. 어이없네."
불카누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뭐야 지금 이거? 장난해? 마법세계에서 누가 가장 인기 있는지 잊었어? 내 말 한마디면 숭배자들이 4열 종대로 콜로세움 이백 바퀴야 이것들아"
"지금 라마랑 계약하는데, 니 숭배자들 얘기는 왜 나와?"
이어 줄 서 있는 신들 중에 어두컴컴한 모양을 한 이가, 줄 한쪽으로 나와서 따지듯 이야기했다.
"마, 숭배자 함 따져 보까? 내 숭배자들이 은밀한 거 좋아해서 티가 안 나서 그러지, 대가리 숫자 세면 니랑 별 차이 안나거든?"
라마가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그를 보더니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에레보스 시군요."
에레보스는 라마가 바로 자신을 알아보자, 눈웃음을 치며 웃음 지었다.
"역시... 안목이 있어. 금방 알아보네."
뿌듯해하는 에레보스를 보며 불카누스가 헛기침을 해댔다.
"자자, 잡신들 신경 쓰지 말고, 제일 중요한 건 나 불의 신과 계약을 맺는다는 거야. 알지? 마법사들 세계에서 누가 뭐래도 화염계 마법이 으뜸인 거? 최고의 파괴력! 최고의 살상력! 화려한 간지의 끝판왕! 페르쿠나스? 그깟 비전 마법 따위는 화염 마법에 턱끝에도 못 미치지."
라마는 조금 의아했다.
이런 애 같은 신이 화염의 신이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그의 말대로 마법사들 세계에서 최고 인기의 신이라면, 누가 뭐래도 화염의 신이다.
공격계 마법에서 가장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니, 젊고 혈기왕성한 마법사라면 화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화염 마법의 환상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저기 ... 근데... 제가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요...."
다들 의아한 눈으로 라마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예요? 왜 이렇게 갑자기... 계약을 하자고..."
라마의 물음에 다들 웃음 짓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웃음이었다.
"거 다 훌륭한 인재를 알아보고, 우리가 또 어? 다 자네를 긍정적으로다가..."
그때 불카누스의 말을 끊고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랄하네."
불카누스가 표정이 굳어지며,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그녀는 불카누스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네. 난 그딴 입에 발린 소리 못하겠고."
이어 라마를 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간단해. 여긴 우리가 있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야. 니가 어떻게 해서 이 세계에 오게 됐는지는 모르겠고, 니가 왜 그런 상태가 됐는지 역시 우리도 몰라. 단지 하나 분명한 건, 얼마 전 니가 비전 마법을 썼고, 그걸 계기로 페르쿠나스가 이 세계를 엿볼 수 있게 됐어. 그리고 알다시피 그가 너와 계약을 맺었고, 그 계약의 조건에 따라 그는 이제 너를 통해 이 세계로 마음대로 오다닐 수 있게 됐지. 그는 이곳에서 만난 신에 대해 우리들에게 이야기했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어. 그래서 우리 역시 페르쿠나스 처럼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들기를 원하는 거야."
라마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신이 달라요? 여기는 대체 어떤 곳이길래..."
"몰라. 인드란지 뭐시긴지, 자기랑 같은 비전 계열의 신을 만났다고 어찌나 호들갑을 떨던지..."
불카누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뭐, 이 세계에서 대단한 영웅이니 어쩌니, 비전의 힘이 인정받는 세계라느니, 아주 꼴 같지 않아서..."
문득 라마는 자신에게 상황을 설명해준 여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라마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네메시스. 뭘 그렇게 조심해? 몰라도 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리가 아쉬운 입장이니까. 봐바... 너랑 계약하고 싶어 안달 나 있는 신들의 모습을."
다들 네메시스의 말에 입맛을 다시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라마는 이 상황이 딱히 싫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 부끄러운 상황이었다.
"뭐.... 어쨌든 제 입장에서는 계약하는 게 좋으니까...."
라마의 말에 불카누스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지? 그래그래, 잘 생각했어. 자 어서 약관 동의부터..."
뒤에 있던 네메시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카누스에게 말했다.
"일단 니가 쳐 넣은 그 개떡 같은 약관은 좀 빼고."
불카누스가 고개를 돌려 눈을 부라리자, 네메시스가 지지 않고 큰소리쳤다.
"뭐? 어쩌라고?"
네메시스의 언성에 살짝 누그러진 불카누스가 라마를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래, 뭐... 이건 좀 욕심이 과했지?"
불카누스가 검지손가락을 펴고 계약서를 향해 손을 긋는 동작을 하자, 계약서에 추가되어 있던 약관 하나가 사라졌다.
바로 불카누스가 추가시킨 "필요에 따라 다른 신의 힘보다 우선한다"는 항목이었다.
라마는 어색하게 웃어 보인 뒤, 불카누스의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오우~ 멋져, 내 힘 잘 쓰고, 죽지 말고, 아 참 안 죽지. 그래. 어쨌든 잘 살아봐. 또 보자."
불카누스가 뒤로 물러나자, 그다음 신이 얼른 계약서를 내밀었고, 서로 앞으로 가려고 신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자자, 소란 떨지 말고. 체면 떨어지게시리... 줄을, 서시오!"
불카누스가 먼저 계약을 했다고 여유를 부리며, 다른 신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신들이 줄을 서고, 라마는 자신의 펜, 아니 신들이 내미는 계약서에 서명하기 바빴다.
네메시스에 이르자, 그녀는 여느 신과 달리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계약서를 내밀었고, 라마는 얼른 서명을 하며 물었다.
"그런데... 제가 안 죽는 건 왜 그런 거죠?"
라마의 물음에 네메시스가 여전히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왜긴...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넌 이 세계에 있는 게 아냐."
"예? 이 세계에 있는 게 아니라뇨?"
"응, 정확하게는 넌 차원의 균열, 틈의 세계에 있는 거지."
라마는 더욱 의아한 표정이 되었고, 네메시스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빨리빨리 싸인해. 뒤에 줄 서 있는 거 안 보여?"
"네네, 그럼 제가 서명하는 동안 옆에서 좀 설명 좀 해주세요."
라마는 그렇게 말하며 얼른 서명했고, 계약서를 회수한 네메시스가 옆으로 비켜 서자, 다음 신이 계약서를 내밀었다.
라마는 열심히 서명을 했고, 네메시스는 그 옆에서 귀찮지만 마지못한다는 듯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니가 이쪽 차원으로 넘어올 때, 널 부른 녀석이 뭘 어떻게 한 건지 몰라도, 차원과 차원을 넘어가는 과정에서 온전히 넘어가지 못한 체, 차원의 틈에 머물게 된 거야. 그곳은 정확하게 얘기하면 시공간의 개념이 없고, 삶과 죽음이 없는 곳이지. 지금 너의 영적 존재는 그 틈의 세계, 차원의 균열 사이에 끼어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연결하는 일종에 통로 같은 존재가 돼버렸어. 신들이 너랑 계약하고 싶어 하는 이유지."
"그래서... 이쪽 세계에서 죽지 못하는 건가요?"
라마는 계속 서명을 하며 물었다.
"정확하게는 죽지 못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부정당하는 거지. 너란 존재 자체가 이미 시공간과 죽음이라는 생물적 운명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 있어서 말이야."
"그렇다는 건.... 죽는 것 말고도 또 다른 현상이 있을 까요?"
"우리도 몰라. 너란 존재를 우리도 처음 겪거든. 그래서 호기심 많은 신들이 너를 주목하고 있어. 너로 인해 생겨날 파장은 신이 존재해온 시간 동안 한 번도 일어난 적 없었던, 일종에 변화 같은 거거든."
"저... 혹시... 그럼 저는 본래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나요?"
"아마도.... 네가 방법만 깨닫는 다면, 이 세계와 본래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을 거야."
"아, 그럼 혹시 가르쳐 주시거나 도와주실 수 있나요?"
라마의 물음에 네메시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 방법을 알거나, 도와줄 수 있다면, 우리가 너랑 계약을 할까?"
"아.... 그렇군요."
"혹시 죽고 싶다면, 죽는 방법을 알려줄 수는 있어."
네메시스의 말에 갑자기 신들이 동요했다.
"야야, 너 선을 넘는다?"
불카누스가 눈을 부라리자, 네메시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어차피 상관없어. 자살할 녀석으로 보이진 않잖아?"
이에 라마가 되물었다.
"자살은 해봤는데요?"
네메시스가 라마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이 세계에서는 해봤겠지."
"그럼? 본래 세계에서는 죽나요?"
"아니."
"예?"
라마가 의아해 하자, 네메시스가 말을 이었다.
"틈의 세계. 그곳에서 죽으면, 진짜로 죽을 수 있어. 아마도 그렇게 되면, 네 존재 자체가 소멸되어 버리거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할 거야."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다구요?"
"응.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게 되는 거지. 너란 존재를 아무도 모르게 될지도."
"신들은요?"
"우린 기억하지. 너란 현상을 목도했으니까."
라마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자자, 서명부터 합시다."
그런 라마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불카누스가 재촉하자, 라마는 다시 서명하기 시작했고, 네메시스는 돌연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라마는 뭔가 더 물어보고 싶었는데, 네메시스가 없어지자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보랏빛 구름, 기묘한 공간, 페르쿠나스를 만났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리고 그때 페르쿠나스가 서 있던 그 자리에, 지금은 누군지 모를 여러 명이 둥글게 모여서 뭔가를 쑥덕거리며 의논하고 있었다.
라마가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자, 그중 하나가 라마를 발견하고 말했다.
"아, 왔네."
그가 서둘러 라마 앞으로 다가오자, 다른 이들도 부랴부랴 뒤 따라왔고, 제일 먼저 라마 앞에 선 이가 돌아보며 말했다.
"자자, 명색이 신이라 불리는 우리가 질서 없이 행동해서야 되겠소? 줄을 서시오. 줄을."
다른 이들의 표정에 살짝 불만이 어리긴 했지만, 그의 말대로 차례대로 줄을 섰다.
그는 다시 라마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자~ 이게 누구신가? 그 명성이 자자하신 라이덴 마샤크... 아니, 지금은 그냥 라마라고 했던가?"
절로 콧방귀가 나온다.
"누구신지..."
그는 라마의 물음에 과장되게 껄껄 거리며 웃어대고는 라마의 어깨를 토닥 거렸다.
"아, 이 친구 모른 척 하기는... 뭐, 이름이 중요한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뭐, 불카누스라고...하하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갑자기 크게 웃으니, 라마는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부, 불카누스라면... 불의 신?"
"그렇지, 그렇지. 잘 아네. 역시 명성이... 하하, 자자, 내가 특별히 준비해온 계약서야."
불카누스가 마법 계약서를 꺼내자, 페르쿠나스가 그랬던 것처럼, 서있는 키에 딱 맞는 탁자가 나타났다.
"뭐 비슷하게 작성했어. 혹시나 읽기 어려울까 봐. 그 친구가 어찌나 생색을 내던지... 하하..."
라마는 계약서의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그렇다 쳐도, 저놈에 약관은 또 있는데, 어째 하나가 더 붙었다.
"필요에 따라 다른 신의 힘보다 우선한다?"
라마가 그 내용을 읽기 무섭게 뒤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야, 저 치사한 자식, 은근슬쩍 저런 걸 넣었어?"
"꼼수 봐라, 저래 놓고 불의 신이란다. 어이없네."
불카누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뭐야 지금 이거? 장난해? 마법세계에서 누가 가장 인기 있는지 잊었어? 내 말 한마디면 숭배자들이 4열 종대로 콜로세움 이백 바퀴야 이것들아"
"지금 라마랑 계약하는데, 니 숭배자들 얘기는 왜 나와?"
이어 줄 서 있는 신들 중에 어두컴컴한 모양을 한 이가, 줄 한쪽으로 나와서 따지듯 이야기했다.
"마, 숭배자 함 따져 보까? 내 숭배자들이 은밀한 거 좋아해서 티가 안 나서 그러지, 대가리 숫자 세면 니랑 별 차이 안나거든?"
라마가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그를 보더니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에레보스 시군요."
에레보스는 라마가 바로 자신을 알아보자, 눈웃음을 치며 웃음 지었다.
"역시... 안목이 있어. 금방 알아보네."
뿌듯해하는 에레보스를 보며 불카누스가 헛기침을 해댔다.
"자자, 잡신들 신경 쓰지 말고, 제일 중요한 건 나 불의 신과 계약을 맺는다는 거야. 알지? 마법사들 세계에서 누가 뭐래도 화염계 마법이 으뜸인 거? 최고의 파괴력! 최고의 살상력! 화려한 간지의 끝판왕! 페르쿠나스? 그깟 비전 마법 따위는 화염 마법에 턱끝에도 못 미치지."
라마는 조금 의아했다.
이런 애 같은 신이 화염의 신이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그의 말대로 마법사들 세계에서 최고 인기의 신이라면, 누가 뭐래도 화염의 신이다.
공격계 마법에서 가장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니, 젊고 혈기왕성한 마법사라면 화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화염 마법의 환상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저기 ... 근데... 제가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요...."
다들 의아한 눈으로 라마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예요? 왜 이렇게 갑자기... 계약을 하자고..."
라마의 물음에 다들 웃음 짓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웃음이었다.
"거 다 훌륭한 인재를 알아보고, 우리가 또 어? 다 자네를 긍정적으로다가..."
그때 불카누스의 말을 끊고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랄하네."
불카누스가 표정이 굳어지며,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그녀는 불카누스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네. 난 그딴 입에 발린 소리 못하겠고."
이어 라마를 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간단해. 여긴 우리가 있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야. 니가 어떻게 해서 이 세계에 오게 됐는지는 모르겠고, 니가 왜 그런 상태가 됐는지 역시 우리도 몰라. 단지 하나 분명한 건, 얼마 전 니가 비전 마법을 썼고, 그걸 계기로 페르쿠나스가 이 세계를 엿볼 수 있게 됐어. 그리고 알다시피 그가 너와 계약을 맺었고, 그 계약의 조건에 따라 그는 이제 너를 통해 이 세계로 마음대로 오다닐 수 있게 됐지. 그는 이곳에서 만난 신에 대해 우리들에게 이야기했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어. 그래서 우리 역시 페르쿠나스 처럼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들기를 원하는 거야."
라마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신이 달라요? 여기는 대체 어떤 곳이길래..."
"몰라. 인드란지 뭐시긴지, 자기랑 같은 비전 계열의 신을 만났다고 어찌나 호들갑을 떨던지..."
불카누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뭐, 이 세계에서 대단한 영웅이니 어쩌니, 비전의 힘이 인정받는 세계라느니, 아주 꼴 같지 않아서..."
문득 라마는 자신에게 상황을 설명해준 여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라마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네메시스. 뭘 그렇게 조심해? 몰라도 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리가 아쉬운 입장이니까. 봐바... 너랑 계약하고 싶어 안달 나 있는 신들의 모습을."
다들 네메시스의 말에 입맛을 다시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라마는 이 상황이 딱히 싫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 부끄러운 상황이었다.
"뭐.... 어쨌든 제 입장에서는 계약하는 게 좋으니까...."
라마의 말에 불카누스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지? 그래그래, 잘 생각했어. 자 어서 약관 동의부터..."
뒤에 있던 네메시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카누스에게 말했다.
"일단 니가 쳐 넣은 그 개떡 같은 약관은 좀 빼고."
불카누스가 고개를 돌려 눈을 부라리자, 네메시스가 지지 않고 큰소리쳤다.
"뭐? 어쩌라고?"
네메시스의 언성에 살짝 누그러진 불카누스가 라마를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래, 뭐... 이건 좀 욕심이 과했지?"
불카누스가 검지손가락을 펴고 계약서를 향해 손을 긋는 동작을 하자, 계약서에 추가되어 있던 약관 하나가 사라졌다.
바로 불카누스가 추가시킨 "필요에 따라 다른 신의 힘보다 우선한다"는 항목이었다.
라마는 어색하게 웃어 보인 뒤, 불카누스의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오우~ 멋져, 내 힘 잘 쓰고, 죽지 말고, 아 참 안 죽지. 그래. 어쨌든 잘 살아봐. 또 보자."
불카누스가 뒤로 물러나자, 그다음 신이 얼른 계약서를 내밀었고, 서로 앞으로 가려고 신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자자, 소란 떨지 말고. 체면 떨어지게시리... 줄을, 서시오!"
불카누스가 먼저 계약을 했다고 여유를 부리며, 다른 신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신들이 줄을 서고, 라마는 자신의 펜, 아니 신들이 내미는 계약서에 서명하기 바빴다.
네메시스에 이르자, 그녀는 여느 신과 달리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계약서를 내밀었고, 라마는 얼른 서명을 하며 물었다.
"그런데... 제가 안 죽는 건 왜 그런 거죠?"
라마의 물음에 네메시스가 여전히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왜긴...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넌 이 세계에 있는 게 아냐."
"예? 이 세계에 있는 게 아니라뇨?"
"응, 정확하게는 넌 차원의 균열, 틈의 세계에 있는 거지."
라마는 더욱 의아한 표정이 되었고, 네메시스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빨리빨리 싸인해. 뒤에 줄 서 있는 거 안 보여?"
"네네, 그럼 제가 서명하는 동안 옆에서 좀 설명 좀 해주세요."
라마는 그렇게 말하며 얼른 서명했고, 계약서를 회수한 네메시스가 옆으로 비켜 서자, 다음 신이 계약서를 내밀었다.
라마는 열심히 서명을 했고, 네메시스는 그 옆에서 귀찮지만 마지못한다는 듯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니가 이쪽 차원으로 넘어올 때, 널 부른 녀석이 뭘 어떻게 한 건지 몰라도, 차원과 차원을 넘어가는 과정에서 온전히 넘어가지 못한 체, 차원의 틈에 머물게 된 거야. 그곳은 정확하게 얘기하면 시공간의 개념이 없고, 삶과 죽음이 없는 곳이지. 지금 너의 영적 존재는 그 틈의 세계, 차원의 균열 사이에 끼어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연결하는 일종에 통로 같은 존재가 돼버렸어. 신들이 너랑 계약하고 싶어 하는 이유지."
"그래서... 이쪽 세계에서 죽지 못하는 건가요?"
라마는 계속 서명을 하며 물었다.
"정확하게는 죽지 못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부정당하는 거지. 너란 존재 자체가 이미 시공간과 죽음이라는 생물적 운명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 있어서 말이야."
"그렇다는 건.... 죽는 것 말고도 또 다른 현상이 있을 까요?"
"우리도 몰라. 너란 존재를 우리도 처음 겪거든. 그래서 호기심 많은 신들이 너를 주목하고 있어. 너로 인해 생겨날 파장은 신이 존재해온 시간 동안 한 번도 일어난 적 없었던, 일종에 변화 같은 거거든."
"저... 혹시... 그럼 저는 본래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나요?"
"아마도.... 네가 방법만 깨닫는 다면, 이 세계와 본래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을 거야."
"아, 그럼 혹시 가르쳐 주시거나 도와주실 수 있나요?"
라마의 물음에 네메시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 방법을 알거나, 도와줄 수 있다면, 우리가 너랑 계약을 할까?"
"아.... 그렇군요."
"혹시 죽고 싶다면, 죽는 방법을 알려줄 수는 있어."
네메시스의 말에 갑자기 신들이 동요했다.
"야야, 너 선을 넘는다?"
불카누스가 눈을 부라리자, 네메시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어차피 상관없어. 자살할 녀석으로 보이진 않잖아?"
이에 라마가 되물었다.
"자살은 해봤는데요?"
네메시스가 라마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이 세계에서는 해봤겠지."
"그럼? 본래 세계에서는 죽나요?"
"아니."
"예?"
라마가 의아해 하자, 네메시스가 말을 이었다.
"틈의 세계. 그곳에서 죽으면, 진짜로 죽을 수 있어. 아마도 그렇게 되면, 네 존재 자체가 소멸되어 버리거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할 거야."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다구요?"
"응.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게 되는 거지. 너란 존재를 아무도 모르게 될지도."
"신들은요?"
"우린 기억하지. 너란 현상을 목도했으니까."
라마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자자, 서명부터 합시다."
그런 라마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불카누스가 재촉하자, 라마는 다시 서명하기 시작했고, 네메시스는 돌연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라마는 뭔가 더 물어보고 싶었는데, 네메시스가 없어지자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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