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 #3
여학수가 그간 조사한 내용들을 살펴본 세자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옆에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희는, 요즘 수현의 병간호로 지쳐있던 차에 지루함이 겹치니 노곤함에 연신 멈추지 않고 하품이 나왔다.
자꾸 하품을 해서 일까, 세자가 연희를 흘겨보니, 연희가 얼른 정색을 하였다.
"그렇게 지루하면 너도 같이 좀 살펴보겠느냐?"
세자의 은근한 핀잔에 연희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하지만... 전 뭐라고 적혀있는지 하나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연희의 말에 속으로는 크게 놀라 당황한 세자는 겉으로 티내지 않으려 애쓰며 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 그럼...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이냐?"
"모르겠습니다... 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지라 당연히 글자도 생각나지 않는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순진한 눈빛으로 세자를 바로 보며 연희는 당연한거 아니냐는듯한 얼굴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세자는 자신도 모르게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연희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지자 이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흠...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한들 설마 글자까지 잊히지는 않을것인데? 원래부터 글자를 몰랐던 것 아닌가 싶구나?"
연희가 눈을 살짝 치켜뜨며 무엄하게도 세자를 노려보며 강경한 어조로 답했다.
"아닐 겁니다. 저하 께옵서도 얘기하시지 않았습니까? 제 손을 보니... 분명 양인 출신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세자는 연희의 대답에 장난치듯 입술을 삐뚜름히 올리며 궁시렁 거리듯 말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다들 일하고 있을 때, 몰래 혼자 빈둥거려 그런 것인지 어찌 알겠느냐?"
연희는 자신의 무엄함을 잊고 다시 세자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것만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글세. 그건 모르는 일이지."
"절대, 절대 절대 아닙니다."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세자의 장난스러운 비아냥에 연희는 분한 듯한 표정으로 확신을 꾹 꾹 눌러 담아 대답했다.
"절.대. 절대절대절대 아닙니다. 절대!"
연희의 확고한 대답이 귀엽게 느껴진 세자는 이내 졌다는듯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좋아. 한 번은 믿어주마."
"와~ 아닙니다, 진짜. 그렇게 봐주듯이 믿지 마십시오. 저에 대한 믿음이 그것뿐이옵니까?"
"그럼? 뭘 보고 너를 믿느냐?"
"뭐, 뭘 보고 라뇨? 저를 못 믿을 이유는 또 뭡니까? 여태 저하 곁에서 이렇게... 저하를 돕고 있지 않습니까?"
세자는 과장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놀리듯 물었다.
"그거야, 네가 오갈 데 없는 처지니까 그런 것 아니냐?"
연희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답답하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와~ 진짜, 저더러 오기만 하면 편히 살게 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기다려준다고."
별안간 세자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뭐? 누가 그런말을 하더냐?"
세자가 무서운 목소리로 묻자 연희는 순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그... 그거야, 뭐... 있습니다. 뭐, 꼭, 그걸 말해야 합니까?"
남자와 같이 걸어가던 연희의 모습이 순간 세자의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혹여,, 그자더냐?"
연희는 궁금함을 담은 눈으로 세자를 바라보다 이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고 일순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에휴,,세자저하에게 농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대체 제게 그런말을 할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
연희는 장난스럽게 크게 한숨을 내쉬며 어색한 웃음을 짓고는 터무니 없다는듯 말하려 노력했다.
이쯤에서 세자는 더 이상 그녀가 그자에대해 생각하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그녀를 보며 그도 이쯤에서 모른척 하기로 했다.
세자는 눈을 흘겨뜨며 연희의 말이 진담인지 가늠하려고 하는것처럼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다 풉하고 장난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스스로 느끼지 못했지만 세자의 웃는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던 얼굴이 스스륵 풀려 버렸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와? 진짜... 저 거짓말 안 합니다."
"뭐, 언제는 악의 없는 거짓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더니...."
"그게... 그게,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저하에게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 뜻이지요."
"그래, 좋아. 거기까지 믿어주마."
"와~"
연희는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저하 이런 분이셨습니까?"
"이런 분이라니? 무엄하구나."
"예, 무엄합니다. 차라리 무엄하렵니다."
"뭐라? 푸하~"
세자가 웃음을 터뜨리자, 연희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세자를 바라보다 속으로 이내 안도의 한숨의 내쉬었다.
새치름한 연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웃던 세자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다정하게 말했다.
"미안하다. 내 네게 장난이 과한 듯 하구나."
"장난이셨습니까? 본심이셨던 것 같습니다."
울상이 되어 투덜거리며 양쪽 뺨을 한껏 부풀린 연희를 보니 ,세자의 눈엔 그 모습이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자자, 우리에게는 지금 중한 일이 있다. 사교도 무리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저들을 토벌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자가 분위기를 바꾸려 하자, 연희도 뚱한 표정을 지우고 세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천무방이란 조직이 좌상대감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좌를 찾지 못한다면, 제이 제삼의 천무방은 또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문득 세자의 눈에 초롱초롱 빛나고 있는 연희의 눈망울이 들어왔다.
반짝 거리는 저 눈빛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뭘 그렇게 보는 것이냐?"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묻자, 연희가 의아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저하를 보고 있사옵니다. 말씀하시기에..."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다시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안되는데, 사교도 무리에 대한 조사 내용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러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불쑥불쑥 그녀에게 장난이 치고 싶어 졌다. 새치롬하던 얼굴을 또 보고싶었다.
자신답지 않음에 세자는 내심 당혹함을 느꼈다.
"넋을 놓고 있는 것 같기에 물은 것이다. 내 얘기를 듣고 있긴 한 것이냐?"
세자가 정색을 하며 묻는 말에, 연희는 아미를 찌푸렸다.
"예, 듣고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정말이냐?"
"예. 정말입니다."
"정말 사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냐?"
"예. 정말... 예? 사심... 이라뇨?"
연희의 되물음에 세자가 풋하고 웃음 짓자, 연희가 다시금 눈을 흘겨 떴다.
"자꾸 이렇게 놀리실 겁니까? 너무 하십니다."
연희가 투정을 부리자, 세자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미안하다. 내가 오늘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어찌 그러십니까?"
"음... 글세,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어찌 좋은 것인지... 그럼..."
세자가 보고 있던 자료들을 덮어 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 있었더니 눈이 침침하구나. 나가서 바람 좀 쐬자."
"예? 아니.. 불과 한식경..."
"어험험"
세자가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하며 밖으로 나가버리자, 연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뒤따랐다.
해가 중천에 떠 있고, 밝은 햇살은 온 세상에 고르게 흩뿌려지고 있었다.
푸른 하늘 위로 몽실몽실한 구름 몇점이 두둥실 떠 있으니, 화폭에 옮겨놓은 그림과도 같았다.
"날이 좋구나."
밖으로 나와 상쾌하게 기지개를 켜며 말하는 세자를 보다 연희도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 바람도 선선하고... 날이 참 좋습니다."
"그럼 좀 걸어볼까?"
세자가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니, 연희가 놀라 서둘러 뒤따랐다.
바깥쪽에서 경계를 서던 호위병들이 세자를 보고 얼른 뒤따르려 하자, 세자가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라오너라."
"예, 저하."
연희가 그 말에 발걸음 속도를 늦추자, 세자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하느냐?"
"예? 아니.. 거리를... 두라 하셔서..."
"너는 이리 가까이 붙거라."
"에?"
"이리 딱 붙으란 말이다."
"예예..."
연희가 서둘러 세자의 곁으로 바짝 붙어서자, 세자가 빙그레 웃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호위무사들이 신경쓰이는지 연신 뒤를 힐끔거리던 연희는 세자에게 슬며시 물었다.
"그런데 저분들은 믿을 만한 분들이 옵니까?"
연희의 물음에 뒤따르는 호위무사들을 슬쩍 한번 쳐다보던 세자는 씨익 웃어 보였다.
"믿을만하긴. 믿을 수 없는 자들이지."
"예에? 그런데 어찌..."
"어쩌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 하지 않느냐? 적의 손에 나의 안전을 맡겨두었으니, 대놓고 나를 함부로 할 수 없을 것 아니냐? 지켜주기로 하였으니, 내가 잘못되었다가는 그 책임에서 자유롭기 힘들 터. 적어도 해가 떠있는 동안에는 저들로 인해 우리는 안전할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놀란 연희는 세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왜 그러느냐?"
세자가 연희의 표정을 보며 의문스런 얼굴로 묻자, 연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대단하십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연희의 때아닌 칭찬에 세자는 괜스레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그래? 뭘 이 정도 가지고...
뒷짐쥐고 걷는 듬직한 세자의 곁에 연희도 조용히 따라 걸었다.
연희는 그렇게 세자 곁을 말없이 걷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오려해 애써 참았다.
왜 이렇게 바보같이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사람들이 내게..."
문득 걷고 있던 세자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 연희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세자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네가 기억을 찾으면 어찌할 것인지 묻더구나."
"아..."
사실 연희도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솔직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마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리길 바랬다.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으니, 기억을 되찾은 이후에 어찌 될지 예측하기가 무서웠다.
"모두가 나로 인해, 네가 힘들어질까 걱정하더구나."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보다 여러 사람들을 걱정시키는 모양입니다."
세자가 피식 웃음 지었다.
"너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너를 아끼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뜻 아니겠느냐?"
"그렇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 은혜에 보답할 방법이 없으니 속상합니다."
"줄 수 있으니까 주는 것이다. 보답하려 애쓰지 말거라. 그냥..."
세자는 부드러운 눈빛과 다정한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니 말이다."
세자의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얼굴에 열이 몰려 빨갛게 물드는 듯했고, 심장이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뛰었다.
세자의 마음도 혹여 자신과 같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런 연희의 마음을 알지도 못한 체, 세자는 해맑게 웃으며 다시 앞을 보고 걸어갈 뿐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붕 떠있는 것이, 이대로 하늘로 둥실둥실 떠올라 구름 위로 올라가 버릴 것만 같았다.
햇빛이 반짝반짝 춤을 추고 있다.
바람이 살랑살랑 꼬리 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이리 이뻐 보이니, 무슨 독에 중독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저하..."
때마침 순시를 마치고 돌아오던 여학수가 세자를 보고 황급히 다가와 공손히 인사하였다.
"제가 올린 자료들은 살펴보셨나이까?"
여학수가 묻는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았네. 아직은 이렇다 할 만큼 눈에 띄는 것은 없어보였네...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한양 내에 천무방이라는 무속 집단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네."
"예."
"그 천무방에 방주란 자가 자신 스스로를 율제라 칭하며, 사교도 들을 모아 혹세무민하고 있네.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봐주게."
"실은... 저희도 연관성이 있는 듯하여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직접적인 관계를 찾지 못하고 있었사온데... 저하께옵서 어찌 그 사실을 아셨습니까?"
세자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흠... 뭐 자세하게 이야기 하기는 그렇고... 지금 누워있는 금호의 도움으로 저들의 동태를 살핀 적이 있네."
"예, 알겠습니다. 저희가 좀 더 살펴본 후, 확인되는 것이 있으면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부탁함세."
"예, 저하."
여학수가 물러나고, 세자가 고개를 돌리니, 연희가 세상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세자는 당황스러운, 아니 어쩌면 조금 부끄러운 얼굴로 연희를 보며 물었다.
"뭘 그리 보느냐?"
"예?"
연희는 살짝 넋이 나간 듯, 마치 어딘가 홀려 있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되물었다.
"연희야!"
옆에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희는, 요즘 수현의 병간호로 지쳐있던 차에 지루함이 겹치니 노곤함에 연신 멈추지 않고 하품이 나왔다.
자꾸 하품을 해서 일까, 세자가 연희를 흘겨보니, 연희가 얼른 정색을 하였다.
"그렇게 지루하면 너도 같이 좀 살펴보겠느냐?"
세자의 은근한 핀잔에 연희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하지만... 전 뭐라고 적혀있는지 하나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연희의 말에 속으로는 크게 놀라 당황한 세자는 겉으로 티내지 않으려 애쓰며 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 그럼...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이냐?"
"모르겠습니다... 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지라 당연히 글자도 생각나지 않는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순진한 눈빛으로 세자를 바로 보며 연희는 당연한거 아니냐는듯한 얼굴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세자는 자신도 모르게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연희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지자 이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흠...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한들 설마 글자까지 잊히지는 않을것인데? 원래부터 글자를 몰랐던 것 아닌가 싶구나?"
연희가 눈을 살짝 치켜뜨며 무엄하게도 세자를 노려보며 강경한 어조로 답했다.
"아닐 겁니다. 저하 께옵서도 얘기하시지 않았습니까? 제 손을 보니... 분명 양인 출신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세자는 연희의 대답에 장난치듯 입술을 삐뚜름히 올리며 궁시렁 거리듯 말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다들 일하고 있을 때, 몰래 혼자 빈둥거려 그런 것인지 어찌 알겠느냐?"
연희는 자신의 무엄함을 잊고 다시 세자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것만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글세. 그건 모르는 일이지."
"절대, 절대 절대 아닙니다."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세자의 장난스러운 비아냥에 연희는 분한 듯한 표정으로 확신을 꾹 꾹 눌러 담아 대답했다.
"절.대. 절대절대절대 아닙니다. 절대!"
연희의 확고한 대답이 귀엽게 느껴진 세자는 이내 졌다는듯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좋아. 한 번은 믿어주마."
"와~ 아닙니다, 진짜. 그렇게 봐주듯이 믿지 마십시오. 저에 대한 믿음이 그것뿐이옵니까?"
"그럼? 뭘 보고 너를 믿느냐?"
"뭐, 뭘 보고 라뇨? 저를 못 믿을 이유는 또 뭡니까? 여태 저하 곁에서 이렇게... 저하를 돕고 있지 않습니까?"
세자는 과장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놀리듯 물었다.
"그거야, 네가 오갈 데 없는 처지니까 그런 것 아니냐?"
연희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답답하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와~ 진짜, 저더러 오기만 하면 편히 살게 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기다려준다고."
별안간 세자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뭐? 누가 그런말을 하더냐?"
세자가 무서운 목소리로 묻자 연희는 순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그... 그거야, 뭐... 있습니다. 뭐, 꼭, 그걸 말해야 합니까?"
남자와 같이 걸어가던 연희의 모습이 순간 세자의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혹여,, 그자더냐?"
연희는 궁금함을 담은 눈으로 세자를 바라보다 이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고 일순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에휴,,세자저하에게 농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대체 제게 그런말을 할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
연희는 장난스럽게 크게 한숨을 내쉬며 어색한 웃음을 짓고는 터무니 없다는듯 말하려 노력했다.
이쯤에서 세자는 더 이상 그녀가 그자에대해 생각하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그녀를 보며 그도 이쯤에서 모른척 하기로 했다.
세자는 눈을 흘겨뜨며 연희의 말이 진담인지 가늠하려고 하는것처럼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다 풉하고 장난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스스로 느끼지 못했지만 세자의 웃는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던 얼굴이 스스륵 풀려 버렸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와? 진짜... 저 거짓말 안 합니다."
"뭐, 언제는 악의 없는 거짓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더니...."
"그게... 그게,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저하에게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 뜻이지요."
"그래, 좋아. 거기까지 믿어주마."
"와~"
연희는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저하 이런 분이셨습니까?"
"이런 분이라니? 무엄하구나."
"예, 무엄합니다. 차라리 무엄하렵니다."
"뭐라? 푸하~"
세자가 웃음을 터뜨리자, 연희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세자를 바라보다 속으로 이내 안도의 한숨의 내쉬었다.
새치름한 연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웃던 세자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다정하게 말했다.
"미안하다. 내 네게 장난이 과한 듯 하구나."
"장난이셨습니까? 본심이셨던 것 같습니다."
울상이 되어 투덜거리며 양쪽 뺨을 한껏 부풀린 연희를 보니 ,세자의 눈엔 그 모습이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자자, 우리에게는 지금 중한 일이 있다. 사교도 무리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저들을 토벌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자가 분위기를 바꾸려 하자, 연희도 뚱한 표정을 지우고 세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천무방이란 조직이 좌상대감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좌를 찾지 못한다면, 제이 제삼의 천무방은 또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문득 세자의 눈에 초롱초롱 빛나고 있는 연희의 눈망울이 들어왔다.
반짝 거리는 저 눈빛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뭘 그렇게 보는 것이냐?"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묻자, 연희가 의아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저하를 보고 있사옵니다. 말씀하시기에..."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다시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안되는데, 사교도 무리에 대한 조사 내용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러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불쑥불쑥 그녀에게 장난이 치고 싶어 졌다. 새치롬하던 얼굴을 또 보고싶었다.
자신답지 않음에 세자는 내심 당혹함을 느꼈다.
"넋을 놓고 있는 것 같기에 물은 것이다. 내 얘기를 듣고 있긴 한 것이냐?"
세자가 정색을 하며 묻는 말에, 연희는 아미를 찌푸렸다.
"예, 듣고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정말이냐?"
"예. 정말입니다."
"정말 사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냐?"
"예. 정말... 예? 사심... 이라뇨?"
연희의 되물음에 세자가 풋하고 웃음 짓자, 연희가 다시금 눈을 흘겨 떴다.
"자꾸 이렇게 놀리실 겁니까? 너무 하십니다."
연희가 투정을 부리자, 세자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미안하다. 내가 오늘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어찌 그러십니까?"
"음... 글세,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어찌 좋은 것인지... 그럼..."
세자가 보고 있던 자료들을 덮어 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 있었더니 눈이 침침하구나. 나가서 바람 좀 쐬자."
"예? 아니.. 불과 한식경..."
"어험험"
세자가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하며 밖으로 나가버리자, 연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뒤따랐다.
해가 중천에 떠 있고, 밝은 햇살은 온 세상에 고르게 흩뿌려지고 있었다.
푸른 하늘 위로 몽실몽실한 구름 몇점이 두둥실 떠 있으니, 화폭에 옮겨놓은 그림과도 같았다.
"날이 좋구나."
밖으로 나와 상쾌하게 기지개를 켜며 말하는 세자를 보다 연희도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 바람도 선선하고... 날이 참 좋습니다."
"그럼 좀 걸어볼까?"
세자가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니, 연희가 놀라 서둘러 뒤따랐다.
바깥쪽에서 경계를 서던 호위병들이 세자를 보고 얼른 뒤따르려 하자, 세자가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라오너라."
"예, 저하."
연희가 그 말에 발걸음 속도를 늦추자, 세자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하느냐?"
"예? 아니.. 거리를... 두라 하셔서..."
"너는 이리 가까이 붙거라."
"에?"
"이리 딱 붙으란 말이다."
"예예..."
연희가 서둘러 세자의 곁으로 바짝 붙어서자, 세자가 빙그레 웃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호위무사들이 신경쓰이는지 연신 뒤를 힐끔거리던 연희는 세자에게 슬며시 물었다.
"그런데 저분들은 믿을 만한 분들이 옵니까?"
연희의 물음에 뒤따르는 호위무사들을 슬쩍 한번 쳐다보던 세자는 씨익 웃어 보였다.
"믿을만하긴. 믿을 수 없는 자들이지."
"예에? 그런데 어찌..."
"어쩌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 하지 않느냐? 적의 손에 나의 안전을 맡겨두었으니, 대놓고 나를 함부로 할 수 없을 것 아니냐? 지켜주기로 하였으니, 내가 잘못되었다가는 그 책임에서 자유롭기 힘들 터. 적어도 해가 떠있는 동안에는 저들로 인해 우리는 안전할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놀란 연희는 세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왜 그러느냐?"
세자가 연희의 표정을 보며 의문스런 얼굴로 묻자, 연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대단하십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연희의 때아닌 칭찬에 세자는 괜스레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그래? 뭘 이 정도 가지고...
뒷짐쥐고 걷는 듬직한 세자의 곁에 연희도 조용히 따라 걸었다.
연희는 그렇게 세자 곁을 말없이 걷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오려해 애써 참았다.
왜 이렇게 바보같이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사람들이 내게..."
문득 걷고 있던 세자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 연희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세자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네가 기억을 찾으면 어찌할 것인지 묻더구나."
"아..."
사실 연희도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솔직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마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리길 바랬다.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으니, 기억을 되찾은 이후에 어찌 될지 예측하기가 무서웠다.
"모두가 나로 인해, 네가 힘들어질까 걱정하더구나."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보다 여러 사람들을 걱정시키는 모양입니다."
세자가 피식 웃음 지었다.
"너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너를 아끼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뜻 아니겠느냐?"
"그렇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 은혜에 보답할 방법이 없으니 속상합니다."
"줄 수 있으니까 주는 것이다. 보답하려 애쓰지 말거라. 그냥..."
세자는 부드러운 눈빛과 다정한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니 말이다."
세자의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얼굴에 열이 몰려 빨갛게 물드는 듯했고, 심장이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뛰었다.
세자의 마음도 혹여 자신과 같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런 연희의 마음을 알지도 못한 체, 세자는 해맑게 웃으며 다시 앞을 보고 걸어갈 뿐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붕 떠있는 것이, 이대로 하늘로 둥실둥실 떠올라 구름 위로 올라가 버릴 것만 같았다.
햇빛이 반짝반짝 춤을 추고 있다.
바람이 살랑살랑 꼬리 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이리 이뻐 보이니, 무슨 독에 중독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저하..."
때마침 순시를 마치고 돌아오던 여학수가 세자를 보고 황급히 다가와 공손히 인사하였다.
"제가 올린 자료들은 살펴보셨나이까?"
여학수가 묻는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았네. 아직은 이렇다 할 만큼 눈에 띄는 것은 없어보였네...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한양 내에 천무방이라는 무속 집단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네."
"예."
"그 천무방에 방주란 자가 자신 스스로를 율제라 칭하며, 사교도 들을 모아 혹세무민하고 있네.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봐주게."
"실은... 저희도 연관성이 있는 듯하여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직접적인 관계를 찾지 못하고 있었사온데... 저하께옵서 어찌 그 사실을 아셨습니까?"
세자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흠... 뭐 자세하게 이야기 하기는 그렇고... 지금 누워있는 금호의 도움으로 저들의 동태를 살핀 적이 있네."
"예, 알겠습니다. 저희가 좀 더 살펴본 후, 확인되는 것이 있으면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부탁함세."
"예, 저하."
여학수가 물러나고, 세자가 고개를 돌리니, 연희가 세상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세자는 당황스러운, 아니 어쩌면 조금 부끄러운 얼굴로 연희를 보며 물었다.
"뭘 그리 보느냐?"
"예?"
연희는 살짝 넋이 나간 듯, 마치 어딘가 홀려 있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되물었다.
"연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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