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1
힘겨워하는 송이개와 유림을 데리고 산을 넘은 라마 일행은, 어느덧 한 마을 인근에 다다르고 있었다.
다들 지치기도 했거니와, 저녁 무렵이 다 되도록 먹은 것이 없어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을 판이었다.
"당장 요기부터 합시다."
지친 듯 헐떡이던 송이개가 먼발치에서 마을이 보이자,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럽시다. 뭐라도 좀 먹읍시다."
유림이 거들고 나서자, 조원영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지친 세 사람을 보며, 앞장서서 가던 고운월과 라마가 무심하게 세 사람을 돌아보고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보아하니, 무공도 익히지 못한 듯한데, 그런 사람들 데리고 다니기 번거롭지 않습니까?"
고운월이 라마에게 슬쩍 물어보니 라마가 피식 웃었다.
"송이개님이야 길 안내를 해준다지만, 유림은 가라는데도 따라오는데 어쩌겠소? 나보다야 남자 행세하는 처자 모시는 댁이 더..."
라마는 별생각 없이 말하다가 흠칫 놀라며 말을 끊었고, 고운월이 놀란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소?"
그 말에 라마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엥? 알고 있었소?"
둘은 서로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다,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계속 나아갔다.
마을 입구에 다다라서야, 고운월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모른 척해주시오."
나지막한 고운월의 부탁에 라마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럽시다."
일행이 모두 요기를 하기 위해 객점부터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제일 먼저 보이는 객점에 부랴부랴 다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표정이 다들 밝고 활기가 찬 듯했다.
허나, 그러한 기운은 들어서는 순간 가라앉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객점 안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망했나?"
실망한 송이개의 말에, 유림이 한걸음 더 나서며 소리쳤다.
"이보시오, 주인장? 안에 아무도 없소?"
그의 목소리가 객점 안에 공허히 울려 퍼졌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순간, 고운월의 표정이 굳어져서 객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일행이 뒤에서 그런 고운월을 바라보니, 고운월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을에.... 사람이 없습니다."
라마가 주위를 살피니, 과연 사람이 아무도 없어 보였다.
이제 어둠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슬슬 등불에 불도 밝히고 해야 하는데, 그저 고요함만이 마을에 가득한 상태였다.
"이거야 원... 유령 마을인가?"
라마의 말에 유림과 송이개, 조원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유, 유령이요?"
조원영의 되물음에, 라마가 그를 돌아보더니 피식 웃음 지었다.
"말이 그렇다는 게요."
조원영은 살짝 뾰로통한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황급히 바꾸었고, 그런 조원영을 보며 라마는 내심 웃고 있었다.
"단순히 빈 마을은 아닌 것 같군요."
고운월이 말하며 칼을 뽑아들자, 지붕 위에서 일련의 그림자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5명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니, 유림과 송이개, 조원영이 뒤로 물러나고, 라마는 고운월 옆에 서서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니네는 또 뭐냐?"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서 말했다.
"쓸데없는 저항하지 말고, 그녀를 순순히 내놓아라."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했고, 고운월과 라마가 서로를 바라보며 뭔가 실망한 눈치였다.
반면 뒤에 있던 송이개와 유림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이보시오. 누구를 찾는지 모르겠지만, 여긴 남자뿐이오."
송이개가 나서 말하니, 유림이 송이개를 툭툭 쳤다.
"거참 눈치도 없으시오. 나도 긴가민가 했는데.... 확실해 졌구만."
유림이 투덜거리며 조원영을 흘겨보자, 조원영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허, 여자였소?"
송이개가 놀라 물었으나, 조원영은 대답하지 않고 그의 눈길을 피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 마라."
고운월이 칼을 치켜들며 말하자, 다섯 명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이어 그들 중 하나가 라마를 보며 말했다.
"그쪽은 굳이 우리와 싸울 필요가 없지 않은가?"
라마가 그런 그들을 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 돈을 받기로 해서..."
"얼마나 받기로 했는지 모르겠으나? 물러서면, 그 두배를 주지."
그러자 라마가 과장되게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두배? 진짜?"
"그렇...."
그가 체 대답하기도 전에 뒤에 있던 조원영이 얼른 소리쳤다.
"난 저들에 3배를 주겠소!"
라마가 그녀를 돌아보니, 그녀가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는 한숨을 내쉬고는 라마에게 설득하듯 말했다.
"돈은 원하는 대로 주겠소. 돈 몇 푼에 굳이 목숨을 걸 이유가 없지 않겠소?"
그러자 라마가 씨익 웃어 보였다.
"아... 그게... 내 목숨 값이 헐값인데, 오늘 꽤 비싸게 받네?"
라마의 대답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굳이 원한다면..."
다섯 명이 동시에 공격해 들어왔고, 라마와 고운월이 그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셋이 라마를 공격해 왔는데, 라마는 특유의 보법을 펼치며 세 사람을 능숙하게 상대했다.
다만, 이전에 상대했던 이들과는 그 결이 다른 인물들이라, 라마도 간신히 그들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세다.'
라마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상대의 공격을 받아냈다.
반면 세 사람 역시 놀라고 있었다.
자신들 셋이 동시에 공격하면 금방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라마가 꽤 능숙하게 받아내는 것을 보고 내심 놀라고 있는 것이었다.
라마가 그렇게 세 사람을 상대하는 사이, 두 사람이 고운월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고운월은 그 두 사람에게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나며 휘청이자, 라마가 얼른 고운월 쪽으로 몸을 움직이며 동시에 다섯 명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라마의 실력에 놀라 잠시 뒤로 물러섰고, 라마도 그 덕에 숨을 돌리고 있었다.
"소협, 소협의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오.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소?"
"라마."
짧은 라마의 대답에, 그들 중 하나가 다시 물었다.
"내공의 심후함이 놀랍소. 아직 나이가 어린 듯한데, 그 나이에 이토록 심후한 내공이라니... 기질이 훌륭한데...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오."
라마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뭐 꼭 그렇게 아쉬울 것 까지야..."
문득 라마는 저들이 내공에 대해 이야기하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철근공을 익혔지. 그걸 써먹으면 좋겠는데...'
라마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번엔 먼저 저들을 향해 공격했다.
다섯 명이 일제히 나서 라마의 공격에 맞서는데, 제일 먼저 라마와 검을 마주한 이가, 검이 닿는 순간 '흡'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가 휘청이며 균형을 잃고 다른 이를 향해 몸을 날리니, 두 사람이 뒤엉켜 나뒹굴었다.
"읏! 뭐야?"
이어 다른 세 사람이 당황하는 사이, 라마의 검이 또 다른 이를 놀렸고, 순식간에 나머지 두 명이 또 나가떨어졌다.
"뭣?"
남은 한 사람이 놀라 주춤 물러서자, 라마가 그를 보며 말했다.
"뭐해? 얼른 안 덤비고?"
타박하듯 말하며, 남은 한 사람을 향해 검을 날리니, 그가 검을 들어 맞섰다.
검이 닿는 순간, 라마의 검을 닿고 묵직한 내력이 압박하고 들어오니,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엄청난 내력이 그의 숨통을 조여 오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안색이 파리해진 그가 간신히 버티고 있으니, 라마가 씨익 웃으며 검을 휘둘렀는데, 마치 상대의 몸과 검이 라마의 검에 착 달라붙어 버린 듯 따라서 움직이다가, 라마가 내력을 거두자, 바닥을 나뒹굴었다.
"윽!"
그가 바닥에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뱉으니, 뒤에 있던 송이개와 유림, 조원영이 환호했다.
"과연!"
"역시 소협이십니다."
그러자, 쓰러진 이들 중 하나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물었다.
"이건... 철근공이 아닌가?"
그가 무공을 알아보자, 함께 온 다른 이들도 모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철근공? 그럼?"
그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라마가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검을 거두고 라마 앞에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철무방 암인랑 속하들이 소협께 인사 올립니다."
다섯 명이 모두 예를 갖추어 인사하니, 라마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가 이내 이해한 듯 머쓱해졌다.
"어... 음...."
그들 중 대장인 듯한 자가 나서 라마를 보며 물었다.
"속하들이 알아보지 못하여 송구하옵니다. 혹, 어디에 계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가 묻는 말에 라마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그게...뭐... 사실 얼마 안되서.... 저... 묵추랑에..."
"아~ 묵추랑에 계셨습니까? 혹? 어느분 문하 신지요?"
"배, 백무보... 밑에..."
그러자 그들은 더욱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 무심랑 백무보님 제자셨군요. 속하들이 알아보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서열상 저희들은 한참 아래이니 말씀 낮추십시오."
라마는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들어간 지 하룻밤만에 도망쳐 나왔으니, 어찌 철무방 소속이라 할 수 있을까.
"그, 그건 그렇다 치고. 어찌 아녀자를 납치하려 하느.....냐....?"
라마가 따지듯 묻는 말에 대장인 듯한 자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송구하옵니다. 속하들은 그저 명에 따랐을 뿐이옵니다. 조수강의 여식인 조여령이 남장을 하고 이곳을 지나고 있으니 잡아오라 하였습니다. 설마 묵추랑에서 호위를 하고 있는지는, 암인랑에서 알지 못하였습니다."
라마는 꽤 난처했다.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지금 상황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뭐... 일이 좀 그렇게 됐는데... 공식적인 호위는 아니고...."
"하오면 속하들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뭐 또 그렇게까지..."
대장인듯한 자가 손을 들어 보이자, 이내 마을의 집 외곽 쪽에서 검은 복색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지는 몰랐기에, 일행은 모두 아연실색한 상태였다.
"뭐... 뭐 이렇게 많이 왔어?"
"설마 묵추랑에서 호위하는지도 모르고, 고수가 호위한다 하여 암인랑 내 무사 백인을 대동하였습니다."
"도대체 왜 잡아 오라는 거야?"
라마의 물음에 그가 조금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뭐... 조수강의 여식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라마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은 내가... 거 뭐... 백무보... 님의 문하에 들은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데다가, 무림에 나선 지 얼마 안되서...."
"아, 그러셨습니까? 조수강은 우리 의천맹을 적대시하는 황족입니다. 무림맹을 도와 우리를 핍박하고, 의천맹을 무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요. 그래서 조수강의 여식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라마가 눈살을 찌푸리며 핀잔을 주었다.
"사내대장부가 정면 승부해야지, 인질을 잡아서 뭘 어찌해보려 하는 건 너무 치사한 거 아니오?"
그 말에 대장은 물론 뒤에 선 네 명이 모두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송구합니다. 저희들이야 그저 명에 따르다 보니..."
"쯧쯧... 바르지 못한 명에 따르는 것도 죄요. 명색이 의천맹과 철무방의 이름으로 활동한다는 자들이, 어찌 그 이름에 먹칠을 하려 하시오?"
라마의 질책에 대장의 표정이 사색이 되어, 자리에 무릎 꿇었다.
"소인이 백번 잘못하였습니다. 벌하여 주시옵소서."
이어 나머지 네 명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벌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주위에 나타난 백여 명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헐.... 소협, 대단한 양반이었구만."
뒤에서 이 광경을 보는 유림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니, 송이개가 짐짓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물론 당연한 일이지."
라마 역시 이 상황이 좀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 보려고 아무 말이나 막 던졌는데, 이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그러나 왠지 조원영, 아니 조여령 앞에서 어깨가 으슥해지는 기분이었다.
아, 이러다 홀딱 반해서 바로 결혼하자고 하면 어떡하지?
영웅이란 이런 기분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참아지지가 않았다.
또 영웅에 면모를 보여줘야지.
"되었소. 그만 일어나시오. 모두가 부덕한 우리의 잘못이니."
"감사합니다."
대장을 위시하여 그들이 모두 일어나, 진정으로 감복한 표정으로 라마를 바라보았다.
아~ 이러다 이 사람들이 모두 존경한다고 따라오면 어떡하지?
라마는 수많은 것들이 걱정되는 와중에도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다들 지치기도 했거니와, 저녁 무렵이 다 되도록 먹은 것이 없어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을 판이었다.
"당장 요기부터 합시다."
지친 듯 헐떡이던 송이개가 먼발치에서 마을이 보이자,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럽시다. 뭐라도 좀 먹읍시다."
유림이 거들고 나서자, 조원영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지친 세 사람을 보며, 앞장서서 가던 고운월과 라마가 무심하게 세 사람을 돌아보고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보아하니, 무공도 익히지 못한 듯한데, 그런 사람들 데리고 다니기 번거롭지 않습니까?"
고운월이 라마에게 슬쩍 물어보니 라마가 피식 웃었다.
"송이개님이야 길 안내를 해준다지만, 유림은 가라는데도 따라오는데 어쩌겠소? 나보다야 남자 행세하는 처자 모시는 댁이 더..."
라마는 별생각 없이 말하다가 흠칫 놀라며 말을 끊었고, 고운월이 놀란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소?"
그 말에 라마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엥? 알고 있었소?"
둘은 서로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다,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계속 나아갔다.
마을 입구에 다다라서야, 고운월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모른 척해주시오."
나지막한 고운월의 부탁에 라마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럽시다."
일행이 모두 요기를 하기 위해 객점부터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제일 먼저 보이는 객점에 부랴부랴 다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표정이 다들 밝고 활기가 찬 듯했다.
허나, 그러한 기운은 들어서는 순간 가라앉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객점 안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망했나?"
실망한 송이개의 말에, 유림이 한걸음 더 나서며 소리쳤다.
"이보시오, 주인장? 안에 아무도 없소?"
그의 목소리가 객점 안에 공허히 울려 퍼졌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순간, 고운월의 표정이 굳어져서 객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일행이 뒤에서 그런 고운월을 바라보니, 고운월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을에.... 사람이 없습니다."
라마가 주위를 살피니, 과연 사람이 아무도 없어 보였다.
이제 어둠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슬슬 등불에 불도 밝히고 해야 하는데, 그저 고요함만이 마을에 가득한 상태였다.
"이거야 원... 유령 마을인가?"
라마의 말에 유림과 송이개, 조원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유, 유령이요?"
조원영의 되물음에, 라마가 그를 돌아보더니 피식 웃음 지었다.
"말이 그렇다는 게요."
조원영은 살짝 뾰로통한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황급히 바꾸었고, 그런 조원영을 보며 라마는 내심 웃고 있었다.
"단순히 빈 마을은 아닌 것 같군요."
고운월이 말하며 칼을 뽑아들자, 지붕 위에서 일련의 그림자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5명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니, 유림과 송이개, 조원영이 뒤로 물러나고, 라마는 고운월 옆에 서서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니네는 또 뭐냐?"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서 말했다.
"쓸데없는 저항하지 말고, 그녀를 순순히 내놓아라."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했고, 고운월과 라마가 서로를 바라보며 뭔가 실망한 눈치였다.
반면 뒤에 있던 송이개와 유림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이보시오. 누구를 찾는지 모르겠지만, 여긴 남자뿐이오."
송이개가 나서 말하니, 유림이 송이개를 툭툭 쳤다.
"거참 눈치도 없으시오. 나도 긴가민가 했는데.... 확실해 졌구만."
유림이 투덜거리며 조원영을 흘겨보자, 조원영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허, 여자였소?"
송이개가 놀라 물었으나, 조원영은 대답하지 않고 그의 눈길을 피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 마라."
고운월이 칼을 치켜들며 말하자, 다섯 명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이어 그들 중 하나가 라마를 보며 말했다.
"그쪽은 굳이 우리와 싸울 필요가 없지 않은가?"
라마가 그런 그들을 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 돈을 받기로 해서..."
"얼마나 받기로 했는지 모르겠으나? 물러서면, 그 두배를 주지."
그러자 라마가 과장되게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두배? 진짜?"
"그렇...."
그가 체 대답하기도 전에 뒤에 있던 조원영이 얼른 소리쳤다.
"난 저들에 3배를 주겠소!"
라마가 그녀를 돌아보니, 그녀가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는 한숨을 내쉬고는 라마에게 설득하듯 말했다.
"돈은 원하는 대로 주겠소. 돈 몇 푼에 굳이 목숨을 걸 이유가 없지 않겠소?"
그러자 라마가 씨익 웃어 보였다.
"아... 그게... 내 목숨 값이 헐값인데, 오늘 꽤 비싸게 받네?"
라마의 대답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굳이 원한다면..."
다섯 명이 동시에 공격해 들어왔고, 라마와 고운월이 그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셋이 라마를 공격해 왔는데, 라마는 특유의 보법을 펼치며 세 사람을 능숙하게 상대했다.
다만, 이전에 상대했던 이들과는 그 결이 다른 인물들이라, 라마도 간신히 그들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세다.'
라마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상대의 공격을 받아냈다.
반면 세 사람 역시 놀라고 있었다.
자신들 셋이 동시에 공격하면 금방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라마가 꽤 능숙하게 받아내는 것을 보고 내심 놀라고 있는 것이었다.
라마가 그렇게 세 사람을 상대하는 사이, 두 사람이 고운월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고운월은 그 두 사람에게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나며 휘청이자, 라마가 얼른 고운월 쪽으로 몸을 움직이며 동시에 다섯 명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라마의 실력에 놀라 잠시 뒤로 물러섰고, 라마도 그 덕에 숨을 돌리고 있었다.
"소협, 소협의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오.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소?"
"라마."
짧은 라마의 대답에, 그들 중 하나가 다시 물었다.
"내공의 심후함이 놀랍소. 아직 나이가 어린 듯한데, 그 나이에 이토록 심후한 내공이라니... 기질이 훌륭한데...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오."
라마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뭐 꼭 그렇게 아쉬울 것 까지야..."
문득 라마는 저들이 내공에 대해 이야기하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철근공을 익혔지. 그걸 써먹으면 좋겠는데...'
라마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번엔 먼저 저들을 향해 공격했다.
다섯 명이 일제히 나서 라마의 공격에 맞서는데, 제일 먼저 라마와 검을 마주한 이가, 검이 닿는 순간 '흡'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가 휘청이며 균형을 잃고 다른 이를 향해 몸을 날리니, 두 사람이 뒤엉켜 나뒹굴었다.
"읏! 뭐야?"
이어 다른 세 사람이 당황하는 사이, 라마의 검이 또 다른 이를 놀렸고, 순식간에 나머지 두 명이 또 나가떨어졌다.
"뭣?"
남은 한 사람이 놀라 주춤 물러서자, 라마가 그를 보며 말했다.
"뭐해? 얼른 안 덤비고?"
타박하듯 말하며, 남은 한 사람을 향해 검을 날리니, 그가 검을 들어 맞섰다.
검이 닿는 순간, 라마의 검을 닿고 묵직한 내력이 압박하고 들어오니,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엄청난 내력이 그의 숨통을 조여 오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안색이 파리해진 그가 간신히 버티고 있으니, 라마가 씨익 웃으며 검을 휘둘렀는데, 마치 상대의 몸과 검이 라마의 검에 착 달라붙어 버린 듯 따라서 움직이다가, 라마가 내력을 거두자, 바닥을 나뒹굴었다.
"윽!"
그가 바닥에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뱉으니, 뒤에 있던 송이개와 유림, 조원영이 환호했다.
"과연!"
"역시 소협이십니다."
그러자, 쓰러진 이들 중 하나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물었다.
"이건... 철근공이 아닌가?"
그가 무공을 알아보자, 함께 온 다른 이들도 모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철근공? 그럼?"
그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라마가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검을 거두고 라마 앞에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철무방 암인랑 속하들이 소협께 인사 올립니다."
다섯 명이 모두 예를 갖추어 인사하니, 라마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가 이내 이해한 듯 머쓱해졌다.
"어... 음...."
그들 중 대장인 듯한 자가 나서 라마를 보며 물었다.
"속하들이 알아보지 못하여 송구하옵니다. 혹, 어디에 계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가 묻는 말에 라마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그게...뭐... 사실 얼마 안되서.... 저... 묵추랑에..."
"아~ 묵추랑에 계셨습니까? 혹? 어느분 문하 신지요?"
"배, 백무보... 밑에..."
그러자 그들은 더욱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 무심랑 백무보님 제자셨군요. 속하들이 알아보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서열상 저희들은 한참 아래이니 말씀 낮추십시오."
라마는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들어간 지 하룻밤만에 도망쳐 나왔으니, 어찌 철무방 소속이라 할 수 있을까.
"그, 그건 그렇다 치고. 어찌 아녀자를 납치하려 하느.....냐....?"
라마가 따지듯 묻는 말에 대장인 듯한 자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송구하옵니다. 속하들은 그저 명에 따랐을 뿐이옵니다. 조수강의 여식인 조여령이 남장을 하고 이곳을 지나고 있으니 잡아오라 하였습니다. 설마 묵추랑에서 호위를 하고 있는지는, 암인랑에서 알지 못하였습니다."
라마는 꽤 난처했다.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지금 상황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뭐... 일이 좀 그렇게 됐는데... 공식적인 호위는 아니고...."
"하오면 속하들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뭐 또 그렇게까지..."
대장인듯한 자가 손을 들어 보이자, 이내 마을의 집 외곽 쪽에서 검은 복색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지는 몰랐기에, 일행은 모두 아연실색한 상태였다.
"뭐... 뭐 이렇게 많이 왔어?"
"설마 묵추랑에서 호위하는지도 모르고, 고수가 호위한다 하여 암인랑 내 무사 백인을 대동하였습니다."
"도대체 왜 잡아 오라는 거야?"
라마의 물음에 그가 조금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뭐... 조수강의 여식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라마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은 내가... 거 뭐... 백무보... 님의 문하에 들은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데다가, 무림에 나선 지 얼마 안되서...."
"아, 그러셨습니까? 조수강은 우리 의천맹을 적대시하는 황족입니다. 무림맹을 도와 우리를 핍박하고, 의천맹을 무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요. 그래서 조수강의 여식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라마가 눈살을 찌푸리며 핀잔을 주었다.
"사내대장부가 정면 승부해야지, 인질을 잡아서 뭘 어찌해보려 하는 건 너무 치사한 거 아니오?"
그 말에 대장은 물론 뒤에 선 네 명이 모두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송구합니다. 저희들이야 그저 명에 따르다 보니..."
"쯧쯧... 바르지 못한 명에 따르는 것도 죄요. 명색이 의천맹과 철무방의 이름으로 활동한다는 자들이, 어찌 그 이름에 먹칠을 하려 하시오?"
라마의 질책에 대장의 표정이 사색이 되어, 자리에 무릎 꿇었다.
"소인이 백번 잘못하였습니다. 벌하여 주시옵소서."
이어 나머지 네 명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벌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주위에 나타난 백여 명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헐.... 소협, 대단한 양반이었구만."
뒤에서 이 광경을 보는 유림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니, 송이개가 짐짓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물론 당연한 일이지."
라마 역시 이 상황이 좀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 보려고 아무 말이나 막 던졌는데, 이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그러나 왠지 조원영, 아니 조여령 앞에서 어깨가 으슥해지는 기분이었다.
아, 이러다 홀딱 반해서 바로 결혼하자고 하면 어떡하지?
영웅이란 이런 기분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참아지지가 않았다.
또 영웅에 면모를 보여줘야지.
"되었소. 그만 일어나시오. 모두가 부덕한 우리의 잘못이니."
"감사합니다."
대장을 위시하여 그들이 모두 일어나, 진정으로 감복한 표정으로 라마를 바라보았다.
아~ 이러다 이 사람들이 모두 존경한다고 따라오면 어떡하지?
라마는 수많은 것들이 걱정되는 와중에도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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