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3
넓은 장소에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행색부터가 각양각색인 것이, 이런 사람들이 한자리 모여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는데, 그 맨 위 상석에 조철웅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 왔는가? 이리 와 앉으시게."
조철웅의 부름에 라마는 인사를 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고, 조철웅 옆에 앉은 조여령이 라마를 보며 환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옆에 앉으시게."
조철웅의 말에 라마는 조여령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그 옆으로 송이개와 유림, 고운월이 차례대로 앉았다.
라마가 자리에 앉자, 기녀가 다가와 일행 모두에게 차례대로 술잔을 채워주었고, 술잔이 모두 채워지자, 조철웅이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들며 말했다.
"오늘, 나는 한 사람의 무인을 칭송하고자 하오."
이어 라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소협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게."
라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쭈볏쭈볏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철웅이 라마의 어깨에 솥뚜껑 같은 손을 턱 하니 얹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기 이 젊은 협객께서, 위기에 처한 이 사람의 조카를 구해주었소. 생명부지의 타인임에도, 의협을 행함에 있어 머뭇거림이 없었음을 들었소. 이에, 영웅을 칭송하기 위해 여러분을 모시게 되었소."
모두가 다 같이 술잔을 들었고, 라마와 일행 역시 술잔을 들어 보였다.
"자, 영웅을 위하여!"
"위하여!"
다 같이 술잔을 마시고, 술잔을 내려놓자,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는 수십 명의 기녀들이 일제히 다시 술잔을 채우기 바빴다.
라마가 다시 자리에 앉으려 하자, 누군가 나서 물었다.
"소협, 소협의 존함이 어찌 되시오?"
라마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살짝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라... 라마라고 합니다."
"네? 라? 뭐요?"
"라... 라마."
"라라마?"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맞장구쳤다.
"라라마라. 묘한 이름이구료."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라마에게 물었다.
"혹 어느 문파에 속해있는지 여쭈어도 되겠소이까, 소협?"
그 질문에 라마가 잠시 머뭇거리자, 조여령이 얼른 나서 대답했다.
"철무방에 속해 있다 하십니다."
그러자 순간 좌중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흥! 이제 보니 사파 놈이었군."
"사파 놈이 어쩌다가 좋은 일 한번 했나 보네."
그들은 다름 아닌 정파로 대변되는 무림맹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철 무방이란 말이 나오자 순식간에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라마가 살짝 기분 나빠지려는 찰나,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씀들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저는 누구보다도 소협을 잘 압니다. 소협은 그야말로 의기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멀리서도 그 준수한 용모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였으니, 놀랍게도 그곳에 모용담이 서 있었다.
"어?"
라마가 반가운 얼굴로 아는 척을 하자, 멀리서도 모용담이 그에게 화답하듯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소협,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이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소협께서는 본인의 거취와는 무관하게 타인을 돕는데 앞장 서는 의인이십니다. 제 동생 또한 소협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모용세가는 라마 소협의 의기에 감사드리며, 만약 그 누구라도 소협을 욕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이 모용세가가 기꺼이 소협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을 맹세합니다."
뜻밖에도 모용세가를 대표해서 모용담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가 나서서 이처럼 이야기하니 다들 서로 눈치만 살필 뿐 함부로 말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조철웅이 좌중을 둘러보며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은 이곳 익주의 무림맹 분파에 속해 있거나, 익주로부터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무림맹의 문파요. 그대들이 그처럼 무림이란 이름으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이, 황제폐하의 은혜이자, 나의 배려요. 허나, 내 손님에게 무례하다면, 더는 그러한 배려는 없을 것이오."
조철웅의 험악한 말에 좌중의 표정은 사색이 되어 서로 눈치만 살폈다.
이어 조철웅이 라마를 보며 말했다.
"소협은 기분 나빠하지 마시오. 내가 대신 사과할 테니."
"아닙니다."
라마는 얼른 손사래를 저어 보이며, 웃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자 드십시다."
조철웅이 말을 하고 자리에 앉으니, 다들 눈앞에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설마 이 자리에 모용담이 와 있을 줄 몰랐던 라마는, 먼발치에서 나마 모용담에게 연신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
배부르게 먹는 것도 먹는 것이고, 모용담이 세워준 체면 덕에 기분도 좋아 술을 제법 많이 먹은 라마는 은근히 오르는 취기를 느끼며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술기운을 몰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휘청거리듯 걷는 와중에 계속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문득 자기 방 앞에서 어떤 이쁘장한 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
흐려진 초점을 바로 잡으려는 듯 연신 눈을 껌뻑 거리며 정신을 차린 라마는 그녀가 조여령임을 알아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라마의 물음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조여령을 보니 라마의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아...저 그게...."
얼굴을 붉히고 머뭇거리는 조여령의 용모는 그야말로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이쁘고 사랑스러웠다.
라마는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린 체 조여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이뻤었나? 심장은 그야말로 폭주를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뜨거운 기운이 배 아래쪽에서부터 용솟음치며, 예고된 준비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고백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저...소협, 소협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얼굴이 빨개질대로 빨개진 조여령을 보며 라마는 들뜬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뭐...뭐 말입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라마는 조여령 못지않게 부끄러움 가득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고백인가? 고백도 받아보고 이 세계도 참 살만하다 싶었다.
황족이라던데... 그럼 이제 황제와 친척이 되는 건가?
이러다가 높은 관직에 진출하고 또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는... 아, 의리 없다. 일단 지금은 조여령에 집중하자.
라마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기분 좋은 얼굴로 조여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른 것이 아니오라...."
그래그래, 얼른 얘기해라. 다 받아 줄 것이니. 당장 오늘 밤 함께 하자고 하면? 어쩔 수 없지.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
꽤 오래 지켜왔던 순정이련만, 기꺼이 받쳐주련다.
"저...."
머뭇거리던 여령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모용담 소협과는 어찌 아시는 사이십니까?"
응? 뭐?
라마는 순간 어리둥절 해졌다.
뭘 잘못 들었나.
"소녀가, 실은 오래전부터 동경해왔던 분이십니다. 뜻밖에도 소협과 인연이 있다고 하여..."
그다음 말부터는 라마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게 뭐지?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올랐던 뜨거운 용솟음은 순식간에 식어 버리고 있었다.
머릿속은 종이 울린 듯 뎅~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고, 심장은 일하기를 거부는 듯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하여, 그러니 꼭 모용담 소협께 제 얘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뭔지 모를 말을 수줍게 부탁한 조여령은 황급히 인사를 하고 부끄러운 얼굴을 가린 체 자리를 떠나버렸다.
아.... 이 무슨 망조인가.
라마는 굳어진 체 떠나간 조여령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용담, 이 개새.... 왜 와가지고...
눈물이 난다. 오늘은 다 잊고 그냥 자야겠다.
확 죽어서 다시 시작한 다음에, 모용담이 이곳에 오기 전에 제거해 버릴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
머리가 깨질 듯 아픈 통증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난 라마는 퀭한 눈으로 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기분이 나빴다. 모용담 그 육시랄 놈은 여기 왜 와서 초를 치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잘생긴 놈들은 이래서 안돼.
그놈들 하는 짓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안 들어.
망할 놈 같으니라고.
궁시렁궁시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밖으로 나간 라마는 변소간을 찾아 소변을 본 뒤 옷자락을 대충 동여매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 그의 눈앞에 누군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라마가 흠칫 놀라 해 하며 그를 살피니, 행색은 여지없는 거지꼴이었으나 허름한 옷일지언정 정갈하게 차려입은 자였다.
"누, 누구시오?"
라마가 놀라 물으니, 그가 라마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개한테는 들었네. 이개 말이 자네 의협심이 참으로 대단하다더군."
라마는 그의 행색과 더불어 송이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미루어, 그가 개방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예..."
라마가 시무룩하게 대답하니,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나? 바깥바람이나 쐬면서 말이야."
"아... 예...."
이 사람, 나이가 꽤 많아보는 노인이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거부할 수 없는 묘한 힘이 있었다.
피곤하고 귀찮아 죽겠는데, 왜 그러는 걸까? 하면서 라마는 그를 따라 걸었다.
이내 밖으로 나온 그는 수풀을 따라 평평하게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나는 홍두평이라고 하네. 개방의 장로를 맡고 있지. 그렇다고 딱히 내세울만한 자리는 아니네만, 그럭저럭 대우받으며 살만한 자리이지."
라마는 이 홍두평이란 인물이 왜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 무심한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했다.
"이개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터라, 그 녀석 성품을 내 잘 알지. 이개가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곤 하지만, 인물 보는 눈이 나쁘지 않아. 듣자 하니, 철무방에 속해 있다고?"
"뭐... 딱히 속해 있다고 이야기하긴 그렇고, 그냥... 인연이 잠깐 있었죠."
"그래, 속해있지 않다니, 오히려 잘된 것 같구만. 이개가 신세를 많이 졌다고. 괜찮다면, 언제 개방의 분파에 방문해 주시게. 어디로 가든, 그곳에 내가 있을 것이니. 그리하면, 내 극진이 대접해 줌세."
라마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딱히 대접받을 만한 일을 한 게 없는데..."
라마의 물음에 홍두평이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내 보기엔 충분히 그럴만했네. 이개와 인연이 있었을 때, 단지 모용가의 여인만 구한 것이 아니라 들었네."
"아..."
"송이개를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는 것이네. 그리고 우리는 은혜를 갚기를 중히 여기지."
"예, 그럼 뭐.... 언제 한번 꼭 들리겠습니다."
"그래, 자네가 그 약속을 지키길 희망하겠네. 그리하면, 자네에게 아주 좋은 선물을 주지."
"무슨...."
"그건 그때 가서 알려주겠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관청 건물 쪽으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라마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이상한 사람일세."
라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하다가, 이내 그를 따라 다시 관청 건물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행색부터가 각양각색인 것이, 이런 사람들이 한자리 모여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는데, 그 맨 위 상석에 조철웅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 왔는가? 이리 와 앉으시게."
조철웅의 부름에 라마는 인사를 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고, 조철웅 옆에 앉은 조여령이 라마를 보며 환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옆에 앉으시게."
조철웅의 말에 라마는 조여령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그 옆으로 송이개와 유림, 고운월이 차례대로 앉았다.
라마가 자리에 앉자, 기녀가 다가와 일행 모두에게 차례대로 술잔을 채워주었고, 술잔이 모두 채워지자, 조철웅이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들며 말했다.
"오늘, 나는 한 사람의 무인을 칭송하고자 하오."
이어 라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소협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게."
라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쭈볏쭈볏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철웅이 라마의 어깨에 솥뚜껑 같은 손을 턱 하니 얹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기 이 젊은 협객께서, 위기에 처한 이 사람의 조카를 구해주었소. 생명부지의 타인임에도, 의협을 행함에 있어 머뭇거림이 없었음을 들었소. 이에, 영웅을 칭송하기 위해 여러분을 모시게 되었소."
모두가 다 같이 술잔을 들었고, 라마와 일행 역시 술잔을 들어 보였다.
"자, 영웅을 위하여!"
"위하여!"
다 같이 술잔을 마시고, 술잔을 내려놓자,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는 수십 명의 기녀들이 일제히 다시 술잔을 채우기 바빴다.
라마가 다시 자리에 앉으려 하자, 누군가 나서 물었다.
"소협, 소협의 존함이 어찌 되시오?"
라마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살짝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라... 라마라고 합니다."
"네? 라? 뭐요?"
"라... 라마."
"라라마?"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맞장구쳤다.
"라라마라. 묘한 이름이구료."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라마에게 물었다.
"혹 어느 문파에 속해있는지 여쭈어도 되겠소이까, 소협?"
그 질문에 라마가 잠시 머뭇거리자, 조여령이 얼른 나서 대답했다.
"철무방에 속해 있다 하십니다."
그러자 순간 좌중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흥! 이제 보니 사파 놈이었군."
"사파 놈이 어쩌다가 좋은 일 한번 했나 보네."
그들은 다름 아닌 정파로 대변되는 무림맹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철 무방이란 말이 나오자 순식간에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라마가 살짝 기분 나빠지려는 찰나,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씀들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저는 누구보다도 소협을 잘 압니다. 소협은 그야말로 의기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멀리서도 그 준수한 용모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였으니, 놀랍게도 그곳에 모용담이 서 있었다.
"어?"
라마가 반가운 얼굴로 아는 척을 하자, 멀리서도 모용담이 그에게 화답하듯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소협,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이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소협께서는 본인의 거취와는 무관하게 타인을 돕는데 앞장 서는 의인이십니다. 제 동생 또한 소협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모용세가는 라마 소협의 의기에 감사드리며, 만약 그 누구라도 소협을 욕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이 모용세가가 기꺼이 소협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을 맹세합니다."
뜻밖에도 모용세가를 대표해서 모용담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가 나서서 이처럼 이야기하니 다들 서로 눈치만 살필 뿐 함부로 말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조철웅이 좌중을 둘러보며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은 이곳 익주의 무림맹 분파에 속해 있거나, 익주로부터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무림맹의 문파요. 그대들이 그처럼 무림이란 이름으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이, 황제폐하의 은혜이자, 나의 배려요. 허나, 내 손님에게 무례하다면, 더는 그러한 배려는 없을 것이오."
조철웅의 험악한 말에 좌중의 표정은 사색이 되어 서로 눈치만 살폈다.
이어 조철웅이 라마를 보며 말했다.
"소협은 기분 나빠하지 마시오. 내가 대신 사과할 테니."
"아닙니다."
라마는 얼른 손사래를 저어 보이며, 웃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자 드십시다."
조철웅이 말을 하고 자리에 앉으니, 다들 눈앞에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설마 이 자리에 모용담이 와 있을 줄 몰랐던 라마는, 먼발치에서 나마 모용담에게 연신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
배부르게 먹는 것도 먹는 것이고, 모용담이 세워준 체면 덕에 기분도 좋아 술을 제법 많이 먹은 라마는 은근히 오르는 취기를 느끼며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술기운을 몰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휘청거리듯 걷는 와중에 계속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문득 자기 방 앞에서 어떤 이쁘장한 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
흐려진 초점을 바로 잡으려는 듯 연신 눈을 껌뻑 거리며 정신을 차린 라마는 그녀가 조여령임을 알아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라마의 물음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조여령을 보니 라마의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아...저 그게...."
얼굴을 붉히고 머뭇거리는 조여령의 용모는 그야말로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이쁘고 사랑스러웠다.
라마는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린 체 조여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이뻤었나? 심장은 그야말로 폭주를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뜨거운 기운이 배 아래쪽에서부터 용솟음치며, 예고된 준비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고백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저...소협, 소협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얼굴이 빨개질대로 빨개진 조여령을 보며 라마는 들뜬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뭐...뭐 말입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라마는 조여령 못지않게 부끄러움 가득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고백인가? 고백도 받아보고 이 세계도 참 살만하다 싶었다.
황족이라던데... 그럼 이제 황제와 친척이 되는 건가?
이러다가 높은 관직에 진출하고 또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는... 아, 의리 없다. 일단 지금은 조여령에 집중하자.
라마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기분 좋은 얼굴로 조여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른 것이 아니오라...."
그래그래, 얼른 얘기해라. 다 받아 줄 것이니. 당장 오늘 밤 함께 하자고 하면? 어쩔 수 없지.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
꽤 오래 지켜왔던 순정이련만, 기꺼이 받쳐주련다.
"저...."
머뭇거리던 여령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모용담 소협과는 어찌 아시는 사이십니까?"
응? 뭐?
라마는 순간 어리둥절 해졌다.
뭘 잘못 들었나.
"소녀가, 실은 오래전부터 동경해왔던 분이십니다. 뜻밖에도 소협과 인연이 있다고 하여..."
그다음 말부터는 라마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게 뭐지?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올랐던 뜨거운 용솟음은 순식간에 식어 버리고 있었다.
머릿속은 종이 울린 듯 뎅~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고, 심장은 일하기를 거부는 듯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하여, 그러니 꼭 모용담 소협께 제 얘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뭔지 모를 말을 수줍게 부탁한 조여령은 황급히 인사를 하고 부끄러운 얼굴을 가린 체 자리를 떠나버렸다.
아.... 이 무슨 망조인가.
라마는 굳어진 체 떠나간 조여령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용담, 이 개새.... 왜 와가지고...
눈물이 난다. 오늘은 다 잊고 그냥 자야겠다.
확 죽어서 다시 시작한 다음에, 모용담이 이곳에 오기 전에 제거해 버릴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
머리가 깨질 듯 아픈 통증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난 라마는 퀭한 눈으로 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기분이 나빴다. 모용담 그 육시랄 놈은 여기 왜 와서 초를 치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잘생긴 놈들은 이래서 안돼.
그놈들 하는 짓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안 들어.
망할 놈 같으니라고.
궁시렁궁시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밖으로 나간 라마는 변소간을 찾아 소변을 본 뒤 옷자락을 대충 동여매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 그의 눈앞에 누군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라마가 흠칫 놀라 해 하며 그를 살피니, 행색은 여지없는 거지꼴이었으나 허름한 옷일지언정 정갈하게 차려입은 자였다.
"누, 누구시오?"
라마가 놀라 물으니, 그가 라마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개한테는 들었네. 이개 말이 자네 의협심이 참으로 대단하다더군."
라마는 그의 행색과 더불어 송이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미루어, 그가 개방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예..."
라마가 시무룩하게 대답하니,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나? 바깥바람이나 쐬면서 말이야."
"아... 예...."
이 사람, 나이가 꽤 많아보는 노인이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거부할 수 없는 묘한 힘이 있었다.
피곤하고 귀찮아 죽겠는데, 왜 그러는 걸까? 하면서 라마는 그를 따라 걸었다.
이내 밖으로 나온 그는 수풀을 따라 평평하게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나는 홍두평이라고 하네. 개방의 장로를 맡고 있지. 그렇다고 딱히 내세울만한 자리는 아니네만, 그럭저럭 대우받으며 살만한 자리이지."
라마는 이 홍두평이란 인물이 왜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 무심한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했다.
"이개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터라, 그 녀석 성품을 내 잘 알지. 이개가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곤 하지만, 인물 보는 눈이 나쁘지 않아. 듣자 하니, 철무방에 속해 있다고?"
"뭐... 딱히 속해 있다고 이야기하긴 그렇고, 그냥... 인연이 잠깐 있었죠."
"그래, 속해있지 않다니, 오히려 잘된 것 같구만. 이개가 신세를 많이 졌다고. 괜찮다면, 언제 개방의 분파에 방문해 주시게. 어디로 가든, 그곳에 내가 있을 것이니. 그리하면, 내 극진이 대접해 줌세."
라마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딱히 대접받을 만한 일을 한 게 없는데..."
라마의 물음에 홍두평이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내 보기엔 충분히 그럴만했네. 이개와 인연이 있었을 때, 단지 모용가의 여인만 구한 것이 아니라 들었네."
"아..."
"송이개를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는 것이네. 그리고 우리는 은혜를 갚기를 중히 여기지."
"예, 그럼 뭐.... 언제 한번 꼭 들리겠습니다."
"그래, 자네가 그 약속을 지키길 희망하겠네. 그리하면, 자네에게 아주 좋은 선물을 주지."
"무슨...."
"그건 그때 가서 알려주겠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관청 건물 쪽으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라마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이상한 사람일세."
라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하다가, 이내 그를 따라 다시 관청 건물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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