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7
상해서 초췌한 얼굴로 의식 없이 누워있는 연희의 진맥을 살펴보던 의원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뒤에 있는 세자와 수현을 향해 조심스럽게 몸을 숙이며 말했다.
"이제 그만 안정이 된 듯합니다."
의원의 말에 수현과 세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 써주어 고맙네."
"아니옵니다, 저하.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의원이 조심스럽게 예를 갖추어 자리에서 물러나자, 세자는 누워있는 연희의 곁으로 다가갔다.
많이 초췌해 보이는 연희를 보며, 세자는 속이 상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또다시 저들에게, 그토록 무력하게, 가까이 있는 여인을 잃을 뻔했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참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어리석었다."
갑작스러운 세자의 말에 뒤에 있던 수현이 묻는듯한 표정으로 세자를 쳐다보았다.
"저들은 저런 자들이다. 서슴없이 패악한 짓을 일삼고, 내 앞에서 나를 능멸하는 자들이다. 전하의 앞에서 권력을 앞세워 힘자랑을 하는 이들이다. 그런 자들 앞에서 이토록 가녀린 여인을 내 사람인 듯 대하였으니... 저들이 이렇게 나를 희롱하는 것이 아니더냐. 내가 어리석었다."
속상해하는 세자를 보며 수현이 안타까운 듯 말했다.
"저하... 어찌 그러십니까."
세자는 너무도 속상했다.
자기 때문에 이토록 모진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울분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또다시 잃을 뻔하였다. 어머니처럼... 그렇게 또다시, 아무것도 지켜주지 못할 뻔하였다. 내 이제는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단 하나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연희를 내려다보며 결심하듯 말했다.
"이 가녀린 여인을 지킬 것이다. 그녀가 가진 비밀로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 것이다. 그때까지 이 여인을.... 내 기필코... 지킬 것이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이야기하는 세자를 보며 수현 역시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자신의 잘못으로 세자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한것 같아, 송구한 마음에 고개를 제대도 들지못했다.
그날 저녁, 세자는 늦은 시간까지 연희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직접 물수건에 물을 묻혀 몸살을 앓는 듯 열이나고 땀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니, 보다 못한 수현이 자신이 나서서 하려는듯 세자를 몇 차례 만류해 보았지만, 세자는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지켜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려는 듯, 그렇게 밤늦도록 연희의 곁을 지켰다.
***
늦은 시간, 좌의정인 최준경이 서책을 보고 있을 때였다.
문밖의 기척 소리에 고개를 드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영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툴툴 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최준경은 뭔가 짚이는 바가 있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인영이 울상이 된 얼굴로 들어와 그의 앞에 앉았다.
"얘기는 들었다. 세자가 왔다갔다고."
인영은 원망스러운 얼굴로 최준경을 보며 말했다.
"저하께서... 저를 무시하시고, 그 신분도 모를 계집년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제가..."
인영은 끝내 울먹거리며 눈물을 흘렸고, 최준경은 못 본 척 외면한 체 책장을 넘겼다.
"언제는 세자마마께 시집보내달라 안달이더니... 그럼 이제 마음이 바뀐 것이냐?"
최준경의 물음에 인영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아직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닌 모양이구나."
최준경의 말에 인영이 분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저를 보던... 저하의 눈빛이... 정말... 잊히지가 않습니다."
비로소 최준경이 인영을 바라보았다.
"어떠하였는데 그러느냐?"
"마치... 철전지 원수를 보는 듯했습니다."
잠시 말없이 인영을 바라보던 최준경은 별일 아니라는 듯 짧은 한숨과 함께 다시 책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차라리 잘 되었다."
"예? 어째서요?"
"어차피 폐세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잊어버리거라."
최준경의 말에 인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폐... 세자요? 정말, 그러실 것입니까?"
최준경이 피식 웃더니, 인영을 보며 말했다.
"너를 철천지 원수 보듯 했다 하였느냐?"
"예."
"나는 그런 눈을 본지 오래되었느니라. 제 어미를 죽인 원흉으로 여기는 게지."
인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최준경을 바라봤다.
"예? 설마요. 그녀는..."
인영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최준경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에 인영은 하려던 말을 목안으로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입 밖으로 내지 말라 하였다. 네가 들은 것은 잊으라 하지 않았느냐?"
"소, 송구합니다."
인영이 멋쩍어 하자, 최준경이 한숨과 함께 표정을 풀며 말했다.
"너도 대충은 알고 있겠지만, 세자는 자기 어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특별히 입단속을 시킨 것이니, 너도 조심해야 한다. 세자가 알아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 폐세자 될 때까지는 함구해야 할 것이야."
"예, 그리하겠습니다."
인영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하자, 그녀의 뒤에 대고 최준경이 다시 말했다.
"세자로는 안영군이 훨씬 나은 듯 하니, 너도 기왕 마음을 바꾸려거든 그쪽으로 생각해 보거라."
인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그리고 그녀는 서둘러 최준경의 방에서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긴장으로 살짝 떨리고 있었다.
"폐세자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알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이 그녀의 가슴속에 소용돌이쳤다.
"후..."
그녀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이른 아침부터 군사들을 이끌고 수현이 당도한 곳은, 일전에 연희가 잡혀왔었던 사교도들의 근거지였다.
이미 초토화되어, 남겨진 거라고는 그 당시의 흔적들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수현이 고개를 돌려 부관을 보며 말했다.
"인근 마을을 살펴보고, 혹시 이상한 것을 본 적은 없는지 물어보고 오너라."
"예, 부총관 나리."
수현의 명령에 부관이 몇몇의 수하들과 함께 마을로 향하자,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참 안팎을 세세히 살펴보며 수색하였으나 널브러져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바구니, 타다만 흔적 등등, 더 이상 뭔가 중요한 단서가 느껴지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문득, 수현은 모닥불이 탔던 흔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타다가 꺼진 듯한 모닥불 숮덩이들 사이로 보이는 짙은 갈색빛의 나무 막대기였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집어 드니, 위쪽으로는 불길이 붙어 타버린 자국이 있고, 그 아래로는 짙은 갈색 바탕의 막대기 위로,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주술 따위에 썼던 물건인 것인가?"
수현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나머지 탄 흔적을 뒤적거렸다.
타다만 종이 등 몇몇 가지가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대수로워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습격 이후에 잔당들이 돌아와 증좌가 될만한 것들을 급히 태웠으나, 다 타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이 자리를 떠난 것이리라.
수현은 혹시 참고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 나무 막대기를 허리춤에 꽃아 두었다.
그러고 나서도 혹시 놓친것이 있는지 한참을 더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더 이상 나오는 것이 없었다.
"그만 돌아가자."
수현이 큰소리로 외치니 수하들이 일제히 수현에게로 모여들었다.
수현은 수하들과 함께 마상에 올라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때마침 인근 마을에 조사 나갔던 부관과 수하들도 돌아오고 있었다.
"부총관 나리."
부관이 제일 먼저 다가와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인근에 두 개의 마을이 있어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사교도에 대해 뚜렷하게 아는 이는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부관이 말끝을 흐리니, 수현이 궁금한 듯 얼른 되물었다.
수현의 재촉에 부관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다만, 그들이 말하기를, 사교도보다 이곳 현감이 더 문제라고 합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현감이... 귀신이... 씌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말에 수현이 어이없다는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귀신?"
"예... 분명 그리 말하였습니다."
부관의 단호한 답변에 수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알아보러 온 것은 사교도에 대한 행적일 뿐, 이곳 현감은 관찰사의 몫이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와 귀신 들렸다는 말은, 왠지 마음 한편에 가볍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불안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 현감이 누구인가?"
"김문익이란 자이온데, 재작년에 이곳 현감으로 부임해 왔습니다. 전 병조참판 김상호 대감의 아들로, 별시에 붙어 현감으로 오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수현이 부관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김상호 대감이라... 그런 사람의 아들 치고는, 고작 이곳에서 현감이나 하고 있단 말인가. 하긴 그 양반 성격에 아들이라고 챙겨줄 리 만무하지. 알았다."
괜히 나서 긁어 부스럼이 될 수 있었다.
수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의 범위를 정확하게 하는 성격이었다.
"그만 돌아간다. 가자."
수현은 수하들을 이끌고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달리는 내내, 마음 한편이 불안했던 그는 어느 정도 가다가 한적한 곳에 이르러 말을 멈춰 세웠고, 그를 따르던 수하들도 일제히 멈춰 섰다.
수현은 멈춰 선 상태로 생각에 빠져들었고 , 그런 그에게 부관이 다가와 물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부총관 나리?"
수현은 잠시 더 말없이 상념에 빠져있다가, 이내 부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믿을만하고, 날쌘 녀석 하나 선별해 주겠는가?".
"어찌... 그러십니까?"
"내 마음이 영 찜찜하고 편치 않아 그러는 것이니, 날쌘 녀석 하나 뽑아서, 현감의 행적을 살펴보고 오게 하거라. 아무래도 뭔가가 더 있는것 같아... 마음에 걸리는구나."
"예, 그리하겠습니다."
부관이 누군가를 불러 명을 내리자, 그는 말을 돌려 왔던길로 다시 달려갔다.
"가자."
수현은 그가 달려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고, 수하들도 모두 그 뒤를 따랐다.
달려가는 수현 너머로, 붉게 물든 달이 구름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뒤에 있는 세자와 수현을 향해 조심스럽게 몸을 숙이며 말했다.
"이제 그만 안정이 된 듯합니다."
의원의 말에 수현과 세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 써주어 고맙네."
"아니옵니다, 저하.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의원이 조심스럽게 예를 갖추어 자리에서 물러나자, 세자는 누워있는 연희의 곁으로 다가갔다.
많이 초췌해 보이는 연희를 보며, 세자는 속이 상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또다시 저들에게, 그토록 무력하게, 가까이 있는 여인을 잃을 뻔했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참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어리석었다."
갑작스러운 세자의 말에 뒤에 있던 수현이 묻는듯한 표정으로 세자를 쳐다보았다.
"저들은 저런 자들이다. 서슴없이 패악한 짓을 일삼고, 내 앞에서 나를 능멸하는 자들이다. 전하의 앞에서 권력을 앞세워 힘자랑을 하는 이들이다. 그런 자들 앞에서 이토록 가녀린 여인을 내 사람인 듯 대하였으니... 저들이 이렇게 나를 희롱하는 것이 아니더냐. 내가 어리석었다."
속상해하는 세자를 보며 수현이 안타까운 듯 말했다.
"저하... 어찌 그러십니까."
세자는 너무도 속상했다.
자기 때문에 이토록 모진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울분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또다시 잃을 뻔하였다. 어머니처럼... 그렇게 또다시, 아무것도 지켜주지 못할 뻔하였다. 내 이제는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단 하나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연희를 내려다보며 결심하듯 말했다.
"이 가녀린 여인을 지킬 것이다. 그녀가 가진 비밀로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 것이다. 그때까지 이 여인을.... 내 기필코... 지킬 것이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이야기하는 세자를 보며 수현 역시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자신의 잘못으로 세자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한것 같아, 송구한 마음에 고개를 제대도 들지못했다.
그날 저녁, 세자는 늦은 시간까지 연희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직접 물수건에 물을 묻혀 몸살을 앓는 듯 열이나고 땀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니, 보다 못한 수현이 자신이 나서서 하려는듯 세자를 몇 차례 만류해 보았지만, 세자는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지켜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려는 듯, 그렇게 밤늦도록 연희의 곁을 지켰다.
***
늦은 시간, 좌의정인 최준경이 서책을 보고 있을 때였다.
문밖의 기척 소리에 고개를 드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영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툴툴 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최준경은 뭔가 짚이는 바가 있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인영이 울상이 된 얼굴로 들어와 그의 앞에 앉았다.
"얘기는 들었다. 세자가 왔다갔다고."
인영은 원망스러운 얼굴로 최준경을 보며 말했다.
"저하께서... 저를 무시하시고, 그 신분도 모를 계집년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제가..."
인영은 끝내 울먹거리며 눈물을 흘렸고, 최준경은 못 본 척 외면한 체 책장을 넘겼다.
"언제는 세자마마께 시집보내달라 안달이더니... 그럼 이제 마음이 바뀐 것이냐?"
최준경의 물음에 인영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아직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닌 모양이구나."
최준경의 말에 인영이 분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저를 보던... 저하의 눈빛이... 정말... 잊히지가 않습니다."
비로소 최준경이 인영을 바라보았다.
"어떠하였는데 그러느냐?"
"마치... 철전지 원수를 보는 듯했습니다."
잠시 말없이 인영을 바라보던 최준경은 별일 아니라는 듯 짧은 한숨과 함께 다시 책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차라리 잘 되었다."
"예? 어째서요?"
"어차피 폐세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잊어버리거라."
최준경의 말에 인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폐... 세자요? 정말, 그러실 것입니까?"
최준경이 피식 웃더니, 인영을 보며 말했다.
"너를 철천지 원수 보듯 했다 하였느냐?"
"예."
"나는 그런 눈을 본지 오래되었느니라. 제 어미를 죽인 원흉으로 여기는 게지."
인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최준경을 바라봤다.
"예? 설마요. 그녀는..."
인영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최준경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에 인영은 하려던 말을 목안으로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입 밖으로 내지 말라 하였다. 네가 들은 것은 잊으라 하지 않았느냐?"
"소, 송구합니다."
인영이 멋쩍어 하자, 최준경이 한숨과 함께 표정을 풀며 말했다.
"너도 대충은 알고 있겠지만, 세자는 자기 어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특별히 입단속을 시킨 것이니, 너도 조심해야 한다. 세자가 알아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 폐세자 될 때까지는 함구해야 할 것이야."
"예, 그리하겠습니다."
인영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하자, 그녀의 뒤에 대고 최준경이 다시 말했다.
"세자로는 안영군이 훨씬 나은 듯 하니, 너도 기왕 마음을 바꾸려거든 그쪽으로 생각해 보거라."
인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그리고 그녀는 서둘러 최준경의 방에서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긴장으로 살짝 떨리고 있었다.
"폐세자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알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이 그녀의 가슴속에 소용돌이쳤다.
"후..."
그녀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이른 아침부터 군사들을 이끌고 수현이 당도한 곳은, 일전에 연희가 잡혀왔었던 사교도들의 근거지였다.
이미 초토화되어, 남겨진 거라고는 그 당시의 흔적들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수현이 고개를 돌려 부관을 보며 말했다.
"인근 마을을 살펴보고, 혹시 이상한 것을 본 적은 없는지 물어보고 오너라."
"예, 부총관 나리."
수현의 명령에 부관이 몇몇의 수하들과 함께 마을로 향하자,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참 안팎을 세세히 살펴보며 수색하였으나 널브러져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바구니, 타다만 흔적 등등, 더 이상 뭔가 중요한 단서가 느껴지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문득, 수현은 모닥불이 탔던 흔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타다가 꺼진 듯한 모닥불 숮덩이들 사이로 보이는 짙은 갈색빛의 나무 막대기였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집어 드니, 위쪽으로는 불길이 붙어 타버린 자국이 있고, 그 아래로는 짙은 갈색 바탕의 막대기 위로,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주술 따위에 썼던 물건인 것인가?"
수현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나머지 탄 흔적을 뒤적거렸다.
타다만 종이 등 몇몇 가지가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대수로워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습격 이후에 잔당들이 돌아와 증좌가 될만한 것들을 급히 태웠으나, 다 타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이 자리를 떠난 것이리라.
수현은 혹시 참고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 나무 막대기를 허리춤에 꽃아 두었다.
그러고 나서도 혹시 놓친것이 있는지 한참을 더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더 이상 나오는 것이 없었다.
"그만 돌아가자."
수현이 큰소리로 외치니 수하들이 일제히 수현에게로 모여들었다.
수현은 수하들과 함께 마상에 올라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때마침 인근 마을에 조사 나갔던 부관과 수하들도 돌아오고 있었다.
"부총관 나리."
부관이 제일 먼저 다가와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인근에 두 개의 마을이 있어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사교도에 대해 뚜렷하게 아는 이는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부관이 말끝을 흐리니, 수현이 궁금한 듯 얼른 되물었다.
수현의 재촉에 부관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다만, 그들이 말하기를, 사교도보다 이곳 현감이 더 문제라고 합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현감이... 귀신이... 씌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말에 수현이 어이없다는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귀신?"
"예... 분명 그리 말하였습니다."
부관의 단호한 답변에 수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알아보러 온 것은 사교도에 대한 행적일 뿐, 이곳 현감은 관찰사의 몫이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와 귀신 들렸다는 말은, 왠지 마음 한편에 가볍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불안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 현감이 누구인가?"
"김문익이란 자이온데, 재작년에 이곳 현감으로 부임해 왔습니다. 전 병조참판 김상호 대감의 아들로, 별시에 붙어 현감으로 오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수현이 부관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김상호 대감이라... 그런 사람의 아들 치고는, 고작 이곳에서 현감이나 하고 있단 말인가. 하긴 그 양반 성격에 아들이라고 챙겨줄 리 만무하지. 알았다."
괜히 나서 긁어 부스럼이 될 수 있었다.
수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의 범위를 정확하게 하는 성격이었다.
"그만 돌아간다. 가자."
수현은 수하들을 이끌고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달리는 내내, 마음 한편이 불안했던 그는 어느 정도 가다가 한적한 곳에 이르러 말을 멈춰 세웠고, 그를 따르던 수하들도 일제히 멈춰 섰다.
수현은 멈춰 선 상태로 생각에 빠져들었고 , 그런 그에게 부관이 다가와 물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부총관 나리?"
수현은 잠시 더 말없이 상념에 빠져있다가, 이내 부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믿을만하고, 날쌘 녀석 하나 선별해 주겠는가?".
"어찌... 그러십니까?"
"내 마음이 영 찜찜하고 편치 않아 그러는 것이니, 날쌘 녀석 하나 뽑아서, 현감의 행적을 살펴보고 오게 하거라. 아무래도 뭔가가 더 있는것 같아... 마음에 걸리는구나."
"예, 그리하겠습니다."
부관이 누군가를 불러 명을 내리자, 그는 말을 돌려 왔던길로 다시 달려갔다.
"가자."
수현은 그가 달려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고, 수하들도 모두 그 뒤를 따랐다.
달려가는 수현 너머로, 붉게 물든 달이 구름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