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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마음

author
·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1.92분

15화 - #1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집안에는 제대로 된 집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곳저곳 꼼꼼히 살펴보아도, 딱히 집히는 것 하나 보이지 않았고, 사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이제 그만 마무리하고 나가보려 발길을 돌렸을 때, 때마침 들어서던 흰소복의 한 중년 여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수현을 보자 놀라 잠시 멈칫하였다가, 이내 수현의 관복을 보고 알았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관아에서 오셨소?"

여인의 질문에 수현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곤 수긍하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 예...."

그러나 여인은 그런 것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의욕 없는 표정으로 터벅 터벌 걸어들어왔다.

"딱히 뒤질 것도 없을 것인데... 뭐 찾는 거라도 있는 거요?"

"아닙니다. 그저 좀 살펴보았을 뿐입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으니... 찾으나 마나 일거요."

"예... 그럼..."

수현이 그만 돌아가려 몸을 돌려 대문을 향해 몇 걸음 체 옮기지 못했을때, 중년 여인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문익이는...."

수현은 발걸음을 멈추어 돌아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결국 죽겠지요?"

중년 여인은 반쯤 넋을 잃은 표정으로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수현이 차마 거짓말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부정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여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사형을 면키 어려울 것이라 하더이다. 그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죗값을 치루어야 겠지요."

수현은 가만히 서서 그저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여인도 답을 바란것은 아니였다.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만들어 죽였다지요. 그렇게 제 아내도 죽이고, 제 형도 죽인 놈이오, 그놈이... 집안을 풍지박살 내놓는 패륜아일 줄 누가 알았겠소?"

퍼석퍼석한 지푸라기 인형처럼 힘없이 마루기둥에 기대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독백하듯 이야기하던 중년 여인의 눈에 고요히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려서는 겁이 많아 남 앞에 나서질 못하고, 그저 제 어미만 끼고돌던 녀석이었는데.... 현감이 되었다고 동네잔치를 열어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찌하다 그리 된 것일꼬... 어쩌다가..."

이어 여인이 텅비어버린 눈으로 고개를 들어 수현을 바라보며 흐느끼며 애원했다.

"내가... 내가 죄인이오. 자식을 그리 키웠으니... 내가 죄인이 아니겠소? 나도 같이 죽여서, 그 자식 곁에 묻어 주시구랴. 못난 자식이라도, 죽어서나마 내가 품어줘야 하지 않겠소? 천벌을 받을 때 받더라도, 내 한번 토닥여나 줄 수 있게... 그리 해주면 안 되겠소?"

수현은 여인의 비통함에 가슴이 버석거렸지만, 들어줄 수 없는 안타까움에 그저 아무런 대답도 못한 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등 뒤 너머로 여인의 애달픈 통곡소리가 들려왔지만, 수현은 애써 외면하며 주먹을 꽉쥔 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



여느 때처럼, 화단에 물을 주고 있던 연희는 문득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져, 물동이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처음에는 당연히 세자일거라는 생각에 치솟는 기쁨을 애써 감추어 웃으며 돌아보았다가, 막상 다른 사람임을 알고 놀라 얼른 허둥대듯 고개를 숙였다.

"네가.. 연희라고 하였느냐?"

그녀는 일전에 연회에서 보았던 세자의 동생 혜령 옹주였다.

"예, 마마..."

연희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많이 다쳤다 들었는데, 거의 나은 듯 하구나."

"예, 마마. 세자마마 덕분이옵니다."

표정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혜령옹주에게서 왕족다운 기품이 느껴졌다.

"그래. 헌데..."

잠시 무언가 물어보길 망설이는듯 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어찌 아직도 궁궐에 있는 것이냐?"

혜령 옹주의 말에 순간 연희의 표정은 난처함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 그것이... 아직 온전히 나은 것이 아니라 하여... 조금 더.... 있으라... 명하셨습니다."

혜령 옹주는 수긍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몸이 다 낫지 않았다 하니,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예, 마마."

혜령 옹주가 돌아서자, 연희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그녀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허나, 무슨연유인지 혜령 옹주는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는가 싶더니, 이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연희를 돌아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네게 한 가지만 말해주고 싶구나."

"예, 말씀하시옵소서."

혜령 옹주는 짧은 한숨을 내쉰 뒤, 결심한듯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혹, 네가 세자마마 곁에 머물고 싶어 하는것이라면...., 물론 그렇지 않을수도 있고, 아직 몸이 낫지 않아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라도, 만약에 네가 그러한 마음을 품고있다면, 그러지 말거라."

연희는 혜령 옹주의 말에 떨리는 눈빛을 숨기려 고개를 숙인 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너는 세자마마의 보호아래 편하고 좋을지 모르나, 너를 거두어들인 세자마마는 너로 인해 수많은 시련을 겪어야 할 것이다. 내 듣자 하니, 이미 너로 인해 아바마마와도 소원함이 더해졌다 들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앞으로도 네가 여기 머무는 동안, 세자마마는 네가 알지 못할 많은 고초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혜령 옹주의 말을 들으며, 연희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네가 정녕 세자마마께 고마워하고, 세자마마를 위한다면... 하루빨리 나아서 이 궁을 나가거라. 그리고 되도록이면 세자마마 곁에서 멀어지거라. 네가 가까이 있을수록, 너는 적들의 표적이 될것이고 그들은 너를 이용해 세자마마를 흔들 것이다."

말을 마친 혜령 옹주는 긴 한숨을 짓고는 돌아가려 문을 향해 고요한 시선을 던졌다.

연희를 등진 체 그녀는 마지막 한마디를 보태었다.

"너마저 세자마마의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마."

혜령 옹주는 그 말을 남기고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연희는 서러움을 참으려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숙인체 망연자실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혜령 옹주와 그녀를 따르는 궁녀들이 모두 떠나가고, 처소에 홀로 남은 연희는 그대로 한동안 목석처럼 서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방울 하나가 뺨을 타고 소리없이 흘러내렸고, 속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저 곁에 있고 싶었을 뿐이는데...

그게 짐이 되는 것이었을 줄이야.

연희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며, 세자를 위해서 자신이 이 궁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



고심에 빠진 세자는 눈 앞에 책을 펼쳐 두고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대체 좌상대감은 어떻게 그가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낸 것일까.

어떻게 김문익으로 하여금 자신의 부친을 배신하게 만든 것일까. 그것도 본인 스스로의 죽음까지 각오하면서...

자신의 부인과 형제까지 자기 손으로 죽인 위인이니, 제정신이 아니라 할지라도, 시기와 내용이 좌상대감이 원하는 쪽으로 정확하게 흘러간 꼴이 되어버렸다.

그 모든 문제들이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해져 왔다.

세자는 돌연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책장을 덮었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펼쳐 놓은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세자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면 이 갑갑한 머리속이 좀 나아질까 싶은 생각에, 문득 연희가 떠올랐다.

세자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연희와 만나 그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지금의 시름이 조금 잊혀지지않을까 싶어서였다.

연희를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처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연희를 만나 할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리자, 어느새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드리워졌다.

산책을 하기엔 다소 늦은 시간임에도, 처소 앞 마당에 연희가 나와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직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별들을 찾고 있는 듯했다.

"별구경을 하러 나왔느냐?"

세자가 다가서며 묻는 말에, 생각에 빠져있던 연희는 화들짝 놀라 가슴에 손을 얹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세자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저하."

세자는 놀라게 해서 미안하는듯 웃으며 연희 곁에 섰다.

"나도 밤하늘이나 볼까 싶구나."

어두워지는 하늘로, 숨어있던 별들이 하나둘씩 자신의 빛을 뿜어내며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고개만 들면 볼 수 있는 것일진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구나."

세자의 말에, 연희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누군가 죽으면, 하늘의 별이 된다 들었습니다."

연희의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리고 별이 떨어지면, 곧 큰 위인이 죽는다 하지."

곁에 서있는 잘생긴 세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연희는 어쩐지 추웠던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만 같았다.

"강물에 비친 별을 본 적 있으십니까?"

연희의 물음에 세자가 살짝 그녀를 돌아보며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강물에 비친 별?"

"예, 은하(銀河)가 드리울 때, 별이 물결에 드리워 비치면, 마치 은하가 흐르는 듯 아름답습니다."

연희의 말에 세자가 웃음을 지었다.

"우물에 비친 달을 본 적은 있구나. 비록 우물속이지만, 그안에 비친 달은 마치 진짜처럼 환희 빛났다."

마치 지난날을 회상하듯 이야기하는 세자를 연희는 고즈넉이 바라보았다.

준수한 용모에 자상하게 웃고 있는 얼굴 한켠에는 아련한 슬픔이 깃들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시름에 잠겨 있는듯하고, 어딘지 모르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듯도 하였다.

'나마저 짐이 되지 말자.'

연희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가슴 앞에 두손을 올려, 그 어떤 결심을 돕기라도 하는 듯, 있는 힘껏 꼭 쥐었다.

'말해야 한다.'

마음은 아프지만,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알고 있었다.

그런 연희의 마음을 알길 없는 세자는 그저 연희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졌다.

어머니가 살아계실때 느꼈던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포근함과 편안한 감정을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았다.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답답했던 가슴속이 점차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하..."

문득 연희의 부름에, 세자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망설이고 있는 연희의 눈이 보였다.

반짝 거리며 깊이를 알 수 없는 묘한 눈동자 너머로, 어쩐지 아득한 슬픔이 느껴졌다.

"이제... 몸이 다 나은 듯 하여, 이만 퇴궐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연희의 말을 듣는 순간, 세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당황한 기색을 미쳐 감추지 못한 체, 연희에게 되물었다.

"그래? 아직은... 좀 더 낫기를...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연희는 애써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하의 보살핌 덕분에 이제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러니 그만 나가봐야지요."

세자는 아쉬움에 조금 더 붙잡아 곁에 두고싶었지만, 그녀의 뜻이 그렇다면 마다할 명분도 없었다.

"그래. 그래...."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지만, 딱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이제 나가 자신의 곁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서운하고 또 왠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들뿐이었다.

시원해졌던 가슴이 다시 먹먹함으로 물들었다.

세자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알았다. 내 금호에게 이야기해 두마. 그럼 이만 쉬거라."

"예, 저하."

돌아서서 다시 동궁전으로 향하는 세자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서는 세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연희 역시 마음이 무거웠다.

분명 해야할 말을 했건만, 왠지 뭔가 세자에게 큰 잘못은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 스스로에게 위안삼으며, 그렇게 떠나가는 세자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서 있었다.

세자의 모습이 어둠속으로 점차 사라져 갔고, 한동안 그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연희를 위로하듯 밤하늘의 음울한 달빛이 그녀의 주위에서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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