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yTokTok v0.1 beta
챕터 배너

드러나는 진실

author
·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3.33분

41화 - #3


연희는 밤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궁궐 인근에 당도했다.

괴로움에 차마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아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을 겨우 옮기고 있었다.

머릿속이 난장판처럼 헝클어져 버려 도무지 무슨 생각을 좀처럼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기운없이 땅만바라보며 걷고 있는 그녀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연희는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선 이를 보았다.

그녀 못지않게 작고 왜소한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형형한 눈으로 연희를 노려보는 그녀는, 다름 아닌 소연이었다.

소연은 마치 원수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연희를 쏘아보았다.

"왜....?"

연희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소연이 분한듯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요망한 것.... 너 따위가 감히 세자마마의 곁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냐?"

연희는 순간, 가슴이 칼에 베인 듯 아파왔다.

그렇게 울었건만, 또다시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저따위는 어떤 것인가요? 감히 세자마마의 곁에 머문 저는 누구입니까?"

마치 하소연하듯 묻는 연희를 보며, 소연이 품 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닥쳐라! 모른 척 발뺌한다고 내 속을 것 같으냐? 요망한 것이 사람을 속이려 들었으니... 내 너를 응징하여, 스승님의 한을 풀어줄 것이다."

연희는 소연의 칼을 보면서도 겁이 나지 않았다.

두려움보다 더 큰 슬픔이, 이미 그녀를 휘감고 있었기에, 죽음조차 그녀에게 무의미할 따름이었다.

"그 칼로... 저를 찌르면... 저는 어찌 됩니까?"

"이 칼은 파사신검이라는 신물이다. 이 칼로 너를 찌르면, 너는 즉각 소멸될 것이다."

연희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이 몸의 주인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연희의 물음에 소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몸은... 칼에 찔렸으니, 죽는 것입니까?"

소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생각하는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다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알 수 없다. 아직 영혼이 남아있는 것인지... 이미 소멸하여 사라졌는지... 그러나... 너는 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감히 사람의 몸에 빙의하여 그 사람의 행세를 하였으니... 천벌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연희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연희의 흐느낌에 소연은 가소롭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제가.... 제가 그런 것입니까? 제가... 제가 사람 행세를 하였습니까? 제가... 전... 사람이 아닌 것입니까?"

울고 있는 연희를 보며 점차 소연은 번민에 휩싸였다. 세자마마의 곁에 서 있는 연희를 처음 보았을때 사악한 것이 저하께 농간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면한 연희의 분위기나 느낌은 다르다고 말하고 있었다. 소연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연희를 가늠하고자 눈을 가늘게뜨며 뚫어지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찌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맞는것일까.....

확신이 없자 칼을 치켜들고 있는 소연의 손에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이대로 연희를 찔러 그녀를 소멸시킨다는 것이, 정녕 옳은것인지 뭔가 찜찜함이 느껴졌다.

"뭐하는 짓이냐?"

난데없이 누군가 끼어들어 소연의 손에 들려있던 칼을 쳐냈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손에 통증을 느낀 소연은 칼을 놓쳤고, 파사신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소연이 아픈 손을 잡고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수현이 한 손에 칼을 든 체, 놀란 표정으로 연희 앞을 가로막고 서서 소연을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연아?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냐?"

수현의 물음에, 소연은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나.... 리..."

"소연아! 정신 차리거라. 무슨 일이냐?"

소연은 다시금 고뇌에 휩싸였다.

이 일을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무슨 일이냐?"

뒤에서 나타난 세자를 보며 소연은 공손히 인사를 하였고, 세자는 그녀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눈물범벅이 된 연희를 보고는 놀라 급히 다가갔다.

"연희야? 이 무슨 일이냐?"

세자는 연희의 표정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저하...."

연희는 차마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체 그저 눈물만 흘렸다.

"왜 그러느냐? 어찌 이러는 것이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재차 걱정하는 세자의 자상한 목소리 , 근심어린 표정, 부드러운 손길, 그 무엇 하나 놓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연희는 이 모든것을 잃게 될거라는 두려움에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자는 초조해보이는 연희를 조심스럽게 안아주며 말했다.

"이제 괜찮다. 괜찮아. 내가 왔으니, 괜찮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연희는 세자의 달래는듯한 다독임에 더욱더 눈물이 멈추질 못하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다정한 세자와 연희의 모습에 소연은 심한 갈등에 휩싸였다.

과연 자신이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이 모든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인지...

그 사이, 수현은 바닥에 떨어진 파사신검을 집어 들었다.

주술에 문외한이라고는 하나, 무공을 연마한 수현은 대번에 그 칼이 보통 칼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소연을 바라보니, 수현의 강렬한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체 소연은 넋을 잃고 세자와 연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밖으로 나와 자신의 옷차림을 살피는 최준경 앞으로 천태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천태호를 본 최준경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고, 천태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최준경을 쳐다보았다.

"내 말은 잘 기억하고 있겠지?"

천태호의 물음에, 최준경이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율제님. 한동안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만 있도록 하겠습니다."

천태호가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옆에 서 있는 주동환을 가리켰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이 친구에게 얘기해. 어쨌든 명색이 좌상의 수족 같은 존재로 알고 있으니까."

"예, 율제님."

이어 주동환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집으로 데려다줘. 티 나지 않게. 알지?"

천태호의 말에 주동환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예."

이어 주동환이 먼저 앞서 걸어가자, 최준경이 천태호에게 다시 공손한 인사를 해보인 뒤, 주동환을 따라 걸었다.

천태호는 그런 최준경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들이 눈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을때까지 그렇게 웃으며 서있었다.

앞서 걸어가며 주동환은 눈살을 찌푸린 체 번민에 휩싸였다.

'세자의 몸을 빼앗겠다.... 그래서 갑자기 세자의 세를 키워주려 했구나.'

하지만 그럼에도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주동환이 아는 범주 내에서, 천태호가 쓰는 주술은 크게 두 가지 였다.

하나는 착주신술(錯炷神術)로, 그 의식을 거의 잃어버린 지박령 따위를 제압하여 특정인에게 특정한 생각을 심어주는 술수이다.

그는 이 술법을 이용해 병판과 이판 등의 생각을 자신이 의도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또 다른 하나는 기생령의 술수였다.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 또는 구천을 떠도는 망령을 산 사람의 몸에 장시간 빙의시키는 술법이었다.

어찌 되었든 두 술법 모두 죽은 사람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고,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은 언제나 배제되는 술법이었다.

헌데 지금 천태호는 세자의 몸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주동환이 아는 술법대로라면, 그 방법을 쓰기 위해서는 천태호 본인이 죽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자초할 천태호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왔었다.

'새로운 술법을 만들어낸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천태호는 주술에 관한한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원체 겁이 많은 성격임을 잘 알고 있기에, 확신이 없는 한 섣불리 자신의 목숨을 걸고 모험을 행하지 않을 것임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죽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옮기는 술수를 개발해 냈다는 것이다.

그간 무수히 많은 주술적 실험을 실행해 왔다는 것을 알고있다. 아마도 그가 답을 찾은 것이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덧 좌상의 집앞에 도착했다. 주동환이 말에서 내려 최준경을 쳐다보자, 최준경은 초헌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흠흠..."

최준경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하인들이 열어주는 대문안으로 발을 막 내딛으려는 찰나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흠칫 멈춰섰다.

"아버지"

최준경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영이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어딜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인영을 바라보는 최준경의 눈빛이 이전과는 달랐다.

"그래... 볼일이 있어 나갔다 왔다."

웃고 있으나 자상하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음험해 보이는 웃음과, 쳐다보는 눈빛조차도 음흉하기 이를 데 없어, 인영은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섰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인영이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최준경은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다. 내 몸이 좀 좋지않아 그런 것이니 신경쓸것 없다, 당분간 쉴 것이다."

"예..."

인영은 불안한 표정으로 서둘러 돌아섰다.

걸어가는 인영의 뒷모습을 음흉한 눈길로 바라보는 최준경에게 주동환이 바짝 다가서서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쓸데없는 생각이랑 말거라. 네놈이 허튼 짓거리를 하게 되면, 내가 먼저 네놈을 벨 것이다."

최준경이 고개를 돌려 주동환을 바라보자, 그가 그야말로 범같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최준경은 주눅이 들어 겁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그리고는 서둘러 안채를 향해 걸었고, 주동환은 안채 앞에 이르러 더 이상 따라가지 않았다.



***



발밑으로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꿈?'

소연은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러나, 예사꿈이 아니라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쭈뼛거렸고, 안개너머 저 앞에 보이는 자그마한 정자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정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중년 여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그 뒷모습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승님!"

소연이 부르며 달려가니, 정자에 앉아있던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환한 미소로 소연을 바라보는 그녀는, 소연이 예상한 백무였다.

"왔구나."

소연은 달려가 백무를 끌어안았다.

"스승님.... 스승님..."

소연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백무를 부르며 서럽게 울자, 백무가 그녀의 등을 살며시 다독거리며 한참을 안아주었다.

"뭘 그리 우누? 때가 되어 간 것뿐인데..."

"스승니임~"

칭얼거리듯 백무를 부른 소연은 눈물을 닦아내며 백무 품에서 빠져나와 그녀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어찌 그렇게 말도 없이 가셨습니까?"

백무는 자애로운 미소를 띤 체, 사랑이 가득 담긴 어머니의 눈으로 소연을 바라보았다.

"내 다 편지로 남겨 두었구만, 무슨 말도 없이 갔다고 그러니?"

"그래도... 너무 속상합니다. 그리 아프게 가실 줄 알았으면...."

"알았으면? 괜히 네가 끼어들었다가 너까지 화를 당하지. 다 내 운명이고 팔자였다. 울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소연은 여전히 속상한 표정으로 눈물을 훔쳤다.

"듣거라. 네게 부탁할 일이 있다."

"네? 어떤...."

백무가 소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했다.

"신검을... 그 연희라는 아이에게 주거라."

백무의 말에 소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계집은 악귀예요."

백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아이는 악귀가 아니다. 그저 그런 운명을 타고난 것뿐이다."

"운명이요? 다른 사람 몸에 들어가 그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 어찌 운명입니까?"

"아직은 네가 다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는 분명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나를 믿고, 그 신검을 그 아이에게 건네거라."

소연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그 칼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칼 아닙니까?"

백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칼은 단지 그 정도가 아니다. 그 칼로 주술이 걸린 이를 찌르면, 네가 알고 있는 결과를 얻을 것이다. 연희를 찌르면, 연희는 소멸되고, 그 몸의 원 주인이 깨어나겠지. 허나 그뿐이다. 하지만, 그 칼로 주술을 건 주술사를 찌르면, 그 주술사가 건 모든 주술이 풀릴 것이다."

소연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럼 더더욱 줘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 칼로... 주술사의 주술이 풀린다는 건, 연희 자신도 소멸된다는 걸 의미하는데, 그 계집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백무는 온화하게 웃으며 다시금 소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믿고 맡기거라. 오직 그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어째서? 왜 저는 못하실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너이기에 못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나의 제자이고, 너의 기운을 천태호는 이미 느끼고 있을 것이다. 너를 경계할 것이야. 그리 되면 그에게 닿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허나, 그 아이에게는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그 아이는 결코 자신을 찌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의심 없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오직 그 아이만이 그 기회를 가질 것이다."

소연은 속상하지만, 스승인 백무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믿거라. 그리고 나 역시 너를 믿는다."

백무는 웃으며 손을들어 소연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안쓰러운듯 허나 사랑을 담아 바라보았다.

"스승님...."

그리고 소연의 자신의 자아가 아득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현재 조회: 2
댓글
0

아직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저작권 보호: 무단전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