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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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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1.37분

33화 - #1


비가 온다.

제법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처마 밑으로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이내 바닥으로 내던져지며 산산조각이 나고 있다.

내리는 비를 처마 밑에서 바라보며 서 있던 연희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사이로 보이는 푸른빛의 하늘을 보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금방 그치겠네."

그때 등 뒤에서 뜻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어찌 아느냐?"

세자의 목소리였다.

놀란 연희가 얼른 돌아서서 공손히 인사하니, 세자가 다시 물었다.

"비가 금방 그칠 것이란 걸 어찌 아느냐 물었다."

"예... 그것이... 파란 하늘이 듬성듬성 보이기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세자가 연희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희는 세자가 자기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몸을 숙이니, 어찌할 바를 모른 체 얼굴만 붉혔다.

"과연... 파란 하늘이 보이는구나."

세자가 몸을 바로 하고 연희의 얼굴을 바라보니, 두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디 아픈 것이냐?"

"예?"

"얼굴에 홍조가 있는 것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세자가 손을 들어 연희의 이마를 짚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세자의 손이 와 닿으니, 심장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뛰는것이 겉으로 소리가 날까 싶어 숨을 죽였다.

"열이 좀 있는 것 같구나. 밤새 잠을 잘못 잔 것이냐? 고뿔에 걸린것이 아니냐?"

"아니옵니다. 괜찮사옵니다."

"괜찮기는... 그러고 보니 눈도 충혈된 것 같고..."

세자가 고개를 살짝 숙여 연희 코앞으로 얼굴을 드리밀고 염려스럽게 쳐다보았다.

바로 앞에 세자의 얼굴이 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 바로 눈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맑은 눈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속내가 모두 드러나 보이는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저... 저하..."

연희가 당황하여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뒤는 벽이어서 더 물러날 수가 없었다.

"어찌 그러느냐?"

태연히 묻는 세자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연희는 고개를 돌렸다.

"너, 너무 가깝사옵니다."

"내가 이리 가까이 있는 것이 불편한 것이냐?"

세자는 몸을 바로 하지 않고, 여전히 얼굴을 가까이한 체 물었다.

"부, 불편한 것은 아니오나..."

문득, 뺨에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세자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저... 저하..."

세자가 입을 열어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어딘가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세자는 얼른 자세를 바로하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들었다.

잠시 후 내관을 비롯한 궁녀들이 헐레벌떡 달려와 세자의 뒤에 섰다.

"거 참... 천천히 오라니까."

세자가 투덜거리듯 말하자, 뒤에 서 숨을 고르고 있던 내관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하... 어찌 저희를 두고 자꾸 이렇게 홀로 가시옵니까?"

"아니 그냥, 생각할 것이 있어 혼자 좀 걷고 싶었을 뿐이다."

이어 연희를 보며 싱겁게 웃어 보였다.

"홀로 걷고 싶었는데, 때마침 여기 있지 않느냐? 거 천천히 오라니까..."

"저하..."

난처해하는 내관을 보며 연희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괜히 발그레해진 얼굴을 들킬까 봐 겁이 났다.

마치 못된 장난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심장이 쿵쾅 거리고 긴장되었다.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좌포청에 가보기 어려울 것 같으니, 푹 쉬어 두거라."

세자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관과 궁녀들은 서둘러 세자의 뒤를 따랐고, 연희는 멍하니 서서 걸어가는 세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돌연 풋하고 웃음이 나왔다.

문득 기분이 좋아졌다.

가슴 안에 따스함이 한가득 자리 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청아한 웃음소리가 궁궐내로 조용히 퍼졌다.

비는 시원하게 내리고 있는데, 가슴은 따뜻하니 어딘가 모르게 묘하게 느껴졌다.



***



천태호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이미 와있던 좌의정 최준경이 상석에 앉아 있고, 그 옆으로 우포청 포도대장인 박지언과 주동환이 앉아 있었다.

천태호는 굽실거리듯 인사를 하였고, 최준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앉거라."

"예, 대감마님."

천태호는 눈치를 살피며 끝자리에 앉았고, 주동환은 그런 그를 눈치껏 살피며 모른 척했다.

"근자 들어 사교도 무리가 횡행하고 있음을 알고 있느냐?"

최준경의 물음에 천태호가 고개를 바짝 숙였다.

"예, 대감마님."

"거기에 네놈도 개입을 한 것이냐?"

천태호는 잠시 당황스러운 얼굴을 보이다가, 이내 과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이고, 대감마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소인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최준경은 그런 천태호를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됐다. 적당한 이들을 물색해서 알아보거라."

"예?"

천태호가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묻자, 최준경이 옆에 앉은 박지언을 보며 말했다.

"여기 이 사람이 우포청의 포도대장이다. 조만간 사교도 무리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 것이다. 그때 수많은 사교도 무리들이 잡혀 들어, 일망타진될 것이니, 네가 그 밑판을 적당히 만들어 보도록 하거라."

천태호는 이해한 듯 고개를 바짝 숙이며 대답했다.

"예, 대감마님."

최준경이 박지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천방주가 사람들을 제법 모으면, 때를 맞춰 우포청 병사들로 제압하세요. 그 공을 크게 치하하도록, 내 자리를 만들어 볼 테니까."

박지언은 이해되지 않는 다는듯한 눈빛을 보였다.

"좌상대감.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교도에 대한 조사는 저희 우포청에서도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냥 이 사람 말을 따르세요. 언제까지 그런 곳에 계실 겝니까? 이제 그만 빈청에 들어와 국정을 논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빈청이란 말에 박지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이 사람은 그럴만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좌상대감."

좌의정이 빙긋 웃어 보였다.

"세상에 날 때부터 그런 사람이 정해져 있겠습니까?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지요."

이어 주동환을 보며 말했다.

"자네가 천방주를 도와,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게 하고. 또... 혹시라도, 천방주가 허튼짓을 하면..."

주동환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예, 허튼짓을 하면, 단칼에 목을 베겠습니다."

단호하게 답한 주동환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천태호를 응시하자, 천태호는 얼른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밖으로 나온 천태호는 주동환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후, 주동환이 나오자 분한 표정으로 씩씩 거리며 말했다.

"도대체 저놈은 날 뭘로 아는 것이냐?"

천태호의 말에 주동환은, 안에서와는 사뭇 다른 표정과 태도로, 천태호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뭐겠습니까? 양반들 눈에는 그저 상것으로 보이겠지요."

천태호가 그런 주동환을 노려보며 말했다.

"왜? 네놈 눈에도 내가 상것으로 밖에 안보이더냐?"

"그게 싫으시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좌상을 죽여 없애버릴까요?"

무표정하게 되묻는 주동환의 물음에, 천태호는 한참을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며 분한 듯 씩씩 거렸다.

"젠장! 내 저 늙은 여우 놈을 반드시 내 눈앞에 무릎 꿇릴 것이다."

"좌상이 뭔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박지언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그리 좋은 일이 아닙니다."

주동환의 말에 천태호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알고 있다. 다른 놈도 아니고, 박지언이라니... 골치 아프게 되었어."

"좌상은 병판의 자리에 저 박지언을 앉힐 요량인가 봅니다."

그러자 천태호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딜 감히... 어떻게 만들어 놓은 꼭두각시인데, 지놈 맘대로 되게 놔둘까."

"지금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입니다. 마음먹고 움직이면,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막아야지. 저놈에게 더 이상 권력을 내어줘서는 안 돼. 그래서는 내 계획에 차질이 생겨."

주동환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방주님의 계획이 뭡니까? 좌상대감을 권력의 정점에 놓고 뒤에서 그를 조종하겠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흥... 생각이 바뀌었다."

주동환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이제 이딴 천한 신분에 속박되지 않겠다. 주술도 어느 정도 완성되어 간다. 내가 궁궐로 들어가,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천태호의 말에 주동환의 얼굴이 아연실색해졌다.

"서... 설마... 역모를 일으키겠단 말씀이십니까?"

"무슨 소리! 역모라니... 그저 나는... 왕이 될 것이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러자 천태호가 낄낄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보거라. 내가 어떻게 왕이 되는지를... 흐흐흐... 모두가 칭송하는 진정한 왕이 되어, 저 빌어먹을 늙은 여우를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니... 흐흐흐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구나. 어서... 어서 그날이 와야 할 텐데..."

천태호의 광기를 보며 주동환의 표정이 점차 굳어져 갔다.

어쩐지 알 수없는 불길한 기분이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음을, 그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비는 초저녁 무렵에 그쳤다.

서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때에, 구름도 개어 보랏빛 하늘 위로 달빛이 함께 보였다.

연희는 궁궐 안에 있는 우물가에 나와 있었다.

궁궐 안에 있는 동안에는 수현의 간병을 자처하고 있었기에, 물을 길러 나온 참이었다.

이전만큼 자주 물을 길을 필요가 없었기에, 오늘은 이제서야 처음 우물가를 찾았다.

바람도 쐴겸 잠시 쉴까 하는 마음에 물을 떠서 담아놓고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이 어쩐지 너무 아름답게 보여서였을까?

그렇게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을 때, 또다시 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뭘 또 그렇게 보고 있느냐?"

연희는 세자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이제는 불쑥불쑥 나타나는 세자가 제법 익숙해져 버린 것이었을까?

세자가 곁으로 다가서며 조용히 읍조리듯 말했다.

"어린 시절... 어마마마와 함께 이 우물가에 온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듯한 아련한 세자의 표정에 연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세자의 얼굴에서 슬픔이 얼핏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마마마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이 우물가에서의 기억이 그나마 그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이 우물가는 나에게 소중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연희는 왠지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잊힌 기억, 그리고 그로 인해 남아있는 기억의 소중함, 간절함, 그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쩐지 세자를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세자는 연희를 돌아보며 태연히 웃음 지었다.

"내가 공연한 말로 너를 우울하게 만든 것이냐?"

"아니옵니다. 그저... 제가 위로하여 드리고 싶은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세자가 연희에게 성큼 가까이 다가갔다.

연희가 어찌할 줄 몰라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세자가 망설임 없이 연희를 품안으로 당겨 가볍게 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얼어붙은 연희는 얼굴이 온전이 홍당무가 되어 버린체 아무것도 못하고 그대로 있었다.

그때 세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왔다.

"그냥... 이렇게 곁에 있어 주거라. 어쩐지 네가 곁에 있으면, 내가 마음이 편해지는구나."

"저하...."

'항상 이렇게 곁에 있고 싶습니다... '

연희는 그저 그렇게 가만히, 겉으로 내뱉지 못하는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세자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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