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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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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연랑
· 최초 등록: 2025.10.04 · 최근 연재: 2025-10-25
읽기 시간 예측: 약 10.21분

46화 - #15


자기들을 신이라고 소개한 어둠들은, 정작 신답지 않게 나래를 경계하고 있었다.

"여긴 어디야?"

나래가 따지듯 묻자, 그것들은 키득키득 웃어대며 대답했다.

"우리."

알 수 없는 대답에 나래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그러다가 문득 느껴진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뒤쪽에 누군가 있었다.

한 사람. 초췌해 보이는 표정으로 어디서 났는지 모를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그녀는, 다름 아닌 여왕이었다.

지금은 왕관도, 화려한 의상도, 어울리지 않는 짙은 화장도 없이, 그저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할머니였다.

깊은 주름은 시름에 젖어 있고, 눈은 생기를 잃은 듯 희미했다.

"당신은..."

나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몇 걸음 다가가려는데 뒤쪽에서 어둠들이 재빨리 나래를 가로질러 그녀의 주변에 그림자를 만들더니,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 엄마, 이런 건 뭐한다고 자꾸 해와? 요즘 애들 이런 거 안 먹어.

또 다른 그림자가 일어나 그녀에게 짜증스럽게 이야기했다.

- 우리 김치 사서 먹는다니까. 요즘 누가 김장해? 자꾸 엄마가 김장하니까, 와이프가 눈치 보잖아.

세 번째 그림자가 일어나서 그녀에게 말했다.

- 엄마,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야. 딱 한번 더 도와주라? 응? 형들한테는 얘기 안 할게.

나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그녀 앞에 섰다.

"뭐 하는 거야?"

나래의 물음에도, 어둠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체 그녀에게 계속 속삭였다.

- 요즘 양로원도 시설 좋아. 거기서 친구들도 사귀고 그럼 좋잖아.

- 이 집 팔면 얼마 해? 상속도 미리미리 조금씩 해놔야지, 나중에 한꺼번에 하려고 그러면 세금 많이 나와.

나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들이..."

나래가 팔을 걷어붙이며 당장이라도 어둠들을 그녀에게서 뜯어내려 할 때였다.

세 번째 어둠 속에 누리끼리한 두 개의 동그라미가 마치 눈동자 인양, 나래를 응시하며 말했다.

- 나한테 돈 맡겨 놨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래는 가슴이 철렁하며 쎄한 기분과 함께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서 버렸다.

- 나한테 왜 그래? 나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

세 번째 어둠이 흡사 나래를 흉내 내듯 나래 비슷한 목소리로 말을 하며, 슬금슬금 나래 쪽으로 다가왔다.

- 나도 쉬고 싶어, 나도 쉬고 싶다고... 나도...

세 번째 어둠이 나래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을 때, 돌연 나래가 버럭 소리 질렀다.

"아냐!"

그 순간, 세 번째 어둠은 강한 힘에 밀려나, 마치 내동댕이 쳐지듯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너희들... 뭐 하는 거야?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나래가 앙칼진 목소리로 버럭 소리지르자, 어둠들이 움츠러들며 앉아있는 여왕 뒤로 몸을 숨겼다.

그 모습을 보자, 나래는 문득 자신의 내면과도 같았던 그림자가 떠올랐다.

'설마... 그럼 저것들도...'

나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경험대로라면, 저 어둠들 조차도, 여왕 그 자신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나래도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소한 행동, 사소한 말 한마디에 별별 의미를 부여하며, 나를 싫어할 거라든지, 나 때문에 그런 거 라며, 스스로를 자책하곤 했었다.

비로소 여왕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혼자 남아 스스로 만든 오해를 겹겹이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래는 여왕에게 다가가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포개어 잡아 온기가 전해지길 바랬다. 초점 없던 여왕의 시선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아들들이... 보고 싶으신가 봐요."

나래가 따스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자, 여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때 나래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의 펜던트가 은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한편, 갑자기 여왕 몸에서 튀어나온 어둠이 나래를 집어삼키고는 둥근 원형의 젤리 같은 형태가 되어 버리자, 솔이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누비는 당황하고 있었지만, 정작 백하도령은 태연했다.

"어찌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솔이가 걱정스레 묻는 말에, 백하도령은 눈앞에 검고 둥근 젤리 같은 것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나래는 괜찮다."

"네? 정말이어요?"

솔이의 물음에 백하도령이 가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것에 손을 댄 채로 지긋이 눈을 감았다.

'나래야...'

백하도령이 마음으로 나래를 부르는 그 순간, 여왕 앞에 앉은 나래의 목걸이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나래는 그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여왕의 손을 붙잡은 그 상태 그대로, 나래는 마치 여왕의 몸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순간 주위에 풍경이 바뀌었다.

어느새 주위를 가득 채운 햇살이, 황금빛으로 반짝거렸다.

툭툭 털어서 빨랫줄에 빨래를 널고 있는 그녀의 곁으로 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갔다.

"엄마, 엄마, 이거 봐봐. 내가 요 앞에서 신기한 돌멩이를 주워왔어."

아이가 눈에 초롱초롱한 빛을 내며 재잘거렸지만, 그 아이의 손에 들린 돌멩이는 여느 돌멩이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엄청 대단한 돌멩이인가 보네?"

그녀는 여전히 빨래를 툭툭 털며 널고 있었고, 뒤따라 다른 두 아이가 달려왔다.

아직은 뛰는 것이 서툰 막내를 뒤로 하고, 둘째가 먼저 달려왔다.

"나도 보여줘."

첫째는 얼른 돌멩이를 주먹으로 감싸, 둘째 손이 닿지 않게 머리 위로 번쩍 든다.

"기다려! 아직 엄마 못 보여줬단 말이야."

첫째한테 매달리는 둘째를 보면서, 그녀는 타이르듯 말했다.

"그냥 보여줘. 엄마 방금 봤어."

빨래를 널고 있는 그녀에게 막내 아이가 달려와 품에 안겼다.

분명 둘째를 따라왔을 터인데, 이미 관심은 엄마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막내가 왔어요?"

그녀는 품에 안긴 아이를 다독거리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의 표정에는 함지박만한 웃음이 한가득 피어나고, 돌멩이를 뺏기지 않으려는 첫째와 보고 싶어 하는 둘째가 주위를 맴돌며 뛰어다녔다.

주위에 사물 하나하나가 밝은 빛을 내뿜고 있는 것 같았고, 공기가 온통 따뜻하고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햇살 같은 순간일 것이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일지도 몰랐다.

아마도 일을 쉬는 일요일의 어느 날이었으리라.

단지 세탁을 해서 옥상 빨랫줄에 빨래를 널어놓는 일상일 뿐일진대, 아이들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이었는가 싶었다.

빨래 하나에도 생기가 넘쳐흐르는 것만 같았다.

마치 입체 영상을 보고 있는 것 같은 현상에, 나래는 다시 의자에 앉아있는 여왕을 바라보았다.

비록 울고 있지만, 처음으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무나 그리운 그때를 마주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마음을, 나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래는 여왕의 손을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온몸에 힘을 꽉 주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다른 건 싫어!'

그 순간, 여왕의 뒤편에 숨어있던 어둠들이 어떤 강력한 힘에 밀쳐진 듯 떨어져 나갔다.

그것들은 시끄러운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여왕 곁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나갔다.

뒤이어 순식간에 자그맣게 쪼그라들더니, 마치 겁에 질린 쥐처럼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백하도령 앞의 검은 젤리 같은 형상도 찢겨 나가고, 나래 눈앞에서 사라진 어둠들처럼 조각난 체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백하도령 앞으로 낡은 의자에 앉아 있는 여왕과, 그 여왕의 손을 붙잡고 앉은 나래가 보였다.

놀랍게도 여왕은 더 이상 늙은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젊은 새댁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래가 자신을 바라보자, 백하도령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했다."

마치 예상했었다는 듯한 백하도령의 표정에, 나래도 따라서 웃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왕도 따라서 일어났다.

그녀의 표정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네."

여왕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누비는 떨리는 눈빛으로 그런 여왕을 보며 한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여왕은 누비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시선이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너를 기억했던 순간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다."

백하도령의 말에 누비가 그를 보며 물었다.

"그럼... 지금 여왕의 시간이 바뀌었단 거요?"

"그렇다. 그녀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시간을 돌려놓았다. 안타깝지만, 그 순간에 그대는 없는 것 같구나."

백하도령의 말에 누비는 그리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거면 됐소. 여왕이 행복하다면...."

백하도령이 이번에는 나래를 보며 말했다.

"이제 그녀의 자아를 찾아야 한다."

"자아를 찾아야 한다구요?"

나래가 놀라 되묻자, 백하도령이 예의 온화한 미소로 답하였다.

"너도 경험하지 않았느냐? 도망간 그림자를 찾아야 한다."

나래는 "아!" 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아예 도망 못 가게 잡지 그러셨어요?"

"무엇을 걱정하느냐?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백하도령의 시선이 여왕에게로 향했다.

"온전히 그녀의 시간이어야 할 것이다. 비로소 자아를 되찾고,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래의 시선 역시 백하도령을 따라 여왕에게로 향했다.

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들은... 어디 있죠?"

그녀는 진심으로 궁금해 묻고 있었다.

다만, 정말로 아이들을 잃어버린 부모 모습이 아니라, 잘 아는 누군가에게 아이를 맡겨놓은 부모 같았다.

"아이들이... 꽤나 장난꾸러기 인 것 같습니다."

웬일인지 백하도령이 그녀를 보며 존댓말을 사용했다.

"네, 사내 녀석만 셋이다 보니..."

여왕은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백하도령은 나래를 돌아보며 말했다.

"첫째부터 찾아보자. 그리 멀리 가지 않은 듯 하니... 가서 만나보자꾸나."

나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여유만만한 이유가 다 있었군요."

백하도령과 나래는 양쪽에서 나란히 여왕의 양손을 잡았다.

"손 꼭 잡아요."

나래의 말에 여왕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셋은 나란히 걸어가 커다란 궁궐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허공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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