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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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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2.97분

13화 - #2


깊은 산 속, 울창하고 높다랗게 솟은 나무들 사이로 우거진 수풀이 펼쳐진 곳이었다.

반짝 거리며 빛나고 있는 그 초록 빛의 수풀들을 지나, 그녀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초목들 사이를 누비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고 있자니,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앞서 달리는 그녀 뒤로, 누군가 따라 오고 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도망치듯 내달렸고, 뒤에서 쫓아오는 이는 그녀를 따라잡으려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개구진 웃음을 지은 그녀는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연희야~"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는, 마치 귓가에 노랫소리처럼 들려왔다.

"연희야~"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데, 이상하게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시커먼 장막에 가려진 것만 같았다.

"왜?"

연희가 놀라 멈춰서는 사이, 모든 세상이 어둡게 변해버렸다.

모든 것은 그저 암흑일 뿐이요, 고요함뿐이었다.

"연희야..."

어둠 속에서 누군가 그녀를 애타게 부르는것 같았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향해 연희가 고개를 돌렸을 때, 누군가 그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윤호성 대감이 돌아왔으니, 조심하거라."

"누구?"

하지만 세상은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뜬 연희는 놀라,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저하..."

그런 연희를 만류하는 손길이 있었으니, 바로 세자였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연희의 곁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이제야 정신이 드는 모양이구나."

연희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숙일뿐이었다.

"고생이 많구나. 네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아, 아니옵니다. 저하... 어찌 저하께옵서... 소녀의 불찰이옵니다."

"아니다. 네가 그렇게 된 것은 결국 나 때문이 아니더냐? 이제부터라도 내가 좀 더 신경을 쓰도록 하마."

세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내관에게 당부해 둘 것이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을 하거라. 금호(金虎:수현의 호)가 금방 온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이다."

연희는 수현이 온다는 말에 괜스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궁을 나가야 한다. 여기 더 머무는 것은 세자에게 민폐가 될 것이 자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가야 한다는 이성적 생각과 그저 세자 곁에 조금 더 머물고 싶다는 미묘한 감정 사이에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꿈을..."

연희의 미미한 음성에, 세자는 돌아서 나가려다 말고 멈춰 자신이 잘못들은것인지 확인하려는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꾸, 꿈을 꾸었습니다."

연희의 말에 세자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무슨 꿈이더냐?"

"잘은 알지 못하오나,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옛일을 꾼 듯합니다. 꿈속에서 어떤 자가 제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연희가 고개를 살짝 들어 세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윤...호성 대감이 돌아왔으니... 조심하라 당부하였습니다."

세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연희의 침상앞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윤호성 대감? 지금 윤호성 대감이라고 하였느냐?"

"예. 분명... 그리 들었습니다. 윤호성 대감이란 분이 누구입니까?"

세자가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며 대답했다.

"윤호성 대감이라면... 전 이조판서 대감이다. 예전에 큰 파벌을 이끌던 황인설 대감의 최측근이었던 사람이다. 황인설 대감은 지금의 좌상대감과 뜻을 달리하는 정적이었으나, 역모죄로 사약을 받아 죽었지. 황인설 대감이 죽을 때, 그 측근들은 황인설 대감 덕에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 대신, 모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을 하였다. 윤호성 대감도 분명 그때, 낙향하여 돌아간 것으로 아는데... 그가 돌아왔다라..."

이야기를 듣던 연희가 얼른 나서 말했다.

"꿈속의 저는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린 듯했습니다. 시기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세자가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그래... 하지만, 윤호성 대감이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겠구나. 어쩌면...."

잠시 생각하던 세자가 연희를 보며 말했다.

"네가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기억을 되찾았다 하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연희는 환한 표정으로 기쁜듯이 대답했다.

"예, 어쩌면 조금씩 조금씩 기억을 되찾을 것 같습니다."

허나 세자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리고 연희는 그런 세자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어찌... 그러십니까?"

연희의 걱정스러운듯 묻는 말에 세자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아니다. 아무래도 네 신변이 위험한 듯하여, 내 금호를 불러 너를 잠시 멀리 피신시킬까 하였다."

그 말에 연희는 다시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저를... 멀리 보내신다 하셨습니까?"

"그 방법이 네게 가장 안전할거라 생각했다."

연희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은연중 세자의 곁에서 언제까지나 머무르게 될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싫었다. 그렇게 멀리 떠나있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켜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너머로, 이제 어느덧 세자에게 자신이 의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곁에 있고 싶었다.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다.

그 마음이 무엇이던지간에, 그저 함께 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것이 연심이라는 것을, 이제는 부정할 수 없게 되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그렇게 멀리 가면 낯선 곳이라 기억을 되찾는 것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자신을 멀리 보내지 않길바라는 염원을 담아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고, 세자는 일리가 있다는듯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가장 중요한것은 네 안위이다. 너의 신변을 먼저 걱정해야 하지 않겠느냐?"

"제 앞가림 정도는 제가 하겠습니다. 이렇게 세자마마께옵서 곁에 계신데 감히 어느 누가 저를 해하겠습니까?"

연희의 말에 세자는 저도 모르게 살짝 웃어 보였다.

"물론 그렇지. 적어도 이곳에서는 감히 너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곳이 제일 안전한 곳이 아닙니까? 임금님이 머무는 궁궐에서 어느 누가 함부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이제서야 겨우 기억을 찾기 시작했는데, 장소를 옮기면 다시 떠오르는 것이 없을까 우려되옵니다."

연희의 말에 세자는 수긍하듯 재차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희의 꿈일뿐이지만 이렇게라도 조그만 단서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그녀를 멀리 보내고 싶지 않았다.

과연 단서때문만일까... 라는 은연중 떠오르는 생각에 세자는 퍼뜩 고개를 흔들어 그러한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럴 수도... 있겠지."

잠시 망설이던 세자가 연희에게 이야기했다.

"금호가 오면 같이 설득해 보자. 곧 온다 하였으니, 내가 이리로 데리고 오마.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예. 저하"

세자는 곧 밖으로 나가고, 연희 앞으로 한 상궁이 다가왔다.

"일단..."

상궁이 연희를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말을 이었다.

"먼저 씻고 의복을 새로 갈아 입는것이 나을것 같습니다. "

연희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요 며칠을 앓아 누워있느라 옷을 갈아입지 못하였던지라, 땀냄새에 핏자국까지 묻어 스스로도 꾀죄죄해 보였다.

그 동안 세자에게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예..."

연희는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대답했고, 이내 상궁과 궁녀들을 따라 방을 나섰다.



***



새 옷을 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던 연희는, 이내 문이 열리고 세자가 들어서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자를 따라 들어서던 수현은, 서 있는 연희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안색을 보니 다 나은 것 같구나. 정말 다행이다. 이제 그만 퇴궐해도 될 듯하다."

수현의 말에 세자와 연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멈칫 굳어졌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아, 아니, 내가 보기엔 아직 안색이 창백해 보이니, 하루 이틀 더 쉬다가 퇴궐하는 것이 나을 것 같네."

세자의 말에 수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예? 아니 뭐 못 걷는 것도 아니고..."

"아니야, 아니야... 잘 봐봐. 아직 안색이 창백하지 않느냐? 저봐, 저봐... 식은땀도 조금 나는 것 같고..."

연희는 세자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아미를 찌푸리더니, 애써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저 봐라, 아직 다 낫지 않았다. 아직 퇴궐하기엔 이르니, 완전히, 완전히 다 나을 때까지 며칠 더 쉬어야 할 듯싶다."

수현은 큰 눈을 껌뻑 거리며 의심스럽다는듯 세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연희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뭔가... 어색한데...?"

그의 말에 세자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허허, 이 사람이...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는가? 자자, 허튼 소리 그만하고 할 얘기가 있으니, 이리 와서 앉아 보게."

세자가 먼저 방가운데 놓여있는 탁자로 발걸음을 옮기니, 수현이 따라가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꾸 수상한듯한 눈빛으로 연희를 돌아보았다.

연희는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색했는데...."

수현은 중얼거리며, 세자를 따라 의자에 걸터 앉았다.

세자는 화제를 돌리려 얼른 탁자에 팔을 올려 수현에게 바싹 몸을 기대며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연희가 꿈속에서 잊은 기억을 본 모양이다."

"기억을 보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것 같아... 꿈속에서 누군가가 연희에게 윤호성 대감을 조심하라 당부하였다는구나."

세자의 말에 수현이 크게 놀란 눈이 휘둥그레졌다.

"윤호성 대감이요? 전 이조판서 윤호성 대감 말입니까?"

"그래... 황인설 대감의 최측근이었지. 강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들었는데..."

"그랬었죠. 재밌군요. 실은... 그 현감 말입니다."

수현이 현감 얘기를 꺼내자 무슨이야기를 할지 기대감에 부푼 세자의 눈동자가 수현을 쳐다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응? 현감?"

"예... 그 현감이... 알고 보니 전 병조참판 김상호 대감의 둘째 아들 김문익이었습니다."

세자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수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김상호 대감? 김상호 대감이라면, 그 역시 황인설 대감의 당여가 아닌가?"

수현이 고개를 한번 크게 끄덕였다.

"예. 이유는 알지 못하겠으나, 본디 겁이 많고 소심한 인물이라 들었습니다. 황인설 대감이 영의정으로 계실 때, 지금의 현감 자리에 놓아둔 모양인데, 근래 들어 포악하기 이를 데가 없어, 하루에도 수십 명의 백성들이 그의 손에 죽어나간다 합니다."

"죽어? 어째서?"

"작은 물건 하나를 훔쳐도, 곤장을 백대씩 때려 죽게 하거나, 심지어는 현감 본인이 칼로 베는 일도 허다하다 합니다."

"그런 자가 겁이 많았었다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

"관영(조세춘의 호)의 말에 의하면, 본인도 김문익을 아는데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한사코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세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야. 그에게 어떤 죄를 뒤집어 씌우느냐에 따라, 과거 황인설 대감과의 약조가 흔들릴 수도 있어."

세자의 조심스런 말에 수현의 표정 역시 굳어졌다.

"허면... 저하 께옵서는... 좌상 대감을 의심하시는 것이옵니까?"

세자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 일로 이득을 볼 사람은 좌상대감과 그 당여들 뿐 아니겠는가?"

세자의 말에 수현도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관직에서 물러난 이들이다. 몇몇의 자제가 아직 관직에 머물고 있다고는 하나, 정적이라 할만한 위치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이런 식으로 궁지로 내모는 이유가 무엇인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발본색원하여 남겨두지 않겠다는 것인가..."

수현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허나 당시에, 황인설 대감이 대역죄를 인정하는 댓가로 자신의 당여들 목숨을 살려주기로 약조했다 들었습니다. 더욱이 좌상대감은 본인이 불리하더라도 이미 한 약조는 기필코 지키는 위인이라 평하지 않습니까?"

"그건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일 뿐, 실제로 황인설 대감과 좌상 대감이 서로 무엇을 주고받았는지 알 수 없네. 분명한 것은, 이대로 둔다면, 낙향한 당여들의 목이 날아가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는 것일세."

세자는 이야기를 마치며 수현을 쳐다보았고, 수현은 세자의 이야기를 듣다말고,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 보았다.

세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수현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이쪽을 힐끔 힐끔 보다가 고개를 숙이는 연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 나은거 같은데...."

수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자, 세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헛기침을 하였다.

"자네 지금 나를 의심하는 겐가? 허허..."

수현은 황망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자자, 할일이 많네. 먼저 빈청으로..."

나무토막처럼 굳은 어색한 몸짓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세자를 보면서 수현이 퉁명스럽게 이야기 했다.

"그쪽은 침전으로 가는 길이옵니다. 저하..."

당황한 세자가 얼른 발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아하하, 알고 있네, 알고 있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세자를 보며 수현이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어색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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