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1
귓가에 들려오는 달그닥 거리는 말발굽 소리, 이제는 제법 차가워진 새벽의 공기에도 앞에 앉은 세자의 등에서 느껴지는 체온과, 세자가 건네준 겉옷 하나에 몸도 마음도 따뜻하기만 연희였다.
옷이 좀 젖어 척척했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그저 좋을 따름이었다.
세자와 연희 뒤로는 수현과 수행 무사들이, 그리고 그 뒤로 좌포청 병사들이 붙잡힌 사교도인들을 포승줄에 묶어 이끌고 있었다.
"연희야..."
문득 세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 저하."
연희가 뒤에서 조심스럽게 대답하니, 세자가 헛기침을 한번 하고 말을 이었다.
"혹 되찾은 기억이 네가 원했던 결과가 아닐지라도, 혹 알게 된 진실이 너를 마음 아프게 만들더라도..., 결코 그것을 혼자 품으려 하지 말거라."
이어 세자가 고개를 돌려 연희를 바라보았다.
"슬퍼도, 내 옆에서 울거라. 괴롭거든, 내게 투정을 부리거라. 힘들거든, 내게 기대거라. 무엇을 하든... 내 곁에서 하거라. 알겠느냐?"
연희는 웃음 지으면서도 마음이 아파왔다.
"저에 대해... 들으신 것이옵니까?"
연희의 물음에, 세자는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들었으나, 무의미하다. 그것을 알았다 한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애써 배려해 주는 세자의 말에 연희는 한없이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고마움 이면에는, 결국 세자가 알게 되었다는 슬픔, 혹은 아픔이 자리를 잡았다.
"혹, 제 실체를 아시고 무섭거나 끔직하지는 않았습니까?"
연희의 물음에 세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하고는 뒤돌아 보았다.
"내 살다 살다 이렇게 어여쁜 여인을 두고 무섭냐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구나..."
그러나 어쩐지 실언을 한 것 같은 기분에, 세자는 말끝을 살짝 흐렸다.
"예법을 모르는 것은 좀 무섭긴 하더구나."
세자가 퉁명스레 말하며 다시 앞을 바라보니, 연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쁘지요. 제가 보기에도 참 이쁩니다. 이 여인은 윤세영이라 합니다. 전 이조판서로 계셨던 윤호성 대감이 아비 되는 사람이라 들었습니다."
세자는 연희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혹... "
무슨 말을 하려던 세자는 다시 말끝을 흐렸다.
연희는 세자가 물어보려던 말이 무슨 말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예... 일전에 제가 울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 몸의 주인이 울었던 것인가 봅니다."
세자는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하의 어머니, 중전마마께옵서 돌아가신 이유 말입니다."
세자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이미 짐작하고 있다."
연희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저들의 목표는... 다름 아닌 저하라고 합니다."
그 말에 세자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나를? 내가 목표라고?"
"예. 천태호라는 주술사는 저하의 몸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저하의 몸을 빼앗아 자신이 이 나라의 임금이 되는 것, 그것이 그자가 노리는 것이었습니다."
연희의 이야기를 들은 세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마도 연희로 자신을 유인했던 이유가 그것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뒤따라 오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현이 조금 더 다가와 말을 건네 왔다.
"중전마마께옵서 기생령의 술수에 걸려 그리 되신 것이라면 전후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허나, 이해되지 않는 것은, 왜 꼭 참수를 해야 했는가입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하듯 말했다.
"짐작이 가는 바가 있네."
"예? 무엇이옵니까?"
세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 고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몸의 원주인 때문이겠지."
수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세자를 바라보니, 세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기생령이 빠져나오는 순간, 원혼이 다시 깨어나게 되면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으니, 진실을 이야기할 겨를을 주지 않기 위해, 단칼에 죽이려 드는 것이겠지."
수현이 이해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그럴 수 있겠군요."
세자의 등뒤에서 조용히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연희는 괜스레 목 주변이 서늘해지는 것 같아 목을 매만졌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무섭습니다."
두려움이 깃든 연희의 눈빛을 보며 세자는 딱딱한 얼굴로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다짐하듯 말했다.
"너는 내가 꼭 지켜줄 것이다. 그러니 염려치 말고 내곁에 있거라."
연희는 진지한 세자의 얼굴을 보며 환한 웃음 지었고, 연희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던 세자도 서서히 굳어있던 얼굴이 풀어지며 마주 웃음을 지었다.
수현은 멋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며 세자와 연희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며 뒤따랐다.
***
아직은 앳된 모습이 남아있는 그는 고급스러운 침소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침소 안으로 불어들어와 한쪽에 켜놓은 촛불이 일렁거리는 그때, 희끄무레한 연기 같은 것이, 흡사 살아있는 듯 창틈으로 넘어와 너울 거리며 그에게로 기어갔다.
그것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귓가에 자리 잡고는 기괴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자는... 역적이다.... 역적이야. 죽여야 해... 죽여야 해...."
그것은 마치 최면을 걸듯 묘한 소리로 잠든 그의 귓가에 중얼거리듯 반복적으로 소곤거렸다.
그는 수면중에도 그것의 소리를 듣고 있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뒤척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계속 같은 소리를 반복하더니, 그의 귓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고, 그것이 빨려 들어가는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부릅떠졌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숨을 헐떡 거리며 긴장된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역적이야...."
그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그가 소리치니,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며 내관이 들어섰다.
"어찌 부르시옵니까?"
"어마마마를 뵈어야겠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내관이 놀라며 대답했다.
"대감, 의빈마마께옵서는 아직 잠자리에 들어 계시옵니다."
내관의 말에도 그는 들리지 않는 듯, 실성한 사람 마냥 이야기했다.
"우릴 죽일 거야. 우리 모두를 죽일 거란 말이다. 당장... 당장 가서 이 사실을 아뢰어야 한다."
그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가자, 내관이 놀라 그를 부르며 뒤따랐다.
"대감, 안영군 대감, 그리 가시면 아니되옵니다."
***
지푸라기로 만든 간이 문을 젖히며 안으로 천태호가 들어섰다.
천태호를 본 주동환이 부상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천태호가 만류하였다.
"됐어, 편치 않은 몸인데..."
천태호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간신히 윗몸을 일으킨 주동환의 앞 쪽에 있는 작은 통 위에 걸터앉았다.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습니다."
천태호가 콧방귀를 뀌었다.
"천하에 표영호도 박지언한테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구만."
그의 말에 주동환이 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심했을 뿐입니다. 다음번에는 그자의 목을 벨 것입니다."
천태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래야지. 그건 그렇고, 세자를 코앞에서 놓쳐 버렸어. 그래서 말인데... 계획을 좀 바꿔야겠어."
천태호의 말에 주동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천태호를 바라보았고, 그런 주동환을 보며 천태호가 낄낄 거리며 웃었다.
"왜? 그 연희 년한테 알려준 거랑 내용이 달라질까 봐 그래?"
주동환은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에이... 씨벌 다 아는데 왜 이래? 그년한테 다 불었지? 내가 모를 것 같아?"
"그렇지 않습니다. 당주님의 계획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글세, 그걸 내가 믿을 수가 없네? 그래서 내가 계획을 바꿨지. 세자의 몸을 노리고 있을 줄 알겠지만~, 관심 없어. 왕좌 따위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그리고... 내가 재밌는 거 알려줄까?"
예의 그 광기 어린 눈빛으로 주동환을 바라보는 천태호를, 주동환은 가끔 두렵게 느껴지곤 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주동환이 조심스레 웃어 보이자, 천태호가 재밌다는 듯이 낄낄 거리며 말했다.
"네가 죽고 못 사는 그년... 연희."
주동환의 표정이 매섭게 굳어졌다.
"그년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주동환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극심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주동환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려다 말고 인상을 쓰자, 놀란 천태호가 벌떡 일어났다가 낄낄 거리며 웃었다.
"이 놈 보게. 그년 일이라면 나도 죽이겠구먼."
주동환이 이를 악물고 천태호를 응시했다.
"연희는.... 연희는 건드리지 마십시오."
"걱정 마, 이 새끼야. 어차피 기생령이라 다른 몸으로 옮기면 그뿐이야."
그 말에 주동환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지자, 천태호가 예의 낄낄 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잘 들어, 세자는 역적이 되는 거야. 누구 때문에? 연희 때문에. 세자가 뒤지고 나면, 누가 세자가 될까? 지금 왕한테 아들이라고 해봐야 둘 밖에 없잖아. 당연히 안영군이겠지."
이어 주동환 얼굴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안영군으로 정했어. 특별한 주술을 걸어두었지. 알지? 의지를 거는 술수."
주동환이 이해가 안된다는 듯이 되물었다.
"기왕 주술을 걸 거라면, 차라리 임금에게 거는 것이..."
체 말을 다하기도 전에 천태호가 몸을 바로하 더니,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흐흥~ 아니지 아니지. 이건 일종에 최면, 즉 그 사람에게 의지를 심어주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심는 의지에는 한계가 있지. 그 의지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 그게 뭔지 알아?"
천태호의 물음에 주동환은 그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신념. 바로 신념이란 거야. 그래서 임금이나 홍여립이는 안돼. 그들은 세자를 너무 완벽하게 믿고 있거든. 그들에게 신념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내가 의지를 심어봐야 소용이 없어. 내가 심는 의지란 건 그런 거야. 애초에 없는 걸 만드는 게 아니라, 평소에 가지고 있던 아주 작은 의심, 아주 작은 증오, 그런 것들을 확, 불 질러 버리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런 의지를 심을 수가 없어."
천태호가 돌아서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다시 몸을 돌려 주동환을 보며 말했다.
"너... 내가 왜 천재 주술사로 불렸는지 아냐?"
주동환은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천태호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간단해. 딴 놈들은 그저 주술, 주술만 수련했지. 아주 멍청한 놈들이야, 그 주술을 누구에게 걸어? 사람에게 걸지. 그러려면 주술만 잘 알아서는 안되고, 사람을 알아야 해. 사람.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떤 신념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그 사람의 평소 습관이나 버릇이 뭔지를 알면, 더 강력한 주술을 걸 수 있지. 이 멍청한 주술사 놈들은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어."
그러고는 예의 낄낄거리는 웃음을 짓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옷이 좀 젖어 척척했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그저 좋을 따름이었다.
세자와 연희 뒤로는 수현과 수행 무사들이, 그리고 그 뒤로 좌포청 병사들이 붙잡힌 사교도인들을 포승줄에 묶어 이끌고 있었다.
"연희야..."
문득 세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 저하."
연희가 뒤에서 조심스럽게 대답하니, 세자가 헛기침을 한번 하고 말을 이었다.
"혹 되찾은 기억이 네가 원했던 결과가 아닐지라도, 혹 알게 된 진실이 너를 마음 아프게 만들더라도..., 결코 그것을 혼자 품으려 하지 말거라."
이어 세자가 고개를 돌려 연희를 바라보았다.
"슬퍼도, 내 옆에서 울거라. 괴롭거든, 내게 투정을 부리거라. 힘들거든, 내게 기대거라. 무엇을 하든... 내 곁에서 하거라. 알겠느냐?"
연희는 웃음 지으면서도 마음이 아파왔다.
"저에 대해... 들으신 것이옵니까?"
연희의 물음에, 세자는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들었으나, 무의미하다. 그것을 알았다 한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애써 배려해 주는 세자의 말에 연희는 한없이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고마움 이면에는, 결국 세자가 알게 되었다는 슬픔, 혹은 아픔이 자리를 잡았다.
"혹, 제 실체를 아시고 무섭거나 끔직하지는 않았습니까?"
연희의 물음에 세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하고는 뒤돌아 보았다.
"내 살다 살다 이렇게 어여쁜 여인을 두고 무섭냐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구나..."
그러나 어쩐지 실언을 한 것 같은 기분에, 세자는 말끝을 살짝 흐렸다.
"예법을 모르는 것은 좀 무섭긴 하더구나."
세자가 퉁명스레 말하며 다시 앞을 바라보니, 연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쁘지요. 제가 보기에도 참 이쁩니다. 이 여인은 윤세영이라 합니다. 전 이조판서로 계셨던 윤호성 대감이 아비 되는 사람이라 들었습니다."
세자는 연희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혹... "
무슨 말을 하려던 세자는 다시 말끝을 흐렸다.
연희는 세자가 물어보려던 말이 무슨 말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예... 일전에 제가 울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 몸의 주인이 울었던 것인가 봅니다."
세자는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하의 어머니, 중전마마께옵서 돌아가신 이유 말입니다."
세자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이미 짐작하고 있다."
연희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저들의 목표는... 다름 아닌 저하라고 합니다."
그 말에 세자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나를? 내가 목표라고?"
"예. 천태호라는 주술사는 저하의 몸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저하의 몸을 빼앗아 자신이 이 나라의 임금이 되는 것, 그것이 그자가 노리는 것이었습니다."
연희의 이야기를 들은 세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마도 연희로 자신을 유인했던 이유가 그것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뒤따라 오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현이 조금 더 다가와 말을 건네 왔다.
"중전마마께옵서 기생령의 술수에 걸려 그리 되신 것이라면 전후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허나, 이해되지 않는 것은, 왜 꼭 참수를 해야 했는가입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하듯 말했다.
"짐작이 가는 바가 있네."
"예? 무엇이옵니까?"
세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 고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몸의 원주인 때문이겠지."
수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세자를 바라보니, 세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기생령이 빠져나오는 순간, 원혼이 다시 깨어나게 되면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으니, 진실을 이야기할 겨를을 주지 않기 위해, 단칼에 죽이려 드는 것이겠지."
수현이 이해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그럴 수 있겠군요."
세자의 등뒤에서 조용히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연희는 괜스레 목 주변이 서늘해지는 것 같아 목을 매만졌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무섭습니다."
두려움이 깃든 연희의 눈빛을 보며 세자는 딱딱한 얼굴로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다짐하듯 말했다.
"너는 내가 꼭 지켜줄 것이다. 그러니 염려치 말고 내곁에 있거라."
연희는 진지한 세자의 얼굴을 보며 환한 웃음 지었고, 연희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던 세자도 서서히 굳어있던 얼굴이 풀어지며 마주 웃음을 지었다.
수현은 멋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며 세자와 연희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며 뒤따랐다.
***
아직은 앳된 모습이 남아있는 그는 고급스러운 침소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침소 안으로 불어들어와 한쪽에 켜놓은 촛불이 일렁거리는 그때, 희끄무레한 연기 같은 것이, 흡사 살아있는 듯 창틈으로 넘어와 너울 거리며 그에게로 기어갔다.
그것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귓가에 자리 잡고는 기괴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자는... 역적이다.... 역적이야. 죽여야 해... 죽여야 해...."
그것은 마치 최면을 걸듯 묘한 소리로 잠든 그의 귓가에 중얼거리듯 반복적으로 소곤거렸다.
그는 수면중에도 그것의 소리를 듣고 있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뒤척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계속 같은 소리를 반복하더니, 그의 귓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고, 그것이 빨려 들어가는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부릅떠졌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숨을 헐떡 거리며 긴장된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역적이야...."
그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그가 소리치니,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며 내관이 들어섰다.
"어찌 부르시옵니까?"
"어마마마를 뵈어야겠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내관이 놀라며 대답했다.
"대감, 의빈마마께옵서는 아직 잠자리에 들어 계시옵니다."
내관의 말에도 그는 들리지 않는 듯, 실성한 사람 마냥 이야기했다.
"우릴 죽일 거야. 우리 모두를 죽일 거란 말이다. 당장... 당장 가서 이 사실을 아뢰어야 한다."
그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가자, 내관이 놀라 그를 부르며 뒤따랐다.
"대감, 안영군 대감, 그리 가시면 아니되옵니다."
***
지푸라기로 만든 간이 문을 젖히며 안으로 천태호가 들어섰다.
천태호를 본 주동환이 부상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천태호가 만류하였다.
"됐어, 편치 않은 몸인데..."
천태호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간신히 윗몸을 일으킨 주동환의 앞 쪽에 있는 작은 통 위에 걸터앉았다.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습니다."
천태호가 콧방귀를 뀌었다.
"천하에 표영호도 박지언한테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구만."
그의 말에 주동환이 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심했을 뿐입니다. 다음번에는 그자의 목을 벨 것입니다."
천태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래야지. 그건 그렇고, 세자를 코앞에서 놓쳐 버렸어. 그래서 말인데... 계획을 좀 바꿔야겠어."
천태호의 말에 주동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천태호를 바라보았고, 그런 주동환을 보며 천태호가 낄낄 거리며 웃었다.
"왜? 그 연희 년한테 알려준 거랑 내용이 달라질까 봐 그래?"
주동환은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에이... 씨벌 다 아는데 왜 이래? 그년한테 다 불었지? 내가 모를 것 같아?"
"그렇지 않습니다. 당주님의 계획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글세, 그걸 내가 믿을 수가 없네? 그래서 내가 계획을 바꿨지. 세자의 몸을 노리고 있을 줄 알겠지만~, 관심 없어. 왕좌 따위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그리고... 내가 재밌는 거 알려줄까?"
예의 그 광기 어린 눈빛으로 주동환을 바라보는 천태호를, 주동환은 가끔 두렵게 느껴지곤 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주동환이 조심스레 웃어 보이자, 천태호가 재밌다는 듯이 낄낄 거리며 말했다.
"네가 죽고 못 사는 그년... 연희."
주동환의 표정이 매섭게 굳어졌다.
"그년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주동환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극심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주동환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려다 말고 인상을 쓰자, 놀란 천태호가 벌떡 일어났다가 낄낄 거리며 웃었다.
"이 놈 보게. 그년 일이라면 나도 죽이겠구먼."
주동환이 이를 악물고 천태호를 응시했다.
"연희는.... 연희는 건드리지 마십시오."
"걱정 마, 이 새끼야. 어차피 기생령이라 다른 몸으로 옮기면 그뿐이야."
그 말에 주동환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지자, 천태호가 예의 낄낄 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잘 들어, 세자는 역적이 되는 거야. 누구 때문에? 연희 때문에. 세자가 뒤지고 나면, 누가 세자가 될까? 지금 왕한테 아들이라고 해봐야 둘 밖에 없잖아. 당연히 안영군이겠지."
이어 주동환 얼굴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안영군으로 정했어. 특별한 주술을 걸어두었지. 알지? 의지를 거는 술수."
주동환이 이해가 안된다는 듯이 되물었다.
"기왕 주술을 걸 거라면, 차라리 임금에게 거는 것이..."
체 말을 다하기도 전에 천태호가 몸을 바로하 더니,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흐흥~ 아니지 아니지. 이건 일종에 최면, 즉 그 사람에게 의지를 심어주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심는 의지에는 한계가 있지. 그 의지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 그게 뭔지 알아?"
천태호의 물음에 주동환은 그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신념. 바로 신념이란 거야. 그래서 임금이나 홍여립이는 안돼. 그들은 세자를 너무 완벽하게 믿고 있거든. 그들에게 신념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내가 의지를 심어봐야 소용이 없어. 내가 심는 의지란 건 그런 거야. 애초에 없는 걸 만드는 게 아니라, 평소에 가지고 있던 아주 작은 의심, 아주 작은 증오, 그런 것들을 확, 불 질러 버리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런 의지를 심을 수가 없어."
천태호가 돌아서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다시 몸을 돌려 주동환을 보며 말했다.
"너... 내가 왜 천재 주술사로 불렸는지 아냐?"
주동환은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천태호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간단해. 딴 놈들은 그저 주술, 주술만 수련했지. 아주 멍청한 놈들이야, 그 주술을 누구에게 걸어? 사람에게 걸지. 그러려면 주술만 잘 알아서는 안되고, 사람을 알아야 해. 사람.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떤 신념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그 사람의 평소 습관이나 버릇이 뭔지를 알면, 더 강력한 주술을 걸 수 있지. 이 멍청한 주술사 놈들은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어."
그러고는 예의 낄낄거리는 웃음을 짓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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