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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比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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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검휘필
· 최초 등록: 2025.10.26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1.12분

18화 - #2


모래로 다듬어진 비무장은 대략 십여 장 크기의 정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비무장 한쪽에 라마와 송이개, 유림이 서 있었고, 반대쪽에 정파 무림을 대변하는 무림맹의 익주 분파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 중에는 모용담도 있었지만, 지금 라마의 눈길을 끄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자신에게 점혈을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무림맹 익주 분파를 대표해서 나선 사람으로 곤륜파(崑崙派)의 청유위였다.

청유위는 매서운 눈으로 라마를 응시하고 있었고, 라마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송이개가 라마에게 귓속말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유위라고 곤륜에서 꼽히는 후기지수(後起之秀)입니다. 저 친구가 익주 분파에 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라마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상관없어요."

이번에는 유림이 나서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청유위라면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듣자 하니, 섬전수(閃電手)와 음풍조(陰風操)의 고수일뿐만 아니라, 특히 근접전에서 상대를 제압하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라마는 고민이 됐다.

비무는 공식적으로 친선경기에 해당하므로, 무기의 사용을 금했기 때문이었다.

유림과 송이개가 라마의 편을 들어, 그의 무공이 검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강조했으나, 조철웅은 '친선'이란 이유로 무기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라마는, 어쩐지 조철웅마저 자신이 이기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들이 짜고 자신에게 치욕을 주려 한다면, 열 번이 아니라 백번, 천 번이라도 죽고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자, 우리 라소협의 청을 받아 무림맹과의 비무가 이루어지게 되었소. 물론 정정당당한 비무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소."

조철웅이 나서 말을 하는 동안, 송이개가 나지막하게 라마에게 말했다.

"그간 무림맹과 조씨 일가가 맺은 관계를 생각해 봤을 때, 그가 소협의 편을 들어주기는 힘들 듯합니다."

라마 역시 작은 소리로 물었다.

"친선이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왠지 좀 치사하게 느껴지네요."

송이개는 씁쓸하게 웃을 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자, 시작합시다."

조철웅의 말에 라마가 비무대 위에 올라섰고, 청유위 역시 맞은편에 올라섰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였고, 청유위는 진지한 모습으로 자세를 취하였다.

검술을 기반으로 하는 라마 입장에서는 취할 자세가 없어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는데, 아무렴 어떠한가, 어차피 처음부터 이길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은 생각에 주먹을 꽉 쥐고 기합을 넣으며 달려들었다.

"이야!"

근본도 없는 공격에 한걸음 물러선 청유위였지만, 이내 간파한 듯 라마의 주먹질을 여유롭게 피하며 다가섰다.
"어리석다!"

한 마디 말과 동시에 라마의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것 같더니, 패대기 쳐지듯 바닥에 떨어졌다.

"윽!"

절로 신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청유위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무리 검술을 익힌 자라고는 하나, 이 정도면 무예의 근본조차 모르는 것 아닌가?"

라마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청유위를 보았다.

저 눈, 저 표정, 익숙했다.

잊으려 노력했고, 이 세계에 온 뒤로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눈과 표정이었다.

분노를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난 건 잠시였다.

다시, 또다시 바닥에 내팽겨 쳐지면서, 라마는 꽤 익숙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다시 느끼는 그 감정은, 지독하게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패배의식이었다.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패배감이 서서히 라마의 몸 구석구석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다시 시작해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지난번에 만났던 섭위장과 비슷한 느낌임을 알 수 있었다.

넘지 못할 벽, 아무리 해도 일말의 가능성조차 느껴지지 않는 능력의 차이.

죽어서 다시 시작한다는 이점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 그것은 타고난 자질과 노력이 더해진, 이른바 인재의 높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서른 번째 내팽겨 쳐지자, 라마는 바로 일어나지 않은 체, 상체만 일으켜 앉은 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다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쌍하게 바라보는 이도 있었고, 고소한 표정으로 웃는 이들도 있었다.

이마저도 라마는 익숙했다.

본래의 세상에서 느꼈던 패배감과 우울한 감정이 다시금 새록새록 솟아나는 것만 같았다.

왜소하기 이를 데 없는 몸이었다가, 이 세계로 넘어오면서 무공을 가지고, 짧은 시간 안에 제법 몸이 튼튼해졌었다.

그래서 그런가 자신감도 조금씩 생겨나고,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니 말도 제법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런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한 백번쯤 다시 시작한다면, 이길 수 있을까?

검을 들고 있을 땐 자신감이 있었는데, 검을 손에 들면 다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그만 하는 게 어떠한가? 더 이상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청유위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다시금 분노가 느껴진다. 저 개자식을 확 뭉게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붙었다가는 또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 체 내팽겨 쳐질 테니, 검술을 못쓸 바엔 차라리 마법을 쓸 수 있으면 낫겠다 싶었다.

'응? 마법?'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는 마법을 못쓰는 걸까?

처음 마법 수련을 하면서 자연의 힘을 느끼고 마나(Mana)를 키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록 소질이 없어 남들보다 늦긴 했지만, 처음 마나를 축적했을 때의 감회는 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안되나?'

라마는 잠시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마나를 느끼려 노력해 보았다.

순간, 그의 몸속에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마나가 그의 몸안에서 폭발하듯 느껴지고 있었다.

"이건..."

수없이 반복하며 효율성을 극대화한 덕에 짧은 시간 안에 꽤 많은 내력을 쌓을 수 있었던 라마였다.

철근공까지 익히면서 그 효율성은 더욱 증대되었는데, 이 세계로 넘어오면서 마나가 내력으로 치환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력이 마나로 치환되니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실제 내력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없었던 라마 입장에서 자신의 가진 내력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나로 치환되고 보니, 그 양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라마가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청유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더 해볼 생각인가? 이번에는 그냥 넘어뜨리는 정도로 끝내지 않겠다."

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라마가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뚜둑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청유위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재밌는데?"

뜻밖의 말에 청유위 표정이 험악해졌다.

"어디 한 군데 부러져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라마는 거대한 마나의 크기를 느끼며 자신감에 차 있었는데, 막상 마법을 쓰려니 고민되는 게 있었다.

자신의 마법적 능력이 워낙 부족해서 습득한 마법의 종류가 몇 가지 안된다는 것이다.

그나마 아주 수준이 낮은 마법 중에 대충 기억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기에, 시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유위가 기다리다 지친 듯 다가오자, 라마가 재빨리 보법을 펼쳐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금세 몸이 휘청하더니, 그만 넘어져 버렸다.

어이없는 표정의 청유위가 라마를 보다가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겁이 난 것인가? 망신은 그만하면 족한 것 같은데? 하하"

라마는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괜찮아, 괜찮아.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라마는 정말로 괜찮았다. 다만, 방금 전으로 확실하게 깨달은 점은 마법으로 치환되면서 무공을 쓸 수 없게 되었단 점이다.

두 가지를 모두 다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치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라마는 서둘러 뒤로 물러나며 왼손은 쭉 내밀고 오른손은 뒤로 접었다.

마치 활시위를 당기는 듯한 자세에, 청유위가 비웃는 표정이 되었다.

"무엇하는 겐가? 뭐 사파에서 떠들어 대는 신궁(神弓)의 무공이라도 펼치려는 겐가?"

라마가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비전의 맹약, 매직 에로우!"

라마가 오른손가락을 연속으로 튕겨내자, 푸른빛의 화살이 허공에 생겨나며 진짜 화살처럼 청유위에게 날아들었다.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청유위는 황급히 몸을 틀어 화살을 피했지만, 그를 스쳐 지나간 화살은 허공을 빠르게 선회하며 다시 그를 향해 날아들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화살까지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뭣?"

피할 곳이 없어 청유위의 표정이 창백해지는 바로 그 순간, '파지직'하는 파열음과 동시에 푸른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으아악!"

처참한 비명소리가 찢어질 듯 울려 퍼지고, 모두가 놀라 고개를 잠시 돌린 사이, 빛이 사그라들었다.

고개를 돌렸던 이들이 조심스레 다시 비무장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청유위는 온데간데없고, 시커멓게 타서 꾀죄죄하게 변해버린 괴인을 볼 수 있었다.

"으..."

신음소리와 함께 청유위는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청소협!"

그들이 우르르 달려가 쓰러진 청유위를 부축했다.

"탄 냄새가 나는데?"

"살아는 있는 거야?"

다들 한 마디씩 하고 있었고, 조철웅은 멍한 표정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습니다, 소협."

송이개와 유림이 다가와 환호했다.

"아니 그건 무슨 무공입니까? 도대체 본 적이 없는 신기한 무공이었습니다."

"소협의 무공이 대단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두 사람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청유위가 기침을 해대자, 무림맹 사람들이 얼른 그를 들어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었고, 눈치를 살피던 모용담이 다가와 말했다.

"소협, 역시나 굉장하십니다. 이렇게 눈앞에서 소협의 무공을 볼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헌데, 방금 전 그 무공은 무엇입니까?"

모용담의 물음에 라마가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뭐 그게... 글쎄..."

그런데 어쩐지 말소리가 어눌하게 느껴졌다.

눈앞에 있던 모용담이 의아한 듯 라마에게 물었다.

"그런데 소협... 소협의 눈동자가 원래 푸른색이었습니까?"

그러자 송이개와 유림도 놀라 말했다.

"어 정말 그렇습니다. 피부도 왠지 더 하얀 것 같고..."

"키도 좀 작고 체격이 왜소해진 것 같습니다."

다들 의아해하니 라마가 속으로 '아차'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얼른 내공을 느끼기 위해 집중했다.

단전의 기운을 끌어올리려 눈을 질끈 감고 집중하니, 어느 순간 내력이 느껴지기 시작하고 마나의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라마가 다시 눈을 뜨자 모용담이 신기해하며 물었다.

"다시 눈이 정상이 되었습니다. 신기합니다, 소협. 이것은 무슨 무공입니까?"

"아, 그게... 말로 설명하기 좀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그러자 유림이 아는 척을 하며 말했다.

"가전 비공이시군요."

그러더니 모용담을 향해 말했다.

"그런 무공에 대해 묻는다면, 그것 또한 결례가 아니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소협. 실례했습니다. 부디 기분 나빠하지 마십시오."

모용담이 얼른 사과를 하자, 라마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아니 아니. 괜찮아요."

라마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설마 이 세계에서 마법을 쓰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흥분되는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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