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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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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연랑
· 최초 등록: 2025.10.04 · 최근 연재: 2025-10-25
읽기 시간 예측: 약 10.95분

43화 - #12


씁쓸한 표정의 치리가 성안으로 들어서고, 그 뒤로 초췌한 모습의 병사들이 축 늘어진 체 힘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마법채는 모두 망가져 그 끝이 모두 검게 그을려 있었다.

사냥꾼들이 초췌한 몰골로 들어오는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의아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치리를 따르던 부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대체 뭐하는 녀석이었을까요? 갑자기 나타나서 마법채를 모두 망가뜨리다니..."

치리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상관없어. 마법채는 다시 만들면 돼. 당장 토끼굴에 전해, 마법채를 더 만들라고."

부관이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들과 거래를 끊은 지가 제법 오래되었는데... 다시 우리 요구를 받아들일까요?"

걸어가던 치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다.

"거래를 안 하면, 그 토끼굴을 송두리째 불태워버리겠다고 해! 알았어?"

치리의 눈빛을 본 부관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예, 그러겠습니다."

치리는 분한 듯 씩씩 거리며 다시 걸어갔고, 부관은 뒤돌아서 어딘가로 달려갔다.

치리는 곧장 여왕이 머무는 궁궐로 향했다.

궁궐 인근에 다다랐을 무렵, 어디선가 헐레벌떡 개들이 달려왔다.

"치리 대장님."

그들은 치리를 보자마자 황급히 달려왔고, 치리는 그들을 보며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뭐냐?"

살벌한 치리의 표정을 보고 그들은 잠시 움찔하였다가, 서로 눈치를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그게... 넋마중을 나갔다가... 이상한 녀석들에게 혼깃을 빼앗겼습니다."

치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이상한 녀석들이라니?"

"그게... 처음엔 하얀 옷을 입은 웬 인간 녀석이, 뭉치 놈을 번갯불에 구워 버리더니, 그놈이 가고 나서는 계집아이 같은 인간이 저를 강아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치리의 눈빛이 희번덕 해졌다.

"하얀 인간이 번갯불을 썼다고? 그놈에게 일행이 있었단 말이지?"

"예, 그놈이 사라지고 남은 일행은 이곳에 와 있습니다."

"어디 있느냐?"

"혼깃을 가지고 느루할배에게 갔습니다."

치리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더니 뒤쪽에 서 있는 부관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모든 병사들을 느루 할배가 있는 곳으로 집결시켜라! 나머지는 나를 따라오너라!"

치리는 재빨리 느루할배가 있는 곳으로 향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놈들, 모두 물어 뜯어주마."

***

나래는 여왕을 어찌해야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지 의논하기 위해 백하도령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목걸이의 둥근 펜던트를 양손으로 모아쥔 나래가 두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백하도령님, 도와주세요.'

실눈을 뜨고 주위를 살핀 나래는 이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렇게만 하면 벼락같이 나타날 줄 알았더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괜스레 실망하여 투덜거렸다.

"위급한 상황에 놓였으면 어쩌려고... 실망이야."

혼자서 투덜거리는 나래를, 한울은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래?"

물어보는 한울을 힐끔 본 나래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러다가 표정을 풀어 한울을 보며 물었다.

"일단 백하도령님을 다시 만나서 의논해 보자. 아무래도 문제를 해결하려면, 백하도령님이 가진 능력이 필요할 것 같아."

"백하도령님의 능력? 어떤 능력?"

"음... 뭐랄까, 백하도령님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뭔가를 만들어 낸달까? 그런 능력이 있거든. 치매에 걸린 여왕의 기억이 특정 시간에 머물러 있는 거라면, 백하도령님이 그 시간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한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지금 여왕의 상태를 바꿀 수도 있다는 건가?"

"아마도? 확실하진 않아."

누비는 희망에 찬 표정으로 나래를 보며 물었다.

"그게...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돕겠다. 무슨 일이든..."

그때였다.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을 향하자, 집 문 앞에 치리가 번득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며 서 있었다.

"네놈들도 그 하얀 옷의 인간 놈과 한패거리렸다? 감히 우리에게 치욕을 안겨줬으니, 우리도 그놈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말과 동시에 담벼락 위로 병사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긴 체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들의 수급을 성문 위에 내걸어 그놈이 보게 만들 것이다."

치리의 자신만만 표정을 보며 나래의 한울, 솔이와 누비까지 모두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안돼..."

나래가 체 나서 말하기도 전에, 병사들의 화살이 활시위를 떠났다.

마치 모든 상황이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화살은 누비와 한울, 솔이와 나래 자신에게까지, 일말의 자비 없이 날아와 꽂혔다.

가슴과 허벅지, 그리고 배에 화살이 꽂히는 통증과 눈앞에서 쓰러지는 한울과 솔이, 누비를 보면서 나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안돼!!!'

그리고 나래 눈앞에 있던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분명, 나래를 포함하여 누비와 한울, 솔이까지 화살에 맞았었는데, 지금 그녀의 눈앞에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모든 화살이 그들을 피해 바닥에 내리 꽂힌 것이다.

"뭐하는 게냐?"

치리가 병사들을 보며 호되게 화를 내자, 병사들의 표정이 당황스럽게 변했다.

분명 똑바로 날아갔다고 생각한 화살들이 하나같이 모두 땅바닥에 내리 꽂혔기 때문이었다.

'뭐지?'

나래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피해야 돼!"

한울이 나래의 손을 붙잡고 집 뒤쪽으로 달려가자, 누비와 솔이가 뒤따라 달렸다.

병사들은 부랴부랴 새 화살로 활시위를 매기고, 뒤편으로 달려가는 일행을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컥!"

맨 끝에서 달리던 누비가 서너 대의 화살을 맞고 비명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누비 아저씨!"

나래가 도망가다 말고 돌아서서 누비에게 달려가려 하자, 한울이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저지했다.

"안돼! 그러다간 너도 죽어!"

"싫어!"

나래가 버럭 소리 지르는 바로 그 순간, 나래는 다시 앞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어?"

나래가 멈춰서 돌아보니, 뒤쪽에서 누비가 달려오고 있고, 날아든 화살은 기묘하게 꺾이며 이곳저곳에 박혔다.

"뭐해?"

앞에서 한울이 팔을 잡아당기고, 헐레벌떡 달려온 누비가 나래를 보며 외쳤다.

"어서 도망쳐!"

나래는 또 한 번 상황이 눈앞에서 바뀌자,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납득되지 않았다.

'뭐지?'

마치 눈앞에서 환상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한울을 따라 달려가는 사이,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더니, 이내 홀로 달리고 있었다.

'뭐야?'

나래는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울! 누비 아저씨! 솔아~"

나래가 주위를 둘러보며 외쳐보지만 아무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나래야?"

나래가 돌아보니, 그곳에 아빠가 있었다.

그리고 아빠 앞에는 어린 시절의 나래가 훌쩍이며 서 있었다.

아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어린 나래와 시선을 맞추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왜? 속상한 일 있어?"

훌쩍이는 어린 나래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무슨 속상한 일인데? 아빠한테 말을 해야 알지."

훌쩍이는 어린 나래는 어쩐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체, 계속 눈물만 흘렸다.

"저건..."

나래는 그 모습을 보며, 그것이 오래전 자신이 겪었던 일에 대한 회상임을 알 수 있었다.

아빠 앞에서 하염없이 울고만 있는 자신을 보면서, 나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차마... 말할 수 없었어. 괜히 말하면... 친구랑 사이가 틀어질까 봐... 혼자 삭혔던 거 같아."

나래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자신이 그런 생각까지 하며 살았다는 게, 어쩐지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말을 해야 하지만 말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그런 그녀를 보며 친구들은 소심하다고, 그녀 대신 답답함을 토로하곤 했었다.

왠지 불평하는 것 같아서, 왠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될 것만 같아서, 이런저런 이유로 말하지 못했던 무수한 순간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빠와 어린 나래의 모습이 바람결에 흩어지고, 그 자리에 백하도령이 서 있었다.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구나."

백하도령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 오자, 나래가 그런 백하도령을 보며 물었다.

"이게... 뭐죠? 도령님이 만드신 건가요?"

"그렇다."

"어째서... 이런 걸 보여주시는 거죠?"

"네가... 신(神)으로써의 능력을 각성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완성시키기 위해 네 안의 기억을 꺼낸 것이다."

"신으로서의 능력이요?"

"그래."

"그게 뭐죠? 혹시 아까 그 현상들..."

백하도령은 차분한 모습으로 나래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앞에 멈춰 선 백하도령이 나래를 보며 말했다.

"네가 싫은 것을, 부정(否定)하는 능력이다."

"부정이요?"

"그래. 아마도 너의 성격이 그러한 능력의 발현에 단초가 된 것이 아닌가 싶구나. 네 안에 내재된, 싫은 것을 싫다 말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원망들, 그것들이 너로 하여금, 네가 싫은 것을 부정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게 한 것 같다."

"그럼... 아까 화살에 맞았던 것은...?"

"네가 그 상황을 부정했기 때문에, 그 상황이 취소되고 바뀐 것이다."

"상황이 취소되었다구요?"

"그래. 네가 부정했으니, 그 일은 없던 일이 된 것이지."

나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정말... 정말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그것이 네가 가진, 신으로서의 능력 같구나."

상황을 부정하여 없던 일로 만든다니, 나래는 믿기지 않는 듯 멍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잠시 그대로 있던 나래가 백하도령을 보며 물었다.

"도와주세요. 여왕을... 그녀의 기억을 어느 시점으로 돌려놔야 할 것 같아요. 혹시... 할 수 있나요?"

"나는 타인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형상화할 수 있다. 그 능력을 응용하면 비슷한 현상을 발현시킬 수 있을 것 같으나, 확신하긴 힘들 것 같구나. 다만..."

"다만?"

"내 능력에 네 능력을 결합시킨다면, 능히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어떻게요?"

"내가 특정 상황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네가 그 기억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부정한다면, 그녀에게는 그 기억만이 남게 되지 않을까?"

나래는 "아!" 소리를 내며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확신할 수는 없다만, 한번 해볼 만할 것 같구나."

백하도령의 온화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래가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며 따지듯이 물었다.

"혹시... 일부러 그런 상황이 되게 하려고, 바로 나타나서 도와주지 않고 기다린 건가요?"

나래의 물음에 백하도령의 표정이 곤란해졌다.

"아, 그건...."

나래가 그런 백하도령을 노려보며 물었다.

"설마 신이 거짓말을 하진 않겠죠?"

"그보다... 얼른 돌아가서..."

"어어? 말 돌리는 거봐? 진짠가 보네?"

"그, 그게..."

나래는 처음으로 백하도령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에 깔깔 거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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