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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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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1.86분

30화 - #1


그래도 명색이 의녀라고, 의녀들이 기거하는 곳에 머물게 되었지만, 다른 의녀들의 눈총에 제대로 눈조차 붙이기 힘들었다.

대충 상황을 아는 의녀의 도움으로 굳이 의녀의 일에 불려 다니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그런 상황이 연희로 하여금 더욱 눈치를 보게 만들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수현의 간병에 필요한 허드렛일을 돕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자민 그마저도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고된 일로 쉽지는 않았다.

다행인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수현의 상태가 안정되어 갔고, 점차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연희가 온 지 일주일이 되었을 초저녁무렵, 수현이 비로소 온전히 눈을 떴다.

정신이 든것을 확인하고 세자에게 전달하자, 소식을 접한 세자가 부랴부랴 한달음에 달려왔다.

"금호, 자네 괜찮은 것인가?"

세자가 묻는 말에, 수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자네가 대체 어쩌다가 이리된 것이야?"

수현은 세자의 물음에 무언가 답하려 했으나, 아직은 버거운 듯 제대로 대답을 하지못했다.

송구한 눈빛으로 다시 입을 열려했으나 힘겨운듯 체념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닐세. 일어나거들랑, 그때 듣겠네. 더 쉬도록 하게."

수현은 잠시 의식을 차렸다지만 그마저도 힘에 부친지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도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에, 세자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작은 소리로 다행이란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되뇌는 세자를, 연희는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연희의 눈빛을 의식한 세자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연희에게 말을 건넸다.

"어찌그리 보는 것이냐?"

연희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흠,,그간 간병하느라 고생 많았다. 허나, 진짜 일은 이제부터다. 누가 무엇 때문에 그리 했고, 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야 하는 일이 남았다. 그리고 그 일에 네 기억이 중하니, 너는 하루빨리 네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주길바란다."

연희는 살짝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어찌... 노력하면 되는 것이옵니까?"

연희의 물음에 세자도 자신의 황당한 요구를 인식하고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글세... 어찌해야 할까... 일단... 좀... 같이 생각해 보자꾸나."

세자의 당황해 하는 모습에 연희는 생긋 웃어 보이며 답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연희는 세자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았다.

같이 한다는 표현이 그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감격스럽게 들렸기 때문이다.

세자는 연희가 갑자기 무엇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알길 없어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의원과 의녀들에게 맡겨도 될 듯 하구나."

"아니옵니다, 저하. 나리께서 일어나실 때까지 곁에서 살피도록 하겠나이다."

"힘들지... 않겠느냐?"

세자의 걱정스런 물음에 연희는 씩씩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 괜찮습니다."

세자도 오랜만에 연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부탁 하마."

세자는 연희를 뒤로 하고 걸어갔고, 연희는 그런 세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세자는 중간중간 멈칫하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으나, 연희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런 모습을 멀리서나마, 연희는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같은 시각, 정성스럽게 차린 제사상에 초를 밝히고 있던 소연은 스승인 백무가 남겨준 것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첫 번째 서책에는 매년 매월 매일 챙겨야 하는 것들에 관한 것과, 자기 삶에 대한 기록, 연구했던 내용들 따위가 적혀 있었다.

두 번째 서책은 최근 있었던 사교도의 사술에 대해 조사했던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소연은 문득 이 내용이 수현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첫 번째 책보다는 두 번째 책을 먼저 세세히 살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가는줄 모르고 책을 읽는 사이, 밤이지나 새벽이 되어 곧 아침으로 바뀌었고, 환한 햇살은 눈부시게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침이 온 세상을 밝힐 무렵에, 소연은 두 번째 책을 덮으며 꽤나 충격에 빠져버렸다.

"이럴 수가..."

소연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보따리 속에 있는 다른 물건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그것은 칼이었다.

칼집에서 칼을 꺼내니, 그 길이가 일곱 치 정도 되는 짧은 단검이었다.

단검은 짧은 검신을 뽐내는 듯, 스스로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소연은 놀란 눈으로 그 검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스승님, 이것이 파사신검(破邪神劍)입니까..."

파사신검이란 단검을 다시 유심히 살펴보았다.

"과연... 이 칼에 담긴 힘은 강맹하고, 서릿발 같구나."

이내 다시 칼 집속으로 칼을 넣으니, 느껴지던 기운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요망한 것들이 이 칼의 기운을 느껴 간사한 술수를 부릴까, 이 칼집으로 기운을 감추셨구나. 과연 스승님이시다."

소연은 칼에서 느껴졌던 신기(神氣)가 새삼 대단하다 생각했다.

어느새 그녀의 눈빛은 단호한 결심으로 반짝거렸다.

"반드시 스승님의 복수를 하고, 이 세상을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연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환하게 빛나는 아침 햇살은, 어둠을 물리치고 온 세상을 밝게 비추었다.

소연은 그러한 세상을 바라보며 용기를 가득 가슴속에 담아둔 체, 보따리를 손에 들고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이른 아침에 일찍 잠에서 깬 수현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아침 바람을 맞고 있었다.

"아직 무리하시면 아니 됩니다."

물을 갈러 갔다 돌아오던 연희는 수현을 보고 놀라 다가와 걱정스럽게 나무라자, 수현이 어렵사리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괜찮다. 그보다, 내가 며칠간 누워 있었던 것이냐?"

"보름입니다. 보름 동안 깨어나지 못하셨습니다."

수현은 긴 한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어리석었다. 스승님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와 싸워서도 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십보장을 너무 과신했던 모양이구나."

"염려치 마십시오. 반드시 잡아 그 죄를 묻게 할 것입니다."

연희의 말에 수현이 빙그레 웃더니, 연희의 행색을 살폈다.

"네가 어찌 의녀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냐?"

연희도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살짝 멋쩍은듯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게... 나리를 간병할 겸.... 그리되었습니다."

연희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수현이 피식 웃음 지었다.

"내 간병을 핑계로 너를 다시 궁으로 들인 것이구나. 잘한 생각이다. 저들이 너를 그냥 둘 것 같지는 않으니."

연희는 수현의 말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와서 열심히 간병하였습니다."

입을 삐죽이며 궁시렁 거리듯 이야기하니, 수현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고맙다. 세자마마는 별일 없으시냐?"

"예, 그런데... 나리께서 그리되시고, 저하께서 참으로 속상해하셨습니다."

"내가 원체 잘난 체를 해놨으니... 저하께서도 믿으신 거지."

"도대체 누구길래, 나리를 이리 만든 것입니까?"

수현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수현은 주동환이란 인물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못했으나, 그가 사교도들의 모임에서 연희의 곁에 있던 사람임은 기억해낼 수 있었다.

"모르겠구나. 하지만, 차차 알아내야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 말고 저하를 도와줄 사람이 더 필요할 것 같다. 특히 외부에서 저들의 속셈을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니..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좌포청을 맡고 있는 포도대장 엄길상은 내 스승님과 아주 절친한 사이시다. 내가 뵈면 말씀드리겠으나, 그분이라면 사교도들에 대한 조사를 도와주실 것이다."

이어 연희를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웃으며 말을 했다.

"의녀 차림이 제법 어울리는구나. 어쩌면 그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연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예? 도움이 되다니요?"

"세자마마를 뵈 오면, 보다 상세히 이야기해주마. 지금은..."

수현이 고개를 돌려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이 아침이 너무 상쾌하구나."

연희는 큰 눈을 껌뻑거리며, 눈을 감고 있는 수현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연희가 다시 수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예상대로 세자가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다음이었다.

세자의 행차를 본 연희와 수현은 얼른 공손히 인사하였고, 세자는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서며 꾸짓듯 엄하게 말했다.

"이 사람아,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벌써 이리 나와 있어도 되는 것이야?"

수현은 괜찮다는 듯이 씨익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그저 조금 불편할 뿐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네. 죽다 살아났거늘.. 어서 들어가 더 쉬도록 하게."

"예... 그리하겠습니다..그리고 저하,,백무에게 갚지 못할 빚을 져버렸습니다."

세자와 연희는 갑작스런 수현의 말에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제가 사경을 헤맬 때, 백무가 제게 말을 해주었습니다. 돌아가서 세자마마를 도우라고.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전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을것입니다."

세자와 연희의 표정이 안타까움으로 변하였다.

"저하, 좌포청 포도대장 엄길상은 스승님의 절친이십니다. 당장은 제가 몸도 다 낫지 않았고, 제가 맡은 소임 때문에라도 바깥출입이 원활치 않으니, 엄길상 대장을 만나 도움을 청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엄길상? 좌포청의 포도대장쯤 되는 인물이라면, 좌상이 아무에게나 맡겼을 리 없다. 그런 사람이 과연 우리를 도우려 하겠느냐?"

"엄길상과 스승님이 절친 사이라는 것은, 그가 포도대장이 되기 전에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는 병판과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 병판이 그를 매우 좋게 보고 있는 듯합니다."

"병판이라... 정말... 믿을 수 있겠는가?"

"스승님께서 보장하는 사람입니다. 한번 만나보시지요. 사교도 무리에 대한 진상조사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수현의 이야기에 세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알았다. 한번 만나보도록 하마."

"그리고..."

수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기왕이면 좌포청의 도움을 받아 연희를 좌포청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수현의 말에 세자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 좌포청에 연희를?"

"예, 좌포청이 사교도에 대한 조사를 한다 하면, 이것은 그들의 소임이니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통상 의녀들은 이러한 수사를 종종 돕곤 하니, 지금 의녀 신분을 하고 있는 김에, 좌포청에 협조를 하는 형식으로 하여 가면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사교도들의 본거지를 안전하게 살필 수 있으니, 기억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세자는 뭔가 망설이는듯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물었다.

"허나... 위험하지 않겠느냐? 차라리 궁궐 안이 안전할 듯싶은데..."

"물론 그러하지요. 허니, 평소에는 궁궐에서 머물다가 낮에만 좌포청에 가서 일을 돕는 형식을 취하면 될 듯하옵니다. 의녀의 신분이니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의 편의를 도모하신다면, 좌포청의 수사를 돕는 의녀들이 묶을 별관을 따로 지정하여 주십시오. 허면, 연희가 좀 더 편하게 좌포청과 궁궐을 다닐 수 있고, 또한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자는 수현의 말이 의미 있게 들리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은 생각이구나. 그 일은 일단 내가 엄길상이란 자를 만나본 연후에 결정하도록 하자."

"예, 저하."

이어 세자가 연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해낼 수... 있겠느냐?"

연희는 씩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할 수 있습니다."

"그래, 혹여 위험하다 싶으면 지체없이 궁궐로 도망 오너라. 언제든지."

"아닙니다. 이제야 제가 뭔가 도울 것이 있는 듯하여 기쁩니다."

그런 연희를 세자가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자, 수현은 그런 세자의 표정을 살피며 어이없는 실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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