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3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 됩니다. 될 것 같습니다.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가 꽤나 흥분해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여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 그래? 어서... 어서 해보거라.
- 예, 지금 바로....
그리고 무언가에 쑥 빨려 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라마는 지금 상황이 꿈속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꿈속에 보이는 상황은, 자신이 이 세계를 넘어올 당시의 상황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나를 이 세계로 데려왔구나.'
그런 자각도 잠시, 다른 여인의 의구심이 전해져 왔다.
- 그런데... 왜 이 사람만 가능한 것이냐?
- 그것이...
라마를 끌어당기는 여인이 당황해하는 듯했다.
- 다른 사람들은 힘이 강해 당길 수가 없었습니다.
- 뭐? 그럼 이 사람은?
- 이 사람은 약해서....
꿈이지만 기분이 나빴다.
'그러니까... 내가 호구라서 이 세계로 끌려왔단 말인가?'
따져 묻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그래서야 어찌 우리에게 도움이 된단 말이냐? 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를 데려와도 시원치 않을 터인데...
- 소, 송구합니다.
- 됐다. 그만두거라.
- 하오나, 공주님... 이미 당기기 시작해서 도중에 그만두면...
- 됐으니까 때려치우거라!
앙칼진 목소리를 끝으로, 돌연 라마는 자신을 끌어당기던 힘이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뭐? 아놔 이것들이...'
어딘지 알 수 없는 무저갱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라마가 소리 질렀다.
"야이, 무책임한 개새...."
소리를 지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라마는,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씩씩 거리며 분한 마음을 삼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오, 소협?
자다 말고 라마의 고함소리를 들은 송이개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먼저 깬듯한 유림은 인상이란 인상은 다 쓰면서 이불속으로 숨어들었다.
"후.... 아니에요. 악몽을 꿨어요."
라마는 손사래를 치며 도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기분 엿같다. 이것들이 누굴 쓰레기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찾아야겠다. 이것들이 누군지 찾아서 요절을 내든가 해야지, 이대로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오냐, 내 너희들을 기필코 찾아내서 날 내팽겨 쳐버린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속으로 다짐, 또 다짐을 하며 분을 삭이는 라마였다.
그리고 다시 잠들지 못한 체, 뒤척거리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이르긴 해도, 이미 아침에 다다르고 있는 시간이었다.
아직 어둡지만, 아마도 곧 해가 밝아올 것이다.
"후~"
라마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어디 가십니까?"
송이개가 걱정스러운 듯 묻는 말에, 라마는 다시금 손사래를 쳐 보이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잠이 깨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밖으로 나온 라마는 1층으로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으...."
기지개를 켜는 라마는 항상 주인장이 앉아있던 입구 쪽을 바라보니, 누군가 그곳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쯧쯧... 잠은 편히 자지."
라마가 그를 깨우기 위해 다가가 그의 몸을 흔들었으나, 반응이 이상했다.
"응?"
순간 놀란 라마가 주춤 물러섰다.
죽어 있었다. 아래쪽으로 피가 흥건하였고, 목 부위에 검상이 보였다.
"이건?"
놀란 라마가 위쪽을 올려다 보고는 후다닥 다시 2층으로 돌라갔다.
어제 풍진표국 사람들이 묵은 방 쪽으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자마자 검이 날아들었다.
"뭣?"
빠르고 기척 없는 검이었다.
순식간에 라마의 목을 꿰뚫어버렸고, 피가 울컥 뿜어져 나오는 그 순간에도, 라마는 눈앞에 상황을 목도할 수 있었다.
이미 죽어있는 풍진표국 사람들, 그리고 붙잡혀 있는 조원영과 고운월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
"이...!"
라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란 송이개가 자신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시오, 소협?"
"아, 아니에요. 주무세요."
라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챙겨들자, 송이개는 더더욱 놀란 표정이 되었다.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나오지 말고 안에 계세요."
라마는 그 말을 남기고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갔다.
기척을 죽이고 살금살금 풍진표국 사람들이 묵기로 한 방으로 향했고, 기척을 살피던 라마는 문을 벌컥 염과 동시에 안쪽으로 검을 쭉 내뻗었다.
"컥!"
아니나 다를까 문 앞을 지키던 자객이 라마의 검을 정면에서 맞고 비틀거렸다.
주위로 복면을 한 자객이 더 있었는데, 잠깐이지만 그들의 눈에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소리 없이 라마를 공격해 들어왔다.
하지만 자객의 강점은 기척 없는 공격으로 적의 허점을 파고드는 것이다.
모습이 드러난 이상, 그들은 일개 무사보다도 취약하다.
직도의 형태를 띠고 있는 라마의 검이 대략 두자 정도의 길이라면, 자객인 저들이 가진 것은 한자 정도밖에 안 되는 조금 짧은 검이었다.
한치가 길면 한치만큼 유리하다 했던가, 더군다나 다수를 상대로 싸우는데 익숙한 라마는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순식간에 서너 명이 라마의 검에 쓰러지고, 남은 두 명은 라마의 무공에 놀라 주춤거렸다.
"고수다. 물러나자."
누군가 말하며 창밖으로 몸을 던지자, 다른 한 명도 그 뒤를 따라 서둘러 도망갔다.
라마는 구태여 도망치는 그들을 쫓지 않았다.
그들이 도망치는 사이, 라마는 묶여 있는 조원영과 고운월을 풀어주었고, 그들은 손이 풀리자마자 입에 물린 재갈부터 풀어냈다.
"저들을 쫓았어야지요!"
답답하다는 듯이 고운월이 말하자, 라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이... 고맙다는 말은 못 하고... 댁들을 지키기로 한 거지, 복수해주기로 한 게 아니잖소?"
"소협, 저들이 저 둘만 왔을 것 같습니까? 이제 곧 병사들이 들이닥칠 겁니다."
라마는 좀 귀찮아졌다는 생각에 죽고 다시 시작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서 이곳을 피합시다."
그러나 그것도 좀 귀찮기는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아직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니 벌써부터 머리에 칼을 꽂고 싶지는 않았다.
고운월과 조원영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니, 라마가 그 뒤를 쫓아 나왔다.
곧바로 방으로 돌아온 라마가 송이개와 유림을 보고 소리치듯 말했다.
"빨리 나와요, 이곳으로 쳐들어 온답니다."
놀라서 서둘러 나오는 송이개와 유림은, 제대로 눈조차 뜨지 못한 체 부랴부랴 나섰다.
"누가 쳐들어 온단 말입니까?"
송이개가 놀라 묻는 말에, 라마는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나도 모르겠는데, 방금 자객 네댓을 죽였습니다. 빨리 갑시다."
라마는 말을 하며 고운월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앞쪽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큼지막한 칼을 들고 막아섰다.
그들 모두 복면으로 눈만 드러내고 있었는데, 아까의 자객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고운월이 검을 뽑아들자, 그들은 망설임 없이 공격해 들어왔다.
고운월이 맞서는 사이, 라마가 끼어들었다.
라마는 그들 사이사이를 비집고 활보하며 한명 한명 쳐내기 시작했다.
십여 명의 사내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데는 불과 일다경도 걸리지 않았다.
"상당하시군요."
놀라 해 하는 조원영의 목소리에 조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깨를 한번 으슥해 보인 라마는, 다시금 꿈 생각에 기분이 나빠졌다.
'이런 나를 쓰레기 취급해? 이 잡것들, 잡히기만 해 봐라.'
그런 라마를 보며 고운월이 재촉했다.
"서두릅시다. 더 올 겁니다."
고운월이 조원영을 데리고 길이 아닌 수풀 쪽을 파고드니, 그 뒤를 라마와 송이개, 유림이 뒤따랐다.
"넌 뭐하러 따라와? 그냥 너 갈길 가지."
송이개가 유림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하니, 유림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쳤소? 보니까 다 죽은 모양인데, 여기 혼자 남으라고? 됐소. 내 아무리 구박받아도, 소협을 따라가겠소."
수풀을 지나 산 위로 오르는 길은, 제대로 된 길이 아니다 보니 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고운월이 맨 앞에서 길을 살피며 앞장서 가고, 조원영, 라마, 송이개, 유림 순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뒤따라가던 라마의 눈에, 힘겹게 산을 오르는 조원영이 보였다.
귀한 집에서 귀하게만 자라서라고 하기엔, 자신도 불과 얼마 전까지 허약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쓸데없는 동질감을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조원영이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문득 눈앞에서 움직이는 조원영의 엉덩이가 큼지막한 것이, 자기 못지않게 맨날 앉아만 있어서 엉덩이가 퍼졌나 보다 생각하는 찰나, 앞쪽에 조원영이 순간 발이 미끄러졌다.
"읏!"
미끄러지면서 뒤로 훌러덩 나자빠질 뻔한 그 순간, 라마가 얼른 그를 붙잡아 주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조원영을 붙잡는다는 것이, 흡사 뒤에서 끌어안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물컹'
"어?"
라마가 당황해하는 사이, 조원영이 후다닥 몸을 세우고 일어났다.
"가, 감사합니다."
경황없이 인사하고 얼른 고운월을 뒤따라 걷는 것을, 라마가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오, 소협?"
뒤따르던 송이개가 가만히 멈춰있는 라마를 보며 묻는 말에, 라마가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컹?"
"예? 뭐라구요?"
뒤에서 유림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아 빨리빨리 갑시다. 힘들어 죽겠구만."
라마는 그제야 잠에서 깨어난 듯, 움찔하고는 다시 고운월과 조원영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분명 물컹했는데.... 그건....'
라마는 의심의 눈초리로 조원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오랜 시간 앉아있어서 퍼진 것이라 생각했던 엉덩이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괜스레 심장이 두근 두근 거리는 것이....
"허...참...."
그러고 보니 곱상한 것이 좀 이쁘장하더라.
말투도 여느 사내들과는 달랐다. 황족이라 그런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지.
그래. 계약은 계약이니, 약속된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목숨 걸고 지켜줘야겠다.
남아로써 어찌 보면 당연한 자세가 아닌가!
그렇다고 반해서 고백을 하거나, 결혼을 해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모용연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라마는 수많은 생각을 이어가며, 그렇게 고운월을 따라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 됩니다. 될 것 같습니다.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가 꽤나 흥분해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여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 그래? 어서... 어서 해보거라.
- 예, 지금 바로....
그리고 무언가에 쑥 빨려 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라마는 지금 상황이 꿈속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꿈속에 보이는 상황은, 자신이 이 세계를 넘어올 당시의 상황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나를 이 세계로 데려왔구나.'
그런 자각도 잠시, 다른 여인의 의구심이 전해져 왔다.
- 그런데... 왜 이 사람만 가능한 것이냐?
- 그것이...
라마를 끌어당기는 여인이 당황해하는 듯했다.
- 다른 사람들은 힘이 강해 당길 수가 없었습니다.
- 뭐? 그럼 이 사람은?
- 이 사람은 약해서....
꿈이지만 기분이 나빴다.
'그러니까... 내가 호구라서 이 세계로 끌려왔단 말인가?'
따져 묻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그래서야 어찌 우리에게 도움이 된단 말이냐? 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를 데려와도 시원치 않을 터인데...
- 소, 송구합니다.
- 됐다. 그만두거라.
- 하오나, 공주님... 이미 당기기 시작해서 도중에 그만두면...
- 됐으니까 때려치우거라!
앙칼진 목소리를 끝으로, 돌연 라마는 자신을 끌어당기던 힘이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뭐? 아놔 이것들이...'
어딘지 알 수 없는 무저갱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라마가 소리 질렀다.
"야이, 무책임한 개새...."
소리를 지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라마는,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씩씩 거리며 분한 마음을 삼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오, 소협?
자다 말고 라마의 고함소리를 들은 송이개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먼저 깬듯한 유림은 인상이란 인상은 다 쓰면서 이불속으로 숨어들었다.
"후.... 아니에요. 악몽을 꿨어요."
라마는 손사래를 치며 도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기분 엿같다. 이것들이 누굴 쓰레기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찾아야겠다. 이것들이 누군지 찾아서 요절을 내든가 해야지, 이대로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오냐, 내 너희들을 기필코 찾아내서 날 내팽겨 쳐버린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속으로 다짐, 또 다짐을 하며 분을 삭이는 라마였다.
그리고 다시 잠들지 못한 체, 뒤척거리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이르긴 해도, 이미 아침에 다다르고 있는 시간이었다.
아직 어둡지만, 아마도 곧 해가 밝아올 것이다.
"후~"
라마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어디 가십니까?"
송이개가 걱정스러운 듯 묻는 말에, 라마는 다시금 손사래를 쳐 보이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잠이 깨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밖으로 나온 라마는 1층으로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으...."
기지개를 켜는 라마는 항상 주인장이 앉아있던 입구 쪽을 바라보니, 누군가 그곳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쯧쯧... 잠은 편히 자지."
라마가 그를 깨우기 위해 다가가 그의 몸을 흔들었으나, 반응이 이상했다.
"응?"
순간 놀란 라마가 주춤 물러섰다.
죽어 있었다. 아래쪽으로 피가 흥건하였고, 목 부위에 검상이 보였다.
"이건?"
놀란 라마가 위쪽을 올려다 보고는 후다닥 다시 2층으로 돌라갔다.
어제 풍진표국 사람들이 묵은 방 쪽으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자마자 검이 날아들었다.
"뭣?"
빠르고 기척 없는 검이었다.
순식간에 라마의 목을 꿰뚫어버렸고, 피가 울컥 뿜어져 나오는 그 순간에도, 라마는 눈앞에 상황을 목도할 수 있었다.
이미 죽어있는 풍진표국 사람들, 그리고 붙잡혀 있는 조원영과 고운월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
"이...!"
라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란 송이개가 자신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시오, 소협?"
"아, 아니에요. 주무세요."
라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챙겨들자, 송이개는 더더욱 놀란 표정이 되었다.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나오지 말고 안에 계세요."
라마는 그 말을 남기고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갔다.
기척을 죽이고 살금살금 풍진표국 사람들이 묵기로 한 방으로 향했고, 기척을 살피던 라마는 문을 벌컥 염과 동시에 안쪽으로 검을 쭉 내뻗었다.
"컥!"
아니나 다를까 문 앞을 지키던 자객이 라마의 검을 정면에서 맞고 비틀거렸다.
주위로 복면을 한 자객이 더 있었는데, 잠깐이지만 그들의 눈에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소리 없이 라마를 공격해 들어왔다.
하지만 자객의 강점은 기척 없는 공격으로 적의 허점을 파고드는 것이다.
모습이 드러난 이상, 그들은 일개 무사보다도 취약하다.
직도의 형태를 띠고 있는 라마의 검이 대략 두자 정도의 길이라면, 자객인 저들이 가진 것은 한자 정도밖에 안 되는 조금 짧은 검이었다.
한치가 길면 한치만큼 유리하다 했던가, 더군다나 다수를 상대로 싸우는데 익숙한 라마는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순식간에 서너 명이 라마의 검에 쓰러지고, 남은 두 명은 라마의 무공에 놀라 주춤거렸다.
"고수다. 물러나자."
누군가 말하며 창밖으로 몸을 던지자, 다른 한 명도 그 뒤를 따라 서둘러 도망갔다.
라마는 구태여 도망치는 그들을 쫓지 않았다.
그들이 도망치는 사이, 라마는 묶여 있는 조원영과 고운월을 풀어주었고, 그들은 손이 풀리자마자 입에 물린 재갈부터 풀어냈다.
"저들을 쫓았어야지요!"
답답하다는 듯이 고운월이 말하자, 라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이... 고맙다는 말은 못 하고... 댁들을 지키기로 한 거지, 복수해주기로 한 게 아니잖소?"
"소협, 저들이 저 둘만 왔을 것 같습니까? 이제 곧 병사들이 들이닥칠 겁니다."
라마는 좀 귀찮아졌다는 생각에 죽고 다시 시작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서 이곳을 피합시다."
그러나 그것도 좀 귀찮기는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아직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니 벌써부터 머리에 칼을 꽂고 싶지는 않았다.
고운월과 조원영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니, 라마가 그 뒤를 쫓아 나왔다.
곧바로 방으로 돌아온 라마가 송이개와 유림을 보고 소리치듯 말했다.
"빨리 나와요, 이곳으로 쳐들어 온답니다."
놀라서 서둘러 나오는 송이개와 유림은, 제대로 눈조차 뜨지 못한 체 부랴부랴 나섰다.
"누가 쳐들어 온단 말입니까?"
송이개가 놀라 묻는 말에, 라마는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나도 모르겠는데, 방금 자객 네댓을 죽였습니다. 빨리 갑시다."
라마는 말을 하며 고운월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앞쪽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큼지막한 칼을 들고 막아섰다.
그들 모두 복면으로 눈만 드러내고 있었는데, 아까의 자객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고운월이 검을 뽑아들자, 그들은 망설임 없이 공격해 들어왔다.
고운월이 맞서는 사이, 라마가 끼어들었다.
라마는 그들 사이사이를 비집고 활보하며 한명 한명 쳐내기 시작했다.
십여 명의 사내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데는 불과 일다경도 걸리지 않았다.
"상당하시군요."
놀라 해 하는 조원영의 목소리에 조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깨를 한번 으슥해 보인 라마는, 다시금 꿈 생각에 기분이 나빠졌다.
'이런 나를 쓰레기 취급해? 이 잡것들, 잡히기만 해 봐라.'
그런 라마를 보며 고운월이 재촉했다.
"서두릅시다. 더 올 겁니다."
고운월이 조원영을 데리고 길이 아닌 수풀 쪽을 파고드니, 그 뒤를 라마와 송이개, 유림이 뒤따랐다.
"넌 뭐하러 따라와? 그냥 너 갈길 가지."
송이개가 유림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하니, 유림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쳤소? 보니까 다 죽은 모양인데, 여기 혼자 남으라고? 됐소. 내 아무리 구박받아도, 소협을 따라가겠소."
수풀을 지나 산 위로 오르는 길은, 제대로 된 길이 아니다 보니 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고운월이 맨 앞에서 길을 살피며 앞장서 가고, 조원영, 라마, 송이개, 유림 순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뒤따라가던 라마의 눈에, 힘겹게 산을 오르는 조원영이 보였다.
귀한 집에서 귀하게만 자라서라고 하기엔, 자신도 불과 얼마 전까지 허약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쓸데없는 동질감을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조원영이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문득 눈앞에서 움직이는 조원영의 엉덩이가 큼지막한 것이, 자기 못지않게 맨날 앉아만 있어서 엉덩이가 퍼졌나 보다 생각하는 찰나, 앞쪽에 조원영이 순간 발이 미끄러졌다.
"읏!"
미끄러지면서 뒤로 훌러덩 나자빠질 뻔한 그 순간, 라마가 얼른 그를 붙잡아 주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조원영을 붙잡는다는 것이, 흡사 뒤에서 끌어안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물컹'
"어?"
라마가 당황해하는 사이, 조원영이 후다닥 몸을 세우고 일어났다.
"가, 감사합니다."
경황없이 인사하고 얼른 고운월을 뒤따라 걷는 것을, 라마가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오, 소협?"
뒤따르던 송이개가 가만히 멈춰있는 라마를 보며 묻는 말에, 라마가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컹?"
"예? 뭐라구요?"
뒤에서 유림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아 빨리빨리 갑시다. 힘들어 죽겠구만."
라마는 그제야 잠에서 깨어난 듯, 움찔하고는 다시 고운월과 조원영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분명 물컹했는데.... 그건....'
라마는 의심의 눈초리로 조원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오랜 시간 앉아있어서 퍼진 것이라 생각했던 엉덩이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괜스레 심장이 두근 두근 거리는 것이....
"허...참...."
그러고 보니 곱상한 것이 좀 이쁘장하더라.
말투도 여느 사내들과는 달랐다. 황족이라 그런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지.
그래. 계약은 계약이니, 약속된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목숨 걸고 지켜줘야겠다.
남아로써 어찌 보면 당연한 자세가 아닌가!
그렇다고 반해서 고백을 하거나, 결혼을 해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모용연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라마는 수많은 생각을 이어가며, 그렇게 고운월을 따라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