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 #2
야심한 시각, 연희는 포도청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의금부로 돌아가고 있었다.
행여나 해가 뜰까, 서둘러 발길을 재촉하고 있던 그들은, 일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웬 놈이냐?"
누군가 그들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연희 역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여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이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찰나의 순간, 앞에 서 있던 병사가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쓰러지고, 어느새 삿갓을 쓴 괴한이 칼을 빼 든 체 바로 앞에 다가와 서 있었다.
"어?"
너무 갑작스러워 잠시 당황하는 사이, 괴한의 칼날은 멈추지 않고 벼락같이 움직였다.
부지불식간에 병사들이 칼에 맞고 쓰러지는 순간, 연희는 삿갓 아래 감춰진 얼굴을 보았다.
"안돼!"
연희가 소리치며 맨 뒤쪽에 서 있던 여학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칼날은 연희의 코 앞에서 멈춰 섰고, 여학수는 자신이 눈 깜짝할 사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침을 꿀꺽 삼켰다.
삿갓을 살짝 들어 올린 그는, 다름 아닌 주동환이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병사 네 명을 쓰러뜨리고는 칼을 내리고 한걸음 물러선 주동환의 앞에 연희와 여학수만이 남은 상태였다.
"가자. 이곳에서 너는, 사실이든 아니든, 그저 사교도의 한 사람일 뿐이다."
주동환의 말에 연희는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상관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이곳에 남을 것입니다."
순간, 주동환이 버럭 소리쳤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 세자는 너를 지켜주지 못해! 네가 고문당하고 혹사당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그는 이 나라의 세자니까! 국본이니까!"
이어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나는 아니다. 나는 세상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너를 지킬 것이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네가 무엇을 하든, 네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 줄 것이다."
연희는 주동환을 보며 안쓰러움과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저하의 곁에서 미력하나마 저하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주동환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그 끝을 알고 있느냐?"
"끝이라뇨?"
"세자의 목적은 어머니에 대한 복수다. 그 끝에는 천방주가 있다. 천방주가 죽으면, 어찌 되는지 아느냐?"
연희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주동환은 씁쓸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안다고? 아는 데도... 도와주고 싶은 것이냐?"
"예. 어차피... 제 몸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너는? 너는 어쩌고? 왜 너는, 너를 생각하지 않느냐?"
"저를 도와주시고 싶으시다면... 저하를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저를 돕는 것입니다."
검을 쥐고 있는 주동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 그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것이 너를 지키는 길이니까. 너의 의지가 그렇다 해도, 나는 너를 지킬 것이다. 그를 무너뜨리고, 좌절시킬 것이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네가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주동환은 칼을 칼집에 넣고는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걸어가 버렸다.
연희는 사라지는 주동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
포승줄에 묶여 무릎 꿇은 체 앉아 있는 우사의 좌우에는 어영위 병사들이 그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이미 조세춘과 수현, 그리고 소연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들 앞으로 세자가 막 들어서고 있었다.
"이자인가?"
세자의 묻는 말에, 수현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예. 이자가 필사장이 우사란 자입니다."
우사라 불린 이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체, 겁에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세자는 그런 우사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여, 우사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나를 보거라."
우사는 세자를 힐끔 보고는 두려움에 얼른 다시 고개를 숙여 버렸다.
"보다시피, 나는 세자다. 내 말 한마디면 네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효수할 수도 있다."
우사는 울상이 되어 얼른 엎드리며 말했다.
"저... 저하, 살려주십시오. 소인은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옵니다."
"그래, 알고 있다. 하여 네게 기회를 줄 것이다."
"예, 예, 하명하시옵소서..."
"정확히 그들이, 네게 무엇을 시킨 것이냐?"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것이... 처음에는 무슨 명부 같은 것을 써달라 했습니다. 헌데, 필사를 해야 한다며 몇 권의 서책을 가져다주었고, 그것을 보고 똑같이 적으라 하였습니다."
"몇 권의 책이라... 그 몇 권의 책에 내 필체가 있었단 말이냐?"
"소인이 정확히 알 순 없사오나, 분명 그리하였을 것이옵니다. 그저 필사만 하였을 뿐, 그것이 누구의 필체인지까지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네게 그 책들을 가져다준 사람이 누구냐?"
"소인은 잘 알지 못하오나... 얼핏 듣기로... 좌의정... 대감이라 들었습니다요."
"좌상이? 근자에 와병을 핑계로 입궐조차 하지 않는데, 언제 왕실 서책까지 가져다가 필사를 시켰단 말인가?"
세자는 의문을 표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우사를 보며 말했다.
"네 죄가 실로 무거워 그냥 용서해 줄 수는 없고... 네가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준다면, 네 죄를 눈감아 주도록 할 것이다."
우사는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던 목숨이건만 살려주고 용서해준다는 세자의 말에 희망이 깃든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예? 무... 무엇이옵니까?"
그러자 세자가 빙그레 웃어 보이며 말했다.
"필사장이에게 필사를 부탁하지 무얼 부탁하겠느냐? 어떠냐? 하겠느냐 말겠느냐?"
"여,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저하. 소신 최선을 다할 것이옵니다."
"그래. 고맙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세자가 수현을 보며 말했다.
"저들에게 들키지 않을 만한 장소를 물색하여 우사를 숨기거라. 저들이 눈치채면, 우사를 구하기는커녕, 죽여 입막음을 하려 할 것이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하며 우직한 대답을 하는 반면, 같은 말을 들은 우사는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어 세자가 우사를 보며 말했다.
"너는 이미 우리와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저들은 너를 죽이려 혈안이 될 것이니, 살고 싶다면 우리를 도와야 할 것이야."
"예, 예, 저하. 그리 하겠사옵니다."
벌벌 떠는 우사는 간곡한 어투로 대답하고 있었다.
세자는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는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소연이 얼른 뒤따르며 세자를 불렀다.
"저하."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세자가 소연을 돌아보자, 소연이 말을 이었다.
"감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그래?"
세자는 다시한번 주위를 둘러본 뒤,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럼 잠시 걸으면서 이야기하자."
"예."
앞장서 걷는 세자의 뒤를 따르며 소연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의 기록과, 서적들을 살펴보며 저들이 다루는 언령의 주술에 대해 많은 것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세자는 앞서 걸으며,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으나,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 무엇을 알아낸 것이냐?"
"언령이란 것이 죽은 자의 영혼으로 부리는 술수로, 그 사람이 가진 평소의 생각이나 의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은 이미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그래."
"허나, 그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평소의 신념, 또는 확신하고 있는 절대적인 믿음에는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신념, 믿음이라..."
"예. 그렇기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자보다는,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언령을 부려 대상자를 곤란하게 만들거나, 여론을 조작하는 용도로 쓰임새가 적당해 보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직접적인 통제가 필요한 인물은 기생령을 쓰고, 그 주위 인물들은 언령을 쓰는 방식이로구나."
"바로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이... 어째서 안영군에게는 덜 센 언령만을 쓴 것이냐? 그가... 직접적인 통제가 필요한 인물이 아니란 것인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사오나, 그에게는 유독 더 많은 언령을 사용한 것만은 분명하옵니다."
"어째서 그는 더 확실한 기생령의 술수를 알면서도, 언령의 술수를 쓴 것인가?"
"소인이 미루어 짐작키로, 그것은 아마도 미리 준비된 육신이 있는가 하는 문제와...."
소연이 말끝을 흐리자, 세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소연을 돌아보았다.
"문제와?"
끝말을 이어 되물으니, 소연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기생령은 본령을 잠재우고, 기생령이 육신을 지배하게 되는 술수이기 때문에... 오히려 들킬 위험이 높습니다. 기생령으로 부려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 데, 그 조건을 쉽게 충족시킬 수 있었던 대상이 바로 율교의 교도들이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세자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기생령으로 부릴 수 있는... 죽어서도 충성하는 자를 만들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다는 것이냐?"
"그렇지 않는다면, 매번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그것도 자기 말을 잘 들어줄만한 영혼을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종교를 만들어 자신을 신봉하게 만들고, 그렇게 생긴 신봉자들을 기생령의 술수로 부린다. 헌데, 그렇다면 더더욱 이번 율교의 교도들이 죽었을 때, 기생령으로 부렸어야 하는 것 아니냐?"
"저하, 저도 같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교도로 잡혀온 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냐?"
세자가 다급히 되묻는 말에, 소연이 바로 이어 말했다.
"그것이... 가난이었습니다."
"가난?"
"예, 가난하였기에, 먹을 것이 궁하였고, 가난하였기에, 배운 것이 부족했습니다."
다시 한번 세자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무지하였구나!"
"바로 그렇습니다."
"무지하였기에... 그런 자들로 기생령을 만들어봐야 얼마 못가 들통이 났던 거야. 그래... 그래서..."
세자는 다시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 어머니는 기생령에 지배당했던 것이다. 육신을 빼앗겼던 어머니는 세자를 죽이려 들고 왕을 죽이려 들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까지는 이미 기생령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했던 것은, 어렵사리 왕비의 몸을 빼앗았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런 무모한 행동으로, 기껏 지배한 왕비를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오히려 왕비의 육신을 빼앗은 사실을 숨기고 배후에서 조작했다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이루었을 텐데.
그 진실을 알기 위해 고민을 해왔던 세자가 비로소 답을 얻은 것이었다.
"그것은.... 실패였어."
그렇다. 기생령으로 왕비의 몸을 빼앗았으나, 왕비로서 알아야 할 수많은 것들을 기생령이 알지 못하였으니,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왕비의 몸을 빼앗고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게 되자, 기생령의 존재를 들키기 전에 황급히 왕비를, 어머니를 죽게 만든 것이었어. 그래서 언령의 술수를 만든 거야. 그 사람의 의지만 바꿀 수 있다면, 굳이 무리해서 기생령 같은 술수를 부리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지. 더욱이 요직에 있는 권력가의 육신을 빼앗으려면, 거기에 맞는 학식이 필요할 텐데... 그런 영혼은 구하기가 쉽지 않고, 자신의 명령에 따를 이유도 없으니... 기생령은 최소화하고, 그 대신 언령을 부리기 시작한 거야."
소연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바로 그러하옵니다. 적은 수의 기생령과 다수의 언령이라면 본인이 원하는 대로 정사를 이끌어 나갈 수 있으니 그리했을 것입니다."
세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소연을 보며 물었다.
"혹, 한번 기생령이 되었던 몸이 다른 영혼으로 바뀌거나 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냐?"
세자가 뜻밖에 질문을 하자, 소연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예.. 딱히 안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가령, 한번 기생령이 들어갔다 나오면 안 좋은 기운이 남는다던가, 그런 것은 없는 것이냐?"
세자가 그 말을 하자, 소연이 뭔가 생각난 듯 "아!" 소리를 내며 말했다.
"있습니다. 한번 기생령이 깃들면 영혼을 바꾸거나, 자주 육신을 들락거리지 말아야 한다고 본 것 같습니다. 이유는... 처음 기생령을 만들 때, 본령이 인지하기 전에, 순식간에 본령을 봉인하고 기생령으로 지배해야, 온전히 육신을 지배한다고 보았습니다. 본령이 기생령을 인지하면, 잠재의식에서부터 저항하여 온전히 지배하기 힘들다고 보았습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역시나 그렇구나."
그런 세자를 보며 소연이 물었다.
"어찌 그러한 것을 짐작하셨습니까?"
"그래야 이야기가 맞기 때문이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그 천방주란 자가 내 몸을 노린다 들었다. 지금의 좌포청 포도대장이나, 어영위의 도총부 복귀는 모두 그래서 내려진 조치였다 들었다. 헌데 근래 들어 나를 위기로 모는 것을 보고, 뭔가 계획이 바뀌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 그자가 계획을 바꾼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몸을 노리고 있어."
"그게 누구이옵니까?"
소연이 묻는 말에, 세자가 소연을 보며 말했다.
"안영군이다. 안영군이라면 충분히 기생령을 쓸 법도 한데, 굳이 다수의 언령을 쓰는 이유는 자신이 그 육신을 노리고 있기 때문인 것이야."
행여나 해가 뜰까, 서둘러 발길을 재촉하고 있던 그들은, 일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웬 놈이냐?"
누군가 그들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연희 역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여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이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찰나의 순간, 앞에 서 있던 병사가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쓰러지고, 어느새 삿갓을 쓴 괴한이 칼을 빼 든 체 바로 앞에 다가와 서 있었다.
"어?"
너무 갑작스러워 잠시 당황하는 사이, 괴한의 칼날은 멈추지 않고 벼락같이 움직였다.
부지불식간에 병사들이 칼에 맞고 쓰러지는 순간, 연희는 삿갓 아래 감춰진 얼굴을 보았다.
"안돼!"
연희가 소리치며 맨 뒤쪽에 서 있던 여학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칼날은 연희의 코 앞에서 멈춰 섰고, 여학수는 자신이 눈 깜짝할 사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침을 꿀꺽 삼켰다.
삿갓을 살짝 들어 올린 그는, 다름 아닌 주동환이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병사 네 명을 쓰러뜨리고는 칼을 내리고 한걸음 물러선 주동환의 앞에 연희와 여학수만이 남은 상태였다.
"가자. 이곳에서 너는, 사실이든 아니든, 그저 사교도의 한 사람일 뿐이다."
주동환의 말에 연희는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상관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이곳에 남을 것입니다."
순간, 주동환이 버럭 소리쳤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 세자는 너를 지켜주지 못해! 네가 고문당하고 혹사당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그는 이 나라의 세자니까! 국본이니까!"
이어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나는 아니다. 나는 세상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너를 지킬 것이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네가 무엇을 하든, 네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 줄 것이다."
연희는 주동환을 보며 안쓰러움과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저하의 곁에서 미력하나마 저하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주동환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그 끝을 알고 있느냐?"
"끝이라뇨?"
"세자의 목적은 어머니에 대한 복수다. 그 끝에는 천방주가 있다. 천방주가 죽으면, 어찌 되는지 아느냐?"
연희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주동환은 씁쓸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안다고? 아는 데도... 도와주고 싶은 것이냐?"
"예. 어차피... 제 몸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너는? 너는 어쩌고? 왜 너는, 너를 생각하지 않느냐?"
"저를 도와주시고 싶으시다면... 저하를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저를 돕는 것입니다."
검을 쥐고 있는 주동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 그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것이 너를 지키는 길이니까. 너의 의지가 그렇다 해도, 나는 너를 지킬 것이다. 그를 무너뜨리고, 좌절시킬 것이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네가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주동환은 칼을 칼집에 넣고는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걸어가 버렸다.
연희는 사라지는 주동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
포승줄에 묶여 무릎 꿇은 체 앉아 있는 우사의 좌우에는 어영위 병사들이 그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이미 조세춘과 수현, 그리고 소연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들 앞으로 세자가 막 들어서고 있었다.
"이자인가?"
세자의 묻는 말에, 수현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예. 이자가 필사장이 우사란 자입니다."
우사라 불린 이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체, 겁에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세자는 그런 우사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여, 우사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나를 보거라."
우사는 세자를 힐끔 보고는 두려움에 얼른 다시 고개를 숙여 버렸다.
"보다시피, 나는 세자다. 내 말 한마디면 네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효수할 수도 있다."
우사는 울상이 되어 얼른 엎드리며 말했다.
"저... 저하, 살려주십시오. 소인은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옵니다."
"그래, 알고 있다. 하여 네게 기회를 줄 것이다."
"예, 예, 하명하시옵소서..."
"정확히 그들이, 네게 무엇을 시킨 것이냐?"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것이... 처음에는 무슨 명부 같은 것을 써달라 했습니다. 헌데, 필사를 해야 한다며 몇 권의 서책을 가져다주었고, 그것을 보고 똑같이 적으라 하였습니다."
"몇 권의 책이라... 그 몇 권의 책에 내 필체가 있었단 말이냐?"
"소인이 정확히 알 순 없사오나, 분명 그리하였을 것이옵니다. 그저 필사만 하였을 뿐, 그것이 누구의 필체인지까지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네게 그 책들을 가져다준 사람이 누구냐?"
"소인은 잘 알지 못하오나... 얼핏 듣기로... 좌의정... 대감이라 들었습니다요."
"좌상이? 근자에 와병을 핑계로 입궐조차 하지 않는데, 언제 왕실 서책까지 가져다가 필사를 시켰단 말인가?"
세자는 의문을 표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우사를 보며 말했다.
"네 죄가 실로 무거워 그냥 용서해 줄 수는 없고... 네가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준다면, 네 죄를 눈감아 주도록 할 것이다."
우사는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던 목숨이건만 살려주고 용서해준다는 세자의 말에 희망이 깃든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예? 무... 무엇이옵니까?"
그러자 세자가 빙그레 웃어 보이며 말했다.
"필사장이에게 필사를 부탁하지 무얼 부탁하겠느냐? 어떠냐? 하겠느냐 말겠느냐?"
"여,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저하. 소신 최선을 다할 것이옵니다."
"그래. 고맙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세자가 수현을 보며 말했다.
"저들에게 들키지 않을 만한 장소를 물색하여 우사를 숨기거라. 저들이 눈치채면, 우사를 구하기는커녕, 죽여 입막음을 하려 할 것이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하며 우직한 대답을 하는 반면, 같은 말을 들은 우사는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어 세자가 우사를 보며 말했다.
"너는 이미 우리와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저들은 너를 죽이려 혈안이 될 것이니, 살고 싶다면 우리를 도와야 할 것이야."
"예, 예, 저하. 그리 하겠사옵니다."
벌벌 떠는 우사는 간곡한 어투로 대답하고 있었다.
세자는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는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소연이 얼른 뒤따르며 세자를 불렀다.
"저하."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세자가 소연을 돌아보자, 소연이 말을 이었다.
"감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그래?"
세자는 다시한번 주위를 둘러본 뒤,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럼 잠시 걸으면서 이야기하자."
"예."
앞장서 걷는 세자의 뒤를 따르며 소연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의 기록과, 서적들을 살펴보며 저들이 다루는 언령의 주술에 대해 많은 것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세자는 앞서 걸으며,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으나,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 무엇을 알아낸 것이냐?"
"언령이란 것이 죽은 자의 영혼으로 부리는 술수로, 그 사람이 가진 평소의 생각이나 의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은 이미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그래."
"허나, 그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평소의 신념, 또는 확신하고 있는 절대적인 믿음에는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신념, 믿음이라..."
"예. 그렇기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자보다는,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언령을 부려 대상자를 곤란하게 만들거나, 여론을 조작하는 용도로 쓰임새가 적당해 보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직접적인 통제가 필요한 인물은 기생령을 쓰고, 그 주위 인물들은 언령을 쓰는 방식이로구나."
"바로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이... 어째서 안영군에게는 덜 센 언령만을 쓴 것이냐? 그가... 직접적인 통제가 필요한 인물이 아니란 것인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사오나, 그에게는 유독 더 많은 언령을 사용한 것만은 분명하옵니다."
"어째서 그는 더 확실한 기생령의 술수를 알면서도, 언령의 술수를 쓴 것인가?"
"소인이 미루어 짐작키로, 그것은 아마도 미리 준비된 육신이 있는가 하는 문제와...."
소연이 말끝을 흐리자, 세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소연을 돌아보았다.
"문제와?"
끝말을 이어 되물으니, 소연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기생령은 본령을 잠재우고, 기생령이 육신을 지배하게 되는 술수이기 때문에... 오히려 들킬 위험이 높습니다. 기생령으로 부려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 데, 그 조건을 쉽게 충족시킬 수 있었던 대상이 바로 율교의 교도들이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세자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기생령으로 부릴 수 있는... 죽어서도 충성하는 자를 만들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다는 것이냐?"
"그렇지 않는다면, 매번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그것도 자기 말을 잘 들어줄만한 영혼을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종교를 만들어 자신을 신봉하게 만들고, 그렇게 생긴 신봉자들을 기생령의 술수로 부린다. 헌데, 그렇다면 더더욱 이번 율교의 교도들이 죽었을 때, 기생령으로 부렸어야 하는 것 아니냐?"
"저하, 저도 같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교도로 잡혀온 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냐?"
세자가 다급히 되묻는 말에, 소연이 바로 이어 말했다.
"그것이... 가난이었습니다."
"가난?"
"예, 가난하였기에, 먹을 것이 궁하였고, 가난하였기에, 배운 것이 부족했습니다."
다시 한번 세자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무지하였구나!"
"바로 그렇습니다."
"무지하였기에... 그런 자들로 기생령을 만들어봐야 얼마 못가 들통이 났던 거야. 그래... 그래서..."
세자는 다시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 어머니는 기생령에 지배당했던 것이다. 육신을 빼앗겼던 어머니는 세자를 죽이려 들고 왕을 죽이려 들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까지는 이미 기생령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했던 것은, 어렵사리 왕비의 몸을 빼앗았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런 무모한 행동으로, 기껏 지배한 왕비를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오히려 왕비의 육신을 빼앗은 사실을 숨기고 배후에서 조작했다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이루었을 텐데.
그 진실을 알기 위해 고민을 해왔던 세자가 비로소 답을 얻은 것이었다.
"그것은.... 실패였어."
그렇다. 기생령으로 왕비의 몸을 빼앗았으나, 왕비로서 알아야 할 수많은 것들을 기생령이 알지 못하였으니,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왕비의 몸을 빼앗고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게 되자, 기생령의 존재를 들키기 전에 황급히 왕비를, 어머니를 죽게 만든 것이었어. 그래서 언령의 술수를 만든 거야. 그 사람의 의지만 바꿀 수 있다면, 굳이 무리해서 기생령 같은 술수를 부리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지. 더욱이 요직에 있는 권력가의 육신을 빼앗으려면, 거기에 맞는 학식이 필요할 텐데... 그런 영혼은 구하기가 쉽지 않고, 자신의 명령에 따를 이유도 없으니... 기생령은 최소화하고, 그 대신 언령을 부리기 시작한 거야."
소연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바로 그러하옵니다. 적은 수의 기생령과 다수의 언령이라면 본인이 원하는 대로 정사를 이끌어 나갈 수 있으니 그리했을 것입니다."
세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소연을 보며 물었다.
"혹, 한번 기생령이 되었던 몸이 다른 영혼으로 바뀌거나 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냐?"
세자가 뜻밖에 질문을 하자, 소연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예.. 딱히 안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가령, 한번 기생령이 들어갔다 나오면 안 좋은 기운이 남는다던가, 그런 것은 없는 것이냐?"
세자가 그 말을 하자, 소연이 뭔가 생각난 듯 "아!" 소리를 내며 말했다.
"있습니다. 한번 기생령이 깃들면 영혼을 바꾸거나, 자주 육신을 들락거리지 말아야 한다고 본 것 같습니다. 이유는... 처음 기생령을 만들 때, 본령이 인지하기 전에, 순식간에 본령을 봉인하고 기생령으로 지배해야, 온전히 육신을 지배한다고 보았습니다. 본령이 기생령을 인지하면, 잠재의식에서부터 저항하여 온전히 지배하기 힘들다고 보았습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역시나 그렇구나."
그런 세자를 보며 소연이 물었다.
"어찌 그러한 것을 짐작하셨습니까?"
"그래야 이야기가 맞기 때문이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그 천방주란 자가 내 몸을 노린다 들었다. 지금의 좌포청 포도대장이나, 어영위의 도총부 복귀는 모두 그래서 내려진 조치였다 들었다. 헌데 근래 들어 나를 위기로 모는 것을 보고, 뭔가 계획이 바뀌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 그자가 계획을 바꾼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몸을 노리고 있어."
"그게 누구이옵니까?"
소연이 묻는 말에, 세자가 소연을 보며 말했다.
"안영군이다. 안영군이라면 충분히 기생령을 쓸 법도 한데, 굳이 다수의 언령을 쓰는 이유는 자신이 그 육신을 노리고 있기 때문인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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