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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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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0.8분

62화 - #3


의금부의 국청에는 우의정을 위시한 추국관들이 서 있었고, 그리고 그들의 정중앙 상석에는 임금이 앉아 있었다.

형틀에 묶여 고개를 숙인 일곱 명의 죄인들, 그 한가운데 박지언이 있었다.

그는 며칠간 이어진 고된 국문으로 초췌해진 모습이었으며, 눈빛도 흐리멍텅하니 탁해보이는것이 기력이 많이 쇠한 기색이 역력했다.

임금의 뒤편에 서 있는 홍여립은 그런 박지언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며, 임금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나, 이날의 추국관인 우의정은 일말의 측은지심 없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박지언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 이놈, 아직도 네 죄를 인정하지 않을 셈이냐?"

박지언은 지친 어투로 간신히 대답하였다.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모르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그의 말에 우의정이 어쩔 수 없다는듯 혀를 끌끌 찼다.

"저놈이 사지가 부러져봐야 바른 소리를 하겠구나."

이어 몸을 돌려 임금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 뒤 말했다.

"전하, 이미 증좌가 명명백백하니, 더 이상 물을 것도 없습니다. 저 파렴치한 죄인들에게 능지처참을 명하시옵소서."

임금은 우의정의 의도를 알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 죄가 명백한 사교도의 사람들 속에 박지언을 두어, 그들의 죄에 묶어서 아뢰고 있었다.

"증좌가 있다 하였는가? 가져와 보라."

임금의 말에 의금부 판의금부사가 얼른 수중에 있던 서책을 임금 앞에 가져다주었다.

임금은 그 서책을 받아 들어 내용을 펼쳐 보더니, 이내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은... 역모에 가담한 자들의 필서가 아닌가? 이것이... 이것이 정녕 그대의 필체가 맞는가?"

임금의 물음에, 박지언이 고개를 흔들며 처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전하, 아니옵니다. 소신이 적은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신하가 한걸음 나서며 대답했다.

"전하, 해당 필체를 확인한 결과 박지언 본인의 필체가 맞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임금은 눈살을 찌푸린 체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내용을 신중히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임금의 눈빛이 휘둥그레지면서 표정이 경악으로 굳어진 체 움직임이 멈췄다.

그의 눈에 들어온 한 사람의 이름, 바로 세자의 이름이 그의 필체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세자의 필체를 알고 있던 임금이었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것이 어찌 된 것이냐? 어찌 이 서책에 세자의 이름이 있는 것이야?"

임금이 격앙된 목소리로 물으니, 우의정은 은연중 은밀한 웃음을 지었다가 정색을 하며 아뢰었다.

"전하, 망극하기 이를 데 없사오나, 이번 일에 세자마마 께옵서도 연루된 것으로 아옵니다."

"이, 이것이 정녕... 세자가 적은 것이란 말이냐?"

임금이 재차 묻는 말에, 우의정이 답하려 하는 찰나, 바깥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명부에 적힌 필체는 소자의 필체가 맞사옵니다, 전하."

동시에 문이 열리며, 내관이 아뢰는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세자마마 납시오."

세자는 거칠 것 없는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것은 분명 소자의 필체가 맞사옵니다."

다가오는 세자를 보며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 버럭 소리쳤다.

"네 이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녕 몰라서 하는 말이냐?"

임금의 지척까지 다가간 세자가 몸을 숙여 예를 취하며 말했다.

"전하, 허면 이것까지 보아주십시오."

세자가 바치는 서책 하나를, 홍여립이 얼른 다가가 받아 들어 임금에게 전하였다.

그것은 또 다른 명부였다.

"이것이 무엇이냐?"

임금이 의아해하니, 세자가 고개를 들어 임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진실이옵니다."

알 수 없는 세자의 대답에, 눈썹을 찌푸리며 임금이 명부를 펼쳐보았다.

거기에는 한날한시에 다 같이 관직에서 물러남을 맹세하는 내용인데, 거기에 적혀 있는 이름들은 좌의정, 우의정을 포함한 대소 신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를 윤허하는 임금의 필체도 적혀 있었다.

"이... 이 해괴망측한 것은 대체 무엇이냐? 더욱이..."

임금은 자신이 서명한 적이 없음에도, 자신의 필체와 똑같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임금을 보며 세자가 말했다.

"저들의 말대로 박지언 대장의 집에서 발견된 것이 진실된 역도들의 명부라면, 그 책 또한 진실된 책일 것입니다. 허니, 그 책에 적힌 군신 간의 맹약에 따라, 당장 관직을 모두 버리고 낙향해야 할 줄 아옵니다."

그 말에 우의정은 물론 추국을 보고 있던 다른 대소 신료들의 표정까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금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눈앞에 놓인 두 개의 명부를 바라보았다.

그런 임금을 보며 세자가 말을 이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한 훌륭한 무장을, 하루아침에 역도로 몰았을 뿐 아니라, 이 나라의 국본인 저에게 죄를 덮어 씌우려 한 간악한 무리들이 있음을 밝히고자 합니다."

세자가 말을 하며 우의정을 비롯한 대소 신료들을 날카로운 눈매로 돌아보자, 다들 창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임금 역시 분노에 찬 얼굴로 우의정을 노려보며 일갈하듯 물었다.

"이 어찌 된 일인가?"

임금의 분노에 우의정은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 숙여 대답했다.

"저, 전하... 소신은 알지 못하는 일이 옵니다."

그러자 세자가 그의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예, 우상 대감께서는 모르셨겠지요. 허나, 이제 알게 되었으니,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우의정은 당황한 표정으로 세자를 마주 보며 대답했다.

"무, 물론 그렇습니다, 저하."

"감히 국본인 세자에게 역모죄를 씌우려 했고, 나라의 충신을 반역도당으로 둔갑시키려 한 자야 말로 진정한 대역죄인일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라면, 응당 발본색원하여 한놈도 빠뜨리지 말고, 모두 참수하여야 할 것입니다."

강한 어조로 자신의 앞에 서서 또박또박 말하는 세자를, 우의정은 차마 바로 볼 수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예.... 무, 물론 그래야지요. 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세자가 고개를 불쑥 내밀어, 우의정의 코앞으로 얼굴을 가져가니, 우의정이 놀라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물론, 그 일에 우상 대감께서 진정으로 힘써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아,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세자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더불어, 죄가 없는 이들을 속히 방면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겠지요?"

떨떠름한 표정의 우의정이 잠시 망설이자, 세자가 다시금 과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닙... 니까? 설마 저게 진실이라면, 우상 대감께서도 관직을 버리시고...?"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다, 당장 방면해야지요. 내 이 간악한 자들을 당장 잡아들이도록 할 것입니다."

"예, 예, 물론 그러시겠지요. 지체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어 세자가 몸을 돌려 임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 박지언 대장은 충신이옵니다. 또한 현재 의금부 옥사에 갇혀 있는 송가 연희라는 여인 또한, 좌포청을 도와 사교도에 대한 수사를 하고 있던 와중에, 우포청 병사들의 오해를 받아 잡혀왔습니다. 추포시에 사교도인들과는 전혀 다른 장소에 있었음을 이미 당시 추포해온 우포청 병사들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하는 바, 전하께옵서 헤아려 살펴주시옵소서."

그러자 임금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방면토록 하라."

"예, 전하."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하들이 달려들어 박지언을 형틀에서 풀어주었다.

박지언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눈물을 흘리며 임금을 향해 절을 하며 외쳤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박지언을 보며 임금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당장 어의를 불러 박지언을 살피게 하라. 또한 송가 연희라는 아이를 즉각 방면할 것이며, 그 외 다른 죄인들에 대한 판단은 유보할 것이니, 국문을 폐하라."

"예, 전하."

신하들의 대답을 들으며, 임금은 홍여립의 호위를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고, 박지언은 수하들의 부축을 받아 추국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우의정을 비롯한 신하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터벅터벅 추국장을 나서자, 그 모습을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자 곁으로 수현이 다가와 물었다.

"필사장이를 역이용하셨군요."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선의 정치는 명분이라 하였지. 명분으로 조정을 장악한 자들이니, 명분 앞에서는 힘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자신들이 가진 실권을 호락호락 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야. 저들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게 만들 것이다."

대소 신료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세자는 날카로운 눈매로 쳐다보았다.



***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세자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며, 연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다급하게 옥사안으로 들어온 세자는 세상 기쁜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희야, 이제 나오너라."

뒤이어 병졸들이 따라 들어와 연희가 갇힌 옥사의 문을 열어주어도, 연희는 여전히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어찌... 된 것이옵니까?"

연희가 묻는 말에, 뒤따라 들어온 수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하께옵서, 너를 구명해 주셨다. 어서 나오너라."

어안이 벙벙해 멍하니바라만 보고있는 앉아있는 연희를 보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던 세자가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저하..."

연희가 여전히 영문을 몰라 세자를 그저 바라만 보자, 세자가 연희를 와락 끌어안으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미안하다. 하루라도 빨리 꺼내 주려 애썼다만, 내가 많이 늦었구나."

연희는 믿을 수 없어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나직히 말했다.

"늦지 않았습니다. 저하."

"늦었다. 많이 늦었다. 너무 늦었다. 너무 오래 두었다. 어서 이곳을 나가자."

세자가 연희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 하자, 연희가 놀라 세자의 소매를 살포시 잡아 끌었다.

"저, 저하... 이대로 나가시면...."

세자가 의아해하니, 옆에서 수현이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말했다.

"저하,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만류하는 수현을 향해 세자가 눈을 흘기며 궁시렁거렸다.

"체통은... 그놈의 체통 지키다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다."

연희와 수현이 풋하고 웃음 지었고, 연희는 자신의 손을 잡은 세자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어디 가지 않습니다. 저하를, 뒤따라 가겠습니다."

세자는 그제야 마지못한 듯 연희의 손을 스르륵 놓아주었다.

"그래, 꼭 뒤따라 오너라. 내 믿을 것이다. 네가 내 뒤에 있음을."

연희를 지긋이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세자를 보며, 연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예, 뒤에 있겠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 항상 저하의 뒤에서, 저하를 바라보고 있겠습니다."

세자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밖으로 걸어 나갔고, 그 뒤를 연희와 수현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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