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 #2
백무는 보따리 하나를 만들어 방 밖으로 가지고 나와 소연에게 내밀었다.
"이걸 받거라."
소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내 오래전 너만 한 나이에 수련할 때 썼던 물건들을 챙겨 보았다. 틈나는 대로 살펴보거라."
"예, 스승님."
소연의 공손한 인사를 받고 돌아서던 백무는 때마침 문 앞에 왔있던 수현을 발견했다.
"나리 오셨습니까?"
백무의 인사에 소연도 얼른 따라서 고개숙여 인사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수현도 마주 인사를 하며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다.
"예, 나리. 안으로 드시지요."
백무가 어서 들라는듯 방으로 손짓하며 안내하니, 소연은 눈치껏 얼른 다과상을 보러 부엌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온 수현과 백무가 서로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백무의 물음에, 수현은 품에 책을 꺼내 백무에게 내밀어 보였다.
"이것을 좀 살펴봐 주시게."
백무는 책을 받아 들고 조심스레 펼쳐보았다.
이내 백무의 표정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이... 이것이 어디서 나셨습니까?"
"어제 세자마마와 함께 사교도 무리의 근거지를 염탐하였네. 그곳에서 훔쳐 가지고 나온 것일세."
백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기서(奇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평범한 자들이 아니란 얘깁니다."
백무가 책을 펼쳐 다시 자세하게 살펴보기 시작했고, 그때 방문이 열리며 소연이 다과상을 들고 들어섰다.
소연이 다과상을 앞에 놓을 무렵, 백무가 경악한 눈으로 수현을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보통 내용이 아닙니다. 이, 이 내용대로라면 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서둘러 세자마마에게 알려야 할 일입니다."
"그런가? 그렇게 위험한 일인가? 이런..그렇담, 자네도 함께 지금 바로 세자마마께 같이 가도록 하세."
두 사람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과상을 챙겨 들어오던 소연은 놀라 어리둥절해졌다.
방에서 나온 두 사람은 부랴부랴 신을 신고 발길을 재촉했다.
"소연아"
나가려던 백무가 돌연 소연을 찾았다. 안에서 들였던 다과상을 다시 들고 소연이 나왔다.
"예, 스승님."
"혹..."
무슨 말을 하려던 백무는, 무슨이유에서인지 망설이는 듯하다 말을 멈췄다.
"예?"
"아, 아니다. 그 일은 다녀와서 이야기하자꾸나."
백무는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몸을 돌려 대문 밖으로 향했다.
수현 역시 정신이 없는지 인사도 없이 백무와 함께 서둘러 나가기 바빠보였다.
소연은 무슨 일인가 싶은 생각에 그저 어리둥절하고 궁금한 표정으로 떠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과상을 정리하기 위해 부엌으로 갈 뿐이었다.
밖으로 나온 백무와 수현은 수현의 수하들이 대기하며 기다리는 곳으로 바삐 걸었다.
허나 그곳에 이르렀을 때, 수현과 백무는 놀라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은 모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그들 앞에 한 남자가 고요히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검은 바탕에 붉은색 띠를 두른 옷을 입고, 큼지막한 삿갓을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웬 놈이냐?"
수현이 칼을 뽑아 들고 그를 경계하자,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련은... 열심히 하였느냐?"
그 말에 수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그 잘난 십보장인지 뭔지... 잘하느냔 말이다."
상대의 말에 수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는 모양이구나. 기꺼이 네놈에게 보여주마. 십보장이 무언지를."
그러자 상대는 살짝 웃어 보이며 삿갓을 슬쩍 들어 보였는데, 그는 다름 아닌 주동환이었다.
수현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억에 생각해내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네놈은..."
그리고 주동환이 웃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 잘난 십보장을, 이 자리에서 깨주마."
"뭐라? 네놈이..."
수현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수현의 십보장은 진작에 발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십보밖에서 순식간에 수현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정말 찰나의 순간에 상대의 칼날이 수현을 가로질렀다.
피가 튀고, 수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굳어진 얼굴로 휘청거렸다.
"나, 나리!"
놀란 백무의 비명소리가 수현의 귓가에 아득하게 들려왔다.
무너지듯 쓰러진 수현은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고, 백무는 자신에게 향하는 칼날을 보며 굳은 표정으로 주동환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잘 가시오."
짧은 말 한마디와 함께, 주동환의 칼날이 거침없이 백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억!"
백무는 가슴에 꽂힌 칼을 바라보며 휘청거렸고, 이내 주동환이 칼을 뽑자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휘청거리던 백무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자, 주동환이 다가가 백무의 품안에서 붉은 표지의 책자를 집어 들었다.
백무는 그 와중에도 책을 뺏기지 않으려 움직이지 않는 팔을 힘겹게 들어 책끝을 움켜쥐었고 책을 잡은 손가락끝을 버둥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주동환이 비웃으며 단번에 힘을 주어 당기니, 그저 빼앗길 뿐이었다.
바닥에 피가 흥건히 고여가고, 백무는 주동환을 잡으려는 듯 마지막 힘을주어 손을 뻗어보지만 공허한 움직임일 뿐이었다.
주동환은 그런 백무를 무심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돌아서서 어딘가로 걸어갔다.
잠시 후 백무의 움직임이 점차 잦아들었고, 주위로 고요가 찾아왔다.
***
세자는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선 세자는 의원이 보이자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금호는? 금호는 어떠한가?"
의원은 참담한 표정으로 공손히 인사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밤이 고비일 듯하옵니다."
세자는 굳어진 표정으로 의원을 지나, 누워있는 수현에게 다가갔다.
수현의 가슴은 붕대로 칭칭 감싸여 있었고, 제법 두툼하게 감싼 붕대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든 상태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수현을 보며 세자는 허물어지듯 그 곁에 앉았다.
"금호, 이 사람아... 어찌 된 것인가? 세상에 자네를 이길 사람은 자네 스승뿐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게... 이게 어찌 된 일이냔 말이야!"
세자는 믿을 수 없다는듯 울분을 참으며, 누워있는 수현을 보며 소리쳐 보지만, 의식이 없는 수현의 귀에는 닿지 못했다.
"제발... 제발 떠나지 말게. 제발... 제발... 내 곁에 있어달란 말이야."
비통한 마음에 애원하던 세자는 그대로 눈을 감고 탄식하기 시작했다.
"자네마저 떠나면... 나는 누구와 함께 한단 말인가? 자네마저 없으면... 난 누굴 믿어야 한단 말인가... 제발..."
뒤이어 홍여립과 조세춘이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 다 충격에 빠진 얼굴로 무너져내린 세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수... 수현아..."
홍여립이 놀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수현의 얼굴을 매만졌다.
"어찌 된 것이냐... 네가.... 네가 어쩌다가..."
믿을 수 없었다. 수현이 이리 당할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자의 비탄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어나게. 제발 일어나게... 나는 자네가 필요하단 말일세. 자네가 필요하다고."
참담해하는 세자 옆에서 홍여립이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아끼는 애제자요, 혼인하지 않은 그에게 있어 자식 같은 사람이었다.
세자가 돌연 벌떡 일어나 의원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야 하네. 궁궐 안에 모든 약재를 다 쓴다 해도 좋네. 필요하다면 뭐든 구해올 것이니... 꼭 살려야 하네. 반드시 살려야 해."
의원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소신,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네. 살리란 말일세. 반드시 살려야 하네."
의원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의지가 강한 사람입니다. 이 고비를 분명 넘길 것이옵니다."
세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저하!"
놀란 조세춘이 다가와 부축 하자, 세자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에 빠져 낮게 으르렁 거렸다.
"내가 너무 방심했어. 내가 너무 방심한 나머지 이렇게 된 게야."
자책하는 세자를 조세춘이 조심스럽게 놓아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하... 금호를 믿지 않으십니까? 언제나 그렇듯, 믿고 기다리십시오. 그리 쉽게 떠날 사람이 아닙니다."
조세춘의 나직한 말에, 세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쯤 진정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암, 그렇지. 그 친구를 내 믿네. 그리 쉽게 떠날 친구가 아니야."
세자는 다시 수현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이 사람아, 언제나처럼 내게 농을 하며 일어나게. 이 모든 게 자네 장난이었다고. 자네는 그런 사람 아닌가. 부디 이겨내게. 이겨내서 다시 내 곁에 있어주게. 부탁일세."
애원하는 세자 곁에서, 슬픔에 차 눈물만 흘리던 홍여립은 그저 아무말 없이 수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뺨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한편, 같은 시각 소연은 스승인 백무의 시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불길에 휩싸여 가는 백무의 시신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스승을 잃을 줄 몰랐기에,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속이 하얗게 변해버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소연의 손에는 백무가 건네주었던 보따리가 들려져 있었다.
소연은 백무가 건네준 보따리가 백무인 마냥 하염없이 쓰다듬고 만지며,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
주동환이 책을 되찾아 오자, 천태호는 낄낄 거리며 광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그래, 백무는?"
"잘 보내드렸습니다."
천태호가 다시 낄낄 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그래, 잘했어. 지난 3년 동안 세자빈의 육신을 지킨다고 힘이 많이 약해졌을 테니... 오늘이 제년 죽는 날인지도 몰랐겠지. 재밌어, 재밌어. 역시 이 나의 손바닥 위를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천태호가 손을 내밀어 보이며 낄낄낄 계속 웃어댔다.
"그 세자빈이 과연 그냥 쓰러졌을까? 다 이런 계산이 있었던 것이었지. 으히히히"
주동환은 천태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세자빈 마마가 그리된 게... 방주님이 그러신 것이었습니까?"
"물론이지. 그러고 백무와 연결시켜 주었지. 육신을 썩지 않게 하고, 흘러가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술수라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야. 그 시간 동안 끊임없이 그 주술을 행한 자의 힘을 뺏어가게 되어 있지. 이제 백무가 죽었으니, 세자빈의 몸에 걸린 주술도 얼마 안 가서 깨어질 것이다. 그리 되면, 세자빈의 몸도 곧 망가져 죽게 되겠지. 이제 백무가 없으니, 어느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것이야. 으히히히히"
주동환은 새삼스럽게 천태호가 무섭게 느껴졌다.
"그래, 좌상은 어찌하고 있더냐?"
천태호의 물음에, 주동환이 대답했다.
"수하들 말에 의하면, 병판이나 이판과 다툼이 있은 후로 소원한 모양입니다."
"제 아무리 좌상이라도 실권을 담당하는 이판과 병판을 무시할 수는 없을 터... 판을 조금 더 흔들어 봐야 할까... 그러다가 이놈들이 갈라서기라도 하면 되려 내가 불편해질 수도 있어. 적당히 좌상이 이들을 이끌고 나가게 만들어야 해."
"좌상이 우포청 포도대장을 은밀히 만났다 합니다."
주동환의 말에 천태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누구? 우포청? 그게 누군데?"
"박지언이라고, 한때 도총관 홍여립과 조선제일검의 자리를 놓고 겨루었던 인물입니다."
"오호... 병판이 말을 안 들으니, 직접 병사를 움직일 수 있는 구실을 만들려 하는 것인가? 거기다가 그 정도 인물이라면 홍여립까지 한 번에 견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천태호가 다시 낄낄 거리며 웃었다.
"재밌군. 재밌어. 좋아. 기왕 흔든 거 조금 더 흔들어 보자고."
"이걸 받거라."
소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내 오래전 너만 한 나이에 수련할 때 썼던 물건들을 챙겨 보았다. 틈나는 대로 살펴보거라."
"예, 스승님."
소연의 공손한 인사를 받고 돌아서던 백무는 때마침 문 앞에 왔있던 수현을 발견했다.
"나리 오셨습니까?"
백무의 인사에 소연도 얼른 따라서 고개숙여 인사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수현도 마주 인사를 하며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다.
"예, 나리. 안으로 드시지요."
백무가 어서 들라는듯 방으로 손짓하며 안내하니, 소연은 눈치껏 얼른 다과상을 보러 부엌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온 수현과 백무가 서로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백무의 물음에, 수현은 품에 책을 꺼내 백무에게 내밀어 보였다.
"이것을 좀 살펴봐 주시게."
백무는 책을 받아 들고 조심스레 펼쳐보았다.
이내 백무의 표정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이... 이것이 어디서 나셨습니까?"
"어제 세자마마와 함께 사교도 무리의 근거지를 염탐하였네. 그곳에서 훔쳐 가지고 나온 것일세."
백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기서(奇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평범한 자들이 아니란 얘깁니다."
백무가 책을 펼쳐 다시 자세하게 살펴보기 시작했고, 그때 방문이 열리며 소연이 다과상을 들고 들어섰다.
소연이 다과상을 앞에 놓을 무렵, 백무가 경악한 눈으로 수현을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보통 내용이 아닙니다. 이, 이 내용대로라면 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서둘러 세자마마에게 알려야 할 일입니다."
"그런가? 그렇게 위험한 일인가? 이런..그렇담, 자네도 함께 지금 바로 세자마마께 같이 가도록 하세."
두 사람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과상을 챙겨 들어오던 소연은 놀라 어리둥절해졌다.
방에서 나온 두 사람은 부랴부랴 신을 신고 발길을 재촉했다.
"소연아"
나가려던 백무가 돌연 소연을 찾았다. 안에서 들였던 다과상을 다시 들고 소연이 나왔다.
"예, 스승님."
"혹..."
무슨 말을 하려던 백무는, 무슨이유에서인지 망설이는 듯하다 말을 멈췄다.
"예?"
"아, 아니다. 그 일은 다녀와서 이야기하자꾸나."
백무는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몸을 돌려 대문 밖으로 향했다.
수현 역시 정신이 없는지 인사도 없이 백무와 함께 서둘러 나가기 바빠보였다.
소연은 무슨 일인가 싶은 생각에 그저 어리둥절하고 궁금한 표정으로 떠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과상을 정리하기 위해 부엌으로 갈 뿐이었다.
밖으로 나온 백무와 수현은 수현의 수하들이 대기하며 기다리는 곳으로 바삐 걸었다.
허나 그곳에 이르렀을 때, 수현과 백무는 놀라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은 모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그들 앞에 한 남자가 고요히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검은 바탕에 붉은색 띠를 두른 옷을 입고, 큼지막한 삿갓을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웬 놈이냐?"
수현이 칼을 뽑아 들고 그를 경계하자,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련은... 열심히 하였느냐?"
그 말에 수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그 잘난 십보장인지 뭔지... 잘하느냔 말이다."
상대의 말에 수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는 모양이구나. 기꺼이 네놈에게 보여주마. 십보장이 무언지를."
그러자 상대는 살짝 웃어 보이며 삿갓을 슬쩍 들어 보였는데, 그는 다름 아닌 주동환이었다.
수현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억에 생각해내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네놈은..."
그리고 주동환이 웃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 잘난 십보장을, 이 자리에서 깨주마."
"뭐라? 네놈이..."
수현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수현의 십보장은 진작에 발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십보밖에서 순식간에 수현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정말 찰나의 순간에 상대의 칼날이 수현을 가로질렀다.
피가 튀고, 수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굳어진 얼굴로 휘청거렸다.
"나, 나리!"
놀란 백무의 비명소리가 수현의 귓가에 아득하게 들려왔다.
무너지듯 쓰러진 수현은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고, 백무는 자신에게 향하는 칼날을 보며 굳은 표정으로 주동환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잘 가시오."
짧은 말 한마디와 함께, 주동환의 칼날이 거침없이 백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억!"
백무는 가슴에 꽂힌 칼을 바라보며 휘청거렸고, 이내 주동환이 칼을 뽑자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휘청거리던 백무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자, 주동환이 다가가 백무의 품안에서 붉은 표지의 책자를 집어 들었다.
백무는 그 와중에도 책을 뺏기지 않으려 움직이지 않는 팔을 힘겹게 들어 책끝을 움켜쥐었고 책을 잡은 손가락끝을 버둥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주동환이 비웃으며 단번에 힘을 주어 당기니, 그저 빼앗길 뿐이었다.
바닥에 피가 흥건히 고여가고, 백무는 주동환을 잡으려는 듯 마지막 힘을주어 손을 뻗어보지만 공허한 움직임일 뿐이었다.
주동환은 그런 백무를 무심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돌아서서 어딘가로 걸어갔다.
잠시 후 백무의 움직임이 점차 잦아들었고, 주위로 고요가 찾아왔다.
***
세자는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선 세자는 의원이 보이자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금호는? 금호는 어떠한가?"
의원은 참담한 표정으로 공손히 인사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밤이 고비일 듯하옵니다."
세자는 굳어진 표정으로 의원을 지나, 누워있는 수현에게 다가갔다.
수현의 가슴은 붕대로 칭칭 감싸여 있었고, 제법 두툼하게 감싼 붕대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든 상태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수현을 보며 세자는 허물어지듯 그 곁에 앉았다.
"금호, 이 사람아... 어찌 된 것인가? 세상에 자네를 이길 사람은 자네 스승뿐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게... 이게 어찌 된 일이냔 말이야!"
세자는 믿을 수 없다는듯 울분을 참으며, 누워있는 수현을 보며 소리쳐 보지만, 의식이 없는 수현의 귀에는 닿지 못했다.
"제발... 제발 떠나지 말게. 제발... 제발... 내 곁에 있어달란 말이야."
비통한 마음에 애원하던 세자는 그대로 눈을 감고 탄식하기 시작했다.
"자네마저 떠나면... 나는 누구와 함께 한단 말인가? 자네마저 없으면... 난 누굴 믿어야 한단 말인가... 제발..."
뒤이어 홍여립과 조세춘이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 다 충격에 빠진 얼굴로 무너져내린 세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수... 수현아..."
홍여립이 놀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수현의 얼굴을 매만졌다.
"어찌 된 것이냐... 네가.... 네가 어쩌다가..."
믿을 수 없었다. 수현이 이리 당할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자의 비탄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어나게. 제발 일어나게... 나는 자네가 필요하단 말일세. 자네가 필요하다고."
참담해하는 세자 옆에서 홍여립이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아끼는 애제자요, 혼인하지 않은 그에게 있어 자식 같은 사람이었다.
세자가 돌연 벌떡 일어나 의원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야 하네. 궁궐 안에 모든 약재를 다 쓴다 해도 좋네. 필요하다면 뭐든 구해올 것이니... 꼭 살려야 하네. 반드시 살려야 해."
의원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소신,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네. 살리란 말일세. 반드시 살려야 하네."
의원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의지가 강한 사람입니다. 이 고비를 분명 넘길 것이옵니다."
세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저하!"
놀란 조세춘이 다가와 부축 하자, 세자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에 빠져 낮게 으르렁 거렸다.
"내가 너무 방심했어. 내가 너무 방심한 나머지 이렇게 된 게야."
자책하는 세자를 조세춘이 조심스럽게 놓아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하... 금호를 믿지 않으십니까? 언제나 그렇듯, 믿고 기다리십시오. 그리 쉽게 떠날 사람이 아닙니다."
조세춘의 나직한 말에, 세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쯤 진정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암, 그렇지. 그 친구를 내 믿네. 그리 쉽게 떠날 친구가 아니야."
세자는 다시 수현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이 사람아, 언제나처럼 내게 농을 하며 일어나게. 이 모든 게 자네 장난이었다고. 자네는 그런 사람 아닌가. 부디 이겨내게. 이겨내서 다시 내 곁에 있어주게. 부탁일세."
애원하는 세자 곁에서, 슬픔에 차 눈물만 흘리던 홍여립은 그저 아무말 없이 수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뺨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한편, 같은 시각 소연은 스승인 백무의 시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불길에 휩싸여 가는 백무의 시신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스승을 잃을 줄 몰랐기에,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속이 하얗게 변해버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소연의 손에는 백무가 건네주었던 보따리가 들려져 있었다.
소연은 백무가 건네준 보따리가 백무인 마냥 하염없이 쓰다듬고 만지며,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
주동환이 책을 되찾아 오자, 천태호는 낄낄 거리며 광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그래, 백무는?"
"잘 보내드렸습니다."
천태호가 다시 낄낄 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그래, 잘했어. 지난 3년 동안 세자빈의 육신을 지킨다고 힘이 많이 약해졌을 테니... 오늘이 제년 죽는 날인지도 몰랐겠지. 재밌어, 재밌어. 역시 이 나의 손바닥 위를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천태호가 손을 내밀어 보이며 낄낄낄 계속 웃어댔다.
"그 세자빈이 과연 그냥 쓰러졌을까? 다 이런 계산이 있었던 것이었지. 으히히히"
주동환은 천태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세자빈 마마가 그리된 게... 방주님이 그러신 것이었습니까?"
"물론이지. 그러고 백무와 연결시켜 주었지. 육신을 썩지 않게 하고, 흘러가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술수라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야. 그 시간 동안 끊임없이 그 주술을 행한 자의 힘을 뺏어가게 되어 있지. 이제 백무가 죽었으니, 세자빈의 몸에 걸린 주술도 얼마 안 가서 깨어질 것이다. 그리 되면, 세자빈의 몸도 곧 망가져 죽게 되겠지. 이제 백무가 없으니, 어느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것이야. 으히히히히"
주동환은 새삼스럽게 천태호가 무섭게 느껴졌다.
"그래, 좌상은 어찌하고 있더냐?"
천태호의 물음에, 주동환이 대답했다.
"수하들 말에 의하면, 병판이나 이판과 다툼이 있은 후로 소원한 모양입니다."
"제 아무리 좌상이라도 실권을 담당하는 이판과 병판을 무시할 수는 없을 터... 판을 조금 더 흔들어 봐야 할까... 그러다가 이놈들이 갈라서기라도 하면 되려 내가 불편해질 수도 있어. 적당히 좌상이 이들을 이끌고 나가게 만들어야 해."
"좌상이 우포청 포도대장을 은밀히 만났다 합니다."
주동환의 말에 천태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누구? 우포청? 그게 누군데?"
"박지언이라고, 한때 도총관 홍여립과 조선제일검의 자리를 놓고 겨루었던 인물입니다."
"오호... 병판이 말을 안 들으니, 직접 병사를 움직일 수 있는 구실을 만들려 하는 것인가? 거기다가 그 정도 인물이라면 홍여립까지 한 번에 견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천태호가 다시 낄낄 거리며 웃었다.
"재밌군. 재밌어. 좋아. 기왕 흔든 거 조금 더 흔들어 보자고."
아직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