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yTokTok v0.1 beta
챕터 배너

나린왕국

author
· 오기연랑
· 최초 등록: 2025.10.04 · 최근 연재: 2025-10-25
읽기 시간 예측: 약 10.38분

45화 - #14


"최대리."

이영주 대리가 '툭'하고 나래의 어깨를 건드리며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잠들어 있던 나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나래가 놀라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이영주 대리가 장난스럽게 투박하듯 말했다.

"뭐야~ 잠깐 조는 줄 알았더니, 아주 깊게 잠든 모양이네?"

나래는 놀란 표정인 체로 이영주 대리를 보며 되물었다.

"네?"

"아이고, 잠이 덜 깼네. 언제까지 잠들어 있을 거야? 그러다 과장님 눈에 띄면 또 혼난다."

이영주 대리의 말에 나래는 눈을 껌뻑거렸다.

이게 뭐지? 꿈을 꾼 건가?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이 이런 기분일까?

문득 발밑으로 향한 시선에, 낡고 닳은 그녀의 검은색 구두가 들어왔다.

꽃신을 신고 달린 것도 모두 꿈이었던 걸까?

하긴, 그게 말이 되나? 꽃신을 신었다고 바람을 타고 달린다는 게...

저도 모르게 실소를 지은 나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거울을 보면서 세면대에 잠시 기대어 있던 나래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일하자, 일에 집중하자.'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밖으로 나와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데, 양 과장이 지나가다 말고 나래를 보더니 물었다.

"최대리, 아까 갔다 달라던 상반기 매출 보고서 준비 다 됐어?"

갑자기 건네 오는 말에, 나래는 당황하여 되물었다.

"네?"

나래의 표정을 본 양 과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 진짜...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일 안 해?"

"아... 죄송합니다. 그게..."

"대리쯤 됐으면 이제 빠릿빠릿하게 좀 하자. 신입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그러다 후배들한테 무시당해."

핀잔을 준 양 과장이 투덜거리며 가버리자, 뒤에 남은 나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맨날 자기 할 일을 툭하면 던져놓고는 왜 제대로 일을 안 하냐고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결국 오늘도 어제처럼 아무런 말도 못 할 것이다.

문득 이상했다.

앞으로는 이러지 않기로 하지 않았던가? 앞으로는 내 기분을 먼저 살피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런 결심들 마저도, 꿈이었던 것일까?

나래는 계속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쩐지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아서, 서랍에 넣어둔 약을 먹기 위해 먼저 냉온수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종이컵에 찬물을 한잔 받고 돌아서는데, 앞에 김실장이 서 있었다.

"어머나."

나래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움츠러들자, 그런 나래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김실장이 그 차디찬 입술을 열었다.

"최대리, 방금 전에도 종이컵에 물 담아 가지 않았어? 어지간하면 쓰던 거 쓰지. 종이컵이라고 딱 한번 쓰고 버리는 건가?"

날 선 김실장의 말에, 나래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깜빡했어요."

"어쩜 그렇게 매일같이 깜빡할까? 최대리. 나이가 몇이야? 대리단지 좀 되지 않았어? 그 일머리로 무슨 일을 한다는 거야?"

종이컵 하나가 일머리까지 번지자, 나래는 속이 상했다.

"저기...."

나래는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술을 우물거려 보지만, 선뜻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됐고. 신입들 못된 버릇 들라, 선배로써 좀 절약하는 모습 좀 보입시다. 선배답게? 응?"

김실장마저 속을 후벼 파는 핀잔을 주고 가버리자, 나래는 속이 걷잡을 수 없이 들끓기 시작했다.

'종이컵 하나 더 썼다고, 너무 한 거 아냐?'

나래는 속이 상해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자리로 돌아왔다.

바로 옆자리 이영주 대리는 어디로 갔는지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래는 자기 자리에 앉아 종이컵을 책상 위에 놓고도, 들뜬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심호흡을 하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때 옆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눈을 뜨고 보니, 입사한 지 반년 정도 된 홍은희 씨였다.

반듯하게 뒤로 묶은 머리 하며, 말하는 솜씨가 신입답지 않게 능숙해서 회사 사람 치고 그녀를 이뻐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저... 대리님, 제가 이걸 잘 몰라서..."

망설이며 어렵게 말을 꺼내는 그녀를 보면서, 나래는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 뭔데요?"

나래가 막 다가서려 할 때, 자리를 비웠던 이영주 대리가 돌아오자, 은희의 곤란했던 표정에 화색이 돌며 재빨리 이영주 대리에게 향했다.

"이대리님, 이 보고서에 들어가는 차트 데이터가 이상한 거 같은데... 제가 잘 몰라서요. 좀 도와주세요."

영주에게 애교 부리듯 가서 이야기하는 은희를 보자니, 나래는 어이가 없었다.

마치 그녀의 행동은 이영주 대리가 없어서 마지못해 자기한테 물어보다가, 때마침 이영주 대리가 오자, 자긴 필요 없다는 듯한 행동아닌가.

나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끓어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려 노력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기분에, 왠지 모르게 울컥거리기 까지 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본인 자리에 가 앉았다.

알 수 없는 소외감과 자격지심이 나래의 온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뭐야, 무시하는 거야?'

나래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키보드를 치는 것조차 버거웠다.

"보고서 쓰고 있어?"

갑자기 다가온 양 과장이 닦달하듯 건네는 말에, 나래는 고개를 들어 양 과장을 바라보았다.

"또 넋 놓고 있는다? 아니 회사는 뭐하러 와? 멍 때리러 와? 보고서 쓰라고요 보고서."

양 과장의 말을 듣고 있는데, 어느 순간 왼쪽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누가 볼세라 황급히 눈물을 훔치다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은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뭔가 들킬세라 얼른 고개를 돌려 이영주 대리에게 눈웃음을 쳤다.

"최대리!"

버럭 고함지르는 양 과장의 목소리에, 나래는 천천히 다시 양 과장을 바라보았다.

"뭐해? 일 안 해?"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 높여 말하는 양 과장을 보며, 나래는 입술을 움직였다.

'말해... 말해, 나래야...'

나래 스스로도 자신이 답답했다.

허우적거리는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마음은 점점 더 허물어져 가며 그녀를 늪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지나가던 김 부장이 다가오며 묻자, 양 과장이 꾸벅 인사를 하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아, 정말... 대리씩이나 되는 사람이, 회사 와서 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왜? 무슨 일인데?"

"아니 아침부터 보고서 하나 제출하라는데, 여태 뭘 하고 있었는지... 아니 요즘은 회사 멍 때리러 오는 사람도 있나 봅니다?"

양 과장의 비아냥에 김 부장이 안경 너머로 나래를 바라보다 시선이 마주쳤다.

벌레를 봐도 저런 눈빛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혐오감 어린 시선에, 나래는 등골이 서늘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후배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는 김 부장까지 핀잔을 거들었다.

"똑바로 좀 합시다, 똑바로 좀... 갓 들어온 신입들도 저렇게 열심인데, 대리라는 사람이... 쯧쯧..."

나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는...."

무슨 말인가를 하긴 해야겠는데, 도통 말이 입에서 잘 나오지도 않았고, 머릿속과 마음이 혼란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제가 오늘..."

나래는 계속 우물거릴뿐 선뜻 말을 하지 못했다.

"아, 됐어. 됐어. 뭐 또 괜히 이런 소리 했다고, 또 무슨 회사에서 왕따를 시키니 어쩌니, 그런 소리하려고... 그런 소리 하기 전에 일이나 좀 똑바로 합시다."

양 과장이 투덜거리며 돌아서 김 부장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답답한데, 담배나 한 대 태우러 가시죠?"

김 부장이 씁쓸한 표정으로 나래를 흘겨보며 말했다.

"쯧쯧... 우리도 이참에 감원 좀 해야 돼. 일 안 하고 묻어가는 것들 싹 다 정리해버려야지."

"아, 그러니깐요. 저런 직원들 때문에,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이 더 피곤한 거 아닙니까?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두 사람은 나래 들으란 듯이 떠들며 바깥으로 향했고, 나래는 눈에서 흐르는 눈물 방울이 손위에 떨어지는 것을 쳐다만 보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래 자신이 산산조각 나서 허물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마음속 깊은 곳까지 찢어져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면 사람들이 나를 측은하게 바라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절망감에 고개를 숙인 나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뚝뚝 떨어졌다.

비참함에 온몸이 젖어들었고, 온몸을 부서뜨릴 것만 같은 자괴감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때, 그녀의 눈물 방울이 목에 걸린 목걸이 옆을 스치며 떨어졌다.

'목걸이?'

나래의 눈에 들어온 목걸이는 은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고, 둥근 모양의 초승달이 새겨진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그 목걸이를 보는 순간, 나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온몸에 닭살이 돋으며, 머리카락까지 한 올 한 올 솟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래의 입안에서 울컥울컥 하며 무슨 말인가가 토해져 나올 것 같았다.

주먹을 불끈 쥐고,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던 소리를 있는 힘껏 내뱉었다.

"싫어~~~~!!!!!"

앙칼진 나래의 목소리가 회사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모두의 시선이 나래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 잠깐 사이, 온 세상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해 버렸다.

어둠 속에 홀로 남은 나래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바로 섰다.

그리고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체, 다시 한번 소리 질렀다.

"싫어~~!!!"

그와 동시에 어둠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마치 산산조각 나고, 갈가리 찢기는 듯 그렇게 어둠이 흐트러지더니, 이제는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아무것도 없는 백(白)의 세상 위에 서 있는 나래 앞으로 찢겨 나간 어둠들이 모여들더니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었다.

그것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듯 일어나서, 나래의 키만 해 지더니, 꾸깃꾸깃한 움직임을 보이며 물었다.

- 이건 무슨 힘이지? 너는 뭐냐?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소리를 냈다. 흡사 여러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너야 말로 뭐야? 난 지금 어디 있는 거지?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래의 물음에 그것은 키득키득 거리며 웃어댔다.

- 우리가 누구냐고?

그의 말에 나래는 어리둥절 해졌다.

'우리?'

그러더니 어둠의 형체가 셋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 우리야 말로 이 세계의 신(神)이다.
현재 조회: 15
댓글
0

아직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저작권 보호: 무단전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