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18
회색빛 산(山)이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언덕 같은 산이었고, 그 한가운데 구릉 같은 장소가 있었다.
그곳에 백하도령과 나래 일행이 당도했을 때, 그들 앞에 있는 것은 거대한 검은 그림자였다.
"저게 뭐죠?"
나래가 놀라 묻는 말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그 검은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검은 그림자의 시뻘건 두 개의 눈을 보는 순간, 나래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그것이 하얗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네발로 서서 긴 꼬리를 뻗자, 품 안에 있던 작은 아이가 보였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를 감싼 검은 형체는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늑대인가 보구나."
백하도령이 경계하며 하는 말에, 나래가 놀라 되물었다.
"늑대요?"
"그래. 저 검은 기운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백하도령의 경고에, 나래는 그 검은 늑대를 다시 바라보았다.
덩치가 얼마나 큰지, 백하도령과 나래 정도는 한입에 꿀꺽 삼켜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가라. 나의 이빨에 자비는 없을 것이니...
검은 늑대의 경고에 나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때 여왕이 한걸음 나서 소리쳤다.
"현우야!"
하지만 아이는 여왕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체였고, 검은 늑대는 이빨을 드러내며 맹렬한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 가라, 영혼마저 갈가리 찢겨 나가고 싶지 않다면.
재차 검은 늑대의 경고에도, 백하도령이 굳은 표정으로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과인(寡人)은 세상의 부덕한 모든 것들에게 죄를 묻는 자이다."
말과 동시에 백하도령의 온몸에서 하얀 전류가 '파지직'하는 소리를 내며 흐르기 시작했다.
백하도령의 눈이 백안(白眼)으로 변하고, 온몸에서 바람이 일어나는 듯 강렬한 기운이 솟구쳐 오르자, 검은 늑대도 경계하며 온몸의 털을 곤두 세웠다.
- 갈!
그 순간, 검은 늑대가 달려들며 거대한 입으로 백하도령을 물으려 했다.
백하도령은 검은 늑대의 위아래 송곳니를 붙잡았다.
입을 다물거나 들어 올리려 해도, 백하도령이 꿈쩍도 하지 않으니 검은 늑대는 당황하여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굉음과 함께 검은 늑대가 전류에 감전되듯 사지를 떨며 고통스러워 했다.
백하도령의 몸에서 엄청난 뇌전(雷電)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검은 늑대의 동작이 크게 줄어들자, 비로소 백하도령이 송곳니를 놓아주며 말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하지만 백하도령이 말을 체 다 하기도 전에, 검은 늑대의 형체는 연기처럼 날아가 아이를 휘감았다.
백하도령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뻗자, 검은 늑대가 외쳤다.
- 그 힘을!
백하도령이 멈칫하자, 검은 늑대가 이어 말했다.
- 함부로 썼다가는 이 아이마저 태워 소멸시키게 될 것이다.
검은 늑대가 아이를 인질로 삼자, 나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백하도령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렸다.
백하도령이 손을 내리니, 그의 몸에 흐르던 백뢰(白雷)가 사그라들었다.
"나빴어!"
나래가 한걸음 나서서 소리쳤다.
나래의 외침에 검은 늑대의 시선이 나래에게로 향했다.
"넌 뭐야? 뭔데 현우를 붙잡고 있는 거야?"
나래가 다시 한걸음 내딛으며 묻는 말에, 검은 늑대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 네가 감히 나를 알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래는 또다시 한걸음 다가섰다.
"너 따위가 뭐라고? 네가 뭔데?"
나래는 마치 시비를 걸듯이 소리쳤고, 한울과 솔이가 걱정되어 말리려는 것을 백하도령이 저지했다.
마치 믿고 기다리란 듯한 백하도령의 표정에, 솔이와 한울은 마음을 졸이며 나래를 바라보았다.
- 네가 나를 알게 되면? 나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검은 늑대의 물음에 나래는 또다시 한걸음 다가섰다.
"너 따위 겁 안 나!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 크흐흐흐.... 두렵지 않다면 나를 받아들여 보거라. 과연 네가 나를 감당할 수 있을지...
나래는 또다시 한걸음 성큼 내딛었고, 어느새 검은 늑대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해봐, 난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스스로도 알지못했지만, 나래는 저 검은 늑대 역시 여왕이 만들어낸 그림자일 거라고 추측했다.
- 어리석은 것!
검은 늑대가 돌연 아이를 놓아주고 나래를 순식간에 휘감았다.
검은 그림자에 시선을 빼앗긴 나래는 순간 엄청난 광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꺄악!"
나래가 비명을 지르자마자, 바람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나래는 조심스럽게 실눈을 뜨며 주위를 살폈다.
- 빵빵
자동차 경적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나래는 뒤로 뒷걸음질 치듯 물러나 보도블록 위로 올라섰다. 운전자는 화난 표정으로 궁시렁 거리며 지나갔다.
어느샌가 바뀐 원래 세계의 풍경을 보며 잠시 어리둥절해진 나래는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내 이것은 분명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한 나래가 힘을 주려는데, 그녀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휘리릭 생겨나더니 사람의 모습을 변하였다.
회색빛 정장을 차분하게 차려입은 그 중년 남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나래를 바라보며 말을 건네 왔다.
"그대의 힘을 쓰지 말라. 네가 그 힘을 쓰면, 아이는 내손에 소멸될 것이다."
그의 협박에 나래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다시 이어 말했다.
"네가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뭘 하라는 거죠?"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왼쪽 길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좀 걷지."
그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며 앞장서 걸었고, 나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분명 환상일진대, 지나다니는 사람들, 자동차 경적소리까지 어느 것 하나 가짜 같은 것이 없었다.
정말 현실세계로 돌아온 것 같은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직장생활은 얼마나 했지?"
무심한 듯 물어오는 그 남자의 물음에, 나래는 옆으로 좀 더 다가서며 대답했다.
"10년 정도 했을 걸요."
"제법 오래 했네."
"적진 않죠."
"어떤가? 직장 생활이란 게?"
나래는 그를 돌아보았다.
이런 대화를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을 현혹시키려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애잔함이 밀려 들어왔다.
"그냥... 직장생활이 다 그렇죠, 뭐... 일하고..."
"회사에서 인정받는 직원인가?"
"..."
나래는 답변을 망설였다. 인정받는다라....
"인정받고 싶었죠."
짤막한 나래의 대답에, 많은 감정이 실려 있자, 그는 마치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구나 그렇지. 사람들하고는 잘 지내는 편인가?"
나래는 쓴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별로요. 그다지... 붙임성이 있는 편이 아니라서... 소심하고..."
"대부분 소심하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대부분 소심해. 소심하지 않은 척하며 사는 거지."
"몇 사람 빼고는... 다들 절 불편해하는 거 같아요."
시무룩한 나래의 대답에,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몇 사람은 정말로 안 불편한 걸까?"
나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끼리도 딱히 편하진 않을 게야. 다들 서로 불편해하며 살아. 단지 불편하지 않은 척, 친한 척하며 살 뿐이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나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요. 다들 그렇게 가면을 쓰고 사나 봐요. 그래서 가끔 그게 너무 힘들기도 해요."
"가면을 쓰지 않으면 편할까?"
나래는 잠깐 입술 끝을 내리며 고민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세요. 그래도 되는 사람이라면, 편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되는 사람이란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거지?"
"뭐 가족이라든가..."
"가족은 가면을 쓰지 않고 대하나?"
나래는 다시 대답을 망설였다.
"아뇨... 생각해 보면... 가족한테도 가면을 썼던 거 같아요."
남자는 예의 너털웃음을 지었다.
"가면을 벗고, 또 벗으면 그 아래 있는 게... 진짜 얼굴일까?"
의외의 말에 나래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우린... 가면을 쓴 거라고, 스스로에게 위안 삼을 뿐, 그게 우리의 본래 모습 아닐까? 그저 가면일 뿐이라고, 진짜 나는 이렇지 않다고 말이야."
뭔가 심오한 답변 같아서, 나래는 눈을 연신 깜빡 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회생활이란 게 결국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방법인 거지. 돈이 목적이 아니야.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으니까 말이야. 가면 쓰고 사는 것이, 사실은 아니면서 그런 척 살아가는 게, 나만 그런 것도,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야. 그저 우리는 사회라는 틀 안에서 서로 암묵적인 약속을 했을 뿐인 거지. 그런 척하며 살아가기로 말이야."
어쩐지 인생 선배 또는 사회생활 선배한테서 들어야 할 것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에 대한 경계심이 저도 모르게 스르륵 풀리는 것만 같았다.
"부모님은 잘 계신가?"
뜬금없는 질문에 나래는 시선을 떨구며 대답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많이 불편하세요."
대답하고 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빠랑은... 친했나?"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질문에, 나래는 아빠를 떠올렸다.
전에는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만 떠올랐지만, 어쩐 일인지 환하게 웃던 어린 시절의 아빠 얼굴이 떠올랐다.
"자상하셨어요. 좀 더 오랫동안 곁에 머물렀으면 좋았을 텐데..."
나래가 말끝을 흐리자, 그가 말했다.
"그분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걸 원하셨을 거야. 너무도 간절하게 말이야."
나래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주시했다.
"갑자기 이런 얘긴 왜 꺼내는 거죠? 지금 대체..."
나래의 말을 끊으며 그가 대답했다.
"내가 누굴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래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를 응시 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 아이들이 크면 말이야."
나래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커지기 시작했다.
"그럼....?"
"나는... 현서와 현준이, 그리고 현우의 아빠 란다."
나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멈춰 서 버렸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언덕 같은 산이었고, 그 한가운데 구릉 같은 장소가 있었다.
그곳에 백하도령과 나래 일행이 당도했을 때, 그들 앞에 있는 것은 거대한 검은 그림자였다.
"저게 뭐죠?"
나래가 놀라 묻는 말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그 검은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검은 그림자의 시뻘건 두 개의 눈을 보는 순간, 나래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그것이 하얗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네발로 서서 긴 꼬리를 뻗자, 품 안에 있던 작은 아이가 보였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를 감싼 검은 형체는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늑대인가 보구나."
백하도령이 경계하며 하는 말에, 나래가 놀라 되물었다.
"늑대요?"
"그래. 저 검은 기운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백하도령의 경고에, 나래는 그 검은 늑대를 다시 바라보았다.
덩치가 얼마나 큰지, 백하도령과 나래 정도는 한입에 꿀꺽 삼켜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가라. 나의 이빨에 자비는 없을 것이니...
검은 늑대의 경고에 나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때 여왕이 한걸음 나서 소리쳤다.
"현우야!"
하지만 아이는 여왕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체였고, 검은 늑대는 이빨을 드러내며 맹렬한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 가라, 영혼마저 갈가리 찢겨 나가고 싶지 않다면.
재차 검은 늑대의 경고에도, 백하도령이 굳은 표정으로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과인(寡人)은 세상의 부덕한 모든 것들에게 죄를 묻는 자이다."
말과 동시에 백하도령의 온몸에서 하얀 전류가 '파지직'하는 소리를 내며 흐르기 시작했다.
백하도령의 눈이 백안(白眼)으로 변하고, 온몸에서 바람이 일어나는 듯 강렬한 기운이 솟구쳐 오르자, 검은 늑대도 경계하며 온몸의 털을 곤두 세웠다.
- 갈!
그 순간, 검은 늑대가 달려들며 거대한 입으로 백하도령을 물으려 했다.
백하도령은 검은 늑대의 위아래 송곳니를 붙잡았다.
입을 다물거나 들어 올리려 해도, 백하도령이 꿈쩍도 하지 않으니 검은 늑대는 당황하여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굉음과 함께 검은 늑대가 전류에 감전되듯 사지를 떨며 고통스러워 했다.
백하도령의 몸에서 엄청난 뇌전(雷電)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검은 늑대의 동작이 크게 줄어들자, 비로소 백하도령이 송곳니를 놓아주며 말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하지만 백하도령이 말을 체 다 하기도 전에, 검은 늑대의 형체는 연기처럼 날아가 아이를 휘감았다.
백하도령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뻗자, 검은 늑대가 외쳤다.
- 그 힘을!
백하도령이 멈칫하자, 검은 늑대가 이어 말했다.
- 함부로 썼다가는 이 아이마저 태워 소멸시키게 될 것이다.
검은 늑대가 아이를 인질로 삼자, 나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백하도령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렸다.
백하도령이 손을 내리니, 그의 몸에 흐르던 백뢰(白雷)가 사그라들었다.
"나빴어!"
나래가 한걸음 나서서 소리쳤다.
나래의 외침에 검은 늑대의 시선이 나래에게로 향했다.
"넌 뭐야? 뭔데 현우를 붙잡고 있는 거야?"
나래가 다시 한걸음 내딛으며 묻는 말에, 검은 늑대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 네가 감히 나를 알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래는 또다시 한걸음 다가섰다.
"너 따위가 뭐라고? 네가 뭔데?"
나래는 마치 시비를 걸듯이 소리쳤고, 한울과 솔이가 걱정되어 말리려는 것을 백하도령이 저지했다.
마치 믿고 기다리란 듯한 백하도령의 표정에, 솔이와 한울은 마음을 졸이며 나래를 바라보았다.
- 네가 나를 알게 되면? 나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검은 늑대의 물음에 나래는 또다시 한걸음 다가섰다.
"너 따위 겁 안 나!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 크흐흐흐.... 두렵지 않다면 나를 받아들여 보거라. 과연 네가 나를 감당할 수 있을지...
나래는 또다시 한걸음 성큼 내딛었고, 어느새 검은 늑대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해봐, 난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스스로도 알지못했지만, 나래는 저 검은 늑대 역시 여왕이 만들어낸 그림자일 거라고 추측했다.
- 어리석은 것!
검은 늑대가 돌연 아이를 놓아주고 나래를 순식간에 휘감았다.
검은 그림자에 시선을 빼앗긴 나래는 순간 엄청난 광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꺄악!"
나래가 비명을 지르자마자, 바람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나래는 조심스럽게 실눈을 뜨며 주위를 살폈다.
- 빵빵
자동차 경적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나래는 뒤로 뒷걸음질 치듯 물러나 보도블록 위로 올라섰다. 운전자는 화난 표정으로 궁시렁 거리며 지나갔다.
어느샌가 바뀐 원래 세계의 풍경을 보며 잠시 어리둥절해진 나래는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내 이것은 분명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한 나래가 힘을 주려는데, 그녀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휘리릭 생겨나더니 사람의 모습을 변하였다.
회색빛 정장을 차분하게 차려입은 그 중년 남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나래를 바라보며 말을 건네 왔다.
"그대의 힘을 쓰지 말라. 네가 그 힘을 쓰면, 아이는 내손에 소멸될 것이다."
그의 협박에 나래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다시 이어 말했다.
"네가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뭘 하라는 거죠?"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왼쪽 길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좀 걷지."
그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며 앞장서 걸었고, 나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분명 환상일진대, 지나다니는 사람들, 자동차 경적소리까지 어느 것 하나 가짜 같은 것이 없었다.
정말 현실세계로 돌아온 것 같은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직장생활은 얼마나 했지?"
무심한 듯 물어오는 그 남자의 물음에, 나래는 옆으로 좀 더 다가서며 대답했다.
"10년 정도 했을 걸요."
"제법 오래 했네."
"적진 않죠."
"어떤가? 직장 생활이란 게?"
나래는 그를 돌아보았다.
이런 대화를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을 현혹시키려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애잔함이 밀려 들어왔다.
"그냥... 직장생활이 다 그렇죠, 뭐... 일하고..."
"회사에서 인정받는 직원인가?"
"..."
나래는 답변을 망설였다. 인정받는다라....
"인정받고 싶었죠."
짤막한 나래의 대답에, 많은 감정이 실려 있자, 그는 마치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구나 그렇지. 사람들하고는 잘 지내는 편인가?"
나래는 쓴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별로요. 그다지... 붙임성이 있는 편이 아니라서... 소심하고..."
"대부분 소심하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대부분 소심해. 소심하지 않은 척하며 사는 거지."
"몇 사람 빼고는... 다들 절 불편해하는 거 같아요."
시무룩한 나래의 대답에,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몇 사람은 정말로 안 불편한 걸까?"
나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끼리도 딱히 편하진 않을 게야. 다들 서로 불편해하며 살아. 단지 불편하지 않은 척, 친한 척하며 살 뿐이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나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요. 다들 그렇게 가면을 쓰고 사나 봐요. 그래서 가끔 그게 너무 힘들기도 해요."
"가면을 쓰지 않으면 편할까?"
나래는 잠깐 입술 끝을 내리며 고민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세요. 그래도 되는 사람이라면, 편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되는 사람이란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거지?"
"뭐 가족이라든가..."
"가족은 가면을 쓰지 않고 대하나?"
나래는 다시 대답을 망설였다.
"아뇨... 생각해 보면... 가족한테도 가면을 썼던 거 같아요."
남자는 예의 너털웃음을 지었다.
"가면을 벗고, 또 벗으면 그 아래 있는 게... 진짜 얼굴일까?"
의외의 말에 나래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우린... 가면을 쓴 거라고, 스스로에게 위안 삼을 뿐, 그게 우리의 본래 모습 아닐까? 그저 가면일 뿐이라고, 진짜 나는 이렇지 않다고 말이야."
뭔가 심오한 답변 같아서, 나래는 눈을 연신 깜빡 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회생활이란 게 결국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방법인 거지. 돈이 목적이 아니야.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으니까 말이야. 가면 쓰고 사는 것이, 사실은 아니면서 그런 척 살아가는 게, 나만 그런 것도,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야. 그저 우리는 사회라는 틀 안에서 서로 암묵적인 약속을 했을 뿐인 거지. 그런 척하며 살아가기로 말이야."
어쩐지 인생 선배 또는 사회생활 선배한테서 들어야 할 것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에 대한 경계심이 저도 모르게 스르륵 풀리는 것만 같았다.
"부모님은 잘 계신가?"
뜬금없는 질문에 나래는 시선을 떨구며 대답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많이 불편하세요."
대답하고 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빠랑은... 친했나?"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질문에, 나래는 아빠를 떠올렸다.
전에는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만 떠올랐지만, 어쩐 일인지 환하게 웃던 어린 시절의 아빠 얼굴이 떠올랐다.
"자상하셨어요. 좀 더 오랫동안 곁에 머물렀으면 좋았을 텐데..."
나래가 말끝을 흐리자, 그가 말했다.
"그분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걸 원하셨을 거야. 너무도 간절하게 말이야."
나래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주시했다.
"갑자기 이런 얘긴 왜 꺼내는 거죠? 지금 대체..."
나래의 말을 끊으며 그가 대답했다.
"내가 누굴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래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를 응시 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 아이들이 크면 말이야."
나래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커지기 시작했다.
"그럼....?"
"나는... 현서와 현준이, 그리고 현우의 아빠 란다."
나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멈춰 서 버렸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아직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