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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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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연랑
· 최초 등록: 2025.10.04 · 최근 연재: 2025-10-25
읽기 시간 예측: 약 10.18분

44화 - #13


다시 돌아온 나래는 도망치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왜?"

같이 달려가던 한울이 멈춰 선 나래를 돌아보며 묻자, 나래가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이제 도망갈 필요 없어."

다음 순간, 그들을 따라 달려오는 치리와 병사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움 없이 달려오는 그들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고, 누비와 한울, 솔이는 그런 나래를 보며 의아해할 뿐이었다.

'콰쾅!'

굉음과 함께 벼락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자신을 따라오던 병사들이 일거에 다 쓰러져 버리자, 쫓아오던 치리가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이...이게..."

그가 다시 앞쪽을 바라봤을 땐, 어디서 나타났는지, 백하도령이 치리와 나래 사이에 서 있었다.

"크으..."

치리가 으르렁 소리를 내며 백하도령을 응시하자, 백하도령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과인은 더 이상의 무례를 용납할 의사가 없다."

치리가 커다란 덩치를 활짝 펴며 양손의 손톱을 날카롭게 세웠다.

"오만방자한 놈이구나!"

치리가 솥뚜껑 같은 손바닥을 활짝 편 체 백하도령을 향해 내뻗자, 백하도령의 곱고 작은 손이 그 거대한 손을 가로막았다.

치리는 이 작은 손이 설마 자신의 공격을 이토록 허무하게 막아낼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백하도령의 손 앞에서 자신의 이 커다란 손과 손톱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뒤이어, 백하도령의 손을 통해 엄청난 통증이 전해져 왔다.

"으아아악!"

처참한 비명소리였다.

백하도령의 손을 통해 엄청난 고통이 전해져 왔다.

'파지지직'

굉음과 함께 시간이 지날수록 치리의 몸은 쭈그러 드는 것 같았고, 온몸의 털이 타들어갔으며, 몸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으으..."

치리가 힘들어하며 털썩 무릎을 꿇자, 백하도령의 그의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더는 무리하지 말거라. 이 이상은 그대의 생명을 보존키 어려울 것이다."

백하도령의 냉랭한 한마디 말에, 치리는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들어 백하도령을 노려보았다.

"너...너는... 대체... 누구냐?"

간신히 내뱉은 치리의 물음에, 백하도령은 태연한 모습으로 그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과인은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지상의 생명들에게 하늘의 뜻을 전하며 죄진 자들을 벌하는 우뢰의 신이다."

치리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너털웃음을 지었다.

"신? 신이라..."

그는 크득크득 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토록 찾아 헤멜 때는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이제는 잘도 나타나는구나."

담담한 치리의 말에, 백하도령은 무심한 듯 물었다.

"신을 어찌 찾았느냐?"

치리가 고개를 들어 백하도령의 눈을 응시했다.

"키워주던 인간의 손에 맞아 죽고, 내 가죽이 벗겨졌소. 단지..."

치리가 말끝을 흐리자, 백하도령은 그를 지긋이 바라보며 또다시 물었다.

"살려달라, 신을 찾았더냐?"

치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울컥 솟구쳐 오르는 그 어떤 감정에, 치리는 분노한 표정을 한 체 눈물을 흘렸다.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다가 망설이는 듯, 그의 입술이 씰룩거렸지만, 쉬이 나오지 않았다.

백하도령은 손을 뻗어 치리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러자 치리에게서 수많은 기억들이 백하도령의 손을 타고 흘러들어와, 그의 머릿속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늑대. 그대로 두면 죽을 것 같은 새끼 늑대를, 인간들이 거두어 키운 것이 치리였다.

한 소년은 자신이 치리를 키울 것이라 나섰고, 그 소년의 아버지는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치리는 그 인간소년과 유대감을 키우며, 가족으로 성장했다.

늑대의 본능이 살아나기 전까지.

치리가 늑대의 본능을 보이기 시작할 무렵, 소년의 아버지는 치리를 소년과 떼어 놓았다.

극심한 불안이 치리의 본능을 더욱 자극했고, 이를 더 두고 볼 수 없었던 소년의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은, 결국 치리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하얀 두건으로 치리의 얼굴을 덮어 씌우고, 어른들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뜨거운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내리는 와중에, 느슨한 두건의 매듭 너머로 소년이 보였다.

매 맞아 죽는 치리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그 소년을 보며, 치리는 신께 빌었다.

저 아이가, 지금 이 모습을 보지 않게 해 달라고.

백하도령은 손을 거두었다.

십여 번이 전뢰(電雷)에 온몸에 신경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겪었을 치리를 보면서, 백하도령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아이의 슬픔을 걱정하였더냐?"

백하도령의 말에 치리는 시선을 떨구었다.

그 순간, 치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온통 하얗게 변하더니, 차가움이 느껴졌다.

어느샌가 자신은 눈 위에 있었다.

사이사이 눈 덮인 나무들의 풍경이 매우 익숙했다.

그렇다. 치리가 살던 곳이었다.

"여긴...."

치리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리~~"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치리야~~"

한 아이가 하얀 솜털 같은 눈 위에 자그마한 발자국을 만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치리야~"

해맑은 미소를 하고, 연신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아이를, 치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서...서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치리 자신은 어느새 반쯤 성장한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치리야 이리 와~"

어느샌가 몸은 멀쩡했다.

치리는 꼬리를 흔들며 자신을 부르는 어린 주인을 향해 달려갔다.

눈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이 순간을, 어린 주인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 꿈같은 순간을,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치리야!"

어린 주인이 치리를 껴안자, 따뜻한 온기가 치리의 온몸을 타고 퍼졌다.

이 느낌, 이 감촉, 이 따뜻함, 치리의 두 눈에서 눈물이 타고 흘러내렸다.

"어디 있었어? 얼마나 찾았다고~"

아이의 칭얼거림을 들으며, 치리는 가슴이 꽉 차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행복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겨울, 서우와 함께 했던 순간을...

그때 소년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미안해, 치리야. 미안해."

치리는 아이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자신의 털 위로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이의 울먹거림을 들은 치리는, 같이 울고 있었다.

아이의 뺨을 혀로 핥아주며, 치리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울지 말라고.

네 잘못은 없다고.

"미안해...."

아이의 울음과 함께, 치리는 서우의 따뜻한 품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평화로움이 깃든 표정 그대로, 고요하게 잠들어 버린 치리를, 백하도령은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나래가 다가와 묻는 말에, 백하도령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치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잠시... 그의 시간을 되돌려 주었다."

나래는 백하도령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만화방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치리에게도 그에게 소중했던 순간을 보여준 것이리라.

"죽은... 건가요?"

"이 세계는 죽음이란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죽어서 온 세상이기 때문이지. 다만, 이 세계는 원래 혼령이 머무는 세계가 아니기에, 이제 그는 그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치리의 몸이, 마치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지고, 백하도령의 눈빛이 어쩐지 슬퍼 보인 나래는 백하도령의 어깨에 손을 얹어 위로했다.

백하도령은 그런 나래를 보며 작은 미소로 답했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하는 거죠?"

한울이 다가와 묻는 말에, 나래와 백하도령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래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여왕을 만나러 가야지. 당당하게."

***

웅성거리는 소란이 시끌벅적하게 들려오는 통에, 낮잠에서 깨버린 여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바깥에 대체 무슨 소란이냐?"

여왕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버럭 소리 지르자, 문이 열리고 개 한 마리가 양손을 곱게 모아 쪼르르 달려왔다.

"그... 그것이..."

여왕은 그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더욱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냐? 대체 무슨 일이야?"

"그것이... 바깥에 외부인이 찾아와 병사들과 충돌이..."

"뭐?"

여왕이 놀라는것도 잠시, 바로 근처 바깥쪽에서 웅성 거리는 소리와 함께 우르르 도망가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대체..."

여왕이 어리둥절해 하며 말끝을 흐리자, 들어와 있던 개가 겁에 질려 덜덜 떨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여왕님."

개는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 다른 이들과 함께 도망쳐 버렸다.

여왕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긴장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체 이게..."

여왕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한쪽에 놓인 붉은색 도깨비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어떤 놈인지... 내 이번엔 돼지로 만들어 주마."

여왕이 씩씩 거리며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살짝 열려 있던 문을 활짝 열며 백하도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하도령 뒤로 나래와 솔이, 한울과 누비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여왕이 그중 한울을 알아보며 인상을 썼다.

"흥! 도망친 도깨비 놈들이구나.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여왕이 도깨비방망이를 치켜들자, 나래가 먼저 외쳤다.

"도깨비방망이 나와라, 뚝딱!"

그 순간, 여왕이 손을 내뻗으며 "돼지가 되어라!"를 외쳤지만, 이미 그녀의 손엔 도깨비방망이가 없었다.

"뭐?"

놀란 여왕은 당황했다. 나래의 손에 그녀의 도깨비방망이가 들려져 있었다.

"어, 어떻게?"

당황한 여왕이 뒤로 몇 발짝 주춤 물러서자, 나래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제 그만해요. 당신은 여왕이 아니에요."

두려워하는 여왕 앞으로 걸어간 나래가 양손에 도깨비방망이를 든 체 말했다.

"더 이상 불쌍한 이들을 괴롭히지 말아요."

여왕은 겁에 질린 체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숙여 다가오는 나래를 외면했다.

"으으으..."

그녀가 겁에 질려 떠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우린..."

나래가 무슨 말인가를 하며 다가서려는데, 뒤에서 백하도령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해!"

달려오는 백하도령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나래는 자신을 감싸는 큼지막한 어둠을 뒤늦게야 인식했다.

'이게 뭐야?'

아주 느리게,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백하도령의 모습이 보이면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의식이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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