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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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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연랑
· 최초 등록: 2025.10.04 · 최근 연재: 2025-10-25
읽기 시간 예측: 약 10.15분

33화 - #2


그곳은 푸른 초록빛으로 물든 숲 한가운데였다.

이름 모를 주황빛 과일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나무가 즐비했고, 틈 사이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은 따사로웠다.

파릇파릇 돋아난 수풀 한가운데 누워있던 나래는 눈을 뜨자마자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뭐야?"

나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짙은 풀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나래의 인기척에 놀란 작은 새가 포롱포롱 날아가 버렸다.

찌르르 찌르르 우는 어느 벌레의 울음소리와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꽃향기는, 나래가 놀라는 와중에도 평화로운 마음이 들게 하기 충분했다.

나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여긴 어디고 왜 여기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떤 위협이 있을것 같지는 않다고 판단했다.

마치 환상 속에서나 있을 것 같은 자연 풍경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어디서 흐르고 있는지 졸졸졸 흐르는 물길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나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걷는 길 한쪽에 있는 보랏빛 꽃들을 스치고 지나가니, 향긋한 꽃내음이 짙게 올라왔다.

몇 걸음 걷다 보니 졸졸 흐르는 냇물을 발견할 수 있었으나, 물이 제법 깊어서 그냥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히 오래전에 쓰러진 나무 하나가 다리처럼 놓여 있었다.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듯, 쓰러진 나무 몸통 위로 잡초와 이끼가 자라나고 있었다.

나래는 그 위로 발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어? 그러고 보니..."

자신이 신고 있는 신발이 총명부인에게 받은 세오녀의 꽃신임을 깨달았지만, 어쩐지 불길한 기분에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어?"

순간적으로 몸이 휘청한 나래는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바로잡았다.

나무의 이끼가 너무 미끄러웠다.

"왜? 미끄러진 거지?"

나래는 이상하다는 생각에, 흐르는 물 위를 살짝 디뎌 보았다.

이상하게도 꽃신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 체 하마터면 물속으로 풍덩 빠져버릴 뻔했다.

"신발이..."

나래는 꽃신이 제 능력을 쓰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곤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이상하네?"

나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이곳은 어느 곳이길래, 나래의 꽃신이 소용없게 된 걸까?

사실 나래는 자신이 있던 현실세계로 돌아간 직 후, 세오녀의 꽃신을 확인해 본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나래가 있던 세계에서도 세오녀의 꽃신은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나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던 세오녀의 꽃신이 이곳에서는 무용지물이라니, 나래는 도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궁금했다.

분명 반짝거리는 아지랑이에 손을 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아지랑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때였다. 뒤에서 인기척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지나갈 거야?"

놀란 나래가 뒤를 돌아보더니, 더욱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는 그것은, 길쭉한 귀를 쫑긋 거리는 토끼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토끼와 사람이 섞인 것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고, 나래의 허리춤 정도 오는 키였다.

제일 앞에 있는 토끼는 조선시대에나 입었을 것 같은 옷차림에, 두꺼운 뿔테 안경과 초립을 쓰고 있었다.

그 토끼 뒤로는 수수해 보이는 토끼 3마리가 줄을 지어 서 있어, 놀란 나래는 얼른 뒤로 물러섰다.

"머, 먼저 가세요."

나래의 대답에, 맨 앞의 토끼는 호주머니에서 둥근 해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혀를 끌끌 거리며 찼다.

"불필요하게 기다리게 만드는군."

그는 앞장서서 쓰러진 나무다리를 건넜고, 그 뒤를 나머지 세 마리의 토끼가 줄줄이 따라 건넜다.

나래는 묘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얼른 그들의 뒤를 쫓아 걷기 시작했다.

"시간은 생명이야. 항상 시간을 지켜야 하지."

앞장서서 걷는 토끼가 큰소리로 말을 하자, 뒤따라 가는 세 마리의 토끼들이 일제히 "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꼬불꼬불 숲길을, 익숙한 길을 걷듯이 거침없이 걸어갔고, 나래는 그 뒤를 바짝 쫓는 와중에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 이름 모를 숲의 풍경을 구경했다.

지나가다 보니, 한쪽에 서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흡사 사람의 형태처럼 보였다.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자, 그 바위가 움직였다.

마치 사람의 눈과 같이 퀭한 두 개의 구멍이 나래 쪽을 향하니, 나래는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를 하자, 그 바위도 나래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해 보였다.

'도대체 여긴 어디야?'

나래는 혼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행여나 토끼들을 놓칠까 그 뒤를 바짝 뒤쫓았다.

토끼들은 어느새 어느 커다란 나무 앞에 다다랐는데, 그 커다란 나무는 단순히 커다란 정도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나무였다.

높이도 어찌나 높은지, 뒤로 넘어질 듯 고개를 들어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고, 몸통의 두께는 얼마나 두꺼운지 구멍을 파내어 그 안에 집을 지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커다란 나무는 사방으로 줄기를 뻗어 파릇파릇한 잎사귀를 뽐내고 있었고, 몸통 제일 아래에는 자그마한 토끼굴 같은 구멍이 있어, 토끼들이 그 안으로 줄줄이 들어갔다.

"어?"

나래도 서둘러 그 구멍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나래가 들어가기에는 구멍이 조금 작았다.

"저, 저기요..."

나래는 앞서가는 토끼들을 불러 세웠지만, 그들은 못 들은 척 토끼굴 저 너머의 어딘가로 가버렸다.

억지로 들어가려다가 입구에 몸이 끼인 나래는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한 체 낑낑거리다가 푸념했다.

"아이씨... 괜히 따라왔나? 더 작아졌어야 했나?"

그때였다. 돌연 나래의 몸이 쑤욱하고 작아지더니, 아까 본 토끼들 정도 크기로 줄어들었다.

"뭐지?"

나래는 자신의 손과 발을 내려다 보고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된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래는 일단 토끼들을 쫓아가야겠다 싶어서, 얼른 그들이 사라진 토끼굴 너머로 달려갔다.

안쪽의 어둠을 헤치고, 분명 나무 안쪽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어마어마한 나무 안쪽은 아예 하나의 마을 풍경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흡사 조선시대 마을 풍경을 보는 듯, 두더지가 이끄는 인력거를 탄 토끼들과, 촛불로 밝혀진 등불 옆에 서서 담소를 나누는 토끼까지, 수많은 토끼들이 보였다.

"맙소사, 이게 다 뭐야?"

나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이들을 지켜보다가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누군가 나래는 툭툭 치며 말을 건네 왔다.

"이봐."

돌아보니 딱 봐도 포졸 같은 복장을 한 토끼 둘이 제법 큰 덩치로 으름장을 놓듯이 물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어디서 온 거야?"

다른 포졸 토끼가 다가와 나래의 옷깃을 잡아 채며 시비를 걸듯이 말했다.

"호패는 있는 거야? 소속이 어디야?"

나래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질문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언제 왔어?"

토끼 중에서도 조금 어려 보이는 토끼가 밝은 표정으로 나래에게 말을 건넸다.

"뭐야?"

포졸 토끼가 어린 토끼를 보며 퉁명스럽게 묻자, 어린 토끼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며 대답했다.

"아이, 저희 일꾼이에요. 여우굴에서 왔어요."

어린 토끼의 말에 포졸 토끼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들은 헛기침을 하며 "아아, 그랬어?" "여우였구만." 하면서 관심 없다는 듯이 돌아섰고, 어린 토끼는 나래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쪽으로 와."

나래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린 토끼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걸어갔다.

"저기... 나는 여우굴에서 온 게 아닌데..."

나래의 말에 앞서 걷는 어린 토끼가 대답했다.

"알고 있어. 하지만, 그대로 있었으면 그들에게 붙잡혀 갔을 거고, 그럼 험한 꼴을 당했을 거라구."

어린 토끼의 대답에 나래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 도와줘서 고마워."

어린 토끼가 나래를 돌아보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씨익 웃더니 물었다.

"난 이든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어려 보이는 토끼 이든의 물음에 나래는 눈을 껌뻑거리며 되물었다.

"이든?"

"응. 이든. 넌?"

이든이 다시 되묻자, 잠시 망설이던 나래가 대답했다.

"난... 나래라고 해."

"나래?"

"응."

이든은 다시 나래의 손을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어디서 왔는지는 묻지 않을게, 여긴 토끼굴이고, 여기가 토끼굴인지 알고 온 게 아니라면 서둘러 나가는 게 좋을 거야. 토끼들은 의심이 많아."

나래는 이든을 따라 걷다가 궁금해서 물었다.

"그런데.... 왜 도와주는 거야?"

나래의 물음에 이든이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나래를 돌아보았다.

"왜 도와주냐고?"

"응."

이든의 되물음에 답한 나래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이든은, 뭔가 고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글세....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 그냥... 뭐랄까? 네가 도움이 필요해 보였달까?"

나래는 뭔가 갸우뚱한 기분이 들었다.

토끼굴에 들어올 때 갑자기 몸이 작아진 것도 그렇고, 아무런 이유 없이 자기를 도와주는 토끼를 만난 것도 그렇고, 이 모든 것들에 뭔지 모르게 묘한 이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반대편 문으로 나갈 수 있어. 나가서 나간 방향 그대로 쭉 걸어가면, 너랑 비슷하게 생긴 이들을 볼 수 있어."

"나랑 비슷하게 생겼다고?"

"응. 그곳으로 가봐. 네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이야."

"누구한테 뭘 물어봐야 하는 거지?"

나래의 질문에 되려 이든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깔깔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너 재밌는 애구나. 넌 이곳에 어떻게 온 거야?"

"여긴 어딘데?"

"여기? 여긴 나린 왕국이지."

"나린 왕국?"

"그래. 넌 네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몰라?"

나래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내가 말한 곳에 가봐. 그곳에는 한울이라는 어른이 있어. 그를 만나봐. 토끼굴에 이든이 알려줬다고 하면 도와줄 거야."

이든은 다시 나래를 데리고 걷기 시작했고, 어느새 반대쪽 문이 있는 계단에 이르렀다.

"쭉 가."

이든은 배웅을 마친 듯 물러섰고, 나래는 이든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고마워."

"또 보자."

의미심장한 이든의 인사에, 나래는 어색한 웃음으로 답한 뒤 계단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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