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 #1
한낮이지만 바람은 시원하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지난번 일로 집 주위를 지키는 병사들의 수가 족히 십여 명은 넘게 늘어나 있었다.
보호를 받는다기 보다 어쩐지 갇혀 있는 것만 같아 답답한 마음에, 마당을 빙글빙글 돌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어쩌다가 사교도들과 함께 있게 된 것일까?'
문득 연희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그 부분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이 도리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같은 시각, 세자 역시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연희는 어쩌다가 사교도들에게 잡혀간 것일까? 그리고 사교도들은 연희를 데려다가 대체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일까?'
더욱이 그 궁금증은, 사교도 무리가 좌의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나서부터 더욱 커져갔다.
이렇다 할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자의 심증으로는 자신의 어머니 죽음에 좌의정이 분명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어머니 목 뒤 문신 문양과 연희의 목 뒤 문신 문양이 같은 것도, 이를 뒷받침해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무조건 잡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보아야겠구나.'
사술이나 주술 따위는 눈으로 보지 않는 한, 말로만 들어서는 믿기 힘든 것들이 종종 있다.
세자는 앉아서 보고만 받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여봐라."
세자가 부르자 내관이 얼른 달려 나왔다.
"예, 저하."
"지금 당장 부총관을 들라하라."
"예, 저하."
내관이 물러가고, 세자는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혔다.
어떻게든 사교도 무리 속에 들어가 그들의 목적을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 거렸다.
잠시 후, 수현이 들었다.
"저하, 부르셨나이까."
수현의 인사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총관. 사교도 무리의 행적을, 은밀히 찾아보게."
수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은... 밀히라뇨?"
"잡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을 터, 잠입하여 저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야겠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당장 날쌘 수하 몇을 뽑아..."
"아니다. 내가 직접 잠입할 것이다."
그 말에 수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하, 어찌...당치 않습니다. 그러다 행여 예체(睿體)에 무슨일이라도 생기시면...절대 아니됩니다."
"저들의 사술은 해괴하여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다 하지 않았던가. 내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봐야겠다."
"하오나, 저하. 위험한 자리이옵니다. 어떤 일이 있을 줄 알고 그곳에 가신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세자가 수현을 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물론, 자네가 함께 가야겠지."
"예?"
"내놓아라 하는 무신 가문의 적자들을 물리치고, 무반제일검(武班第一劍)의 명성을 얻은 자네가 아닌가? 자네가 함께라면 위험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말일세."
수현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어째 칭찬으로 들리지가 않습니다, 저하..."
"칭찬 맞다."
"설령 그렇다 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 혼자 상대하는 것은 어찌 될지 몰라도, 그 와중에 저하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사옵니다."
"내몸 하나 못지킬까, 걱정하지 말게. 그리고 어영위의 군사들을 대동할 것이네."
"실제 배치되어 활용할 수 있는 어영위 군사는 백여 명에 불과합니다. 사교도의 무리들이 몇 명일 줄 알고 상대하신다 하십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네. 어차피 일망타진할 계획으로 잠입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저들의 목적을 알고자 함일세."
수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말린다고 말을 들을 세자도 아니었다.
"속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수현이 인사를 올린 뒤, 자리에서 물러나 서둘러 궁궐 밖으로 향했다.
그때 어디선가 수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총관."
수현이 고개를 돌려보니, 도총관 홍여립이 그를 부르며 서 있었다.
수현은 얼른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부르셨사옵니까?"
"그래. 자네에게는 세자마마를 지키는 막중한 운검의 임무가 겸직되었을 터인데 어찌 세자마마의 곁을 지키지 않고 항상 밖으로만 나가는 것인가?"
말의 내용은 타박하는 내용이었으나, 목소리는 밝고 친근했다.
수현은 그런 홍여립을 보며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어쩌겠습니까, 그 세자마마께옵서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잔뜩 시키시옵니다."
"네 수하들은 어쩌고, 잔심부름을 네가 하는 것이냐?"
"그러게나 말입니다. 꼭 저에게만 시키십니다."
수현의 넉살에 홍여립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세자마마께서는 어찌하고 계시느냐?"
나지막하게 묻는 말에, 수현이 진중한 표정으로 답했다.
"사교도 무리가 아무래도 좌상대감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수현의 말에 홍여립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라? 그 말이 사실이냐?"
"예, 아직은 이렇다 할 증좌가 없으나, 최선을 다해 사교도 무리를 쫓고 있습니다. 다만... 인원이 부족하다 보니, 생각만큼 서두를 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홍여립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중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받거라."
수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물건을 바라보니, 바로 서찰이 든 봉투였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수현이 서찰을 받아 들며 의아하게 묻는 말에, 홍여립이 조용히 말했다.
"이것을 좌포청 포도대장 엄길상에게 보이거라. 네게 도움을 줄 것이다."
수현이 놀란 눈으로 홍여립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옵니까? 믿을 수 있는 것이옵니까?"
홍여립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얼마 전 부임한 엄길상은 나와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다. 서로를 목숨 걸고 지켜주기로 맹세한 사이이며, 의를 제 목숨보다 귀히 여기는 사람이니, 믿어도 될 것이다."
수현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신기한 일이군요. 좌포청 포도대장이면, 결코 가벼운 직책이 아닐진대, 그것을 좌상대감이 내어 주었단 말입니까?"
홍여립도 의아한듯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나로서도 아직 알 길이 없구나. 알고서 그런 것인지 아닌 것인지, 이판대감과 병판대감의 적극 추천으로 엄길상이 이번에 좌포청 포도대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과정이야 의문이 많이 남아 조심스럽지만, 결과적으로는 주상전하께 조금 더 힘이 실리게 되었으니, 다행인 일이 아니더냐?"
"예, 물론 그렇지요."
수현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가서 서찰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수현은 다시 공손히 인사를 한 뒤, 서둘러 궁궐을 빠져나갔다.
***
빈청으로 들어선 좌상대감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때마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육조의 대감들 모두 좌상대감을 보고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이번에 좌포청 포도대장에 새로 부임한 사람이 혹 엄길상이란 사람 맞습니까?"
좌상대감의 물음에, 이판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맞습니다. 병판대감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지요."
맞은편 병판 대감이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맞습니다. 이 사람이 추천하였습니다. 인품도 훌륭하고, 사내다운 기질을 타고난 무장이지요. 믿고 맡겨도 무방하다 여겨집니다."
좌상대감은 못마땅한 표정을지으며 병판 대감을 바라보았다.
"그 자하고는 어찌 알게 된 사이십니까?"
"아, 내 아우 덕에 알게 되었는데, 아주 사람이 진국입니다. 보면 볼수록 참 마음에 드는 사람이에요."
좌상은 여전히 불만스런 얼굴로 되물었다.
"듣자 하니, 도총관 홍여립과는 막역한 사이라 들었는데... 알고 계셨습니까?"
그 말에 병판의 표정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래요? 그건... 듣지 못했습니다."
좌상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이판을 쏘아보자, 이판도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 이 사람도... 그런 내용은 듣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일 줄이야..."
좌상이 갑자기 탁자를 치며 소리치듯 말했다.
"어찌들 이러십니까? 일을 이렇게 소홀히 해서야 되겠습니까? 중한 자리에 사람을 앉힐 때는 어떤 사람인지 세밀히 살펴야 할 것 아닙니까?"
이판은 머쓱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숙였지만, 병판은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좌상대감, 개인적인 친분까지 이 사람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개인적인 친분을 어디 기록해 놓는 것도 아니고, 나 이 사람과 친합니다라고 써붙이는 것도 아닐진대,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아닙니까?"
좌상이 답답하다는 듯이 병판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 중요 요직일수록, 한사람을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앉히는 법이지요. 곁에서 길게 지켜본 다음에 말입니다."
병판은 지지 않고 맞서 얘기했다.
"이 사람이 오랜 시간 두고 본 사람입니다. 도총관과의 친분까지는 알지 못하였으나, 사람 됨됨이가 아주 바르고 굳건한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면 족한 것 아닙니까?"
좌상은 표정을 굳히곤 병판을 응시했다.
"근래 들어, 이 사람과 종종 대립하십니다, 병판."
좌상의 싸늘한 목소리에, 병판은 헛기침을 하며 한결 수그러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내가 좌상대감과 반목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다 보니, 그렇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좌상은 대답하지 않고, 빈청 안에 대감들을 하나씩 돌아보기 시작했다.
다들 차마 좌상과 마주하지 못한 체 얼른 고개를 숙여 눈길을 피했다.
"좋습니다. 어영위 건은 병판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번 일은 이판의 체면을 생각해서 넘어가 드리지요. 허나, 그 체면을 자꾸 내세우면, 체면 따위 필요 없는 자리에 가시게 될겝니다."
협박 아닌 협박을 남기고, 좌상대감이 밖으로 나가 버리자, 다들 서로 눈치만 살폈고, 병판은 못마땅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밖으로 나온 좌상대감은 분함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렸다.
"주제도 모르고..., 누구 덕에 그 자리에 앉았는데, 감히..."
그때, 마침 누군가 지나가다가 좌상을 보고 인사를 하니, 좌상이 그를 보고 눈빛을 번득거렸다.
"안녕하십니까, 대감."
"오, 이게 누구신가? 영운 아니신가? 궁궐에는 어인 일인가?"
좌상이 반갑게 맞으니, 도리어 흠칫 놀란 표정으로 영운(박지언의 호)은 다시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예, 의금부와 관련된 일로 볼일이 있어 잠시 들렸습니다."
"그래, 요즘 우포청은 어떤가? 요즘도 많이 바쁜가?"
"지금은 한결 나아졌습니다. 근래 들어 사교도 무리가 사방에서 혹세무민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오히려 이전보다는 평화로운 듯합니다."
"그래... 내 안 그래도 자네를 좀 만나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네."
좌상의 말에 박지언이 의문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예? 저를 어찌..."
"이리 오시게. 날 좀 잠깐 보고 가게."
좌상이 넌지시 말을남기며 먼저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박지언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지난번 일로 집 주위를 지키는 병사들의 수가 족히 십여 명은 넘게 늘어나 있었다.
보호를 받는다기 보다 어쩐지 갇혀 있는 것만 같아 답답한 마음에, 마당을 빙글빙글 돌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어쩌다가 사교도들과 함께 있게 된 것일까?'
문득 연희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그 부분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이 도리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같은 시각, 세자 역시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연희는 어쩌다가 사교도들에게 잡혀간 것일까? 그리고 사교도들은 연희를 데려다가 대체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일까?'
더욱이 그 궁금증은, 사교도 무리가 좌의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나서부터 더욱 커져갔다.
이렇다 할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자의 심증으로는 자신의 어머니 죽음에 좌의정이 분명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어머니 목 뒤 문신 문양과 연희의 목 뒤 문신 문양이 같은 것도, 이를 뒷받침해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무조건 잡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보아야겠구나.'
사술이나 주술 따위는 눈으로 보지 않는 한, 말로만 들어서는 믿기 힘든 것들이 종종 있다.
세자는 앉아서 보고만 받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여봐라."
세자가 부르자 내관이 얼른 달려 나왔다.
"예, 저하."
"지금 당장 부총관을 들라하라."
"예, 저하."
내관이 물러가고, 세자는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혔다.
어떻게든 사교도 무리 속에 들어가 그들의 목적을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 거렸다.
잠시 후, 수현이 들었다.
"저하, 부르셨나이까."
수현의 인사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총관. 사교도 무리의 행적을, 은밀히 찾아보게."
수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은... 밀히라뇨?"
"잡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을 터, 잠입하여 저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야겠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당장 날쌘 수하 몇을 뽑아..."
"아니다. 내가 직접 잠입할 것이다."
그 말에 수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하, 어찌...당치 않습니다. 그러다 행여 예체(睿體)에 무슨일이라도 생기시면...절대 아니됩니다."
"저들의 사술은 해괴하여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다 하지 않았던가. 내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봐야겠다."
"하오나, 저하. 위험한 자리이옵니다. 어떤 일이 있을 줄 알고 그곳에 가신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세자가 수현을 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물론, 자네가 함께 가야겠지."
"예?"
"내놓아라 하는 무신 가문의 적자들을 물리치고, 무반제일검(武班第一劍)의 명성을 얻은 자네가 아닌가? 자네가 함께라면 위험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말일세."
수현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어째 칭찬으로 들리지가 않습니다, 저하..."
"칭찬 맞다."
"설령 그렇다 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 혼자 상대하는 것은 어찌 될지 몰라도, 그 와중에 저하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사옵니다."
"내몸 하나 못지킬까, 걱정하지 말게. 그리고 어영위의 군사들을 대동할 것이네."
"실제 배치되어 활용할 수 있는 어영위 군사는 백여 명에 불과합니다. 사교도의 무리들이 몇 명일 줄 알고 상대하신다 하십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네. 어차피 일망타진할 계획으로 잠입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저들의 목적을 알고자 함일세."
수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말린다고 말을 들을 세자도 아니었다.
"속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수현이 인사를 올린 뒤, 자리에서 물러나 서둘러 궁궐 밖으로 향했다.
그때 어디선가 수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총관."
수현이 고개를 돌려보니, 도총관 홍여립이 그를 부르며 서 있었다.
수현은 얼른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부르셨사옵니까?"
"그래. 자네에게는 세자마마를 지키는 막중한 운검의 임무가 겸직되었을 터인데 어찌 세자마마의 곁을 지키지 않고 항상 밖으로만 나가는 것인가?"
말의 내용은 타박하는 내용이었으나, 목소리는 밝고 친근했다.
수현은 그런 홍여립을 보며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어쩌겠습니까, 그 세자마마께옵서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잔뜩 시키시옵니다."
"네 수하들은 어쩌고, 잔심부름을 네가 하는 것이냐?"
"그러게나 말입니다. 꼭 저에게만 시키십니다."
수현의 넉살에 홍여립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세자마마께서는 어찌하고 계시느냐?"
나지막하게 묻는 말에, 수현이 진중한 표정으로 답했다.
"사교도 무리가 아무래도 좌상대감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수현의 말에 홍여립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라? 그 말이 사실이냐?"
"예, 아직은 이렇다 할 증좌가 없으나, 최선을 다해 사교도 무리를 쫓고 있습니다. 다만... 인원이 부족하다 보니, 생각만큼 서두를 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홍여립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중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받거라."
수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물건을 바라보니, 바로 서찰이 든 봉투였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수현이 서찰을 받아 들며 의아하게 묻는 말에, 홍여립이 조용히 말했다.
"이것을 좌포청 포도대장 엄길상에게 보이거라. 네게 도움을 줄 것이다."
수현이 놀란 눈으로 홍여립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옵니까? 믿을 수 있는 것이옵니까?"
홍여립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얼마 전 부임한 엄길상은 나와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다. 서로를 목숨 걸고 지켜주기로 맹세한 사이이며, 의를 제 목숨보다 귀히 여기는 사람이니, 믿어도 될 것이다."
수현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신기한 일이군요. 좌포청 포도대장이면, 결코 가벼운 직책이 아닐진대, 그것을 좌상대감이 내어 주었단 말입니까?"
홍여립도 의아한듯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나로서도 아직 알 길이 없구나. 알고서 그런 것인지 아닌 것인지, 이판대감과 병판대감의 적극 추천으로 엄길상이 이번에 좌포청 포도대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과정이야 의문이 많이 남아 조심스럽지만, 결과적으로는 주상전하께 조금 더 힘이 실리게 되었으니, 다행인 일이 아니더냐?"
"예, 물론 그렇지요."
수현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가서 서찰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수현은 다시 공손히 인사를 한 뒤, 서둘러 궁궐을 빠져나갔다.
***
빈청으로 들어선 좌상대감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때마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육조의 대감들 모두 좌상대감을 보고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이번에 좌포청 포도대장에 새로 부임한 사람이 혹 엄길상이란 사람 맞습니까?"
좌상대감의 물음에, 이판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맞습니다. 병판대감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지요."
맞은편 병판 대감이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맞습니다. 이 사람이 추천하였습니다. 인품도 훌륭하고, 사내다운 기질을 타고난 무장이지요. 믿고 맡겨도 무방하다 여겨집니다."
좌상대감은 못마땅한 표정을지으며 병판 대감을 바라보았다.
"그 자하고는 어찌 알게 된 사이십니까?"
"아, 내 아우 덕에 알게 되었는데, 아주 사람이 진국입니다. 보면 볼수록 참 마음에 드는 사람이에요."
좌상은 여전히 불만스런 얼굴로 되물었다.
"듣자 하니, 도총관 홍여립과는 막역한 사이라 들었는데... 알고 계셨습니까?"
그 말에 병판의 표정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래요? 그건... 듣지 못했습니다."
좌상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이판을 쏘아보자, 이판도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 이 사람도... 그런 내용은 듣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일 줄이야..."
좌상이 갑자기 탁자를 치며 소리치듯 말했다.
"어찌들 이러십니까? 일을 이렇게 소홀히 해서야 되겠습니까? 중한 자리에 사람을 앉힐 때는 어떤 사람인지 세밀히 살펴야 할 것 아닙니까?"
이판은 머쓱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숙였지만, 병판은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좌상대감, 개인적인 친분까지 이 사람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개인적인 친분을 어디 기록해 놓는 것도 아니고, 나 이 사람과 친합니다라고 써붙이는 것도 아닐진대,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아닙니까?"
좌상이 답답하다는 듯이 병판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 중요 요직일수록, 한사람을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앉히는 법이지요. 곁에서 길게 지켜본 다음에 말입니다."
병판은 지지 않고 맞서 얘기했다.
"이 사람이 오랜 시간 두고 본 사람입니다. 도총관과의 친분까지는 알지 못하였으나, 사람 됨됨이가 아주 바르고 굳건한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면 족한 것 아닙니까?"
좌상은 표정을 굳히곤 병판을 응시했다.
"근래 들어, 이 사람과 종종 대립하십니다, 병판."
좌상의 싸늘한 목소리에, 병판은 헛기침을 하며 한결 수그러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내가 좌상대감과 반목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다 보니, 그렇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좌상은 대답하지 않고, 빈청 안에 대감들을 하나씩 돌아보기 시작했다.
다들 차마 좌상과 마주하지 못한 체 얼른 고개를 숙여 눈길을 피했다.
"좋습니다. 어영위 건은 병판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번 일은 이판의 체면을 생각해서 넘어가 드리지요. 허나, 그 체면을 자꾸 내세우면, 체면 따위 필요 없는 자리에 가시게 될겝니다."
협박 아닌 협박을 남기고, 좌상대감이 밖으로 나가 버리자, 다들 서로 눈치만 살폈고, 병판은 못마땅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밖으로 나온 좌상대감은 분함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렸다.
"주제도 모르고..., 누구 덕에 그 자리에 앉았는데, 감히..."
그때, 마침 누군가 지나가다가 좌상을 보고 인사를 하니, 좌상이 그를 보고 눈빛을 번득거렸다.
"안녕하십니까, 대감."
"오, 이게 누구신가? 영운 아니신가? 궁궐에는 어인 일인가?"
좌상이 반갑게 맞으니, 도리어 흠칫 놀란 표정으로 영운(박지언의 호)은 다시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예, 의금부와 관련된 일로 볼일이 있어 잠시 들렸습니다."
"그래, 요즘 우포청은 어떤가? 요즘도 많이 바쁜가?"
"지금은 한결 나아졌습니다. 근래 들어 사교도 무리가 사방에서 혹세무민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오히려 이전보다는 평화로운 듯합니다."
"그래... 내 안 그래도 자네를 좀 만나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네."
좌상의 말에 박지언이 의문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예? 저를 어찌..."
"이리 오시게. 날 좀 잠깐 보고 가게."
좌상이 넌지시 말을남기며 먼저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박지언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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