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2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저 막연하게 옮긴 발걸음은, 어느새 인적이 드문 길가로 향하고 있었다.
터벅터벅 맥 빠진 걸음걸이는 그 목적도, 의미도 퇴색되어 버린, 의미 없는 삶과 꼭 닮아있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버린 것일까 싶은 생각에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드니, 몇 걸음 앞에 서서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동환이 보였다.
주동환은 연희가 자신을 발견하자, 천천히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
연희의 바로 앞에 멈춰서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것이냐?"
연희의 시선이 그의 눈길을 피해 아래로 향했다.
어찌 대답해야 할까. 어차피 주동환을 만나고자 했지만 왠지, 세자 곁을 떠나왔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이룰 수 없는 희망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음이 아파왔다.
"가거라. 그곳이 어디든, 내가 뒤따르마."
연희가 고개를 들어 다시 주동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할 일이 있지 않으십니까?"
주동환은 망설임 없이 연희를 보며 대답했다.
"버릴 것이다. 포기할 것이다. 내버려 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어찌 너만큼 귀하고 중하겠느냐?"
연희의 뺨위로 감출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연희 입에서 터지듯 내뱉은 한마디 뒤로, 울음이 따라 나왔다.
주동환이 조심스럽게 연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가 있는 곳으로 함께 가자. 어디로 가든, 네가 있고 싶은 만큼 머물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나거라."
연희는 그렇게 말해주는 주동환에게 크나큰 고마움과 한편 미안함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오로지 세자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
연희는 말위에 앉아 있었다.
터벅한 걸음을 옮기는 말 옆구리에는 말고삐를 거머쥔 주동환이 천천히 발을 맞춰 걷고 있었다.
"저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연희의 물음에 주동환이 그녀를 슬쩍 올려다보더니 빙그레 웃어 보였다.
"글세... 필요한 만큼?"
연희는 기운 없는 와중에도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는 원래 어떤 아이였습니까? 듣자 하니 역병으로 죽었다 하던데..."
연희의 말에 주동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찌... 안 것이냐?"
연희가 떨리는듯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생전에 동생같이 대하던 아이를 만나 알게 됐습니다. 제가 이미 죽은 사람이란 것을요..."
그녀의 말에 주동환이 잠시 말없이 걷다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다. 나 역시... 이미 죽은 사람이다."
주동환의 말에 연희가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동환을 내려다 보았다.
"정말입니까?"
"그래. 우리처럼, 이미 죽은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사는 것을 가리켜 기생령(寄生靈)이라 한다."
주동환은 슬쩍 연희의 표정을 살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원래 궁궐에 있었다. 내금위에 한 사람으로 주상전하와 세자마마의 곁을 지켰었지."
연희가 놀라 되물었다.
"세자마마 곁을요? 그럼 세자마마를 아십니까?"
주동환이 씁쓸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세자에 대해서, 너보다 많이 알고 있다고. 물론 세세한 것까지 알지는 못하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대략 알고 있다. 그리고 수현도..."
"금호 나리 말입니까?"
"그래. 그 녀석... 내 사제다.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 하였지."
연이은 놀라움에 연희의 눈이 화등장만하게 커지자, 그런 연희를 보며 주동환이 웃음 지었다.
"내 원래 이름은... 표영호였다. 이 주동환이라는 검계 수장의 몸에 기생하여 살게 된 것이지."
"표... 영호..."
연희가 이름을 조용히 곱씹자, 주동환이 말했다.
"이름 따위가 어떤들 무슨 상관이겠느냐? 나는 나 일뿐. 이제는 주동환이란 이름도 제법 익숙해졌다."
잠시 말없이 생각에 빠져있던 연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제 몸의 원래 이름을 아십니까?"
주동환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굳어진 표정으로 연희를 쳐다보았다.
잠시 말없이 연희를 바라보던 주동환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세영이다."
연희는 그 이름을 듣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려왔다.
"윤.... 세영....."
문득 가슴이 저미어 오자, 손으로 가슴께를 누르며 물었다.
"윤.... 윤세영이라면.... 혹시.... 윤호성.... 윤호성 대감과 어떤 사이입니까? 혹시..."
주동환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전 이조판서 윤호성 대감이 윤세영의 아비 되는 자이다."
연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날, 윤호성 대감이 처형되던 날,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흘러내렸었는지 알지 못했는데, 그 의문이 풀렸다.
그 사람은 바로 이 육신의 아버지였고, 원래 이 몸의 주인이 슬퍼서 흘린 눈물이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연희는 마음속으로 연신 자신의 육신을 향해 사죄를 했다.
그런 것을 미처 알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어차피 너와는 관련 없는 사람이다."
주동환이 달래듯 건네는 말에 연희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보았습니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처형되었단 소식을 듣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났었습니다. 그 마지막을... 그 곁을 지켜 드렸어야 했는데..."
연희가 슬퍼하며 우는 모습을, 주동환은 말없이 쓸쓸하게 바라보고 서 있다가, 천천히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시금 말이 움직이고, 또각 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잔잔하게 주위에 울려 퍼졌다.
조금 진정이 된 연희가 눈물을 훔치며, 주동환에게 물었다.
"그럼... 이 몸은... 아직... 살아있는 것입니까?"
주동환은 다시금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무거운 표정으로 연희를 돌아보았다.
"물론... 그렇다."
"원래 주인은... 그녀... 윤세영의 영혼은 어찌 된 것입니까?"
주동환이 천천히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러난 몸을 뒤돌아, 연희에게 등을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그의 등에는 연희의 목 뒤에 있는 것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주술이다. 기생령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원 주인의 영혼이 깨어나는 것을 억제하는 주술이지."
이어 다시 옷을 입으며 말을 이었다.
"보통, 그 효과를 최대한으로 끌어내기 위해, 최대한 머리 가까이에 이 부적을 심는다. 그렇기에 보통 목 뒤에 있는 것이지."
연희는 주동환의 이야기에, 자기도 모르게, 목 뒤에 있는 그 문양을 만지작거렸다.
"나 같은 경우,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등에 부적을 새겨 넣었다. 즉, 굳이 바꾸고자 하면, 위치를 바꿀 수도 있는 것이지."
"그럼... 돌려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원 주인에게..."
주동환은 실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너는 항상 너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먼저 걱정하는구나."
"나리도 그러시지 않습니까? 나리 자신보다 저를 먼저 염려하시니 말입니다."
연희의 말에 주동환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허나, 잊지 말거라. 그 몸을 원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것은... 네가 구천을 떠돌던 원혼(怨魂)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기생령이 되었던 영혼은, 다시 기생령이 되지 않는 이상, 육신을 떠나서는 얼마 안가 소멸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수차례 시도해본 결과였다."
연희는 소연에게 들어 알면서도 확실히 확인하고자 모르는척 은근슬쩍 물었다.
"이 기생령의 주술은 누가 행하는 것입니까? 혹... 그 율교라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연희의 물음에 주동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앞을 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관련이 있지. 율교의 교주가 천무방의 방주이고, 이 기생령의 술수를 부리는 주술사이지."
"그는 어찌 이런 술수를 부리는 것입니까? 그자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주동환이 고개를 살짝 돌려 연희를 보면서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 내가 그것을 말해주면, 세자에게 달려가 고변이라도 할 생각이냐?"
주동환의 핀잔 같은 농담에, 연희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하... 그것들은 천천히 알아가자.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말해주면, 네가 훌쩍 떠나갈까 무섭구나."
주동환이 다시 앞을 보고 걸으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하나씩 천천히 말해줄 것이다. 내 곁에 오래오래 머물 수 있게."
***
짙은 보랏빛의 하늘 위로 그려진 달빛은, 그 은은한 빛무리를 우물 위에 흩뿌리고 있었다.
우물에 비친 달을 보며, 세자는 말없이 서 있었다.
어디에도 없었다. 갈만한 곳을 모두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렇듯 말없이 홀연히 떠나가 버린 것일까?
세자는 끊이지 않는 의문을 되새기며, 연희와 함께 바라보았던 우물을 내려다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 신분 때문인가.'
지금까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이 세자임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신분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저 연희 곁에 나란히, 함께 서기를 바랬을 뿐인데,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아, 가슴속에 울분이 가득 차올랐다.
깊은 시름이, 긴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런 세자의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수현과, 그의 곁에 서서 수현과 세자를 번갈아 살피는 소연이 있었다.
소연은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 참지 못한 듯 수현에게 물었다.
"혹... 저하께옵서, 그 아이에게 연심이라도 가지신 것입니까?"
소연이 확인하듯 묻는 말에, 수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엄한 표정으로 꾸짖듯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이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람 마음이란 게,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저하께 그리도 연심을 품지 말라 말씀드렸건만, 끝내는 그리 되신 것 같구나. 허나, 어디 가서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수현이 마지막에 주의를 당부하자, 소연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소연의 시선이 세자에게로 향했다.
어쩐지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은 기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아이.... 어떠셨습니까?"
소연이 다시금 묻는 말에, 얼마전 연희를 공격했던 소연이었기에 수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연이 수현의 생각을 읽은듯 멋쩍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제 실수도 있었고... 또 얼마 보지 못해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그럽니다."
변명하듯 얼버무리는 소연을 보며, 수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심성이 착한 아이였다. 밝고 씩씩한 면이 있어, 저하의 마음에 많은 용기를 주는 듯 보이더구나. 마음에 고심이 있었던 모양인데... 하루빨리 찾기를 바랄 수밖에..."
수현의 한숨을 지켜보며, 소연은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문득 예전 스승인 백무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이것아, 원귀가 어디 그리 되고 싶어 되는 원귀가 있더냐? 다 그 나름의 사연이 있는 것이다. 불쌍히 여겨야지.
소연은 당시 스승님의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원귀는 원귀일 뿐, 사람을 해치는 것들에게 자비 따위는 베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믿음에, 이제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터벅터벅 맥 빠진 걸음걸이는 그 목적도, 의미도 퇴색되어 버린, 의미 없는 삶과 꼭 닮아있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버린 것일까 싶은 생각에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드니, 몇 걸음 앞에 서서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동환이 보였다.
주동환은 연희가 자신을 발견하자, 천천히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
연희의 바로 앞에 멈춰서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것이냐?"
연희의 시선이 그의 눈길을 피해 아래로 향했다.
어찌 대답해야 할까. 어차피 주동환을 만나고자 했지만 왠지, 세자 곁을 떠나왔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이룰 수 없는 희망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음이 아파왔다.
"가거라. 그곳이 어디든, 내가 뒤따르마."
연희가 고개를 들어 다시 주동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할 일이 있지 않으십니까?"
주동환은 망설임 없이 연희를 보며 대답했다.
"버릴 것이다. 포기할 것이다. 내버려 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어찌 너만큼 귀하고 중하겠느냐?"
연희의 뺨위로 감출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연희 입에서 터지듯 내뱉은 한마디 뒤로, 울음이 따라 나왔다.
주동환이 조심스럽게 연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가 있는 곳으로 함께 가자. 어디로 가든, 네가 있고 싶은 만큼 머물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나거라."
연희는 그렇게 말해주는 주동환에게 크나큰 고마움과 한편 미안함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오로지 세자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
연희는 말위에 앉아 있었다.
터벅한 걸음을 옮기는 말 옆구리에는 말고삐를 거머쥔 주동환이 천천히 발을 맞춰 걷고 있었다.
"저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연희의 물음에 주동환이 그녀를 슬쩍 올려다보더니 빙그레 웃어 보였다.
"글세... 필요한 만큼?"
연희는 기운 없는 와중에도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는 원래 어떤 아이였습니까? 듣자 하니 역병으로 죽었다 하던데..."
연희의 말에 주동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찌... 안 것이냐?"
연희가 떨리는듯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생전에 동생같이 대하던 아이를 만나 알게 됐습니다. 제가 이미 죽은 사람이란 것을요..."
그녀의 말에 주동환이 잠시 말없이 걷다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다. 나 역시... 이미 죽은 사람이다."
주동환의 말에 연희가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동환을 내려다 보았다.
"정말입니까?"
"그래. 우리처럼, 이미 죽은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사는 것을 가리켜 기생령(寄生靈)이라 한다."
주동환은 슬쩍 연희의 표정을 살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원래 궁궐에 있었다. 내금위에 한 사람으로 주상전하와 세자마마의 곁을 지켰었지."
연희가 놀라 되물었다.
"세자마마 곁을요? 그럼 세자마마를 아십니까?"
주동환이 씁쓸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세자에 대해서, 너보다 많이 알고 있다고. 물론 세세한 것까지 알지는 못하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대략 알고 있다. 그리고 수현도..."
"금호 나리 말입니까?"
"그래. 그 녀석... 내 사제다.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 하였지."
연이은 놀라움에 연희의 눈이 화등장만하게 커지자, 그런 연희를 보며 주동환이 웃음 지었다.
"내 원래 이름은... 표영호였다. 이 주동환이라는 검계 수장의 몸에 기생하여 살게 된 것이지."
"표... 영호..."
연희가 이름을 조용히 곱씹자, 주동환이 말했다.
"이름 따위가 어떤들 무슨 상관이겠느냐? 나는 나 일뿐. 이제는 주동환이란 이름도 제법 익숙해졌다."
잠시 말없이 생각에 빠져있던 연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제 몸의 원래 이름을 아십니까?"
주동환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굳어진 표정으로 연희를 쳐다보았다.
잠시 말없이 연희를 바라보던 주동환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세영이다."
연희는 그 이름을 듣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려왔다.
"윤.... 세영....."
문득 가슴이 저미어 오자, 손으로 가슴께를 누르며 물었다.
"윤.... 윤세영이라면.... 혹시.... 윤호성.... 윤호성 대감과 어떤 사이입니까? 혹시..."
주동환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전 이조판서 윤호성 대감이 윤세영의 아비 되는 자이다."
연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날, 윤호성 대감이 처형되던 날,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흘러내렸었는지 알지 못했는데, 그 의문이 풀렸다.
그 사람은 바로 이 육신의 아버지였고, 원래 이 몸의 주인이 슬퍼서 흘린 눈물이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연희는 마음속으로 연신 자신의 육신을 향해 사죄를 했다.
그런 것을 미처 알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어차피 너와는 관련 없는 사람이다."
주동환이 달래듯 건네는 말에 연희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보았습니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처형되었단 소식을 듣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났었습니다. 그 마지막을... 그 곁을 지켜 드렸어야 했는데..."
연희가 슬퍼하며 우는 모습을, 주동환은 말없이 쓸쓸하게 바라보고 서 있다가, 천천히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시금 말이 움직이고, 또각 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잔잔하게 주위에 울려 퍼졌다.
조금 진정이 된 연희가 눈물을 훔치며, 주동환에게 물었다.
"그럼... 이 몸은... 아직... 살아있는 것입니까?"
주동환은 다시금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무거운 표정으로 연희를 돌아보았다.
"물론... 그렇다."
"원래 주인은... 그녀... 윤세영의 영혼은 어찌 된 것입니까?"
주동환이 천천히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러난 몸을 뒤돌아, 연희에게 등을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그의 등에는 연희의 목 뒤에 있는 것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주술이다. 기생령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원 주인의 영혼이 깨어나는 것을 억제하는 주술이지."
이어 다시 옷을 입으며 말을 이었다.
"보통, 그 효과를 최대한으로 끌어내기 위해, 최대한 머리 가까이에 이 부적을 심는다. 그렇기에 보통 목 뒤에 있는 것이지."
연희는 주동환의 이야기에, 자기도 모르게, 목 뒤에 있는 그 문양을 만지작거렸다.
"나 같은 경우,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등에 부적을 새겨 넣었다. 즉, 굳이 바꾸고자 하면, 위치를 바꿀 수도 있는 것이지."
"그럼... 돌려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원 주인에게..."
주동환은 실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너는 항상 너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먼저 걱정하는구나."
"나리도 그러시지 않습니까? 나리 자신보다 저를 먼저 염려하시니 말입니다."
연희의 말에 주동환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허나, 잊지 말거라. 그 몸을 원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것은... 네가 구천을 떠돌던 원혼(怨魂)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기생령이 되었던 영혼은, 다시 기생령이 되지 않는 이상, 육신을 떠나서는 얼마 안가 소멸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수차례 시도해본 결과였다."
연희는 소연에게 들어 알면서도 확실히 확인하고자 모르는척 은근슬쩍 물었다.
"이 기생령의 주술은 누가 행하는 것입니까? 혹... 그 율교라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연희의 물음에 주동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앞을 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관련이 있지. 율교의 교주가 천무방의 방주이고, 이 기생령의 술수를 부리는 주술사이지."
"그는 어찌 이런 술수를 부리는 것입니까? 그자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주동환이 고개를 살짝 돌려 연희를 보면서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 내가 그것을 말해주면, 세자에게 달려가 고변이라도 할 생각이냐?"
주동환의 핀잔 같은 농담에, 연희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하... 그것들은 천천히 알아가자.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말해주면, 네가 훌쩍 떠나갈까 무섭구나."
주동환이 다시 앞을 보고 걸으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하나씩 천천히 말해줄 것이다. 내 곁에 오래오래 머물 수 있게."
***
짙은 보랏빛의 하늘 위로 그려진 달빛은, 그 은은한 빛무리를 우물 위에 흩뿌리고 있었다.
우물에 비친 달을 보며, 세자는 말없이 서 있었다.
어디에도 없었다. 갈만한 곳을 모두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렇듯 말없이 홀연히 떠나가 버린 것일까?
세자는 끊이지 않는 의문을 되새기며, 연희와 함께 바라보았던 우물을 내려다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 신분 때문인가.'
지금까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이 세자임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신분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저 연희 곁에 나란히, 함께 서기를 바랬을 뿐인데,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아, 가슴속에 울분이 가득 차올랐다.
깊은 시름이, 긴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런 세자의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수현과, 그의 곁에 서서 수현과 세자를 번갈아 살피는 소연이 있었다.
소연은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 참지 못한 듯 수현에게 물었다.
"혹... 저하께옵서, 그 아이에게 연심이라도 가지신 것입니까?"
소연이 확인하듯 묻는 말에, 수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엄한 표정으로 꾸짖듯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이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람 마음이란 게,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저하께 그리도 연심을 품지 말라 말씀드렸건만, 끝내는 그리 되신 것 같구나. 허나, 어디 가서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수현이 마지막에 주의를 당부하자, 소연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소연의 시선이 세자에게로 향했다.
어쩐지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은 기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아이.... 어떠셨습니까?"
소연이 다시금 묻는 말에, 얼마전 연희를 공격했던 소연이었기에 수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연이 수현의 생각을 읽은듯 멋쩍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제 실수도 있었고... 또 얼마 보지 못해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그럽니다."
변명하듯 얼버무리는 소연을 보며, 수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심성이 착한 아이였다. 밝고 씩씩한 면이 있어, 저하의 마음에 많은 용기를 주는 듯 보이더구나. 마음에 고심이 있었던 모양인데... 하루빨리 찾기를 바랄 수밖에..."
수현의 한숨을 지켜보며, 소연은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문득 예전 스승인 백무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이것아, 원귀가 어디 그리 되고 싶어 되는 원귀가 있더냐? 다 그 나름의 사연이 있는 것이다. 불쌍히 여겨야지.
소연은 당시 스승님의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원귀는 원귀일 뿐, 사람을 해치는 것들에게 자비 따위는 베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믿음에, 이제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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