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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0.31분

63화 - #1


푸른빛의 하늘에서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 쬐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은 붉게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 사이로 스쳐 지나오고, 세자는 우물가 앞에서 뒷짐 쥔 체,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혼자서 실없이 웃음 짓고 있었다.

"저하..."

잠시 후, 분홍빛 치마에 흰색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연희가 다가와 부르자, 세자가 연희를 돌아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왔느냐? 그래, 그렇게 입고 있으니, 훨씬 좋아 보이는구나."

연희는 희미한 미소로 답하며, 세자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이제 저는 무엇을 하면 되는 것이옵니까?"

연희가 묻는 말에 세자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뭘 하긴? 사교도에 대한 수사를 마저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연희가 자신의 옷을 한번 내려다 보고는 되물었다.

"이렇게... 입고 말입니까?"

"뭐 어떠냐? 의녀 복장을 하고 있으면, 되려 더 힘든 것이다. 그렇게 입고 있으니, 좌포청에서도 네게 힘든 일을 시키진 못할 것이다."

그러자 연희가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야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짐이 되는 것 아닙니까?"

"짐은 무슨... 그냥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피..."

연희를 보며 세자가 또다시 장난스럽게 웃음 지었다.

"가자. 오늘 포도청에 교지가 내려갔을 것이다."

세자가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하자, 연희가 뒤따라 걸으며 물었다.

"교지라뇨? 어떤 교지 말입니까?"

"뭐긴? 사교도를 조장하여 간악한 짓거리를 일삼은 주술 집단 천무방을 추포하고, 그 수괴되는 천태호란 자를 당장 잡아들이라는 어명이다."
연희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잡아들이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연희를 보며 세자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찌 되긴? 그 죄를 물어 배후가 누구인지 밝혀내고 발본색원하여 모두 참수토록 할 것이다."

연희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억지스럽게 웃음 지었고,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 세자는 여전히 앞을 보고 걸어갈 뿐이었다.

천태호의 죽음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연희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내용을 세자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



황급히 방안으로 들어선 주동환의 시야에 시뻘건 눈으로 흥분한 체 물건을 마구 집어던지고 있는 천태호의 모습이 들어왔고, 주위로는 수하들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방주님! 방주님!"

주동환이 황급히 달려가 천태호의 팔을 붙잡으며 만류하자, 천태호는 광기 어린 눈으로 그를 보며 소리쳤다.

"오, 그래, 잘난 놈 왔냐? 이 새끼가... 당장 안 놔? 바로 소멸시켜줄까?"

"진정하십시오!"

"뭘 진정해, 이 개자식들을 그냥..."

"어찌 그러십니까? 제발 진정하십시오."

주동환의 간곡한 만류에, 비로소 천태호는 조금 진정되는 듯 씩씩 거리며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바닥에 던져 놓으며 말했다.

"소식은 들었지? 박지언이 풀려났다고."

"예, 하지만 애초에 박지언은 저희 목표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천태호가 이를 갈며 말했다.

"언령의 절반이 날아갔다."

천태호의 말에 주동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령의 절반이 날아갔다뇨? 그건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야. 젠장... 언령이란 것이 대상자의 의지에 강한 편견을 심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자가 신념이나 혹은 타인에게 설득되거나, 그 편견을 적용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되면, 언령의 조작은 깨어지게 되지."

"그런다고 언령이 소멸됩니까?"

"그게... 그게 실책이다. 나 역시 설마 그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소환시킨 언령의 수가 고작 절반 정도에 그친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젠장... 그것뿐만 아니야..."

주동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천태호가 주동환의 얼굴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반대로 언령이 왜곡되는 현상이 있었다."

"왜곡이요?"

"그래. 상대에게 굴복되거나, 설득당하게 되면, 그로 인한 변화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반대 의견을 내도록 한 언령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럼... 이제 언령들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힘이 크게 약해진 상태다. 아직은 그런대로 쓸만하긴 하지만, 지속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주동환이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특정 인물에게 집중하셔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행보도 조금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천태호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과감해지라니? 뭘 어떻게?"

"설득으로 되지 않을 땐, 칼을 뽑아야지요."

단호한 주동환의 말에, 천태호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갔다.

이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렇지. 그동안 너무 설득만 하려 했어. 내편으로 만들려고만... 내편이 아니라면, 죽여 없애야지."

천태호는 한결 부드러워진 인상으로 주동환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네놈이 좀 낫긴 하구나."

그는 이어 주위에 수하들을 보며 불편한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당장 나가 있어! 이 쓸모없는 녀석들아!"

그들은 눈치를 살피며 서둘러 밖으로 나갔고, 방안에는 이제 주동환과 천태호만이 남아 있었다.

주동환은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천태호 곁에서 한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포도청에 천무방과 방주님에 대한 추포령이 떨어졌습니다."

천태호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이제 나를 표적으로 삼고 있으니... 일이 어렵게 됐어."

"일단 몸을 숨기시지요."

"안 그래도, 밀영(密營)으로 갈 생각이었다."

"언령으로 몇 명까지 조정할 수 있으실 것 같습니까?"

천태호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기껏해야 열명도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안영군과 재상들에게 집중하십시오. 그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천태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래.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문제는 그다음인데... 어찌하는 것이 좋겠느냐? 칼을 어찌 써야겠느냐?"

"어제, 백석산(白石山)의 봉수에서 봉화가 피어올랐다 합니다."

살짝 놀란 표정으로 천태호가 되물었다.

"백석산 봉화가? 그럼... 왜구들이 쳐들어 왔단 말이냐?"

"예, 수하들을 시켜 알아보았는데, 단순한 왜구 무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규모는?"

"대략 오백명 정도 되는 듯합니다."

이번에는 제법 놀란 표정이 된 천태호였다.

"오백? 그야말로 단순한 규모는 아니구나. 허나, 그렇다고 해서 조선을 뒤흔들 만큼의 규모도 아니다. 우리가 그들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제가 보기에 오백이면 딱 적당한 숫자입니다. 놔두기엔 그 수가 많고, 전쟁으로 보기에는 그 수가 적지요. 잘 훈련된 병사들이라면 지방 병사들만 가지고는 난전을 피하기 어려울 터, 일시적이나마 모든 이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게 될 것입니다."

천태호는 이야기를 들으며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주동환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이럴 때일수록, 초지일관, 처음 계획했던 것을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좌상의 몸을 취하시지요."

천태호가 의아한 눈빛으로 주동환을 바라보자, 주동환이 말을 이었다.

"더 이상 놔두는 것도 의심을 받거니와, 어찌 되었든 좌상은 현시점에서 최강의 권력자입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 좌상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허나, 그런 좌상도 명분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힘을 쓰지 못하지요. 그렇기에 육조의 재상들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좌상의 몸으로 무엇을 하라는 것이냐?"

"세자에게 출정을 명하십시오."

천태호는 이제 크게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세자에게? 그것이 가당키나 한 것이냐?"

"오백이면 적은 수가 아니라고 하나, 그렇다고 제압하지 못할 숫자도 아닙니다. 이 나라의 국본이니, 어지럽혀진 민심을 두루 살필 겸, 중앙군을 이끌고 왜구를 처단한 다음, 돌아오는 길에 백성들을 두루 살피고 오라 한다면,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야, 그렇지."

"더욱이 왕이 믿어 의심치 않는 홍여립으로 하여금 보좌케 한다면, 세자의 안위에 대해 의심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홍여립이라.... 그다음엔?"

주동환이 싸늘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그 기대를 꺾어드려야지요. 홍여립과 세자를 죽여 없애는 것입니다."

"세자야 그렇다 치더라도, 조선 제일 검이라는 홍여립을... 꺾을 수 있겠느냐?"

"홍여립은... 결코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천태호가 걱정스러운 듯 되물었다.

"허나... 너는 홍여립을 이기지 못했던, 박지언에게도 큰 부상을 입지 않았느냐?"

주동환이 분한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때 그건... 제가 방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허나, 이번엔 다릅니다."

"뭐... 네가 그렇다면야...알았다. 차질 없이 해야 돼. 그래, 홍여립과 세자가 죽으면 어찌 돌아갈 것 같으냐?"

"궁궐은 발칵 뒤집어지겠지요. 세자의 출정을 청한 좌상에게 원망이 향하겠지만, 제일검인 홍여립이 보좌하고도 죽을지는 몰랐다 하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그다음은?"

"어차피 재상들의 의지를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좌상은 필요치 않습니다. 세자에 대한 책임에 부담을 느끼고 자택에서 자결했다고 한다면, 더 이상 이일에 대해 추궁하지도, 원망하지도 못하겠지요."

"그리고 나는 좌상의 몸에서 빠져나와, 안영군의 몸을 취한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재상들은 국본의 자리를 비워놓을 수 없음을 이유로, 서둘러 세자 책봉을 진행토록 하는 것이지요."

주동환의 이야기를 들은 천태호가 돌연 껄껄 거리며 웃어댔다.

"과연,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구나. 좋다. 내 적당한 때가 되면, 네놈도 다른 몸으로 옮겨 권력을 맛을 보게 해 주마."

주동환은 천태호의 말을 듣고 피식 웃음 지었다.

"저는 권력 같은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러자 천태호가 주동환의 면전에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그럼? 연희? 그 계집을 원하느냐?"

주동환이 표정을 굳힌 체, 천태호를 가만히 응시하자, 천태호는 주동환을 마주 보다 다시금 껄껄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뭐, 원하는 게 그것뿐이라면야, 나야 아쉬울 것이 없지. 기왕이면, 금슬 좋은 양반가 부부의 몸으로 둘 다 옮겨줄 수도 있고. 어쨌든 잘만 해결되면,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지 들어주마."

"예. 반드시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래그래.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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