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 #28
사나래를 타고 나래가 당도한 곳은 숲 한가운데 있는 자그마한 공터에 위치한 허름한 집 앞이었다.
그곳에 내려서자 사나래가 사라졌고,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홍저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케 예까지 왔구나."
홍저왕이 말을 하며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자, 나래가 대별왕에게 받은 종을 불쑥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혼나기 전에, 백하도령님을 돌려줘."
그 종을 본 홍저왕의 표정이 번민에 휩싸이는 듯 하더니, 버럭 화를 내며 몸집이 커졌다.
"인간 따위가 감히 내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홍저왕의 몸이 순식간에 커지자, 나래는 덜컥 겁이 나서 손에 든 종을 흔들었다.
'딸랑딸랑'하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무시무시한 홍저왕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집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벌벌 떠는 원숭이 한 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으으으.... 제발 살려주세요..."
벌벌 떠는 홍저왕을 보며, 나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홍저왕 손에 들려진 호리병을 뺏어 든 나래는 양손을 쓸 수 없자, 솔이에게 부탁했다.
"솔아, 잠깐 이것 좀 들어줄래?"
솔이가 다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나래가 내미는 대별왕의 종을 받아 들었다.
그 순간, 홍저왕의 눈빛이 번득였지만, 이를 보지 못한 나래는 총명 부인의 호리병 뚜껑을 열었다.
호리병 뚜껑이 열리자 그 안에서 연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더니, 허공에서 한번 빙글 돌고는, 백하도령의 모습이 되어 땅에 내려섰다.
"도령님!"
나래가 기쁜 마음에 달려가 백하도령을 와락 끌어안자, 어리둥절해하던 백하도령이 눈치를 채고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를 구하였구나."
기뻐하며 무어라 말할 겨를도 없이, 순간 두 사람의 발밑이 꺼졌다.
갑자기 생겨난 원형의 검은 구멍 속으로 둘이 동시에 빠져 들자, 홍저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히히히, 이놈들, 영원히 어둠 속에 갇혀 버려라!"
홍저왕이 구멍을 닫아 버리려 하자, 백하도령의 온몸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 거리며 일어났다.
"이노옴!"
백하도령의 외침과 동시에 푸른 섬광은 흡사 손과 같은 형태로 변하여 닫히려는 구멍을 붙잡아 막았고, 허리춤에 두르고 있던 하얀 띠를 풀러 휘두르니, 그 줄이 떨어지는 나래에게로 향했다.
"잡거라!"
백하도령의 외침에 떨어지던 나래는 백하도령의 허리띠를 붙잡았다.
어딘지 모를 심연의 검은 어둠은 금방이라도 둘을 집어삼킬 듯 빨아들이고 있었지만, 백하도령의 강한 힘이 둘을 서서히 위로 올려놓고 있었다.
"이익...."
홍저왕은 어떻게든 문을 닫아보려 애썼지만, 그의 힘보다 백하도령의 힘이 더 센 듯, 푸른 섬광에 밀려 구멍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었다.
"아씨!"
솔이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레 외치는 그 순간, 나래는 뭔가 자신의 몸에서 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래야!"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의 비명소리에 나래가 고개를 숙여 보니, 나래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안돼!"
그 순간, 나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체, 그저 그림자를 붙잡아야 한다는 그 생각 하나로, 백하도령의 허리띠를 놓아버렸다.
"안된다!"
백하도령의 안타까운 외침을 뒤로하며, 나래는 심연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뒤이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백하도령이 결심한 듯 이를 악물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 섬광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구멍이 닫혀 어둠 속에 갇혀 버렸다.
그리고 백하도령 또한 나래를 따라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하하하하... 성공이다."
홍저왕이 기뻐하며 외치는 소리만이 어둠 저편에서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
나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뜻밖이었다. 눈을 뜬 나래는 어느 가게 안에 서 있었는데, 그 가게의 풍경이 꽤나 낯익었다.
"여긴..."
나래는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디오테이프가 빼곡히 채우고 있는 비디오 대여점의 풍경이었고, 놀랍게도 나래가 어린 시절 즐겨 이용하던 곳의 모습 그대로였다.
계산대 쪽에는 어린 시절 그때처럼,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할 수 있는 TV와 비디오가 보였다.
"왜...."
나래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진열된 비디오테이프 쪽으로 다가가봤다. 놀랍게도 비디오테이프 케이스에는 하나같이 영화 제목이 아닌 연도와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나래가 그중 하나를 꺼내어 보니, 표지에는 나래의 모습이 선명한 사진이 자리 잡고 있었고, 1996년 2월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사진 속 나래 뒤에는 나래의 아빠가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함께 있었다.
나래는 놀란 표정으로 그 비디오테이프를 내려다보다가, 케이스를 열어 테이프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뭔가에 홀린 듯 비디오가 있는 곳으로 가서 테이프를 안에 넣었다.
TV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저절로 켜졌고,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무언가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래가 어린 시절 살던 동네의 놀이터 풍경이 비치고 있었고, '저기는...'하며 그곳을 떠올릴 무렵 어느새 나래는 그곳에 가 있었다.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한쪽에서 아빠가 다가오며 말했다.
"자, 다됐다. 잘 봐."
아빠가 말을 하며 손에 든 통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래는 멍한 표정으로 아빠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빠가 보여준 것은 정월대보름에 하던 쥐불놀이였다.
아빠의 손동작을 따라 빙글빙글 돌고 있는 불꽃을 나래는 멍하니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빠...."
나래의 아빠는 나래가 고등학생이 될 무렵,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병원에서 의식 없이 3년간 누워 있으면서, 병간호를 하던 엄마마저 건강이 악화되었고, 끝내 세상을 먼저 떠났었다.
그 3년간 집안은 기울 대로 기울었고, 나래는 원하는 대학에 갈 처지가 되지 못했다.
"자, 이제 우리 공주님이 한번 해볼까?"
아빠가 불통을 내려놓으며 나래에게 다가와 말을 하니, 나래는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빠.... 아빠, 아빠!"
나래가 달려가 아빠 품에 와락 안기자, 아빠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나래야? 놀랐어? 무서웠어?"
"아빠, 미안해... 아빠, 미안해..."
나래가 울며 하는 말에, 아빠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왜 그래, 나래야? 무슨 일 있었어? 우리 공주님이 왜 아빠한테 미안할까?"
자상한 아빠의 목소리를 들으니, 더욱 가슴이 복받쳐 왔다.
"아빠, 아프지 마. 아프지 마..."
아빠는 나래의 말을 듣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안 아파, 나래야. 괜찮아."
아빠는 나래의 등을 다독거려주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공주님이 이렇게나 아빠 걱정을 했어? 아이고, 우리 공주님..."
아빠가 무릎을 굽혀 나래를 가슴으로 따뜻하게 안아주자, 나래는 더욱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이 따뜻한 품이 이토록 포근했었던가 싶은 생각에 눈물이 그칠 줄 몰랐다.
"아빠, 너무 보고 싶었어. 아빠. 아빠한테, 정말 너무 미안했어."
나래는 슬픔을 삼키며 말했다.
"진심이 아니었어, 아빠한테 한말... 정말 진심이 아니었어."
나래는 아빠한테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기운 가세에 오빠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 가지고는 병원비는 감당하기 힘들었고, 비싼 간병인을 둘 수 없어 엄마가 간병을 대신하는 동안, 엄마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져 갔다.
속절없이 침상에 누워만 있는 아빠를 보며, 힘들고 지쳤던 나래는 아빠에게 외쳤다.
이럴 거면 차라리 죽어 버리라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울며 부르짖는 나래를 엄마가 무슨 소리냐며 그런 나래의 등을 멍이 들도록 때렸었다.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빠였지만, 그런 나래의 목소리를 듣고는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때 아빠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나래는 똑똑히 보았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아빠는 하늘나라로 떠나 버렸다.
가슴에 맺힌 미안함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그 일로 엄마와의 관계도 소원해져 버렸다.
"미안해, 아빠... 미안해..."
나래가 목놓아 울며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자, 아빠는 그런 나래를 이해한다는 듯이 꼭 안은 체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괜찮아. 나래야. 아빠는 괜찮아. 우리 공주님.... 아빠가 우리 공주님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아빠의 말에, 나래는 더욱 더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빠의 온기가 사라져 버렸다.
놀란 나래가 눈을 떠보니, 다시 비디오 가게 안이었다.
"어떻게..."
당황하는 나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너의 심연 속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 백하도령이 서 있었다.
"도령님?"
백하도령은 나래 앞으로 한걸음 더 다가와 말했다.
"이곳은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틈의 세계이자, 너의 심연 속이다. 잊지 말거라. 자신의 시간을 잊게 되면, 너는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너는 너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내가 도와줄 것이다. 내가 너를 인도할 것이며, 너로 하여금 네 시간을 살게 도와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믿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백하도령이 손을 내밀자, 잠시 망설이던 나래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백하도령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잃어버린 네 그림자를 찾아야 한다. 그것을 찾아 이곳을 떠나 너는 네 세계로, 나는 내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백하도령의 말에 나래는 얼른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백하도령은 그림자가 있지만, 나래는 그림자가 없었다.
"어디.... 어디 가서 찾죠?"
나래가 걱정스레 묻는 말에, 백하도령은 나래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나를 믿으라 하지 않았느냐? 내 꼭 찾아줄 것이다. 일단 나와 함께 이곳을 나가자꾸나."
"하지만 여긴..."
나래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남겨진 자신의 삶들을 한 번씩 살펴보고 싶었다.
"아빠..."
나래는 울먹이며 아빠를 한번 더 불러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빠를 만나러 한번 더 비디오를 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지체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백하도령은 나래의 손을 붙잡고 비디오 가게를 나섰고, 나래는 미련이 남은 듯 연신 비디오 가게 안을 돌아보며 백하도령을 따라 가게를 나섰다.
그곳에 내려서자 사나래가 사라졌고,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홍저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케 예까지 왔구나."
홍저왕이 말을 하며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자, 나래가 대별왕에게 받은 종을 불쑥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혼나기 전에, 백하도령님을 돌려줘."
그 종을 본 홍저왕의 표정이 번민에 휩싸이는 듯 하더니, 버럭 화를 내며 몸집이 커졌다.
"인간 따위가 감히 내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홍저왕의 몸이 순식간에 커지자, 나래는 덜컥 겁이 나서 손에 든 종을 흔들었다.
'딸랑딸랑'하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무시무시한 홍저왕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집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벌벌 떠는 원숭이 한 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으으으.... 제발 살려주세요..."
벌벌 떠는 홍저왕을 보며, 나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홍저왕 손에 들려진 호리병을 뺏어 든 나래는 양손을 쓸 수 없자, 솔이에게 부탁했다.
"솔아, 잠깐 이것 좀 들어줄래?"
솔이가 다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나래가 내미는 대별왕의 종을 받아 들었다.
그 순간, 홍저왕의 눈빛이 번득였지만, 이를 보지 못한 나래는 총명 부인의 호리병 뚜껑을 열었다.
호리병 뚜껑이 열리자 그 안에서 연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더니, 허공에서 한번 빙글 돌고는, 백하도령의 모습이 되어 땅에 내려섰다.
"도령님!"
나래가 기쁜 마음에 달려가 백하도령을 와락 끌어안자, 어리둥절해하던 백하도령이 눈치를 채고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를 구하였구나."
기뻐하며 무어라 말할 겨를도 없이, 순간 두 사람의 발밑이 꺼졌다.
갑자기 생겨난 원형의 검은 구멍 속으로 둘이 동시에 빠져 들자, 홍저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히히히, 이놈들, 영원히 어둠 속에 갇혀 버려라!"
홍저왕이 구멍을 닫아 버리려 하자, 백하도령의 온몸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 거리며 일어났다.
"이노옴!"
백하도령의 외침과 동시에 푸른 섬광은 흡사 손과 같은 형태로 변하여 닫히려는 구멍을 붙잡아 막았고, 허리춤에 두르고 있던 하얀 띠를 풀러 휘두르니, 그 줄이 떨어지는 나래에게로 향했다.
"잡거라!"
백하도령의 외침에 떨어지던 나래는 백하도령의 허리띠를 붙잡았다.
어딘지 모를 심연의 검은 어둠은 금방이라도 둘을 집어삼킬 듯 빨아들이고 있었지만, 백하도령의 강한 힘이 둘을 서서히 위로 올려놓고 있었다.
"이익...."
홍저왕은 어떻게든 문을 닫아보려 애썼지만, 그의 힘보다 백하도령의 힘이 더 센 듯, 푸른 섬광에 밀려 구멍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었다.
"아씨!"
솔이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레 외치는 그 순간, 나래는 뭔가 자신의 몸에서 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래야!"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의 비명소리에 나래가 고개를 숙여 보니, 나래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안돼!"
그 순간, 나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체, 그저 그림자를 붙잡아야 한다는 그 생각 하나로, 백하도령의 허리띠를 놓아버렸다.
"안된다!"
백하도령의 안타까운 외침을 뒤로하며, 나래는 심연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뒤이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백하도령이 결심한 듯 이를 악물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 섬광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구멍이 닫혀 어둠 속에 갇혀 버렸다.
그리고 백하도령 또한 나래를 따라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하하하하... 성공이다."
홍저왕이 기뻐하며 외치는 소리만이 어둠 저편에서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
나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뜻밖이었다. 눈을 뜬 나래는 어느 가게 안에 서 있었는데, 그 가게의 풍경이 꽤나 낯익었다.
"여긴..."
나래는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디오테이프가 빼곡히 채우고 있는 비디오 대여점의 풍경이었고, 놀랍게도 나래가 어린 시절 즐겨 이용하던 곳의 모습 그대로였다.
계산대 쪽에는 어린 시절 그때처럼,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할 수 있는 TV와 비디오가 보였다.
"왜...."
나래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진열된 비디오테이프 쪽으로 다가가봤다. 놀랍게도 비디오테이프 케이스에는 하나같이 영화 제목이 아닌 연도와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나래가 그중 하나를 꺼내어 보니, 표지에는 나래의 모습이 선명한 사진이 자리 잡고 있었고, 1996년 2월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사진 속 나래 뒤에는 나래의 아빠가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함께 있었다.
나래는 놀란 표정으로 그 비디오테이프를 내려다보다가, 케이스를 열어 테이프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뭔가에 홀린 듯 비디오가 있는 곳으로 가서 테이프를 안에 넣었다.
TV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저절로 켜졌고,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무언가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래가 어린 시절 살던 동네의 놀이터 풍경이 비치고 있었고, '저기는...'하며 그곳을 떠올릴 무렵 어느새 나래는 그곳에 가 있었다.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한쪽에서 아빠가 다가오며 말했다.
"자, 다됐다. 잘 봐."
아빠가 말을 하며 손에 든 통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래는 멍한 표정으로 아빠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빠가 보여준 것은 정월대보름에 하던 쥐불놀이였다.
아빠의 손동작을 따라 빙글빙글 돌고 있는 불꽃을 나래는 멍하니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빠...."
나래의 아빠는 나래가 고등학생이 될 무렵,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병원에서 의식 없이 3년간 누워 있으면서, 병간호를 하던 엄마마저 건강이 악화되었고, 끝내 세상을 먼저 떠났었다.
그 3년간 집안은 기울 대로 기울었고, 나래는 원하는 대학에 갈 처지가 되지 못했다.
"자, 이제 우리 공주님이 한번 해볼까?"
아빠가 불통을 내려놓으며 나래에게 다가와 말을 하니, 나래는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빠.... 아빠, 아빠!"
나래가 달려가 아빠 품에 와락 안기자, 아빠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나래야? 놀랐어? 무서웠어?"
"아빠, 미안해... 아빠, 미안해..."
나래가 울며 하는 말에, 아빠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왜 그래, 나래야? 무슨 일 있었어? 우리 공주님이 왜 아빠한테 미안할까?"
자상한 아빠의 목소리를 들으니, 더욱 가슴이 복받쳐 왔다.
"아빠, 아프지 마. 아프지 마..."
아빠는 나래의 말을 듣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안 아파, 나래야. 괜찮아."
아빠는 나래의 등을 다독거려주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공주님이 이렇게나 아빠 걱정을 했어? 아이고, 우리 공주님..."
아빠가 무릎을 굽혀 나래를 가슴으로 따뜻하게 안아주자, 나래는 더욱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이 따뜻한 품이 이토록 포근했었던가 싶은 생각에 눈물이 그칠 줄 몰랐다.
"아빠, 너무 보고 싶었어. 아빠. 아빠한테, 정말 너무 미안했어."
나래는 슬픔을 삼키며 말했다.
"진심이 아니었어, 아빠한테 한말... 정말 진심이 아니었어."
나래는 아빠한테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기운 가세에 오빠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 가지고는 병원비는 감당하기 힘들었고, 비싼 간병인을 둘 수 없어 엄마가 간병을 대신하는 동안, 엄마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져 갔다.
속절없이 침상에 누워만 있는 아빠를 보며, 힘들고 지쳤던 나래는 아빠에게 외쳤다.
이럴 거면 차라리 죽어 버리라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울며 부르짖는 나래를 엄마가 무슨 소리냐며 그런 나래의 등을 멍이 들도록 때렸었다.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빠였지만, 그런 나래의 목소리를 듣고는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때 아빠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나래는 똑똑히 보았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아빠는 하늘나라로 떠나 버렸다.
가슴에 맺힌 미안함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그 일로 엄마와의 관계도 소원해져 버렸다.
"미안해, 아빠... 미안해..."
나래가 목놓아 울며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자, 아빠는 그런 나래를 이해한다는 듯이 꼭 안은 체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괜찮아. 나래야. 아빠는 괜찮아. 우리 공주님.... 아빠가 우리 공주님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아빠의 말에, 나래는 더욱 더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빠의 온기가 사라져 버렸다.
놀란 나래가 눈을 떠보니, 다시 비디오 가게 안이었다.
"어떻게..."
당황하는 나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너의 심연 속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 백하도령이 서 있었다.
"도령님?"
백하도령은 나래 앞으로 한걸음 더 다가와 말했다.
"이곳은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틈의 세계이자, 너의 심연 속이다. 잊지 말거라. 자신의 시간을 잊게 되면, 너는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너는 너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내가 도와줄 것이다. 내가 너를 인도할 것이며, 너로 하여금 네 시간을 살게 도와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믿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백하도령이 손을 내밀자, 잠시 망설이던 나래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백하도령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잃어버린 네 그림자를 찾아야 한다. 그것을 찾아 이곳을 떠나 너는 네 세계로, 나는 내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백하도령의 말에 나래는 얼른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백하도령은 그림자가 있지만, 나래는 그림자가 없었다.
"어디.... 어디 가서 찾죠?"
나래가 걱정스레 묻는 말에, 백하도령은 나래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나를 믿으라 하지 않았느냐? 내 꼭 찾아줄 것이다. 일단 나와 함께 이곳을 나가자꾸나."
"하지만 여긴..."
나래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남겨진 자신의 삶들을 한 번씩 살펴보고 싶었다.
"아빠..."
나래는 울먹이며 아빠를 한번 더 불러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빠를 만나러 한번 더 비디오를 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지체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백하도령은 나래의 손을 붙잡고 비디오 가게를 나섰고, 나래는 미련이 남은 듯 연신 비디오 가게 안을 돌아보며 백하도령을 따라 가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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