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3
바쁜 걸음을 옮기던 세자는, 자신을 기다리고 서 있는 수현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오는 세자를 향해, 수현은 황급히 자세를 바로 잡고 인사를 하며 말했다.
"모두가 편전(便殿)에 들었사옵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듯 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진행되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는가?"
"밖에서 듣기로는 아직 이렇다 할만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세자를 보며 수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듣고 있겠습니다. 일단 물러가 계시지요."
"알았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돌아서려는데, 때마침 편전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근래에 금천현의 현감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그 횡포가 이를 데 없으니, 흉포하고 극악함이 비할 바가 없다 하옵니다. 이를 일벌백계하여 백성들을 살피시옵소서."
순간 걸음을 멈춰 선 세자가 귀를 쫑긋이 기울이자, 뒤이어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영의정 황인걸 대감의 역모사건 때, 연루된 자들을 모두 벌하지 아니하니, 이리 오만방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권력을 탐하다 얻지 못하니, 애꿎은 백성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임금은, 무기력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현 금천현의 현감이 누구인데 그러시는 것이오?"
임금의 물음에 누군가가 한걸음 나서 대답했다.
"전 병조참판 김상호 대감의 차남 김문익이라 하옵니다."
"김상호 대감이라.... 어찌 되었든 그 일은 이미 끝난 일이니, 다시 재론치 말라하였소. 금천현 현감의 일은 그 현감의 일로만..."
임금이 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좌의정 최준경이 한걸음 나섰다.
"전하, 이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옵니다."
노여움에 저절로 표정이 굳어진 임금은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고, 최준경은 다시 말을 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백성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관청 옆에 짐짝처럼 쌓이고 있다 합니다. 어찌하여 그런 것인지 세세히 살피어 명명백백히 밝히지 않는다면, 이러한 구설들이 어찌 끊일 수 있겠습니까? 황인걸 대감의 당여들이 연루되지 않았다, 미루어 짐직할 것이 아니라, 세세히 살피어 그들의 죄가 있고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좌의정의 말이 끝나자, 대소신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소리 높여 외쳤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임금의 표정은 더이상 숨기지못할정도로 점점 더 굳어져 갔다.
허나, 인정해야했다..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음을.....
"그리..하라."
밖에서 이야기를 듣고있던 세자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고, 수현도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편전에서 멀어진 세자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군."
세자의 말에 수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그자가 죄를 짓는 것은 또한 분명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말이다. 갑자기 왜 그런 것일까?"
잠시 고민하던 세자가 수현을 보며 말했다.
"필시 의금부에서 움직일 것이니, 의금부가 나서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서둘러 하나라도 더 알아내야 한다. 그 자 주변을 살피는 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의금부로 압송된 후에는 이미 때는 늦은것이다."
세자의 말에 수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수현이 먼저 자리를 뜨자, 세자는 홀로 생각에 잠기며 걸었다.
저들의 계획은 무엇일까. 어떻게 저런 결과를 이끌어 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릇된 자였던 것일까.
끊임없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저하..."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자가 고개를 들었다.
다섯걸음정도의 거리를 둔 앞에 손에 물동이를 들고 있는 연희가 있었다.
"아,,,네가 여긴 어인 일이냐?"
"예? 여긴... 저하께서 있으라 명하신..."
세자가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이 연희에게 머물 수 있도록 마련해준 거처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에 빠져 여기까지 걸어온 모양이었다.
"험험"
세자는 당황하여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연희를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 생각할것이 있어 잠시 걷는다는것이, 예까지 오는지도 몰랐구나. 몸은 좀 어떠하냐?"
연희는 세자의 물음에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이제 아무..."
그러다가 문득, 세자의 등 뒤에 서 있는 내관과 궁녀들을 흘낏 보더니, 돌연 콜록 거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 조금, 조금만 더 쉬면 다 나을 듯합니다."
세자는 그런 연희의 모습이 귀여워보여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며 표정을 굳히려 노력했다.
"그래, 아직은 다 낫지 않은 듯 하니, 쾌차할 때까지는 여기서 푹 쉬도록 하거라."
세자가 웃음을 참으며 애써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니, 그를 바라보던 연희 역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숨기며 수줍은듯 고개를 숙였다.
"그 물동이는 무엇이냐?"
세자가 화제를 돌리려는 듯 연희의 손에 들린 물동이를 가리켰다.
"아... 마당에 핀 꽃들이 점점 시들어가는듯해, 아쉬운 마음에 물을 좀 주고싶었습니다."
"아직 다 낫지도 않은 몸으로 무거운 것을 들지 말거라."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연희가 배시시 웃으니, 그 모습에 세자의 얼굴에도 자연스레 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그러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세자가 말없이 서 있으니, 연희도 물동이를 든 채 계속 서 있었다.
물동이를 든 고운손이 눈에 들어온 세자는 얼른 자신이 자리를 비켜줘야겠다 싶은 생각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너무 무리하지말고.. 쉬거라."
"예, 저하."
연희의 인사를 받고 돌아선 세자는 몇 걸음을 옮기다가 잠시 멈칫 멈춰섰다.
뭔가 이대로 가는 것이 퍽 아쉽게 느껴져서였을까, 뒤를 돌아보니 자신을 바라보던 연희가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세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걷기 시작했다.
왜 아쉬운 지, 왜 이리 발걸음이 잘 안 떨어지는지 모를 일이 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자기가 그녀를 지켜줘야 한다는 그 어떤 사명감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
궁궐 앞으로 일련의 호송 행렬이 지나가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길가로 모여들어 서 있었다.
말이 이끄는 함거 안에는 포승줄에 묶인 젊은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 지 입꼬리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번득거리는 광기로 가득차있는 눈빛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등골이 오싹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 행렬은 그대로 의금부로 향하였고, 의금부에 당도했다는 소식에 임금이 추국장으로 직접 나왔다.
임금의 곁에는 언제나 그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도총관 홍여립이 서 있었고, 그 앞으로 좌의정 최준경이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죄인은 병사들에 의해 끌려와 그들 앞에 놓인 의자에 앉혀진 뒤, 묶여졌다.
그리고 두 명의 병사가 좌우에 서서 주릿대를 죄인의 다리사이에 끼워 넣었다.
좌의정이 먼저 임금에게 청을 하듯 바라보니, 임금이 허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좌의정은 죄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죄인 김문익은 들으라. 죄인은 금천현의 현감으로 있으면서 제 아비가 죄를 지어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음에도, 이를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불만을 품고 죄 없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대하였음을 인정하겠느냐?"
그러자 김문익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씨익 웃으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인정하오! 내 분을 삭일 수 없어 닥치는 대로 죽였소."
뜻밖의 말에 임금은 아미를 찌푸렸고, 홍여립도 당황스러운 기색이 되었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처음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기 마련인데, 이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 모든 일에 누가 사주하였는가?"
좌의정의 물음에 김문익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는 모두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시킨 일이오."
임금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들이란 자가 어찌 저리 쉽게 자신의 부친을 지목한단 말인가?
임금은 눈쌀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나서 물었다.
"너는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것이냐? 이는 역모죄에 해당할 수 있는 일이다. 네 아비가 사주했다 한들, 네놈 역시 사형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러자 김문익은 태연하게 임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저는 그저 사실을 아뢴 것뿐입니다."
하지만 임금은 믿을 수 없었다.
광기 어린 그의 눈빛 속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 어떤 비밀이 있을 것만 같았다.
"전하."
좌의정이 돌아서서 임금을 바라보며 아뢰었다.
"이는 명백한 역모이옵니다. 이제 병사들로 하여금 죄인들을 모두 잡아들이라 명하시옵소서."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지만, 이는 엄연히 죄인이 인정한 내용이었다.
부정할 수도, 의심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체기가 느껴지는것같이 가슴속이 갑갑해져 왔지만, 그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리하라."
마지못한 듯 꺼낸 한마디에, 좌의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서서 옆에 선 무관들에게 호령하듯 말했다.
"당장 죄인들을 추포 하라."
"예, 대감."
무관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죄인을 하옥시켜라."
좌의정의 명령에, 병사들이 김문익의 팔을 거칠게 붙잡아 일으켰다.
임금은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추국장에서 단 한 번의 주리도 없이 죄인이 죄를 모두 실토하는 것을 보는 것조차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김문익이 좌의정과 짜고 이런 일을 벌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 역시 역모에 연루되어 사형을 면하긴 어려울 것이니...
도대체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 머리가 아파왔다.
"그만... 들어가자."
임금은 허탈감에 무력한 몸을 이끌고 힘겹게 대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째서.... 어찌하여...'
알 수 없는 의문만이 머릿속을 맴돌 따름이었다.
힘 빠진 다리로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고있는 임금을, 먼발치에서 세자가 소리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세자 곁에는 수현이 아니라, 조세춘이 서 있었다.
그는 어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세자에게 말했다.
"제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결코... 김문익은 결코 저런 사람이 아닙니다."
세자 역시 번득거리는 눈으로 끌려가는 김문익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몸을 돌려 동궁전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뭔가 있음이야."
조세춘은 어떨떨하게 서있다가, 서둘러 세자의 뒤를 쫓았다.
"뭔가 있다니요?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 부친의 죄를 실토했습니다. 자기 자신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말입니다. 이게 어느 누구와 작당을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걸 알아내야지."
세자의 말에 조세춘은 고개를 설레 설레 내저었다.
"시간이 별로 없네. 황인걸 대감의 당여들이 잡혀 오면, 좌의정은 틈을 주지 않고 바로 형을 집행할 것이 분명하네."
"그렇겠지요. 시간을 끌어 좋을 게 없을 테니..."
"그전에 뭐라도 알아내야 하네. 이대로 모두 죽어버리면, 이 문제를 결코 풀 수 없게 돼버릴 테니..."
세자는 결의에 찬 걸음으로 동궁전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고, 조세춘이 그 뒤를 초초한 마음으로 따라 걸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세자를 향해, 수현은 황급히 자세를 바로 잡고 인사를 하며 말했다.
"모두가 편전(便殿)에 들었사옵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듯 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진행되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는가?"
"밖에서 듣기로는 아직 이렇다 할만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세자를 보며 수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듣고 있겠습니다. 일단 물러가 계시지요."
"알았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돌아서려는데, 때마침 편전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근래에 금천현의 현감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그 횡포가 이를 데 없으니, 흉포하고 극악함이 비할 바가 없다 하옵니다. 이를 일벌백계하여 백성들을 살피시옵소서."
순간 걸음을 멈춰 선 세자가 귀를 쫑긋이 기울이자, 뒤이어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영의정 황인걸 대감의 역모사건 때, 연루된 자들을 모두 벌하지 아니하니, 이리 오만방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권력을 탐하다 얻지 못하니, 애꿎은 백성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임금은, 무기력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현 금천현의 현감이 누구인데 그러시는 것이오?"
임금의 물음에 누군가가 한걸음 나서 대답했다.
"전 병조참판 김상호 대감의 차남 김문익이라 하옵니다."
"김상호 대감이라.... 어찌 되었든 그 일은 이미 끝난 일이니, 다시 재론치 말라하였소. 금천현 현감의 일은 그 현감의 일로만..."
임금이 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좌의정 최준경이 한걸음 나섰다.
"전하, 이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옵니다."
노여움에 저절로 표정이 굳어진 임금은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고, 최준경은 다시 말을 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백성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관청 옆에 짐짝처럼 쌓이고 있다 합니다. 어찌하여 그런 것인지 세세히 살피어 명명백백히 밝히지 않는다면, 이러한 구설들이 어찌 끊일 수 있겠습니까? 황인걸 대감의 당여들이 연루되지 않았다, 미루어 짐직할 것이 아니라, 세세히 살피어 그들의 죄가 있고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좌의정의 말이 끝나자, 대소신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소리 높여 외쳤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임금의 표정은 더이상 숨기지못할정도로 점점 더 굳어져 갔다.
허나, 인정해야했다..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음을.....
"그리..하라."
밖에서 이야기를 듣고있던 세자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고, 수현도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편전에서 멀어진 세자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군."
세자의 말에 수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그자가 죄를 짓는 것은 또한 분명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말이다. 갑자기 왜 그런 것일까?"
잠시 고민하던 세자가 수현을 보며 말했다.
"필시 의금부에서 움직일 것이니, 의금부가 나서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서둘러 하나라도 더 알아내야 한다. 그 자 주변을 살피는 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의금부로 압송된 후에는 이미 때는 늦은것이다."
세자의 말에 수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수현이 먼저 자리를 뜨자, 세자는 홀로 생각에 잠기며 걸었다.
저들의 계획은 무엇일까. 어떻게 저런 결과를 이끌어 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릇된 자였던 것일까.
끊임없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저하..."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자가 고개를 들었다.
다섯걸음정도의 거리를 둔 앞에 손에 물동이를 들고 있는 연희가 있었다.
"아,,,네가 여긴 어인 일이냐?"
"예? 여긴... 저하께서 있으라 명하신..."
세자가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이 연희에게 머물 수 있도록 마련해준 거처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에 빠져 여기까지 걸어온 모양이었다.
"험험"
세자는 당황하여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연희를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 생각할것이 있어 잠시 걷는다는것이, 예까지 오는지도 몰랐구나. 몸은 좀 어떠하냐?"
연희는 세자의 물음에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이제 아무..."
그러다가 문득, 세자의 등 뒤에 서 있는 내관과 궁녀들을 흘낏 보더니, 돌연 콜록 거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 조금, 조금만 더 쉬면 다 나을 듯합니다."
세자는 그런 연희의 모습이 귀여워보여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며 표정을 굳히려 노력했다.
"그래, 아직은 다 낫지 않은 듯 하니, 쾌차할 때까지는 여기서 푹 쉬도록 하거라."
세자가 웃음을 참으며 애써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니, 그를 바라보던 연희 역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숨기며 수줍은듯 고개를 숙였다.
"그 물동이는 무엇이냐?"
세자가 화제를 돌리려는 듯 연희의 손에 들린 물동이를 가리켰다.
"아... 마당에 핀 꽃들이 점점 시들어가는듯해, 아쉬운 마음에 물을 좀 주고싶었습니다."
"아직 다 낫지도 않은 몸으로 무거운 것을 들지 말거라."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연희가 배시시 웃으니, 그 모습에 세자의 얼굴에도 자연스레 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그러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세자가 말없이 서 있으니, 연희도 물동이를 든 채 계속 서 있었다.
물동이를 든 고운손이 눈에 들어온 세자는 얼른 자신이 자리를 비켜줘야겠다 싶은 생각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너무 무리하지말고.. 쉬거라."
"예, 저하."
연희의 인사를 받고 돌아선 세자는 몇 걸음을 옮기다가 잠시 멈칫 멈춰섰다.
뭔가 이대로 가는 것이 퍽 아쉽게 느껴져서였을까, 뒤를 돌아보니 자신을 바라보던 연희가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세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걷기 시작했다.
왜 아쉬운 지, 왜 이리 발걸음이 잘 안 떨어지는지 모를 일이 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자기가 그녀를 지켜줘야 한다는 그 어떤 사명감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
궁궐 앞으로 일련의 호송 행렬이 지나가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길가로 모여들어 서 있었다.
말이 이끄는 함거 안에는 포승줄에 묶인 젊은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 지 입꼬리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번득거리는 광기로 가득차있는 눈빛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등골이 오싹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 행렬은 그대로 의금부로 향하였고, 의금부에 당도했다는 소식에 임금이 추국장으로 직접 나왔다.
임금의 곁에는 언제나 그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도총관 홍여립이 서 있었고, 그 앞으로 좌의정 최준경이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죄인은 병사들에 의해 끌려와 그들 앞에 놓인 의자에 앉혀진 뒤, 묶여졌다.
그리고 두 명의 병사가 좌우에 서서 주릿대를 죄인의 다리사이에 끼워 넣었다.
좌의정이 먼저 임금에게 청을 하듯 바라보니, 임금이 허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좌의정은 죄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죄인 김문익은 들으라. 죄인은 금천현의 현감으로 있으면서 제 아비가 죄를 지어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음에도, 이를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불만을 품고 죄 없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대하였음을 인정하겠느냐?"
그러자 김문익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씨익 웃으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인정하오! 내 분을 삭일 수 없어 닥치는 대로 죽였소."
뜻밖의 말에 임금은 아미를 찌푸렸고, 홍여립도 당황스러운 기색이 되었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처음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기 마련인데, 이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 모든 일에 누가 사주하였는가?"
좌의정의 물음에 김문익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는 모두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시킨 일이오."
임금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들이란 자가 어찌 저리 쉽게 자신의 부친을 지목한단 말인가?
임금은 눈쌀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나서 물었다.
"너는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것이냐? 이는 역모죄에 해당할 수 있는 일이다. 네 아비가 사주했다 한들, 네놈 역시 사형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러자 김문익은 태연하게 임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저는 그저 사실을 아뢴 것뿐입니다."
하지만 임금은 믿을 수 없었다.
광기 어린 그의 눈빛 속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 어떤 비밀이 있을 것만 같았다.
"전하."
좌의정이 돌아서서 임금을 바라보며 아뢰었다.
"이는 명백한 역모이옵니다. 이제 병사들로 하여금 죄인들을 모두 잡아들이라 명하시옵소서."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지만, 이는 엄연히 죄인이 인정한 내용이었다.
부정할 수도, 의심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체기가 느껴지는것같이 가슴속이 갑갑해져 왔지만, 그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리하라."
마지못한 듯 꺼낸 한마디에, 좌의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서서 옆에 선 무관들에게 호령하듯 말했다.
"당장 죄인들을 추포 하라."
"예, 대감."
무관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죄인을 하옥시켜라."
좌의정의 명령에, 병사들이 김문익의 팔을 거칠게 붙잡아 일으켰다.
임금은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추국장에서 단 한 번의 주리도 없이 죄인이 죄를 모두 실토하는 것을 보는 것조차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김문익이 좌의정과 짜고 이런 일을 벌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 역시 역모에 연루되어 사형을 면하긴 어려울 것이니...
도대체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 머리가 아파왔다.
"그만... 들어가자."
임금은 허탈감에 무력한 몸을 이끌고 힘겹게 대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째서.... 어찌하여...'
알 수 없는 의문만이 머릿속을 맴돌 따름이었다.
힘 빠진 다리로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고있는 임금을, 먼발치에서 세자가 소리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세자 곁에는 수현이 아니라, 조세춘이 서 있었다.
그는 어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세자에게 말했다.
"제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결코... 김문익은 결코 저런 사람이 아닙니다."
세자 역시 번득거리는 눈으로 끌려가는 김문익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몸을 돌려 동궁전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뭔가 있음이야."
조세춘은 어떨떨하게 서있다가, 서둘러 세자의 뒤를 쫓았다.
"뭔가 있다니요?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 부친의 죄를 실토했습니다. 자기 자신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말입니다. 이게 어느 누구와 작당을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걸 알아내야지."
세자의 말에 조세춘은 고개를 설레 설레 내저었다.
"시간이 별로 없네. 황인걸 대감의 당여들이 잡혀 오면, 좌의정은 틈을 주지 않고 바로 형을 집행할 것이 분명하네."
"그렇겠지요. 시간을 끌어 좋을 게 없을 테니..."
"그전에 뭐라도 알아내야 하네. 이대로 모두 죽어버리면, 이 문제를 결코 풀 수 없게 돼버릴 테니..."
세자는 결의에 찬 걸음으로 동궁전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고, 조세춘이 그 뒤를 초초한 마음으로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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