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2
오랜만에 연무장에 선 수현은 목검을 손에 들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 보았다.
아직 몸 이곳저곳에서 통증이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마냥 누워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조금만 몸을 풀고자 했다.
"후...."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목검은 물 흐르듯, 새벽 공기를 갈랐다.
조금 더 집중하려고 기를 모으는 그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약간 떨어진 연무장 한쪽에서 말없이 서서 수현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를 알아본 수현은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하여 인사하였다.
그는 이내 수현의 앞으로 다가왔다.
날카로운 인상, 근엄해 보이는 눈빛을 한 그는, 다름 아닌 도총부의 총관이자 임금의 곁을 지키는 운검 홍여립이었다.
또한 그는 수현의 스승이기도 했다.
"어찌 그리 당하였느냐?"
홍여립의 물음에 수현은 잠시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면목없습니다."
홍여립은 차분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나는 그저, 네가 어찌 패하였는지 물은 것이다."
수현은 곰곰이 그날 일을 상기하며 대답했다.
"순식간이었습니다. 십보장 안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칼을 뽑는 듯하였는데, 어느새 저를 베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홍여립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열 걸음 밖에서, 한순간에 다가왔단 말이냐?"
"예... 분명 그리하였습니다."
홍여립은 수현을 따라 허탈한 표정이 되어 몸을 돌렸다.
터벅터벅 몇걸음을 옮기던 홍여립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느지막이 말했다.
"십보일참(十步一斬)이로구나."
홍여립의 말에 수현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십보... 일참? 스승님께서는 아시는 무공입니까?"
홍여립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알고 있지. 지금도 그날의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
홍여립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눈을 감았다.
그의 눈앞에 아련하게 떠오르는 한 아이가 있었다.
해맑은 표정으로, 온몸이 땀으로 덤벅이 된 체 달려오던 그 아이는 격앙된 목소리로 홍여립을 부르고 있었다.
"스승님~~"
해맑은 목소리로 홍여립을 부르며 달려온 그 아이는, 홍여립의 앞에 멈춰 서서 숨을 헐떡거렸다.
"무슨 일이냐?"
홍여립이 묻는 말에, 그 아이는 신이 난 듯 이야기했다.
"마침내 해냈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십보장. 십보장을 파쇄할 비법을 만들어 냈습니다."
아이의 말에 놀란 홍여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십보장을 깰 방법을 알아냈다고?"
"예. 그렇습니다. 당장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아이는 신이 난 듯 한쪽에 놓여있는 목검 두 개를 들고 와서, 홍여립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자 이것을 들고 계십시오."
이어 아이는 홍여립에게서 대략 십여 걸음을 물러섰다.
"자, 잘 보십시오."
아이는 진중한 표정으로 목검을 고쳐 잡았다.
흡사, 아직 검집 속에 있는 검을 잡고 있는 듯한 자세는, 검을 뽑으며 상대를 베는 발도술(拔刀術) 같은 자세였다.
홍여립 역시 목검을 비스듬히 고쳐 잡아 상대의 공격에 대비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 순간, 아이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탁!'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홍여립이 든 목검이 강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느새 홍여립의 옆에 와 있는 아이는 홍여립을 보며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느끼셨습니까? 못 느끼셨죠?"
홍여립이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그래... 어찌한 것이냐?"
"십보장의 밖, 열 한걸음 밖에서 열 걸음을 단박에 좁힌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방법이면 능히 십보장을 깰 수 있습니다."
"그렇구나. 과연..."
홍여립은 기뻐하는 아이를 보며 따라서 웃음 지었다.
"그래, 이 무공의 이름은 무엇이냐?"
아이는 씩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십보일참이옵니다."
"십보일참이라... 우리 영호가 이제 무공을 이룰 줄 안다니... 참으로 대견하고 기쁜 날이로구나."
스승의 칭찬에 아이, 표영호의 얼굴에는 기쁨과 자부심이 넘쳐 흘렀다.
그토록 기뻐하던 영호의 표정을 떠올리니, 홍여립은 가슴 한켠이 아련하게 아파왔다.
"십보일참이란 어떤 무공입니까?"
스승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수현의 목소리에, 홍여립이 그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십보일참은... 네 사형인 영호가 만든, 십보장의 파쇄무공이다."
그의 말에 수현이 크게 놀랐다.
"십보장의... 파쇄무공... 허나... 사형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어찌 그자가 영호 사형의 기술을 쓸 수 있는 것입니까?"
홍여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어찌 이 무공을 아는 것일까... 나도 그것이 궁금하구나."
굳어진 표정의 홍여립을, 수현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홍여립은 등을 돌려 발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야겠다...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그렇게 얼마간 걸어가던 홍여립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참..."
할 말이 남은 듯 고개 돌린 홍여립을, 수현은 그 자리에서 서서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여러 가지 기록물들이 한쪽에 수북하게 쌓여있고, 각지에서 올라오는 각종 보고 또한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쉬이 그냥 지나칠 수 없기에, 세자는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연희가 앉아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세자가 손을 내밀어 서책을 가리키면 연희가 그 서책을 집어다 건네주었다.
서책을 세심하게 넘겨가며 유심히 살피고있는 세자의 잘생긴 얼굴을, 연희는 양손으로 턱을 괸 체,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열중하고있는 세자의 모습이, 너무나도 진중하고 멋있어 보여 쉬이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연희의 눈빛을 느꼈는지, 세자가 문득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누가 보면 내 얼굴에 꿀이라도 발라놓은줄 알겠구나."
세자의 말에 연희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입으로 먹는 꿀이 아닌, 눈으로 먹는 꿀이 왕창 발라져 있는 듯합니다."
연희의 말에 세자가 풋하고 웃음을 짓더니, 비로소 서책에서 눈을 떼어 연희를 바라보았다.
"그런 당돌한 말은 어디서 배운 것이냐?"
"피~ 그런 걸 배워야 아는 것입니까?"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거리는 연희를 보며 세자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네가 궁궐의 예법을, 오~랫동안 배워야 할 듯싶구나."
그러자 연희가 시무룩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말만 들어도 하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어찌해야 하나~ 나는 네가 예법을 몰라도 좋으나, 다른 이들은 다를 것인데... 나 혼자만 아는곳에 너를 꽁꽁 숨겨놓아야겠구나"
세자의 말에 연희는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게 뭡니까~ 저를 왜 숨깁니까?"
"안 그러면 네가 치도곤을 당할 수 있으니 하는 말이다."
"이제는 그 정도로 예법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세자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의심스럽다는듯 물었다.
"정말이냐?"
연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정말입니다. 이제 정말 많이 압니다."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진짭니다. 이제는 정말 그 정도는 아닙니다."
"누가 보면 이미 경을 치고 있을 것 같구나.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국본인 내게 이리 따져 묻는 것이냐?"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제법 근엄하게 이야기하는 세자를, 연희는 울상이 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밉습니다."
"누가? 내가? 설마... 난 누구에게도 미운 상이 아니다."
"아주아주 얄밉습니다."
"그 말은 사랑스럽다는 뜻이냐?"
세자의 농에 연희가 흘깃 째려보는듯 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세자 역시 연희의 웃는 얼굴을 보며 함께 웃었다.
연희는 화제를 돌려, 세자가 들고있는 서책에 시선을 주며 물었다.
"뭘 좀 찾으시긴 하신 것입니까?"
"글쎄다. 네가 나를 그렇게 강렬하게 바라보지만 않았다면, 뭘 좀 발견하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만..."
"피~ 과장이십니다."
세자가 한번 웃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김문익이란 자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많구나. 이러한 자가 어찌하다 그리 된 것인지... 그리고 어디를 보아도 좌상대감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으니... 답답하구나."
"그 김문익이란 분은... 원래는 좋은 분이셨습니까?"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주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길거리에 있는 걸인들에게도 따뜻한 온정을 베풀던 이라 평하고 있다. 가족들도 끔직이 아껴 유명했다 하는데... 도대체 어찌 된 것인지..."
돌연 세자는 한없이 반짝 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있는 연희에게 물었다.
"왜... 그러느냐?"
세자의 물음에 연희가 또다시 배시시 웃어 보였다.
"저하는 뭔가 골몰히 생각하실 때면, 눈이 막 반짝반짝거리십니다."
그녀의 말에 세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는 너는, 나를 볼 때면 그리 눈이 반짝반짝 거리는 구나."
연희가 헤헤 거리며 부끄러운 듯 웃었다.
"저하 곁에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연희의 말에 세자가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네가 곁에 있어서 좋다."
연희의 양 뺨이 빨갛게 물들자, 세자가 조심스럽게 연희 곁으로 다가갔다.
연희는 세자가 다가오자 놀란 토끼눈으로 굳어 버렸다. 세자는 그런 그녀의 양 어깨를 가볍게 붙잡아 당기며 좀 더 가까이 다가섰다.
연희의 눈이 더더욱 커지고, 세자의 얼굴이 연희의 얼굴 지척까지 다가갔을 때였다.
"저하..."
밖에서 세자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수현이 들어섰고, 세자는 후다닥 서책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수하들이..."
들어오며 말을 하던 수현은, 어색하게 서책을 살피고 있는 세자와, 얼굴을 붉히고 있는 연희를 보며 말을 멈추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수현이 머쓱하게 대답하며 물러나려 하자, 세자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다. 그런 것 아니다. 어서 들어오너라."
"그런 것.... 아니라뇨?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수현이 의아한 듯 묻는 말에, 세자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뭐, 뭐? 어떤 것이라니?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었다. 그래, 수하들이 무슨 보고를 했다고?"
"네... 그러시군요."
문득 수현이 연희를 바라보니, 연희는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수하들에 의하면... 김문익이란 자가 율교라는 사교에 들게 된 것은... 홍문관 교리인 전윤수란 자의 소개가 있었다 합니다."
수현의 말에 세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전윤수?"
"예. 그는 이판인 고숭렴 대감의 처남입니다."
세자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비로소 사교도와 좌상의 접점을 찾은 것이었다.
"그자에 대해 세밀하게 알아보게. 하나부터 열까지 어느 것 하나 놓쳐서는 안 될 것이야."
"예, 저하. 샅샅이 살펴 아뢰겠습니다."
막 돌아서서 나가려던 수현이 멈춰 서서 천천히 세자를 돌아 보며 진지한 얼굴로 권유했다 .
"그리고... 여긴 엄연히 좌포청입니다. 차라리 바깥으로 나가서...."
세자가 얼굴을 붉히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어허! 그런 것이 아니라..."
"아, 예예..."
수현은 세자의 대답을 체 다 듣기도 전에 서둘러 나가 버렸다.
"저저..."
그러더니 툴툴 거리는 투로 이야기했다.
"저놈도 예법을 다시 배워야겠어!"
투덜거리는 세자를 보며 연희가 피식 웃어 보이니, 세자도 그녀를 따라 장난스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직 몸 이곳저곳에서 통증이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마냥 누워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조금만 몸을 풀고자 했다.
"후...."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목검은 물 흐르듯, 새벽 공기를 갈랐다.
조금 더 집중하려고 기를 모으는 그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약간 떨어진 연무장 한쪽에서 말없이 서서 수현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를 알아본 수현은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하여 인사하였다.
그는 이내 수현의 앞으로 다가왔다.
날카로운 인상, 근엄해 보이는 눈빛을 한 그는, 다름 아닌 도총부의 총관이자 임금의 곁을 지키는 운검 홍여립이었다.
또한 그는 수현의 스승이기도 했다.
"어찌 그리 당하였느냐?"
홍여립의 물음에 수현은 잠시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면목없습니다."
홍여립은 차분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나는 그저, 네가 어찌 패하였는지 물은 것이다."
수현은 곰곰이 그날 일을 상기하며 대답했다.
"순식간이었습니다. 십보장 안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칼을 뽑는 듯하였는데, 어느새 저를 베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홍여립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열 걸음 밖에서, 한순간에 다가왔단 말이냐?"
"예... 분명 그리하였습니다."
홍여립은 수현을 따라 허탈한 표정이 되어 몸을 돌렸다.
터벅터벅 몇걸음을 옮기던 홍여립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느지막이 말했다.
"십보일참(十步一斬)이로구나."
홍여립의 말에 수현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십보... 일참? 스승님께서는 아시는 무공입니까?"
홍여립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알고 있지. 지금도 그날의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
홍여립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눈을 감았다.
그의 눈앞에 아련하게 떠오르는 한 아이가 있었다.
해맑은 표정으로, 온몸이 땀으로 덤벅이 된 체 달려오던 그 아이는 격앙된 목소리로 홍여립을 부르고 있었다.
"스승님~~"
해맑은 목소리로 홍여립을 부르며 달려온 그 아이는, 홍여립의 앞에 멈춰 서서 숨을 헐떡거렸다.
"무슨 일이냐?"
홍여립이 묻는 말에, 그 아이는 신이 난 듯 이야기했다.
"마침내 해냈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십보장. 십보장을 파쇄할 비법을 만들어 냈습니다."
아이의 말에 놀란 홍여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십보장을 깰 방법을 알아냈다고?"
"예. 그렇습니다. 당장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아이는 신이 난 듯 한쪽에 놓여있는 목검 두 개를 들고 와서, 홍여립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자 이것을 들고 계십시오."
이어 아이는 홍여립에게서 대략 십여 걸음을 물러섰다.
"자, 잘 보십시오."
아이는 진중한 표정으로 목검을 고쳐 잡았다.
흡사, 아직 검집 속에 있는 검을 잡고 있는 듯한 자세는, 검을 뽑으며 상대를 베는 발도술(拔刀術) 같은 자세였다.
홍여립 역시 목검을 비스듬히 고쳐 잡아 상대의 공격에 대비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 순간, 아이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탁!'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홍여립이 든 목검이 강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느새 홍여립의 옆에 와 있는 아이는 홍여립을 보며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느끼셨습니까? 못 느끼셨죠?"
홍여립이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그래... 어찌한 것이냐?"
"십보장의 밖, 열 한걸음 밖에서 열 걸음을 단박에 좁힌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방법이면 능히 십보장을 깰 수 있습니다."
"그렇구나. 과연..."
홍여립은 기뻐하는 아이를 보며 따라서 웃음 지었다.
"그래, 이 무공의 이름은 무엇이냐?"
아이는 씩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십보일참이옵니다."
"십보일참이라... 우리 영호가 이제 무공을 이룰 줄 안다니... 참으로 대견하고 기쁜 날이로구나."
스승의 칭찬에 아이, 표영호의 얼굴에는 기쁨과 자부심이 넘쳐 흘렀다.
그토록 기뻐하던 영호의 표정을 떠올리니, 홍여립은 가슴 한켠이 아련하게 아파왔다.
"십보일참이란 어떤 무공입니까?"
스승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수현의 목소리에, 홍여립이 그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십보일참은... 네 사형인 영호가 만든, 십보장의 파쇄무공이다."
그의 말에 수현이 크게 놀랐다.
"십보장의... 파쇄무공... 허나... 사형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어찌 그자가 영호 사형의 기술을 쓸 수 있는 것입니까?"
홍여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어찌 이 무공을 아는 것일까... 나도 그것이 궁금하구나."
굳어진 표정의 홍여립을, 수현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홍여립은 등을 돌려 발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야겠다...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그렇게 얼마간 걸어가던 홍여립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참..."
할 말이 남은 듯 고개 돌린 홍여립을, 수현은 그 자리에서 서서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여러 가지 기록물들이 한쪽에 수북하게 쌓여있고, 각지에서 올라오는 각종 보고 또한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쉬이 그냥 지나칠 수 없기에, 세자는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연희가 앉아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세자가 손을 내밀어 서책을 가리키면 연희가 그 서책을 집어다 건네주었다.
서책을 세심하게 넘겨가며 유심히 살피고있는 세자의 잘생긴 얼굴을, 연희는 양손으로 턱을 괸 체,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열중하고있는 세자의 모습이, 너무나도 진중하고 멋있어 보여 쉬이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연희의 눈빛을 느꼈는지, 세자가 문득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누가 보면 내 얼굴에 꿀이라도 발라놓은줄 알겠구나."
세자의 말에 연희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입으로 먹는 꿀이 아닌, 눈으로 먹는 꿀이 왕창 발라져 있는 듯합니다."
연희의 말에 세자가 풋하고 웃음을 짓더니, 비로소 서책에서 눈을 떼어 연희를 바라보았다.
"그런 당돌한 말은 어디서 배운 것이냐?"
"피~ 그런 걸 배워야 아는 것입니까?"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거리는 연희를 보며 세자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네가 궁궐의 예법을, 오~랫동안 배워야 할 듯싶구나."
그러자 연희가 시무룩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말만 들어도 하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어찌해야 하나~ 나는 네가 예법을 몰라도 좋으나, 다른 이들은 다를 것인데... 나 혼자만 아는곳에 너를 꽁꽁 숨겨놓아야겠구나"
세자의 말에 연희는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게 뭡니까~ 저를 왜 숨깁니까?"
"안 그러면 네가 치도곤을 당할 수 있으니 하는 말이다."
"이제는 그 정도로 예법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세자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의심스럽다는듯 물었다.
"정말이냐?"
연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정말입니다. 이제 정말 많이 압니다."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진짭니다. 이제는 정말 그 정도는 아닙니다."
"누가 보면 이미 경을 치고 있을 것 같구나.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국본인 내게 이리 따져 묻는 것이냐?"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제법 근엄하게 이야기하는 세자를, 연희는 울상이 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밉습니다."
"누가? 내가? 설마... 난 누구에게도 미운 상이 아니다."
"아주아주 얄밉습니다."
"그 말은 사랑스럽다는 뜻이냐?"
세자의 농에 연희가 흘깃 째려보는듯 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세자 역시 연희의 웃는 얼굴을 보며 함께 웃었다.
연희는 화제를 돌려, 세자가 들고있는 서책에 시선을 주며 물었다.
"뭘 좀 찾으시긴 하신 것입니까?"
"글쎄다. 네가 나를 그렇게 강렬하게 바라보지만 않았다면, 뭘 좀 발견하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만..."
"피~ 과장이십니다."
세자가 한번 웃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김문익이란 자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많구나. 이러한 자가 어찌하다 그리 된 것인지... 그리고 어디를 보아도 좌상대감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으니... 답답하구나."
"그 김문익이란 분은... 원래는 좋은 분이셨습니까?"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주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길거리에 있는 걸인들에게도 따뜻한 온정을 베풀던 이라 평하고 있다. 가족들도 끔직이 아껴 유명했다 하는데... 도대체 어찌 된 것인지..."
돌연 세자는 한없이 반짝 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있는 연희에게 물었다.
"왜... 그러느냐?"
세자의 물음에 연희가 또다시 배시시 웃어 보였다.
"저하는 뭔가 골몰히 생각하실 때면, 눈이 막 반짝반짝거리십니다."
그녀의 말에 세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는 너는, 나를 볼 때면 그리 눈이 반짝반짝 거리는 구나."
연희가 헤헤 거리며 부끄러운 듯 웃었다.
"저하 곁에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연희의 말에 세자가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네가 곁에 있어서 좋다."
연희의 양 뺨이 빨갛게 물들자, 세자가 조심스럽게 연희 곁으로 다가갔다.
연희는 세자가 다가오자 놀란 토끼눈으로 굳어 버렸다. 세자는 그런 그녀의 양 어깨를 가볍게 붙잡아 당기며 좀 더 가까이 다가섰다.
연희의 눈이 더더욱 커지고, 세자의 얼굴이 연희의 얼굴 지척까지 다가갔을 때였다.
"저하..."
밖에서 세자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수현이 들어섰고, 세자는 후다닥 서책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수하들이..."
들어오며 말을 하던 수현은, 어색하게 서책을 살피고 있는 세자와, 얼굴을 붉히고 있는 연희를 보며 말을 멈추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수현이 머쓱하게 대답하며 물러나려 하자, 세자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다. 그런 것 아니다. 어서 들어오너라."
"그런 것.... 아니라뇨?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수현이 의아한 듯 묻는 말에, 세자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뭐, 뭐? 어떤 것이라니?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었다. 그래, 수하들이 무슨 보고를 했다고?"
"네... 그러시군요."
문득 수현이 연희를 바라보니, 연희는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수하들에 의하면... 김문익이란 자가 율교라는 사교에 들게 된 것은... 홍문관 교리인 전윤수란 자의 소개가 있었다 합니다."
수현의 말에 세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전윤수?"
"예. 그는 이판인 고숭렴 대감의 처남입니다."
세자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비로소 사교도와 좌상의 접점을 찾은 것이었다.
"그자에 대해 세밀하게 알아보게. 하나부터 열까지 어느 것 하나 놓쳐서는 안 될 것이야."
"예, 저하. 샅샅이 살펴 아뢰겠습니다."
막 돌아서서 나가려던 수현이 멈춰 서서 천천히 세자를 돌아 보며 진지한 얼굴로 권유했다 .
"그리고... 여긴 엄연히 좌포청입니다. 차라리 바깥으로 나가서...."
세자가 얼굴을 붉히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어허! 그런 것이 아니라..."
"아, 예예..."
수현은 세자의 대답을 체 다 듣기도 전에 서둘러 나가 버렸다.
"저저..."
그러더니 툴툴 거리는 투로 이야기했다.
"저놈도 예법을 다시 배워야겠어!"
투덜거리는 세자를 보며 연희가 피식 웃어 보이니, 세자도 그녀를 따라 장난스런 웃음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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